“러시아 게이트 연루자의 절반은 감옥에 갈 것으로 보입니다(Half the people involved in the Russian investigation are going to jail).”
8일 밤 9시(현지시각) 미국 폭스뉴스에 출연한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상원 의원의 한 마디는 지난 주말동안 트럼프 지지자들의 소셜미디어(SNS)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해당 영상을 캡처해서 올린 시민운동가
셰릴 설렌저(Cheryl Sullenger)의 트위터 글에는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1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리트윗은 9400회, ‘좋아요’는 1만7200회였다. 셀렌저 씨의 글에는 #QAnon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렸다. 댓글에도 #QAnon, #QArmy, #WWG1WGA 같은 태그들이 보였다. 이는 스스로 ‘큐어넌(QAnon)’의 일원임을 알리는 그들만의 표현이다.
큐어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온라인 우파 세력이다. 실체가 있는 정치 조직이 아니라 SNS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결집된 지지 세력이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영국, 유럽에도 큐어넌을 자처하는 세력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굳이 미국인이 아니어도 트럼프의 정치노선과 세계관을 지지하기 때문에 생겨난 특이 현상이다.
이들은 반(反)글로벌리즘, 반(反)사회주의 성향으로 워싱턴DC와 뉴욕 월가의 기득권에도 저항한다는 점에서 서민·중산층 중심의 우파라고 볼 수 있다. 대안우파(Alternative Right)라고도 불린다. 서구사회를 장악한 페미니즘, 다문화, 동성애, 낙태 찬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위선) 좌파들의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이들 PC좌파는 큐어넌 지지자들을 극우주의자로 매도한다.
美 주류매체, 약속이나 한듯 같은날 큐어넌 비하 보도
이런 가운데 좀처럼 큐어넌을 다루지 않던 미국 주류미디어가 지난 주말 본격적인 큐어넌 분석기사를 연이어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친(親)민주당 성향의 이들 주류 미디어는 과거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큐어넌에 관한 비난과 우려, 폄하로 지면을 채웠다. 두 매체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극우주의자(far right), 음모론자, 폭력주의자 같은 딱지를 붙이며 큐어넌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비주류 소수세력으로 깎아내렸다.
AP통신, “황당한 음모론 신봉하는 극우세력”
먼저 AP통신은 “극우 성향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시작된 온라인 세력(What started as an online obsession for the far-right fringe)”이라고 큐어넌을 규정한 뒤, “인터넷의 어두운 구석에서 기어 나왔다(beyond its origins in a dark corner of the internet)”며 “최근 1년간 불쑥 주류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QAnon has been creeping into the mainstream political arena for more than a year)”고 우려했다.
뉴욕타임스도 “난잡하고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2년 전 시작된 온라인 세력이 오프라인 현실 세계로 내딛는 발판을 마련했다(What began online more than two years ago as an intricate, if baseless, conspiracy theory that quickly attracted thousands of followers has since found footholds in the offline world)”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들이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대표적인 큐어넌의 주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악의 세력, 딥스테이트(Deep State)와 싸우고 있다는 내용이다. 딥스테이트란 선거로 선출된 정부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기득권 세력을 일컫는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국익도 져버리고 각종 비리와 범죄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 서민들의 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정치인으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 주로 좌파 계열의 민주당 고위 인사가 딥스테이트 세력으로 거론된다. 민주당 배후에 있는 억만장자 투자가 조지 소로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 구글 전 회장 에릭 슈미트도 딥스테이트로 간주되고 있다.
딥스테이트가 저질렀다고 보이는 범죄 중 큐어넌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아동 인신매매(satanic child-trafficking ring)와 성 착취다. 이른바 ‘피자게이트’와 관련된 음모론이다. 힐러리 클린턴을 비롯한 민주당 인사들이 워싱턴DC의 한 피자집에서 아동 인신매매를 해왔다는 내용이다. 이들이 이러한 일을 자행한 이유는 악마를 숭배하는 고대 종교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 큐어넌은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까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AP통신은 “큐어넌들이 힐러리와 오바마를 포함한 수천 명의 민주당 유력 정치인이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내질 것(thousands of deep state operatives and top Democrats, including Hillary Clinton and Obama, will be rounded up and sent to Guantanamo Bay)”이라고 믿고 있다며 “근거 없는 신념(baseless belief)”이라고 깎아내렸다.
“주변에서 비웃음받는 부적응자”, “음모론이 폭력으로 연결”
AP통신과 뉴욕타임스는 큐어넌을 사회 부적응자처럼 그리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AP통신은 큐어넌을 믿는 다이안 제이콥스(Diane Jacobson)라는 여성을 등장시켜 “그 자신도 친척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을 사고 있는 걸 알고 있다(Jacobson knows many people, including some of her relatives, scoff at QAnon)”고 소개했다. 또 뉴욕타임스는 피자게이트를 믿는 65세의 한 남성이 “친구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My friends think I’m crazy)”고 말한 발언을 인용했다.
권위를 빌어 큐어넌을 폄하하기도 한다. 공신력이 있어 보이는 대학교수를 등장시켜 그럴싸한 딱지를 붙이는 것도 두 매체가 같았다. AP통신은 큐어넌을 가리켜 ‘종말론적 정치 컬트(apocalyptic political cult)’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어 낸시 로젠블룸(Nancy Rosenblum) 하버드대 정치윤리학 교수가 “큐어넌 음모론의 종말론적 성격은 그들의 정적이 제거될 것이며, 더 나은 미래가 잿더미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고 말한 내용을 소개했다.
뉴욕타임스도 조셉 우신스키(Joseph Uscinski) 마이애미대 정치학과 교수를 등장시켜 “(큐어넌의 주장은) 다른 음모론보다 컬트에 가깝다(It’s more of a cult than other conspiracy theories)”는 발언을 인용했다.
이처럼 두 매체는 큐어넌을 사회부적응자, 컬트적 신봉자로 낙인찍은 뒤 현실세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잠재적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갔다. AP통신은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음모는 이미 현실 세계의 폭력 행위로 연결되고 있다(Internet-fueled conspiracies already have been linked to acts of real-world violence)”고 단정했다. 그 사례로 지난해 3월 조직범죄단의 두목을 살해한 20대 남성과 2017년 워싱턴DC의 한 피자집에서 소총을 난사한 범인이 모두 큐어넌 음모론에 심취한 사람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뉴욕타임스는 아예 기사 첫 부분을 큐어넌의 폭력 사례로 시작했다. 애리조나의 한 카톨릭 성당에서 큐어넌 신봉자가 쇠막대기를 휘둘러 제단을 훼손한 사건을 소개했다.
트럼프 흠집내기 의도 드러내…韓 주류매체와 흡사
AP통신과 뉴욕타임스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으로 큐어넌 때리기에 나선 것에는 갈수록 힘을 받는 트럼프의 거침없는 행보에 PC 좌파 진영의 불안감을 반영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3월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과 무관하다는 뮬러 특검의 무죄 결론을 받아든 데 이어, 다섯 달 가까이 이어졌던 탄핵 정국도 최근 트럼프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같은 주류 미디어의 큐아넌 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나왔다는데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 스캔들과 탄핵 정국이 모두 완패로 끝나자, 더 이상 트럼프를 공격할 총알이 없는 주류 미디어로서는 그 대안으로 큐어넌을 전면에 등장시켰다는 것. 즉, 큐어넌으로 상징되는 트럼프 지지자들을 음모론자, 폭력주의자, 사회부적응자로 몰아붙이면서 곧 이들의 지지를 받는 트럼프를 비정상적 인물로 프레이밍하겠다는 게 주류미디어의 일관된 의도라는 분석이다.
실제, AP통신은 “트럼프가 큐어넌 계정의 글들을 리트윗 해왔다(Trump has retweeted QAnon-promoting accounts)”며 “트럼프의 대선 유세에 큐어넌이 몰려들고 있다(Followers flock to Trump’s rallies)”고 우려했다. 캐서린 옴스테드 캘리포니아대 역사학 교수가 “기존 음모론보다 더 많은 신봉자를 끌어 모은 것은 음모론을 확산하는 권력자가 있기 때문(there are people in power who are spreading this conspiracy theory)”이라는 발언도 인용했다. 트럼프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도 “트럼프는 자신의 트윗을 확산시키면서 큐어넌 팔로어를 모으고 격려해왔다(Trump has at times elevated and encouraged QAnon followers-recirculating their posts on Twitter)”며 “최근에는 큐어넌 자료와 관련된 게시물을 하루 동안 20개 이상 리트윗 했다(Recently, during a daylong Twitter binge, Mr. Trump retweeted more than 20 posts from accounts that had trafficked in QAnon material)”고 트럼프를 비판했다.
美 주류매체의 큐어넌 비하, 韓 주류매체의 태극기 비하와 ‘오버랩’
이처럼 미국 주류매체가 큐어넌을 공격하는 기사는 한국의 조중동, 지상파, 종편, 경향·한겨레 등 주류 미디어가 태극기 우파 세력을 다루는 행태와 매우 흡사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촉발시킨 태블릿PC 조작보도를 주장하면 황당한 음모론자로 비하하고, 탄핵 반대를 외치는 우파에게는 주변의 비웃음을 사는 극우세력이나 사회부적응자로 매도한다. 드물게 발생하는 집회 현장의 폭력 사건을 침소봉대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미 양국의 주류미디어가 보이는 이 같은 보도행태는 일단 미국에서부터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주류미디어가 음모론으로 치부하던 사건들이 더 이상 황당한 루머가 아닐 수 있다는 정황이 서서히 나오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각) 인신매매 문제를 전담하는 백악관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여기에는 성노예, 아동 성범죄를 근절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러시아 스캔들을 조사하는 미 법무부의 수사 결과도 기다리고 있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이 폭스뉴스에서 언급했던 “절반쯤은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발언도 예사롭지 않다. 린지 그레이엄은 현재 미 상원 법사위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