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과거에 김동호 작가님이 20세기 전반 동북아 마약문제 연구의 대가인 박강 교수의 저서인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선인, 2008년)의 내용을 소개하는 형태로 개인 블로그에 올리신 글입니다. 미디어워치가 김 작가님의 허락을 얻어 새로이 재정리해 공개합니다. |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특히 일본군 점령 하의 화베이(화북, 華北) 지역으로 진출하는 조선인들(한국인들)의 수가 폭증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조선 본토에서 건너가기도 하였고, 조선인/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이 폐지되어 활동하기 곤란해진 만주국으로부터 진출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목적하는 '사업(?)'의 태반은 바로 법적 일본인 신분을 활용한 치외법권을 무기로 삼아 현지 중국인을 상대로 마약 매매를 하거나 주로 현지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위안소(매춘업) 경영이었다.
조선인들은 현지 일본군과 유착되어 때로는 중국인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고, 일본군의 스파이가 되어 마약을 사러온 중국군 패잔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전 불과 8천여명 정도였던 在화북 조선인의 수는 일본군 점령 지역이 넓어지면서 1938년 7월에는 1만 8천여명, 1939년 6월에는 3만 3천여명, 1940년 6월 말에 이르러서는 6만 8천여명으로 급증하였다.
농업 인구가 다수였던 在만주 조선인과는 달리 在화북 조선인의 경우 농업 종사자는 거의 없었으며 일본 관공서나 회사, 은행 등에 근무하는 소수의 조선인을 제외한 다수는 법적 일본인으로서 치외법권의 이점을 등에 업고 아편, 마약을 밀매하거나 일본군 상대로 위안소를 경영하여 일확천금을 하겠다는 꿈을 안고 온 자들이었다.
‘제국의 위안부’(세종대 박유하 교수 저, 뿌리와이파리, 2013년)에는 위안부들의 아편 사용 이야기가 언급이 되는데, 당시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 쇼킹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우리 ‘순결한 처녀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일본군이 강제로 놓았던지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가 아마 독자들의 1차적인 반응일 것이다.
최근에 나와 주목을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는 한 위안부의 육성을 사용한 ‘위안부 이야기’다. 증언자의 육성을 살렸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창작 이상으로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기도 하다.
... ... ...
속아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된 이 할머니는 군인의 폭행을 특히 강조하는데, 그중 하나로 아편주사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한다.
... ... ...
특히 아편에 관한 이야기에서, 원래의 증언은 아편을 놓은 이가 군인이 아니라 ‘주인’이었다고 말하는데 애니메이션에서는 군인이 주사를 놓은 것처럼 그려진다. 그렇게 되다 보니 ‘주인’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증언에서도 ‘주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때 한 번뿐이다).
“가서 얼마 안 돼서 남자들 상대 안 할려구 내가 발악하구 하니…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받았는데 피가 죽죽 나구 목간도 못 갔어. 나 살려달라고 그러니깐 나 살려준다면서 그때부터 아편을 놓아주는 기라. 그게 아편인 기라. 그 뒤 아편을 맞고 나면 아픈 데도 모르는 기라, 상대를 해도. 그래 가지고 고만 일요일이나 토요일은 다섯 대씩 아편을 맞았다.
“기분 좋은 거는 모르고 아프지가 않아. 처음에는 하루에 한 대 맞구, 나중 가서는 한 대 가지고는 안 되거든. 그러니깐 두 대 맞고 일요일, 토요일 날은 다섯 대 맞구.
“매일 놔줬다. 인자 주인[이] 놔줘.
“모르지. 아편주사라는 걸. 내가 중독이 될 때 알았지. 하루 한 번 주던 게, 아침에 주고 저녁에 주고 그러고 이제 주사를 안 주면 아이고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바로 중독 초기라.(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홈페이지)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들은 일본군이 아편까지 놓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실 아편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위안부들의 증언에서도 많이 보인다.
아편을 하는 여자도 있었다. 나이 먹고 몸이 힘들고 속상하니까. 중국 사람 중에는 아편 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편을 팔에 혈관에 맞기도 하고 빨아먹기도 했다. 몰래 중국집에 가서 하는 것이다. 아편은 쌌다. 아편을 빨고 오면 안 아프다고 했다. 아편 기운이 떨어지면 죽어간다. (중략) 그런 언니들이 나중에 돈도 떨어지고 주사를 더 꽂을 데가 없으면 살이 굳어지면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강제 2』, 157~158쪽)
또 아편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중략) 중국인, 조선인 장사들이 몰래 와서 파는데 나도 한번 찔러보니 세상이 내 세상이여.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중략) 함께 있던 여자들도 몰래 아편을 많이 했어요. 군인들이 찔러줬어요. 들키면 큰일나지. 군인은 아편을 못 찌르게 돼 있었거든. 군인들이 몰래몰래 찔러줬는데, 같이 아편을 찌르고 그걸 하면 그렇게 좋다고 하면서 여자도 찔러주고 자기들도 찌르고, 그렇게 했어요.(『강제 3』, 133~134쪽)
아편은 하루하루의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언에 의하면 대부분은 ‘주인’이나 상인들을 통한 직접사용이었다. 군인과 함께 사용한 경우는 오히려 즐기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편이 본래 좋은 기분을 만들거나 고통을 잊기 위해 쓰는 것인데도, <소녀 이야기>의 아편 이야기는 그런 문맥을 완전히 소거하고 그저 ‘일본군의 악행’의 증거로만 이야기된다. 물론 이 위안부가 해방 후에 ‘밀수’로 생활을 했다는 것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육성’을 토대로 해 ‘진실’성이 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이런 식의 각색을 거친 이야기는 ‘위안부의 온전한 삶’에 대한 이해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박유하 교수가 언급한 위안부가 ‘밀수’를 업으로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아래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이 어떤 시대적 맥락에서 나온 얘기인지 알 수 있다. 당시 우리의 상황은 결코 서정적이고 소박한 상황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1938년 2월 2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수백명의 매춘녀가 일본군 점령하의 북중국으로 대거 진출하기 위해 경찰증명서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급, 작부 편대 북지로 대거진출'이란 다소 선정적(?)인 제목을 뽑고 있다.
‘동아일보’ 1939년 4월 3일자 기사 내용도 흥미롭다.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부산외대 박강 교수 저, 선인, 2008년)에 소개된 1939년 5월 일본외무성 조약국 외무서기관 니시무라 구마오 '만주국 및 북지(北支)의 아편마약 문제에 관한 시찰보고'를 보면 북경과 천진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마약 판매업에 종사하며 이들이 중국군에게도 아편을 팔아 중국 패잔병의 동정에 대한 정보를 얻어 일본군에게 전달해주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북경에는 약 7천명의 조선인이 있으며 그 가운데 2천 명은 마약 중독자였다. 그들은 마약을 판매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분말흡수, 모근으로의 침투 등에 의한) 중독자가 되었다... 천진에는 9천 명의 조선인이 있으며 9할은 마약 부정업자이다...]
[중국 군대에는 마약 흡식의 습관이 있다. 패잔병은 마약의 궁핍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곳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마약을 소지한 조선인은 중국병사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고 있다. 이들 조선인의 활동에 의해 패잔병의 동정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편리함이 있다. 자연히 전선에서 조선인은 군략적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책에 소개된 같은 해(1939년)의 조선총독부 관방외무부 작성 '중화민국재류조선인개황'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고되고 있다.
[이번 성전의 진행과 더불어 반도 동포의 이주자가 갑자기 증가하여 제국의 부동의 국책선을 따라 정업을 목적으로 도래하는 자 역시 점차 늘어나고 있으므로 기뻐할 현상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일확천금을 의도하고 도래하는 자로써 제일선 방면에서 오로지 금제품 취급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심히 유감스럽지만... 화북 거주 반도인의 대부분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도래한 자로서 안정된 직업을 갖는 자 적고, 간혹 영사관 경찰에 신고서를 제출할 경우 잡화상 등의 명의를 사용하여도 그 대부분은 금제품 밀매매에 대한 당국의 단속을 피할 방편으로 정업자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재화북 전반에 걸친 반도 동포의 대부분은 금제품 밀매매에 종사하고 있는 실정이나...]
아래 1940년도 ‘삼천리’라는 잡지의 기사를 보자. 종군분사 임학수라는 사람이 북중국의 약 4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태반이 아편 밀매와 유곽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군이나 관헌의 지도하에 용감무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상찬도 있으나 이들이 소위 말하는 '일본군 앞잡이'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北京의 朝鮮人 (삼천리 제12권 제3호, 1940년 03월01일)
[北京의 朝鮮人
從軍文士 林學洙
朝鮮人 氣質
北京 東堂子胡同 총독부 출장소 내의 모 사무관 談
―北支의 朝鮮人은 대단히 평판이 나쁘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개괄적으로는 원인이 둘로 나뉘는데, 1은 朝鮮人의 직업이 모히, 코카인의 禁制品을 밀매하는 것. 2는 선량한 中國人의게 사기, 공갈 등 불량한 행위를 하는 것. 北支 在住 약 40,000명인데 대개는 滿洲에 있다가 들어온 사란들로 9할 5분은 표면 잡화점 등의 간판을 걸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 대반이 밀매자이다. 사실 중국인은 모히를 절대로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장소에 따라는 그들이 이 밀매자들을 보호하여 주기로 한다. 또한 朝鮮人만이 밀매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로시모도」는 외국인이다. 그들은 X艦에다 실고 오기까지 한다. 결국은 조선인이 그 수족 노릇을 하는 것으로 문제는 조선인은 대부분이 밀매를 한다는 것이다.
이번 聖戰의 목적하는 바는 인도적으로 그들을 지도하자는 것이요, 「모히」를 팔아 자멸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연 取締의 대상은 조선인이 된다. 이의 대책으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생업을 전향시키는 것이다. 그래 京漢線 연선에다 방금 농장을 준비하고, 거기 모여 농작을 하게 하고 자본을 융통하여 줄 계획이다.
그러나 이 보다도 곤란한 것은 세력을 믿고 불량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조선인은 사변 전부터 들어온 사람이 많어, 중국인의 생활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중국어도 능하다. 그래 군이나 헌병대의 통역으로 많이 기용하는데, 그 중에는 실로 용감하고 충직한 훌륭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통역 등을 가운데에 두고, 그의 세력을 빌어 가옥을 얻고 貰錢을 아니 내거나 미곡을 징발하는 수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이 北支에 있어서의 조선인의 발전에 큰 장해을 일으키고 있고, 또 중국인은 조선인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다.
최근에 와서는 모든 점이 차차 호전하여 지고는 있다.―
사변 전부터 北支에 들어와 착실한 직업으로 상당히 성공한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변 직후 일확 천금을 꿈꾸고 물밀듯 밀려든 그들은 남자나 여자나 차라리 滿洲로 집단 이민이 되어가는, 그 생활은 어려우나, 끝까지 소박하고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농민들과는 유달리 오로지 세상을 꾀와 속임수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인은 아무리 쿠우리일지라도 그 민족의 독특한 예의라든지는 철저히 지키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우리네 전체에게 辱되는 일을 눈 앞의 적은 이 끝을 위하여 감히 한다는 말이요. 자본 없고 취직 못하고 먹을 것이 없어 그 길로 나서는 건 동정할 여지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떻게 단순히 집어 치우기에는 대륙 진출의 뜻을 둔 후진에게 아니 여러 가지 의미로 너무나 영향이 큰 문제입니다. 다행히 당국에서는 장차 농장을 베풀고 자본까지 융통하여 준다 하니, 부디 그 땅이 비옥하고 또 天災도 없어 하루 속히 신성한 개척자가 많이 나기를 축원합니다.
解決 方法
우리들의 거류민은 넷으로 나눌 수가 있읍니다. 착실한 직업을 가진 이와 군이나 관헌의 지도 하에서 勇敢無比한 활동을 하는 이와 위에 말한 禁制品 밀매자와 여자를 더불고 가서 하는 요리점. 等屬. 전자의 둘은 세계에서도 칭찬하고 있으나 극소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명예를 만회할가? 자기의 힘으로 정당한 일을 개척하여야 할 것입니다. 매일 北支로 北支로 밀려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관헌이 지도하고 생계를 세워줄 수는 도저히 없는 일입니다.
사실 니시무라 구마오의 보고에서처럼 마약 밀매업과 일본군 지도하에 용감무비한 활동을 하는 것이 반드시 괴리되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약을 팔면서 일본군 앞잡이 일을 동시에 겸하는 것은 얼마든지 흔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위 기사에서는 '세력을 믿고 불량한 행동을 하는'이란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력'이 또한 현지 일본군의 '세력'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아래의 1941년도 ‘삼천리’ 기사를 보자. 상해시보 총경리 최경수라는 사람이 상해에 거주하는 1000여명의 조선인들이 대부분 위안소(慰安所), 즉 유곽업(遊廓業)에 종사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上海時報 總經理 崔敬洙氏와 上海의 朝鮮人 諸問題를 語함(삼천리 제13권 제4호, 1941년 04월01일)
三. 朝鮮人의 經濟生活狀態
記者 在上海의 朝鮮人의 經濟生活狀態는 如何합니까. 특히 朝鮮同胞의 職業率과 인테리層의 就職現狀에 관해서 말씀해 주십시요.
崔敬洙 대체로는 商業에 종사하는데 그 經濟生活狀態가 事變 前보다는 數倍나 ?裕하다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不正業者가 아직도 多少있어서 우리들의 한 羞恥로 이것 이 在外同胞의 발전에 큰 癌이 되여있습니다. 無論 이것에는 在支同胞에게 있어서 法律的 보장이라든가 또는 자본과 기술 등의 여러 가지의 결함이 있어서 부득기 그러한 방면으로 흐르기 쉬운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으나 正當한 見地에서 냉정한 批判을 加한다면 돈을 위해서는 民무 체면도 돌보지 않는 族屬이라는 것에 탄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기는 支那新政府가 막대한 경비를 써가면서 阿片根絶에 노력해 왔는데 지금 와서 이 阿片密賣業을 우리 가운데 多少하는 이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爲替買賣, 不正事業 등 실로 우리의 중대문제라고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현재의 帝國總領事館에서와 軍當局에서 상당히 取締도 하며 그 善導에 노력하고 있으니까 차츰 나어질 것입니다.
四. 上海에서 새로 開業할 수 있는가
記者 上海에서 새로 장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崔敬洙 지금은 절대로 새로 商業을 시작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當地에 본래부터 있던 諸商人들도 組合에 가입해야 하므로 새로 開業하기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記者 딴쓰홀같은 類의 사업도 역시 마찬가진가요?
崔敬洙 그런 遊興事業은 더욱 不許可합니다.
記者 上海에 朝鮮人經營의 딴쓰홀이 몇이나 됩니까.
崔敬洙 「極東딴쓰홀」이라는 단 한 개의 딴쓰홀만 있습니다.]
記者 南京에 있는 1,000여명의 朝鮮 同胞는 대체로 어떠한 事業에 從事하고 있습니까.
崔敬洙 부끄러운 말이지만 대부분은 慰安所, 즉 遊廓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記者 上海의 物價는 어떠합니까.
崔敬洙 쌀 100파운에 36원인데 100파운이라면 5升斗 다섯말이나 됩니다.
같은 1941년 6월의 '삼천리' 기사에는 일본군 점령하의 한구의 화평일어학교장 유근상이란 사람의 현지보고를 싣고 있는데, 한구의 경기가 매우 좋으며 심지어 위안소 여인의 매일 수입금이 50, 60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식모의 한달 수입이 10원 정도였다고 한다.
<現地報告> 漢口와 朝鮮人 近? (삼천리 제13권 제6호, 1941년 06월 01일)
漢口에서 朝鮮人은 무얼 하는가
皇軍의 세력 하에 활동하고 있는 朝鮮동포들은 주로 무역상 ,잡화상 ,여관업 ,음식점 ,위안소업이다. 全漢口에 있는 朝鮮人 여관은 「平和旅?」 「東和旅?」 「金水旅?」 「漢口旅?」 「三鎭旅?」 半島下宿屋 등이다.
戰地의 경기가 좋아서 어느 여관이나 매일 만원의 상태에 있다. 음식점은 갑종 요리 「東一?」과 을종 요리 「大勝?」이 있다. 기타 京城食堂 平澤食堂 朝鮮食堂 東光食堂 등이며 其外에 朝鮮人이 경영하고 있는 카페도 不少하다.
朝鮮飮食의 價格表
日酒 1合 50전, 탁주 1合 20전, ビ?ル 1本 85전, サイダ? 1本 50전, 냉면 1器 60전, 백반 1器 30전, 肉湯 1器 40전, 燒肉 1인분 70전, 갈비 1인분 70전, 갈비탕 1인분 70전, 비빔밥 1器 60전, 만두국 1器 60전, 회갓 1인분 60전, 떡국 1器 50전, 장국밥 1器 50전, 쟁반 1상 1원 이상. 飯食 가격은 대개 이러하다.
위안소는 「陸軍慰安所」 「海軍慰安所」 기타 일반 위안소 등이 있다. 위안소업도 경기가 좋아서 여인 1인이 매일 수입금이 5, 60원 이상이다.
이상과 如히 漢口의 사정은 대략 이러하다.
유근상은 무한의 조선인 사정에 대해서도 같은 해 5월 기사에서 보고하고 있는데, 무한의 조선인들이 대개 부유하며 '일지사변(중일전쟁)'에 편승하여 반수 이상은 '막대한 물질'을 적립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제일 경기가 좋은 사업은 '위안소업'이라며 역시 여인 1인당 수입금이 엄청나다고 말하고 있다.
武漢의 朝鮮 동포 (삼천리 제12권 제5호, 1940년 05월01일)
其 생활 상태는 대개 裕富하며 또한 日支事變으로 의하여 반수 이상은 막대한 물질을 적립하고 있다. 각 人의 직업은 各色各種이나 주로 무역상 잡화상 여관업 음식점 위안소업 등이다. 其外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인사도 있고 교육기관을 설치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戰地인 것 만치 경기가 호경기이지만 각종 물가가 매우 빗싸다.
제일 경기 좋기는 위안소업이다. 여인 一人이 매일 수입금이 5,60원 이상이다.
참고로, '삼천리'는 일제시대에 우리의 대표적인 시사종합 월간지 중 하나였다. 이 잡지에 대한 개괄은 한국어 위키백과를 읽어보면 된다.
한편,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에 소개된 1940년의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종래 조선인의 대부분은 치외법권의 입장을 악용하여 금제품인 모르핀, 헤로인류를 밀매하였다. 특히 1937년 12월 만주국에서 치외법권의 철폐와 함께 그 땅에서 부정업에 종사하고 있던 자 가운데 많은 이가 비교적 단속이 완만한 화북으로 잠입하여 은괴밀수와 함께 금제품의 밀매에 종사하여 화북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일본 국적인)의 체면을 더럽히는 무리들이 속출하기에 이르러...]
[... 내지인에 비해 월등히 적은 자본으로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특히 뛰어난 어학 실력과 강인한 생활력으로 군의 진격과 함께 군을 따라 혹은 군이 진격한 직후 서둘러 진출하여 군대가 필요로 하는 잡화를 소지 운반, 혹은 특수 부녀자의 무리를 거느리고 군 위안소를 개업하거나 혹은 시계점, 사진점으로 군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등 치안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지방에서 커다란 이윤을 챙기면서 전선으로 전선으로 진출하였다... 그래도 직간접적으로 부정업에 의해 생활하는 자 역시 극히 다수로 "조선인의 대다수는 금제품의 밀매에 의해 밥을 먹고 산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모르핀과 헤로인의 밀매는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부정업자는 뜻밖에도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1940년 조선총독부 북경 출장소에서 작성한 '재북지조선인개황'에서는 화베이(화북)의 조선인들이 아편 밀매와 군 위안소를 통해 커다란 이윤을 올리고 있는데 '뛰어난 어학 실력과 강인한 생활력'이란 인상적인 표현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북경 일본대사관 촉탁 와타나베가 작성한 '화북의 마약 비밀사회의 실체'에서도 흡사한 보고를 하고 있다.
[일지사변을 계기로 대륙에 진출한 조선인 다수는 당초부터 마약의 밀조, 밀매를 목표로 밀업의 중심지인 경진(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전선으로 전선으로 황군의 진격을 따라 화북 전체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것은 군 주둔지에 부수한 상인 또는 통역, 군속으로 왕성히 위험지구에서 활약하면서 마약을 전선으로 전선으로 화북 전역에 운반한 것이다. 적어도 황군이 주둔한 곳이라면 어떠한 전선의 소도시에도 조선인 밀업자가 없는 경우가 없으며(그들의 90%는 마약과 관련이 있다) 마약의 밀조, 밀수입, 밀매에 관계하는 자의 수는 1만 2, 3천 호 약 6만 명 정도, 주로 부정업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황군이 주둔하면 반드시 조선인이 와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영업을 하였는데, ... 그러나 그들이 중국에 온 목적은 화북의 최전선에서 위와 같은 영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헤로인의 밀매를 지향한 것으로 그들은 군 의존관계의 영업에 의해 거주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면에서 폭리를 얻는 헤로인을 밀매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 가운데 자신이 속한 군의 이동에 따라 이동지로 전출하는 자를 보면, 군이 그들의 거주에 의해 편익을 얻은 관계가 많았기에 전출한 업자는 전출지에서도 계속하여 헤로인 밀매에 종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방에서의 밀매업자는 위와 같이 헤로인의 소매를 부업(오히려 본업으로 볼 수 있다)으로 하고, 그중에는 군관계의 일, 황군에 협력하는 경우도 자주 있는 관계로 도시에서의 부정업자에 비해 그 성격도 좋고 도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심각한 범죄 등에 의한 어두운 그림자를 수반하지도 않고 있다.]
1942년 8월. 흥아원 화북연락부. '지나아편대책에 관한 협의회의 제출서류'에서는 화베이 거주 조선인의 7할 가량이 현지 중국인 상대 마약 밀매에 종사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화북의 마약제도 창시에 가장 우려하고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은 반도인, 이곳에 거주하는 전체 주민 약 7만 2천 명 가운데 약 7할로 칭해지는 이 같은 업자의 문제로서 이 문제에 대해 잘못 처리하면 화북의 치안을 어지럽히고 황국의 위신에 관한 사건을 만들어낼까 두렵다. 따라서 그것의 선후책에 대해 대사관 측과도 신중히 연구 중이다. 외무성 당국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충분한 지도, 원조를 요망한다.]
중일전쟁기에 일본군 점령하의 중국에 거주하며 아편 밀매와 침략군을 고객으로 한 위안소 등을 경영하며 부정한 소득을 향유한 조선인의 수는 위의 여러 문서들을 종합하여 볼때 대략 4만명에서 5만명에 이르는 방대한 수로 가히 일제시대 한국인의 흑역사라 할 것이다.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