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김동호 작가님이 과거에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김 작가님의 허락을 얻어 미디어워치가 새로이 재정리해 공개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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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의 내용을 전부 번역한 것이다.
신경써서 번역했지만, 물론 오류가 있을 수는 있으니 원문과 함께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괄호 안의 글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보충한 것이다. 원문은 위키소스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49
번역문, 원문 이미지,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 있는 왜곡 및 누락 번역 뉴시스 기사 캡춰를 모두 공개하니 셋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
원문 이미지 중 가장 나중의 것에는 한국인 위안부 20명과 일본인 위안소 업자 2명의 이름과 나이도 기재되어 있다. 기재를 담당한 미군이 한국식 이름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지, 원래 한국 이름이 무엇인지 잘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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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
1 Oct 1944
1944년 10월 1일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인디아-버마 전역에 부속된
미합중국
전쟁 정보국
심리전팀
Japanese Prisoner |
| Place interrogated: Ledo Stockade
Date of Report: October 1, 1944 보고 일자 : 1944년 10월 1일
심문 주체 : 알렉스 요리치 포로 :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
생포 일자 : 1944년 8월 10일
도착 일자 1944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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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ACE
서문
This report is based on the information obtained from the interrogation of twenty Korean "comfort girls" and two Japanese civilians captured around the tenth of August, 1944 in the mopping up operations after the fall of Myitkyina in Burma.
이 보고서는 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 소탕 작전 중 8월 10일에 포로가 된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과 2명의 일본인 민간인에 대한 심문으로부터 기초한 것이다.
The report shows how the Japanese recruited these Korean "comfort girls",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lived and worked, their relations with and reaction to the Japanese soldier, and their understanding of the military situation.
이 보고서는 일본인들이 이 한국인 "위안부들"을 어떻게 모집했으며, 그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일했으며, 그들의 일본 군인과의 관계와 군대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comfort girl" is nothing more than a prostitute or "professional camp follower" attached to the Japanese Army for the benefit of the soldiers. The word "comfort girl" is peculiar to the Japanese. Other reports show the "comfort girls" have been found wherever it was necessary for the Japanese Army to fight. This report however deals only with the Korean "comfort girls" recruited by the Japanese and attached to their Army in Burma. The Japanese are reported to have shipped some 703 of these girls to Burma in 1942.
"위안부"는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붙여진 창녀 혹은 "직업적인 종군 민간인"에 다름 아니다. "위안부 comfort girl'이란 용어는 일본인들 특유의 표현이다. 다른 보고서들도 이 "위안부들"이 전투하는 일본군들을 위해 필요한 어느 곳이든 발견됨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그러나 일본인에 의해 모집되어 버마의 그들 군대에 붙여진 한국인 "위안부"들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일본인들은 1942년에 버마로 이러한 위안부들을 703명 가량 데려왔다고 보고된다.
RECRUITING
모집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1942년 5월초, 일본인 업자들은 새로 정복된 동남아시아의 일본 영토로 갈 "위안 서비스"을 위한 한국인 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 "서비스"의 성격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붕대를 감아주고, 일반적으로 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 설명되었다. 이 업자들의 권유는 풍성한 돈, 가족의 빚을 청산할 기회, 쉬운 일,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장밋빛 전망 등이었다. 이러한 거짓된 설명 하에 많은 여자들이 해외에서의 일을 위해 모집되었고 선금으로 몇 백엔의 보상을 받았다.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ar for the "house master"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여자들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무학이었는데, 개중 몇몇은 모집 이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다. 그녀들이 서명한 계약은 미리 선금으로 지급된 가족 연대채무의 액수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까지의 기간 동안 그녀들을 위안소 업자와 군의 통제하에 놓이게 하였다.
Approximately 800 of these girls were recruited in this manner and they landed with their Japanese "house master" at Rangoon around August 20th, 1942. They came in groups of from eight to twenty-two. From here they were distributed to various parts of Burma, usually to fair sized towns near Japanese Army camps.
대략 800여명의 이 여자들은 위의 방법으로 모집되었으며 그들은 8월 20일 즈음에 랭군에 일본인 '위안소 업자 house master'들과 함께 상륙하였다. 그들은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는데 주로 일본군 병영 근방의 규모있는 도시에 배치되었다.
Eventually four of these units reached the Myitkyina. They were, Kyoei, Kinsui, Bakushinro, and Momoya. The Kyoei house was called the "Maruyama Club", but was changed when the girls reached Myitkyina as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objected to the similarity to his name.
이들 그룹 중 네 그룹은 미트키나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게 될 위안소들의 이름은)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였다. 쿄에이 위안소는 원래 "마루야마 클럽"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가 해당 위안소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여 이 여성들이 도착하기 전에 개칭되었다.
PERSONALITY
인성
The interrogations show the average Korean "comfort girl" to be about twenty-five years old, uneducated, childish, and selfish. She is not pretty either by Japanese of Caucasian standards. She is inclined to be egotistical and likes to talk about herself. Her attitude in front of strangers is quiet and demure, but she "knows the wiles of a woman." She claims to dislike her "profession" and would rather not talk either about it or her family. Because of the kind treatment she received as a prisoner from American soldiers at Myitkyina and Ledo, she feels that they are more emotional than Japanese soldiers. She is afraid of Chinese and Indian troops.
심문은 평균적인 한국인 "위안부"가 대략 25세 내외이며, 무학이며, 유치하며, 이기적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일본인 혹은 코카시안의 기준으로도 예쁘지 않다. 그녀는 자기중심적이며 그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낯선 자들 앞에서의 그녀의 태도는 조용하며 점잖빼는 모습이지만,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며 그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미트키나와 레도에서 미군으로부터 포로로서 받은 친절한 대접 때문에, 그녀는 미군이 일본군에 비해 보다 정에 무르다고 느낀다. 그녀는 중국군과 인도군을 두려워한다.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생활과 업무 조건
In Myitkyina the girls were usually quartered in a large two story house (usually a school building) with a separate room for each girl. There each girl lived, slept, and transacted business. In Myitkina their food was prepared by and purchased from the "house master" as they received no regular ration from the Japanese Army.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is was especially true of their second year in Burma.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They were able to buy cloth, shoes, cigarettes, and cosmetics to supplement the many gifts given to them by soldiers who had received "comfort bags" from home.
미트키나에서 여성들은 대개 큰 2층 가옥(주로 학교 건물이었던)에서 생활했으며 각 여성마다 하나의 독립된 방을 제공받았다. 그 방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생활하고, 자고, 비즈니스를 행하였다. 미트키나에서 그들의 음식은 위안소 업자를 통해 제공받아 구매하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지는 않았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버마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 이는 버마에서의 2년째 생활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은 (병사들과 달리) 음식과 물품이 심하게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구매할 많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잘 살았다. 그들은 옷, 신발,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으며 집으로부터 "위안 가방"을 우송받은 병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While in Burma they amused themselves by participating in sports events with both officers and men, and attended picnics, entertainments, and social dinners. They had a phonograph and in the towns they were allowed to go shopping.
버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장교들과 다른 남자들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소풍과 각종 오락, 사교적 저녁 식사 등에 참가하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였다. 그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PRIOR SYSTEM
(이용의) 우선순위 시스템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transacted business were regulated by the Army, and in congested areas regulations were strictly enforced. The Army found it necessary in congested areas to install a system of prices, priorities, and schedules for the various units operating in a particular areas. According to interrogations the average system was as follows:
그들이 일하는 조건은 군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위안소 이용이 많아) 붐비는 지역에서는 규칙이 엄격히 적용되었다. 군은 이용이 붐비는 지역에서 (직위에 따른) 차등 가격, (직위에 따른 위안소 이용의) 우선 순위, 특정 지역에서 작전하는 다양한 부대의 스케쥴 등을 고려한 위안소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1. Soldiers | 10 AM to 5 PM | 1.50 yen | 20 to 30 minutes |
2. NCOs | 5 PM to 9 PM | 3.00 yen | 30 to 40 minutes |
3. Officers | 9 PM to 12 PM | 5.00 yen | 30 to 40 minutes |
1. 사병 :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 1회 이용 시간 20분에서 30분. 요금 1.5엔
2. 하사관 : 오후 5시에서 오후 9시.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분. 요금 3엔
3. 장교 : 오후 9시에서 자정.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분. 요금 5엔
These were average prices in Central Burma. Officers were allowed to stay overnight for twenty yen. In Myitkyina Col. Maruyama slashed the prices to almost one-half of the average price.
위의 요금은 중부 버마에서 평균 가격들이었다. 장교들은 20엔을 내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미트키나에서 마루야마 사령관은 위안소의 요금을 평균 가격의 거의 절반으로 깎아버렷다.
SCHEDULES
일정
The soldiers often complained about congestion in the houses. In many situations they were not served and had to leave as the army was very strict about overstaying. In order to overcome this problem the Army set aside certain days for certain units. Usually two men from the unit for the day were stationed at the house to identify soldiers. A roving MP was also on hand to keep order. Following is the schedule used by the "Kyoei" house for the various units of the 18th Division while at Naymyo.
병사들은 종종 위안소가 붐비는 것에 대해 불평하였다. 많은 상황에서 그들은 이용을 하지 못하였으며, 군은 이용 시간 초과에 대해 매우 엄격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은 특정 부대에 대해 특정 이용 일자를 지정하였다. 대개 부대에서 2명이 차출되어 위안소에 상주하며 병사들의 신원을 (위안소의 중복 이용를 하지 못하도록) 확인하였다. 위안소의 질서 유지를 위해 헌병 또한 순찰하였다. 아래는 나이묘의 제 18사단의 여러 부대에 대해 쿄에이 위안소에서 사용된 일정이다.
Sunday | 18th Div. Hdqs. Staff |
Monday | Cavalry |
Tuesday | Engineers |
Wednesday | Day off and weekly physical exam. |
Thursday | Medics |
Friday | Mountain artillery |
Saturday | Transport |
일요일 : 제 18사단 사령부
월요일 : 기병대
화요일 : 공병대
수요일 : 휴일 겸 주간 신체 검사
목요일 : 의무병대
금요일 : 산악 포병대
토요일 : 수송부대
Officers were allowed to come seven nights a week. The girls complained that even with the schedule congestion was so great that they could not care for all guests, thus causing ill feeling among many of the soldiers.
장교들은 일주일 중 아무 날이나 이용이 가능하엿다. 여성들은 이러한 (지정일이 있는) 스케쥴에도 불구하고 붐빔이 너무 심하여 모든 손님을 다 받을 수가 없어서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기분이 나쁘게 되었다고 불평하였다.
Soldiers would come to the house, pay the price and get tickets of cardboard about two inches square with the prior on the left side and the name of the house on the other side. Each soldier's identity or rank was then established after which he "took his turn in line". The girls were allowed the prerogative of refusing a customer. This was often done if the person were too drunk.
군인들은 위안소에 와서 돈을 지불하고 표를 샀는데, 표는 2인치 정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왼쪽에는 직급이 찍혀 있고 오른 쪽에는 위안소 명칭이 적혀 있었다. 각 군인의 직급은 그가 어느 줄에 설 지 결정한 다음 확인되었다. 위안부들은 고객을 거절하는 특권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종종 고객이 너무 취했을 때 발생하였다.
PAY AND LIVING CONDITIONS
급여와 거주 조건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This meant that in an average month a girl would gross about fifteen hundred yen. She turned over seven hundred and fifty to the "master". Many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위안부 업자는 여성들이 처음 계약시 받은 돈(선대금)이 얼마냐에 따라 위안부들의 총수입의 50에서 6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였다. 이는 평균적인 한 달 동안 한 위안부가 1,500엔 가량의 수입을 올리며 이 중 750엔을 업자에게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업자들은 식료품이나 기타 물품을 위안부들에게 고액을 받고 팔아 이 여성들을 힘들게 하였다.
In the latter part of 1943 the Army issued orders that certain girls who had paid their debt could return home. Some of the girls were thus allowed to return to Korea.
1943년 후반에 군은 (위안소 업자에게) 빚을 다 갚은 여성들은 귀국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위안부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The interrogations further show that the health of these girls was good. They were well supplied with all types of contraceptives, and often soldiers would bring their own which had been supplied by the army. They were well trained in looking after both themselves and customers in the matter of hygiene. A regular Japanese Army doctor visited the houses once a week and any girl found diseased was given treatment, secluded, and eventually sent to a hospital. This same procedure was carried on within the ranks of the Army itself, bu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a soldier did not lose pay during the period he was confined.
추가적인 심문은 이 여성들의 건강이 매우 좋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피임 기구들을 잘 공급받았으며, 종종 병사들이 군에서 지급받은 피임도구들을 지참하고 왔다. 위안부들은 자기 자신들과 고객들을 위생이란 측면에서 세심하게 보살피도록 교육받았다. 일본군 군의관이 주 1회 정기적으로 위안소를 방문하였고 병에 걸린 여성이 발견되면 누구든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동일한 과정은 군대 자체에도 적용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군인은 병원에서 치료받은 기간에도 (위안부와 달리) 월급을 지급받았다는 점이다.
REACTIONS TO JAPANESE SOLDIERS
일본 군인들에 대한 반응
In their relations with the Japanese officers and men only two names of any consequence came out of interrogations. They were those of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and Maj. Gen. Mizukami, who brought in reinforcements. The two were exact opposites. The former was hard, selfish and repulsive with no consideration for his men; the latter a good, kind man and a fine soldier, with the utmost consideration for those who worked under him. The Colonel was a constant habitu of the houses while the General was never known to have visited them. With the fall of Myitkyina, Col. Maruyama supposedly deserted while Gen. Mizukami committed suicide because he could not evacuate the men.
일본군 장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심문에서는 단지 2명의 의미있는 이름만이 등장하엿다. 그들은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 대좌과 증원부대로 온 미즈아키 소장이었다. 이 둘에 대한 (위안부들의) 평판은 정반대였다. 마루야마 대령은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혐오스러웠으며 부하들에 대해 배려가 전혀 없었다. 미즈아키 소장은 선하고 친절하며 훌륭한 군인으로 자기 밑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앞에서 말했듯이 위안소 요금을 절반으로 낮추어 업자와 위안부들의 원성을 샀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위안소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나, 미즈아키 소장은 한 번도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
(위안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트키나 함락 때 마루마야 대좌는 아마도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즈아키 소장은 부하들을 탈출시키지 못한 책임감으로 자살하였다.
SOLDIERS REACTIONS
군인들의 반응
The average Japanese soldier is embarrassed about being seen in a "comfort house" according to one of the girls who said, "when the place is packed he is apt to be ashamed if he has to wait in line for his turn". However there were numerous instances of proposals of marriage and in certain cases marriages actually took place.
평균적인 일본군은 '위안소'에 나타나는 것을 당황스러워하였다. 한 위안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위안소가 붐빌 때 (군인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나 (군인들이 위안부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위안부와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All the girls agreed that the worst officers and men who came to see them were those who were drunk and leaving for the front the following day. But all likewise agreed that even though very drunk the Japanese soldier never discussed military matters or secrets with them. Though the girls might start the conversation about some military matter the officer or enlisted man would not talk, but would in fact "scold us for discussing such un-lady like subjects. Even Col. Maruyama when drunk would never discuss such matters."
모든 위안부들은 가장 최악의 고객은 만취한 자들과 다음날 전선으로 떠날 사람들이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하였다. 그러나 비록 술에 취했을 경우에도 일본군은 그 누구도 결코 군 내부의 문제나 기밀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위안부들이 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려고 해도 장교들은 그에 응하지않았고 때로는 "여성 답지 못한 문제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꾸짖었다 한다. 마루야마 대좌조차도 취했을 때에도 그러한 문제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The soldiers would often express how much they enjoyed receiving magazines, letters and newspapers from home. They also mentioned the receipt of "comfort bags" filled with canned goods, magazines, soap, handkerchiefs, toothbrush, miniature doll, lipstick, and wooden clothes. The lipstick and cloths were feminine and the girls couldn't understand why the people at home were sending such articles. They speculated that the sender could only have had themselves or the "native girls".
군인들은 종종 고향으로부터 편지, 잡지, 신문을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위안부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또한 통조림, 잡지, 비누, 손수건, 치솔, 인형, 립스틱, 옷감 등이 들어있는 "위문 가방"을 받았다고 위안부들에게 말하였다. 립스틱와 옷감은 여성용이라서 위안부들은 왜 고향 사람들이 이러한 물건을 군인들에게 보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해당 물건을 보낸 발송인이 아마도 군인들의 애인일 것이라서 (사용하던 물건을 보낸 것이라) 추측하였다.
MILITARY SITUATION
군의 상황
"In the initial attack on Myitkyina and the airstrip about two hundred Japanese died in battle, leaving about two hundred to defend the town. Ammunition was very low.
미트키나와 활주로에 대한 첫번째 공격에서 2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하였고 그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2백명을 남겨두고 퇴각하였다. (일본군의) 탄약은 매우 부족하였다.
"Col. Maruyama dispersed his men. During the following days the enemy were shooting haphazardly everywhere. It was a waste since they didn't seem to aim at any particular thing. The Japanese soldiers on the other hand had orders to fire one shot at a time and only when they were sure of a hit."
마루야마 대좌는 부하들을 넓게 산개시켰다. 다음 날 적군(미군)은 모든 곳에서 위험스러운 총격을 가했으나 특정한 목표를 겨눈 것이 아니라서 (탄약의) 낭비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적을 명중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할 때만 (연사하지 않고) 1회씩 발사하도록 명령받았다.
Before the enemy attacked on the west airstrip, soldiers stationed around Myitkyina were dispatched elsewhere, to storm the Allied attack in the North and West. About four hundred men were left behind, largely from the 114th Regiment. Evidently Col. Maruyama did not expect the town to be attacked. Later Maj. Gen. Mizukami of the 56th Division brought in reinforcements of more than two regiments but these were unable to hold the town.
적이 서쪽 활주로를 공격하기 전에, 미트키나 주둔 병사들은 북부와 서부 쪽의 연합군에게 강습을 가하기 위해 어딘가로 파송되고 있었다. 대략 400명의 병사가 남겨졌는데 주로 제 114연대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분명 그 도시가 공격받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제 56 사단의 미즈아키 소장이 2개 연대 이상의 증원군을 제리고 왔으나 그들로서도 도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It was the consensus among the girls that Allied bombings were intense and frightening and because of them they spent most of their last days in foxholes. One or two even carried on work there. The comfort houses were bombed and several of the girls were wounded and killed.
연합군의 폭격이 맹렬하고 위협적이었다는 것이 위안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마지막 날들을 대부분 방공호에서 보냈다. 한 두 명은 그 와중에도 일을 수행하였다. 위안소도 폭격을 받았으며 위안부 중 몇몇이 부상당하고 사망하였다.
RETREAT AND CAPTURE
퇴각과 생포
The story of the retreat and final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is somewhat vague and confused in their own minds. From various reports it appears that the following occurred: on the night of July 31st a party of sixty three people including the "comfort girls" of three houses (Bakushinro was merged with Kinsui), families, and helpers, started across the Irrawaddy River in small boats. They eventually landed somewhere near Waingmaw, They stayed there until August 4th, but never entered Waingmaw. From there they followed in the path of a group of soldiers until August 7th when there was a skirmish with the enemy and the party split up. The girls were ordered to follow the soldiers after three-hour interval. They did this only to find themselves on the bank of a river with no sign of the soldiers or any means of crossing. They remained in a nearby house until August 10th when they were captured by Kaahin soldiers led by an English officer. They were taken to Myitkyina and then to the Ledo stockade where the interrogation which form the basis of this report took place.
퇴각과 최종적으로 사로잡히게 된 과정을 이야기할 때 위안부들은 다소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워보였다. 여러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 7월 31일 밤에 세 위안소(이때 바쿠신로 위안소는 킨스이 위안소와 통합된 상태였다)의 위안부들, 여러 가족들, 보조자들이 포함된 63명의 일행이, 작은 보트에 나누어타고 이라와디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내 와잉마우(Waingmaw) 근처의 어딘가에 상륙하였는데, 그곳에서 8월 4일까지 머물렀는데, 와잉마우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 부대를 따라갔는데 8월 7일에 소규모 접접이 일어나면서 일행이 쪼개지게 되었다. 위안부들은 3시간 간격을 두고 군인들을 따르라고 명령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명령을 따랐으나 마침내 어느 강둑에서 병사들을 놓치고 강을 건널 수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근처의 가옥에서 8월 10일까지 머무르다가 영국 장교가 인솔하는 카힌 부대(인도인 현지 부대인 듯 하다)에 의해 생포되었다. 그들은 미트키나로 이송된 후 다시 레도 진지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이 보고서의 기반이 되는 심문이 진행되었다.
REQUESTS
요청들
None of the girls appeared to have heard the loudspeaker used at Myitkyina but very did overhear the soldiers mention a "radio broadcast."
여성들 중 누구도 미트키나에서 사용된 확성기 방송을 듣지 못했으나 군인들이 "라디오 방송"을 언급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은 있었다(미군의 심리전 방송을 말하는 듯).
They asked that leaflets telling of the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should not be used for it would endanger the lives of other girls if the Army knew of their capture. They did think it would be a good idea to utilize the fact of their capture in any droppings planned for Korea.
그들은 "위안부들"을 생포했다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일본군에게) 뿌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는데, 만약 일본군 측이 그들의 생포를 알게 되면 (부대에 있는) 다른 위안부들의 생활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포 사실이 한국에 살포하기로 계획된 전단지에 활용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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