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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1)

이용수와 정대협에 의해 국제사기극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 우리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차례>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1)

- 이용수와 정대협에 의해 결국 국제사기극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 우리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2)

- 일본군 장교를 위해서 영혼결혼식까지 치러준 이용수, 심지어 나이, 결혼, 직업까지 전부 허위 혐의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3)

-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까지 신청하며 ‘종북’ 문재인, ‘종북’ 정대협과 함께 반미활동에 여념없는 이용수

 



[정정]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이 최근 이용수 씨의 위안부 증언들을 1차 자료를 중심으로 다시 검토한 결과 과거 미디어워치의 이용수 검증 보도에서 일부 오류가 있었음을 알려왔습니다. 김 소장의 지적은 다음과 같으며, 미디어워치는 이 지적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이에 정정하는 바입니다. 


(1) 이용수 씨의 위안부 관련 증언이 미디어워치의 지적처럼 1993년부터 최근까지 이십여 차례에 걸쳐 연도, 나이, 경위, 기간 등에 일관성이 없이 오락가락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미디어워치가 연합뉴스 등의 관련 보도를 인용하여 증언 내용이 달라졌다고 지적한 '2007년 미국 의회 증언'과 '2018년 프랑스 의회 증언'은, 원 증언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기본적으로 같은 취지의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두 증언에는 공히 “강제연행 현장에 군인이 있었다”, “등에 칼이 찔려 끌려갔다”는 ‘1993년 최초 증언’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강제연행 증언이 담겨 있는데, 이는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내용은 아니고 실제로는 (2007년, 2018년이 되어서가 아니라) 이미 2000년을 전후로 하여서 등장한 내용으로 여겨진다. 이 씨의 ‘1993년 최초 증언’이 2000년대 들어서 국내외로 갑자기 과격한 강제연행 증언으로 바뀌고, 결국 2007년 미 의회에서까지 그렇게 바꾸어 증언한 경위를 추궁하는 것이 이용수 위안부 증언 변천 문제의 핵심이다. 이 씨가 ‘1993년 최초 증언’을 계속해서 부정하고 최초 증언집은 더 이상 팔면 안 된다고 최근 기자회견에서 강조했음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2) 미디어워치가 한겨레를 보도 등을 인용해 이용수 씨가 2016년 12월, 박유하 교수 결심 공판에서 한 증언은 미디어워치의 소개와는 달리 공식적인 '법정증언'이 아니었다. 이 씨가 당시 증언대에서 여러 이야기를 했었지만, 이 씨는 일단 당시에 증언선서를 한 바가 없었다. 법적으로는 단순히 재판 방청인의 의견진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박유하 교수의 관련 1심 기록을 직접 확인한 결과로도 이용수 씨가 법정증인으로 채택된 내역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용수(李容洙)는 조선인 출신 일본군 위안부들 중에서도 가히 ‘아이콘’으로 통하는 인사다. 


일본군 위안부들 중 생존자는 수십 여명이지만 주류 언론들이 조명해줬던 이들은 주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함께하는 너댓 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씨는 그런 이들중에서도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의 파트너로서 가장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펼쳐온 ‘대표’ 격이다.


하지만, 이용수가 과연 우리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로 그 ‘일본군 위안부’가 맞는지에 대해서, 사정을 잘 아는 네티즌들은 오래전부터 비판적 의문을 제기해 왔었던 실정이다. 좌익 백과사전인 ‘나무위키’ 유저들을 비롯, 여러 온라인 논객들의 거듭된 합리적 비판에도 주류 언론들은 지난 십수년 동안 이 씨의 문제를 모른 체 하기에만 급급했다.


무엇보다도 이 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인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 문제와 관련, 그 증언이 여러 차례 바뀌었던 전력이 있다. 더구나 이 씨가 다른 단체도 아닌 ‘종북(從北)’ 단체인 정대협과 함께 각종 이념활동, 정치활동을 이어왔던 문제도 간단하게 볼 수 없는 문제다. 


미디어워치의 취재 결과, 이용수의 나이, 결혼, 직업 등 아예 기본 정체가 의심스러운 정황도 한두 가지가 아님도 확인됐다.


일본군 위안부 증언은 절대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용수의 1993년도 본인 증언과 1997년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이 씨는 1944년 10월에 일본군 위안부로 모집되어 1945년 1월부터 대만의 신죽(新竹) 공군기지 옆 위안소에서 종전 시까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대략 7-10개월 정도 위안부 생활을 한 셈이다.


초기 증언에 따르면 이용수는 하루 5~6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하였다고 한다. 초기 증언에서는 가미가제 특공대였다는 '하세가와'라는 일본군 장교가 그녀를 도와주어 둘이서 낭만적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이 씨는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1942년에 14세의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대만에서 3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였다’는 식으로 증언 내용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중에는 하루에 상대한 일본군의 숫자 또한 처음 이야기하였던 5~6명에서 최소 20명, 최대 70명으로 폭증하기 시작했다.


1993년도에 이용수를 다룬 ‘한겨레’ 기사를 보면 해방 후 술집종업원, 가정부 등을 하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부각되기 이전인 87년에 60세의 나이로 75세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혼인신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7년도 EBS ‘시대의 초상’ 증언에서는 이용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부각되기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런 엇갈리는 증언들은 모두 이용수 본인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증언들이며 100% 서증(書證)으로도 모순이 확인된다. 





1993년도 증언에서는 취업사기로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고 증언


먼저 이용수의 1993년 증언부터 살펴보자. 아래 내용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 증언집’(한울)에 수록(해당 책 123~124쪽)되어 있다. 이 내용은 또한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없어진, 여성가족부의 웹사이트 ‘일본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도 채록된 내용으로, 인터넷에서도 그 내용이 쉽게 검색 가능하다.


1944년, 내가 만 열여섯 살 때 가을의 일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미창(米倉)에 나가서 쌀을 져나르는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분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이것이 과연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인가? 이 증언만으로는 친구 “김분순”의 유혹에다가 본인의 자발성도 있는 가출행위(家出行爲)인데다가, 술장사를 하던 “김분순”의 어머니가 “김분순”과 이 씨를 인신매매(人身賣買) 대상으로 삼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관련 업자들에 의한 유인사기(誘引詐欺)의 혐의도 엿보인다. 


특히 이 씨의 저 1993년도 증언은 매우 구체적인 내용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복장이 “검은 통치마”,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이라는 내용, 그리고 자기를 데려간 일본인 남자가 “마흔”이 좀 안 되어보였다는 내용, 그 일본인 남자가 “국민복”에 “전투모”를 착용했다는 내용, 그리고 자기를 유인하기 위해서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줬다는 내용까지. 


이는 이용수가 가장 젊은 시절에 했던 공식 증언이기도 하고, 누가 봐도 이 증언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수는 이렇게 업자들에 의해 유인되어 대만 일본공군 기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한겨레’ 1997년 9월 6일자 기사 ‘위안부 할머니 울지 마세요! -  대만 신죽기지앞/치욕의 현장 찾은 할머니들 눈물 … 통곡’ 제하 기사를 보자.


지난 8월 30일 새벽 5시30분 대만 타이베이에서 1시간여 떨어진 신죽(新竹) 공군기지 앞. 이용수(72·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비둘기 아파트 107동 113호)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했는데…, 여기가 정말로.”


‘신죽’이라는 어렴풋한 기억 하나만으로 찾아나선 몸서리쳐지는 50여년 전 위안부 삶은 공군기지와 기지 옆을 흐르는 개천, 부대 주변의 방공호, 전쟁 때 20여명의 여자들이 있었다는 기지 주변 70대 노인의 증언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부대 안쪽인 것 같아. 처음에는 건물이었는데 폭격으로 무너져 판자로 가건물을 세웠지.”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45년 1월 이곳으로 끌려온 이 할머니는 어디인지조차 모른 채로 일본 패전일까지 하루 5~6명의 일본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총 기간으로 보자면 1944년 가을에 “국민복”에 “전투모”를 착용한 어느 일본인 남자를 만나서 이후 일본 패전 일까지 총 10개월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 총 기간도 일단 기억해두라.


1990년대 후반부터 오락가락하는 이용수의 일본군 위안부 모집 관련 증언


하지만 이 씨의 위와 같은 증언 내용은 공교롭게도 좌파 정권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1998년도부터 확연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일단 ‘한겨레’ 1998년 5월 6일자 ‘위안부 할머니 정부지원금 거부 이용수 씨 등 3명’ 제하 기사를 보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온 대구지역 할머니 5명 가운데 이용수(71·대구시) 할머니 등 3명이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정부방침에 반발해 정부 지원금 3150만원의 수령을 거부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부 지원금의 수령을 거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할머니 등은 지난 4일 정부지원금 수령과 관련해 ‘앞으로 일본의 민간기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으러 온 대구시 관계자를 만나 “일본 정부에 책임이 있는 만큼 그들로부터 정식 사과를 받고 배상을 받아야 한다”며 각서쓰기와 지원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14살 때인 1942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이 할머니는 지난 92년 피해자들과 함께 10여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의 사과 및 법적 배상을 요구해 왔다.


1993년도에는 분명 '1944년에 16세'라는 내용이, 1998년부터는 갑자기 '1942년에 14세'라는 내용으로 바뀐다. 이런 것은 기자가 자의적으로 바꿀만한 내용이 절대 아니다. 


‘한겨레’의 1999년 3월 6일자 ‘군위안부 할머니 대학원생 된다’ 제하 기사도 보자. 만 14세라고는 표기했지만 역시 1942년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연도이다.


일제 당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야학에서 한문 등을 배운 그는 지난 42년 만 14살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다가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다음은 일본공산당의 기관지인 ‘신문아카하타(しんぶん赤旗)’ 2002년 6월 26일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관련기사 : 전 ‘위안부’에게 보상을 ... 참의원 의장들에게 법안 성립을 요청(元「慰安婦」へ補償を ... 参院議長らに法案成立要請))


동 법안은 전 ‘위안부’였다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표하고 그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금전지급을 포함)를 강구할 것을 정한 것입니다. 일본공산당, 민주당, 사민당의 야당 3당이 전 국회에 제출하여 계속 심의되고 있습니다.


(同法案は、元「慰安婦」とされた人たちに謝罪の意を表し、その名誉回復のために必要な措置(金銭の支給を含む)を講ずると定めています。日本共産党、民主党、社民党の野党三党が前国会に提出し、継続審議になっています)


한국의 이용수씨(74세)는 14살 때 총검으로 협박당하여 연행된 사실과 거절하면 구타당하고 전기고문을 받아 죽을 뻔했던 경험을 말하면서 “나는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지금 살고 있다. 이 법안이 심의되어 성립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韓国の李容洙さん(74)は、十四歳で銃剣をつき付けられて連れてこられたこと、拒むと殴られ、電気による拷問を受けて死にかけたことなどを話し、「私は歴史の生き証人として今、生きている。この法案が審議され、成立することを望む」と語りました)


일본공산당에서는 요시카와 하루코(吉川春子), 핫타 히로코(八田ひろ子) 참원의원이 동석했습니다.


(日本共産党からは吉川春子、八田ひろ子参院議員が同席しました)


14세 내용에 추가로 총검으로 협박을 당해 ‘연행’이 되었다는 내용까지 나온다. 총검을 들이댔다는 주체가 누군지는 안 나온다. 


1944년부터 3년간 일본군 위안부생활을 했다?


다음은 2004년 12월 4일에 있었던 교토실행위원회(京都実行委員会) 주최 ‘12 · 4 전국동시증언집회 ’지울 수없는 기억‘ -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불러( 「消せない記憶」 -日本軍「慰安婦」被害女性を招いて)의 이용수 증언을 기초로 한 프로필 내용이다.


1928년 한국 대구 태생. 1944년 16살 때 “군복같은 옷을 입은 남자”에 연행되어 대만으로. 이동 중에 배 안에서 일본 군인들한테 반복적으로 강간당했다.


(1928年韓国の大邱(テグ)生まれ。1944年、16歳の時に「軍服みたいな服を着た男」に連行され、台湾へ。移動中の船の中で、日本の兵隊たちに繰り返し強かんされる)


그 후 연행된 대만에서 강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 3년간 생활했다. ‘위안소’에서는 하루에 여러 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도록 강요당했으며 저항하면 전선과 같은 것으로 전류를 흘리거나 통나무로 때리는 등 폭행당했다. ‘해방’ (일본의 패전) 후 한동안 머물다가 한국으로 귀국했다.


(その後、連れて行かれた先の台湾で、日本軍「慰安婦」としての生活を3年間強制された。「慰安所」では1日に何人もの兵士の相手をさせられ、抵抗すると電線のようなもので電流を流されたり、丸太で叩かれたりの暴行を受けた。「解放」(日本の敗戦)後、しばらくしてから韓国に戻る)


3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부분을 주목하라. 일본군은 다들 알다시피 1945년에 패전하고 대만에서 물러났다. 그렇다면 1944년에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면서 어떻게 동시에 3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의 증언에서도 명백한 모순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2006년 7월 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제는 집에서 자고 있는데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고 한다. (관련기사 : “정부, 日에 외교적 노력 안해” 위안부 할머니 109명 헌법소원)


열다섯 살이던 1942년경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갔다. 이후 내 몸과 삶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데 정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우리는 한국의 어머니도, 딸도 아니란 말인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청구서를 접수시키러 온 일본군 위안부 출신 이용수(79) 할머니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경위만 바뀐 게 아니다. 그때가 1942년에 15세였다면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연도와 나이에 대한 내용도 다 바뀌었다.





14세? 15세? 16세? 1942년인가, 1943년인가, 1944년인가


2007년도 2월 15일 미국 의회 증언 관련 보도를 보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연도가 다시 1944년으로 바뀐다.(관련기사 : <'위안부 할머니' 미하원 증언록>)


이용수 할머니 "구타와 고문, 강간으로 점철된 3년"


= 첫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니는 "나는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설움이 북받치는 듯 "제가 겪은 일들을 꼭 얘기해야 하는데 너무 부끄럽다"며 이내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하나하나 고발했다. 성 노예로 지낸 한 많은 세월들도 털어놨다.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유모로 일하는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며 면사공장에 다니다가 16세이던 1944년 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다.


원래는 면사공장에 다녔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는 “끌려갔다”(연행)는 표현은 나오지만 강제연행인지 인신매매인지 취업사기인지, 또 동원주체가 일본군인지 위안소 업자인지가 불분명하다. 어쨌든 일본군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분명 그런 증언을 했는데도 더구나 한국인 기자가 그런 사실을 누락하고 보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부분은, 해당 기사에서 소제목을 보면 ‘이용수 할머니 “구타와 고문, 강간으로 점철된 3년"’이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미디어워치가 미국 의회 증언과 관련 중앙일보 2007년 2월 17일자 ‘미국의 마음 흔든 한국·네덜란드 할머니 '위안부' 증언’ 기사로써 크로스체크를 해본 결과, 이용수 씨의 당시 워딩은 "1944년 16세 때 대만에 위안부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의 성 노리개가 됐다”가 맞는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거듭 지적하거니와 1944년부터 어떻게 3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가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2004년 교토실행위원회 증언에 이어 역시 하나의 증언에서도 명백한 모순이 나오고 만 것이다.


2007년도 6월 12일에 방영된 EBS ‘시대의 초상 - 위안부라 하지마라'에서의 인터뷰를 보자. 집 밖에 나갔다가 일본군한테 끌려갔다는 내용이다. (관련기사 : "내가 왜 위안부냐,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지")


“1944년 10월 어느 날 저녁 그가 집 밖에 나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게 끌려간 곳은 대만 일본군 위안소였다. 끌려가면서 "엄마, 엄마... 이 사람들이 나 죽일라고 한다. 엄마 살려줘"라고 울부짖었던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2009년도 3월에 일본의 성문제 관련 평론가 다카야나기 미치코(高柳美知子)의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わたしは日本軍「慰安婦」だった)’(신닛폰출판사(新日本出版社))라는 증언집에 수록된 내용(해당 책 29~30쪽)도 보자. 여기서 나오는 친구는 척 봐도 “김분순”이다.(관련기사 : 트럼프에게 껴안긴 前위안부 '이용수'의 정체 (トランプに抱き着いた「元慰安婦」李容洙の正体))


엄마는 방금 전 태어난 남동생이 있는 방에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초가 지붕 집으로 뒤에 작은 창이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창문 쪽을 봤더니 며칠 전 같이 쑥 캐러 가자고 한 친구가 손짓하여 부릅니다. "무슨 일이지?"


(オンマは、生まれたばかりの弟のいる部屋の方にいました。わたしの家はわらぶき屋根の家で、後ろに小さな窓がありました。何か物音が聞こえたようなので窓の方を見ました。すると、数日前、ヨモギ採りにさそってくれた友だちが手招きしています。 「なんだろう」)


밖에 나가 보니 친구 옆에 모자를 깊이 쓴 군인이 서있었습니다. 친구는 그 남자가 저를 부르게 했다고 하며 저한테 보자기에 싼 짐을 줬습니다. 만져보니 신발과 옷이 들어있었습니다. "같이 따라 와“


(外に出てみると、友だちのそばに目深に帽子をかぶった軍人が立っていました。友だちは、その男から手招きされるようにいわれたといい、わたしに風呂敷包みを渡しました。さわってみると、そこには靴と服が入っているようでした。 「いっしょに来い」)


군인은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겁이 나서 도망 가려고 했지만 친구가 "가자"며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저도 보자기에 싼 짐을 들고 따라갔습니다. 동네 건널목까지 갔더니 거기에 3명의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군인은 우리를 역으로 데려가서 5명을 기차에 태웠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기차를 타본적이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멀미로 저는 토하면서 외쳤습니다. "엄마! 엄마!“


(軍人はそういうと、歩き出しました。怖くなって逃げようとしたのですが、友だちが「行こう」といって歩きだしたので、わたしも風呂敷包みをもってついて行きました。近くの踏切まで行くと、そこに三人の女の人が待っていました。そして、そのまま駅につれていかれ、五人は汽車に乗せられました。わたしはそれまで、汽車に乗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怖さと不安と乗り物酔いで、わたしは吐きながら叫びました。「オンマ!オンマ!」)


군인은 저를 조용히 시키려고 "조센진!" "조센피-!"라고 고함치면서 저의 머리카락을 잡아 바닥에 내리쳤습니다. 


(軍人はわたしを黙らせようと「チョウセンジン!」「チョウセンピー!」と怒鳴りながら、わたしの髪をつかんで床にたたきつけました。)


“조센진(チョウセンジン)”, “조센피-!(チョウセンピー!)” 얘기는 이번 증언에서 처음 나오는 얘기다. 이용수는 저 증언집에서 “15살에 나에게 일어난 일(15歳の私に起こったこと)”이라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


3년후에 이용수의 증언은 또 바뀐다. 친구가 불러서 나간 다음에 군인을 따라갔다고 하더니 이제는 일본군이 집 마당에 들어와서 끌고갔다고 한다. 인터뷰와는 별개로 기사에서는 이용수가 17세에 끌려갔다는 내용도 나온다.(관련기사 : ‘참 무서운 이웃, 일본을 말하다’ 일제 강제위안부 이용수 할머니)


2차대전 막바지 17세 때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2년간 대만 등지에서 짐승보다 못한 강제위안부 생활을 했다. 광복 후 귀국해서 포장마차, 술집 등을 전전하면서 가난과 이혼, 질병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할머니는 강제위안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는 영화에 출연했고, 미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위안부 결의안 처리 등을 요구했다. 


(. . .)


-일본군에게 끌려가 모진 고난을 당했는데 당시 상황은.


대구에 있는 집 마당에까지 일본군이 들어와서 끌고 갔다. 기차를 타고 경주~평안도 안주~중국 다롄까지 갔는데 거기서 군함을 타고 상하이~대만으로 갔다. 중간 중간에 또래 여자를 태웠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기도 했다. 안주에서 동료와 탈출을 시도하다 동료가 죽도록 얻어맞았다.”


다음은 2014년 7월 4일에 있었던 한양대에서의 증언이다. 언제는 자다가 바로 끌려갔다더니 이번에는 자신을 유인하는 일본군이 있어서 도망을 가다가 다른 일본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는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관련기사 : 위안부 할머니들, 한양대서 역사 증언…"돼지 보다 못한 삶이었어")


이용수 할머니는 "제가 15살이 되던 해 어느날 일본 군인이 '이리오라'는 손짓을 했다"며 "무서워서 도망갔는데 또다른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기차를 타고 대만의 한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93년도 증언에서는 기차를 타고 대구를 갈 때까지는 일본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2009년도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증언집에서부터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기차를 타고 위안소로 갔다고 증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안부 업자에 의한 ‘취업사기’인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인가


다음은 2014년도에 ‘아시아경제’가 기획한 ‘위안부 보고서 55’의 이용수 프로필 내용이다. 여기서 55라는 숫자는 당시 생존 일본군 위안부들 명수를 뜻한다.


“16세에 원피스와 빨간 가죽구두를 보여주며 '배불리 먹여주고 집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 남자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따라 나섰다. 중국을 거쳐 대만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이 주인에게 전기고문도 당했다.”


다시 1993년도 원 증언 내용으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강제연행 내용도 다시 취업사기 내용으로 바뀌었다. 나이도 16세이다


‘위안부 보고서 55’은 ‘‘제288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상’을 받은 바 있는데, 일단 ‘아시아경제’ 측은 3개월 동안 일본군 위안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관련기사 : 위안부 보고서 55 - 제288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신문·통신 / 아시아경제 주상돈 기자)


다음은 2015년도 3월 12일, 인문학 모임인 '두:목회'가 주최한 '이용수 할머니의 역사의 증언'에서의 이용수 증언이다. 16세였던 1943년 ‘여름’에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증언하고 있다.(관련기사 : "난 가미카제 성노예, 생각만 해도...나쁜놈들")


대구 고성동에서 태어난 이용수 할머니는 16살 때 다른 4명의 동네 언니들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갔다. 1943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이할머니는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는 모자를 쓴 군인이 우리를 데려갔다, 당시 장난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1943년부터라면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2년 동안 했다는 말인가. 앞서는 3년 동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용수는 2015년도 4월에 일본 아베 총리가 미국 의회 합동연설을 했을 때 이를 비판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으로 갔었다. 이용수는 당시 세계적인 유력언론인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 내용을 한번 보도록 하자.(관련기사 : 70년후, 한 한국인 '위안부'가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70 years later, a Korean ‘comfort woman’ demands apology from Japan))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처음에 다른 소녀들이 나를 보호하려 했다. 나는 병사들이 그녀들 위에 있는 것 즉 덮치는 것을 보았으나, 소녀들은 담요를 나에게 덮어주고는 나에게 조용히 쥐죽은 듯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의미를 몰랐다. 나는 단지 14살 이었고, 나는 그때 어떠한 것도 알지 못했다. ”


(“At first the other girls tried to protect me because I was so young. I saw the soldiers on them, but the girls put a blanket over me and told me to pretend I was dead so nothing would happen to me. I didn’t know what they meant. I was only 14. I didn’t know anything then.“)


이용수 씨가 페어팩스에 있는 친구들의 집에서 화요일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그녀의 악몽은 1943년 10월 어느 날 시작되었다. 이 씨는 한 이웃의 비명소리를 듣고 밖에 나갈 때는 그녀는 자신의 집 농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했다. 곧 그녀는 자신과 다른 4명의 소녀들이 일본군에 의해 열을 지어 끌려 가고 있음을 알아챘고, 그녀들은 기차, 트럭, 배로 연행됐다.” 


(As Lee recounted Tuesday during an interview at the home of friends in Fairfax, her nightmare began one night in October 1943. Lee said she was asleep in her family’s farmhouse when she heard a neighbor calling and went outside. Soon she found herself with four other girls being marched off by Japanese soldiers, then forced on a series of journeys by train, truck and ship.)


이용수 씨가 마침내 구출되어 전쟁 후에 집으로 보내졌을 때, 그녀는 17살 이었다. 그러나 여러 이유들로 그녀의 삶은 위안부의 곤경이 알려지고서야 비로소 다시 시작되었다.


(When Lee was finally rescued and sent home after the war, she was 17. But in many ways, her life did not begin again until the plight of the comfort women became known)


14세에 끌려갔다고 한다. 1943년도 ‘10월’이다. 그런데 바로 앞의 인문학 모임 증언에서는 ‘여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1943년 10월부터 1945년 8월까지면 일본군 위안부 생활 기간은 역시 2년이 된다.


일본군에 의해 기차, 트럭, 배로 연행됐다고 한다. 1993년도 증언에서도 기차를 타고 경주와 대구를 가는 내용이 나오지만 거기에는 일본군에 대한 내용은 일체 없었다.






‘가미가제’ 일본 공군 기지라면 1943년과 1942년은 말이 안돼


다음날인 2015년 4월 23일, 웹진 ‘뉴스로’(‘뉴시스’가 재수록)와의 인터뷰를 보자. 이 증언 내용은 초장부터 어쩐지 이상하다. 


일본 아베 총리는 위안부와 관련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을 부정하고 민간의 업자에 의한 인신매매를 주장하고 있다. 이경우에는 당연히 반박을 하려면 “강제연행이 확실히 맞다, ‘일본군’이 끌고 갔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용수는 끌고 간 주체를 ‘일제 정부’라고 하면서 어딘지 모호한 답을 한다.(관련기사 : "아베, 워싱턴에서 나부터 봐라“ 위안부피해 이용수 할머니 일갈)


"아베 총리가 말하길 전쟁이 있는 곳에 위안부 여성있다고 했는데 그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일제 정부가 일제 군인들을 위해서 위안소를 만들고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간 것 아닙니까. 부모님과 6남매가 행복한 가정의 15살 고명딸에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성노예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인신매매 당했다는 아베 총리의 망발에 울분이 치솟습니다. 


이 인터뷰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용수가 일본군의 패전 시점까지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하나도 모르는 열다섯살짜리가 끌려간 곳은 일제가 점령한 대만의 신주 가미가제 공군부대입니다. 그 부대의 21살 일본군인이 도시코(年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치욕의 성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날 부대내에서 비행기 청소일 등을 하는 대만 노무자가 담넘어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알려주더군요. 그후 수용소를 거쳐서 1946년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인터뷰에는 이용수가 애초 대만 일본공군 기지 위안소로 가게 됐던 시점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가미가제(자살공격) 공군부대’다.


이용수는 다른 곳에서 한 증언들에서도 자기를 돌봐주던 일본군 장교도 ‘가미가제’로 죽게 됐다고 밝힌 바도 있다.


일본군의 ‘가미가제’는 1944년 10월경부터 시작됐다. 이용수가 위안부 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곳이 ‘가미가제’ 공격을 하는 대만 일본공군 기지 위안소인데, 1943년과 1942년에는 ‘가미가제’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이용수는 과연 무슨 근거로 1943년과 1942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첫 증언에서는 “김분순”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고 증언한 이용수


한편, 저 인터뷰 중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분순”이라고 밖에 달리 여겨지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도 나온다.


"고향 집에 돌아와서 한 여인이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고 온 적이 있어요. 죽기전에 고백할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내가 너 끌려 갈 때 너희 집에 일본 군인하고 같이 왔던 사람이다. 꼭 너에게 말을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아서 왔다'고 했어요. 맨살 얼굴을 보여준 그 여인은 성병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용수는 1993년도 증언에서 분명 친구 “김분순”이 일본 남자와 같이 왔다고 증언했던 바 있다. 그리고 그 “김분순”과 같이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고 증언했다.


2015년 6월 24일, 격주간지 ‘미래한국’과의 인터뷰를 보자. 일본군이 여자아이를 이용해 자신을 폭행 납치했다고 한다. 이제 다시 1943년 ‘가을’이고 16세로 바뀐다.(관련기사 : 이용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내 소원은 한국과 일본이 원수 지지 않는 것”)


이용수 할머니는 1943년 가을 우리 나이로 16세 때 다른 소녀 4명과 함께 일본군 2명에게 끌려갔다. 집에서 잠을 자다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된 할머니는 기차를 타고 경주와 평양을 거쳐 중국 다롄(大連)까지 갔다. 할머니는 다롄에서 배를 타고 대만 북서부의 신죽(新竹)에 있는 일본 가미카제 부대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우리 고향 집이 초가집이었는데 방에 조그만 봉창이 있었어요. 거기에 모자를 눌러쓴 군인과 여자 아이가 하나가 있는데, 그 아이가 나오라고 손짓을 했어요. 자다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마루에 걸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입을 막고 뭔가 뾰족한 것으로 등을 찌르는 거예요. 그길로 다른 여자 아이 4명과 함께 기차에 태워졌어요. 그때 ‘난 안 간다’, ‘엄마한테 갈란다’ 하다가 엄청 맞았어요.”


이 증언은 자다가 끌려갔다는 내용, 또 집 밖에 나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는 내용이 합쳐진 형태로 일종의 종합상세설명일 수 있다. 그러나 일본군을 또 언급하는 등 어쨌건 1993년도 증언과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기서 “여자아이”가 바로 친구 “김분순”이 아닐까? 이용수는 1993년도 증언에서 “김분순”이 자기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고 하길래 그길로 집을 나왔고 나중에 같이 일본군 위안소로 가게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용수가 초기에 했던 “김분순” 관련 증언에다가 그간에 했던 증언을 논리적으로 어긋나지 않게 모아서 억지로 각색 창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용수, 자칫하면 모해위증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


이용수의 이런 오락가락하는 증언은 결국 본인의 법적 신변조차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용수는 2016년 12월 20일, ‘제국의 위안부’를 저술한 박유하 세종대 교수에 대한 1심 '구형' 현장에 나타나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관련기사 : 검찰,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에 3년 구형)


“16살에 자다가 군인에게 붙들려갔는데 군인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전기고문 등 갖은 고통을 당했다. 대만 가미카제 부대로 끌려가서 1946년에 나왔다. 박유하가 망언으로 책을 냈다. 저런 교수가 어떻게 학생을 가르치나. 엄벌해달라. 너무나 억울하다.”


1946년에 나왔다는 얘기는 대만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로 보인다. 어쨌든 이용수는 다시 집에서 자다가 군인에게 붙들려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참고로, 이용수의 위 증언은 일반 증언도 아니고 명예훼손 관련 피해자로서 형사피고를 대상으로 한 법정 증언이다. 저런 법정 증언이 허위 내용이면 모해위증죄(謀害僞證罪)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법정 허위 증언을 정대협이 사주했다면 정대협도 물론 교사범(敎唆犯)이 될 수 있다.


놀랍게도 이용수는 2017년 1월 25일, 박유하 세종대 교수 1심 '선고' 현장에서는 취업사기를 당했다는 식 또 다른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본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관련기사 : '제국의 위안부' 무죄에 할머니 '격노' vs 박교수 '만족')


"공장을 데려간다 해놓고 공장을 안 보내고 성노예를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


2007년 2월 미국 의회 증언 때 이용수가 면사공장에 다녔다고 증언한 바 있음을 상기해보자. 


아래 2018년 3월 10일, 프랑스 의회에서의 이용수 증언을 보자. 일본군이 여자아이를 이용해 자신을 폭행 납치했다고 한다. 나이는 다시 15세로 바뀐다. 2015년도의 ‘미래한국’ 인터뷰 내용으로 돌아온 것이다.(관련기사 : 佛 의사당 흔든 위안부 할머니 증언)


“어느 날 방 안에 있는데 여자아이가 창문 밖에서 손짓으로 날 불러요. 친구가 놀자고 하는 줄 알고 나갔더니 여자아이는 손으로 내 입을 막고, 군인이 날카로운 걸로 등을 찔러요. 그렇게 기차역으로 끌려갔죠. 15세 때였어요.”


“여자아이”에 이어 이번에는 “친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다시 한번 “김분순”이 떠오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의회 증언에서는 그 중요한 ‘일본군’은 언급도 안하다가, 11년이 지나서야 프랑스 의회 증언에서야 ‘일본군’이 더구나 폭행·납치를 했다고 말한다. 차후 미국이나 프랑스 쪽 어느 의회 관계자가 이 차이를 물고 늘어진다면?






국제사기극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 우리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결국, 이용수는 아무 검증도 받지 않고 지난 25년 간 이런 식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해왔다. 


이용수의 증언 중에는 자주 나온 얘기(강제연행)도 있고, 덜 자주 나온 얘기(취업사기)도 있다. 문제는 두 개 얘기가 특히 일본 정부에 관련 책임을 물으려 할 경우, 아예 본질이 전혀 다른 얘기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용수가 지금껏 해왔던 증언들 중에서 비교적 자주 나온 얘기가 더 진실에 가깝지 않겠냐고? 그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이용수가 앞으로 10년간 하게 될 증언에서 혹 전혀 다른 새로운 얘기가 나오고 그 새로운 얘기가 더 잦아진다면 그 새로운 얘기가 진실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이용수의 갈지자 증언 변천사 문제, 아니 정확히는 허위증언 문제와 관련해서 나이 든 노인이 기억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또 학대 등에 의한 트라우마를 감안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감상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양보해서도 안 될 문제이지만 백번 양보해서 연도, 나이야 헷갈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위안부가 된 구체적인 경위에 대한 진술이 저렇듯 널을 뛴다는 건 제3자가 봤을 때 기억력만의 문제로 도저히 봐주기가 어렵다. 애초 기억력 문제가 있는 사람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부터가 무슨 진지함이 있는 일이라고 볼 수가 없다.


지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일본군에 의한 조선의 어린 소녀 강제연행의 진실성 여부는 국제사회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핵심 중에 핵심이다. 더구나 이용수는 정대협에 의해서 그간 언론, 정부로부터 일본군 위안부의 ‘대표’와 같은 대우를 받아왔다.


국제사회가 예의상 얼렁뚱땅 넘어가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이용수의 경우 당장 2007년 미국 의회 증언과 2018년 프랑스 의원 증언부터가 다르지 않나. 일본이야 그렇다 치고, 가령 미국 의회, 프랑스 의회에서 뭐 좀 이상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뒤늦게라도 재청문 요구가 들어온다 치자. 국제사회에 공개한 최고 공적 증언의 문제인데,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변명이 과연 먹힐까?


지금 이용수에게 다시 위안부가 된 구체적인 경위, 시점을 물어본다고 한들 국제사회도, 국내외 언론도, 정대협도, 어쩌면 이용수 본인조차 무슨 증언이 나올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처녀 강제연행은 안 그래도 지난 수십 여년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물증이 나오지 않았던 문제다.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친지도 이웃의 ‘제3자 증언’(물론 학계가 널리 인정하는 믿을만한 것)도 단 한건이 나오지 않았던 문제라는 말이다. 


(관련기사 : 영화 ‘귀향’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유일한 증거인 ‘일본군 위안부 대표’의 ‘강제연행 핵심증언’이 이렇게 수없이 흔들렸었다는 것이 해외에도 알려질 경우, 차후 국제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어떤 취급을 받게 될 것인가. 무엇보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국격은 어떻게 될 것인가. 


늦었지만 누가 이 위기상황 경고하고 빨리 출구전략 세우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음기사 :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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