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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칸하나다] 종군위안부 영화 ‘주전장(主戦場)’의 악랄한 수법

영화가 선전하고자 하는 논지에 반대되는 논거를 제시하는 저명한 전문가는 빼버려 ...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편견 저널리즘, 프로파간다 아닌가



※ 본 칼럼은, 일본의 유력 시사잡지 ‘게칸하나다(月刊Hanada)’의 인터넷판인 ‘하나다프러스(Hanadaプラス)’에 2019년 5월 23일자로 게재된 종군위안부 영화 ‘주전장(主戦場)’의 악랄한 수법(従軍慰安婦映画『主戦場』の悪辣な手口) ‘게칸하나다’ 측의 허락을 얻어 완역게재한 것이다. 본 칼럼은 ‘게칸하나다’ 2019년 6월호에도 게재됐으며 영문판 'A Nasty Trick 'The Main Battleground of The Comfort Women Issue'도 별도로 발표됐다.(번역 : 황호민)
 



[저자소개] 이 글의 필자인 야마오카 테슈(山岡鉄秀)는 Australia-Japan Community Network(AJCN) Inc. 대표이며 공익 재단법인 모라로지(モラロジー) 연구소 연구원이다. 1965년 도쿄 출생. 일본 주오(中央) 대학교 졸업 후, 호주 시드니 대학 대학원, 뉴사우스웨일즈 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14년 호주 스트라스필드(ストラスフィールド, Strathfield) 시에서, 중국계와 한국계의 반일 단체가 추진하는 위안부 동상 설치 계획과 조우했었다. 이에 아이가 있는 어머니들과 함께 현지 일본계를 이끌고 AJCN를 결성했다. “지역 사회의 평화와 화합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비일본계 주민의 지지도 얻어, 압도적 열세를 만회했다. 결국 2015년 8월, 스트라스필드 시에서의 “위안부 동상 설치” 저지에 성공했다. 저서에 유엔의 사기와 아사히 신문 등 영어 선전전의 함정(陥穽)을 추궁한 ‘일본, 이제는 사과 하지마!(日本よ、もう謝るな!)’(아스카신샤(飛鳥新社))가 있다.   



미키 데자키라는 청년

2년 전, 미키 데자키(ミキ・デザキ, Miki Dezaki)라는 이름의 일본 조치(上智) 대학 대학원생 청년이, 일본의 보수논단 언론인들에게 접근했다. 

목적은 “위안부 문제에 초점을 맞춘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 취재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석사 수료 프로젝트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데자키 씨의 이메일 속에 이런 글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보면서 구미(欧米)의 리버럴 미디어가 전해준 정보와 달리, 문제가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위안부 강제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며, 또한 위안부의 상황이 일부 활동가와 전문가의 주장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는 한때 관련해 구미 미디어가 전해준 정보를 믿고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지금 현재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중략) 대학원생으로서, 저는 인터뷰를 양해해주시는 분들을 존경심과 공정성을 갖고 소개할 윤리적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학술적인 연구이기도 하므로 일정한 학술적 기준점과 허용점을 충족시켜야 하며, 불공평한 저널리즘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논단 쪽의 대상 인물은 ▲ 켄트 길버트(ケント・ギルバート, 영문 이름은 Kent Gilbert로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인 변호사이자 언론인), ▲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국가기본연구소 이사장 및 언론인), ▲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다쿠쇼쿠(拓殖)대학 ‘일본 문화 연구소’의 객원교수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설립자), ▲ 스기타 미오(杉田水脈, 자민당 국회의원), ▲ 야마모토 유미코(山本優美子, 보수 여성단체 ‘나데시코 액션(なでしこアクション, Nadeshiko Action’ 대표), ▲ 토니 마라노(トニー・マラーノ, 영문 이름은 Tony Marano 로  ‘텍사스 대디(テキサス親父, Texas Daddy)’라는 별칭의,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인 유튜버), ▲ 후지키 슌이치(藤木俊一, ‘텍사스 대디’ 일본 사무국장) 등이다.

이들은 모두 데자키 씨의 말을 믿고 영화를 만드는 일에 협력했다. 중립적이고 공정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하고서.

세월은 흘러서 2019년 3월 27일, 나는 시부야(渋谷)의 한 작은 영화관을 찾았다. 데자키 씨의 영화 시사회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자키 씨의 취재 요청을 수락한 인사들은 다들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데자키 씨의 영화가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위안부 프로파간다 영화’인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과연 무슨 내용이었을까? 이전까지의 평판으로는 위안부 성노예설에 대한 추진파와 양쪽으로부터 공정하게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었다. 

성노예설 추진파에서는, ▲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일본 주오(中央)대학 상학부 교수이자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의 대표로서 일본의 대표적인 위안부 문제 연구자 중 한 사람), ▲ 토쓰카 에쓰로(戶塚悅郞,  일본 류코쿠(龍谷)대학 법학과 교수로 변호사), ▲ 하야시 히로부미(林博史, 일본 간토가쿠인(関東学院)대학 경제학부 교수), ▲ 나카노 코이치(中野晃一, 일본 조오치(上智)대학 국제교양학부 교수로 미키 데자키의 지도교수), ▲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보도했던 아사히신문 기자) 등의 이름이 있었다.

또한 한국 정대협 대표 윤미향 씨, ‘제국의 위안부’를 집필하고 기소된 박유하(朴裕河) 씨 이름까지 명단에 있었다. 

이런 인물이 출연했으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주전장(主戦場, The Main Battleground of The Comfort Women Issue)’이다.

전단지에서 받은 위화감

먼저 영화 전단지를 보고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스릴링!!!! 오늘날 가장 도전적인 다큐멘터리. 당신이 ‘넷우익’이 아니라면 그들을 격분케 만든 일본계 미국인 유튜버인 미키·데자키의 이름을 아마 모를 것이다. 넷우익의 거듭된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비난에 오히려 호기심을 느꼈다는 미키 데자키는 많은 일본인이 ‘이제는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위안부 문제의 소용돌이에 스스로 뛰어들어갔다”


이것이 공정하고 중립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장일까? 이 문장으로 그가 유튜버인 것, 또 자신의 동영상으로 많은 사람을 격분시켰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로써는 데자키 씨가 많은 사람들을 격분시킨 ‘이유’는 알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그가 과연 어떤 동영상을 제작하였기에 집중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것인지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데자키 씨의 동영상은 간단하게 찾을 수 있었다. 둘만 소개한다.

“’자지’가 필요해!”

먼저 ‘Racism in Japan(일본에 인종차별이 있습니까?)’라는 동영상이다. 데자키 씨는 이전에 오키나와의 이토만(糸満) 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이 동영상은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데자키 씨가 일본어로 학생들에게 말을 건다. 

“일본에도 인종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 들어보세요!”


어떤 반에서도 몇 명 밖에 손을 들지 않는다. 데자키 씨는 이에 불만을 갖고서 카메라를 향해 영어로 말했다.

“나는 미국에 심한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인종 차별이 존재합니다. 일본에는 에도 시대에 부라쿠민(部落民)이라는 최하층의 백성이 존재했습니다만, 지금도 부라쿠 출신자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일본어로는 ‘바까총 카메라(バカチョンカメラ, ‘바보 조선인 카메라’라는 의미)’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인을 경멸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같은 일본인인데도 오키나와 사람들도 차별을 받았고 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총알받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도 본토에서는 방을 빌릴 수가 없습니다.”


또다른 동영상의 제목은 ‘Shit Japanese Girls Say’. 일본어판 제목은 ‘일본 여성이 흔히 말하는 것(日本の女の子がよく言うこと)’이긴 한데, 어떻든 원제를 직역하면 ‘일본 여성의 똥(糞, Shit)같은 말’이다. 



놀랍게도 이 동영상에는 수염을 기르고 여장(女装)을 한 데자키 씨가 등장한다. 그는 가발을 쓰고 귀여운 소녀인 척하는 오늘날 일본인 여성이 할 듯한 말을 하며 구불구불 포즈를 취한다.

"바나나 다이어트로 살이 5킬로 빠졌어!"
"있잖아, 누구에게 이메일하는거야?"
"이건 바겐세일에서 샀다"
"짜증나!"
"'완전(超)', 아니냐?"
"와, B형?"
"최근에는 좋은 만남이 없네"
"그만, 부끄러워!" 
"이렇게 (가슴을) 주물러 보면 커진다고!"
"한국으로 가자! 최근 한국어 공부하고 있어요! ‘카무사합니다-!’(한국어)"


이런 말이 끝없이 계속된다. 어떤 결말이 될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끝이 나고, The End 문자. 그 다음에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땋은 머리를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바다를 향해 외친다.

“아, ‘자지(ちんちん, 남자 성기)’가 필요해!”


그는 이 동영상을 통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제목에 Shit 이 들어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기본적으로는 일본인 여성을 조롱하고 있다. 이 영상은 원래 외국인 전용으로 발신했으며 무려 68만 번이나 재생되었다. 

이런 사람이 제작한 ‘주전장’은 그렇다면 어떤 영화인가?

“헬로, 폭스!(Hello, Forks!)(안녕 얘들아!)”


이 영화는 ‘텍사스 대디’ 토니 마라노 씨와, ‘텍사스 대디’ 사무국 후지키 슌이치 씨, ‘반박 프로젝트(論破プロジェクト, 편집자주 : 위안부 문제 등으로 잘못 알려진 일본의 역사를 반박하고서 올바른 일본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일본의 시민단체)’ 주최 측의 후지이 미쓰히코 씨 세 사람이 위안부 동상이 있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시의 공원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는 ‘텍사스 대디’의 동영상을 그냥 그대로 재생하고 있다. 데자키 씨의 나레이션이 들어가는데 그가 처음에 ‘텍사스 대디’를 다룬 이유는 마라노 씨가 자신의 동영상에서 데자키 씨를 등장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왜 니시오카 쓰토무 씨에게 듣지 않는가?

이후부터는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하면서 여러 의견들이 부딪히는 전개다. 이 전개가 바로 데자키 씨가 말하는 “놀라울 정도의 스릴링”인가 싶었지만, 나는 일찌감치 강한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음 두가지 점에서다.

첫째, 중립적인 입장에서 문제 본질을 탐구한다고 하면서 위안부 성노예설 반대파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역사수정주의자(revisionist)’, ‘부정론자(denialist)’라고 단정해버렸다.

이는 스스로 성노예설 추진파의 관점에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구나 상대방 입장에서 볼때, 즉 취재에 협력한 사람들에게 실례다. 이로써 앞서 데자키 씨의 이메일에서 밝힌 입장은 완전한 허위라는 것,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는 것이 드러났다.

둘째, 출연자에 균형이 없다. 반대파로서 위안부 문제 전문가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니혼(日本)대학 교수로서 일본 학계의 대표적인 위안부 문제 전문가) 씨와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레이타쿠(麗澤)대학 객원교수로서 하타 이쿠히토와 더불어 역시 일본 학계의 대표적인 위안부 문제 전문가) 씨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타 씨의 이름은 일단 언급은 되고 있는 만큼, 데자키 씨가 그를 인식하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니시오카 씨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다.




이 영화는 (일반인이 봤을때는) ‘전문가가 아닌 성노예설 반대파’의 의견에 대해서 ‘전문가(학자)인 성노예설 추진파’가 반박을 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성노예설 추진파 대표 학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씨, 하야시 히로시 씨를 등장시키면서 당연히 ‘성노예설 반대파 대표 학자’인 하타 씨, 니시오카 씨도 출연시켜야 하는 것이고 이런 전문가들 간의 토론이 아니고서는 위안부 문제는 공정하게 논의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4월 4일에 열린 ‘외국인 특파원 협회(外国人特派員協会)’에서의 시사회와 기자회견 자리에서 데자키 씨에게도 관련 직접 질문이 나왔었고 데자키 씨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하타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연락을 하니 부인이 밤에 전화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인 습관으로는 밤에 전화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에 전화했습니다. 그렇지만 혼이 나고 취재를 거절당했습니다. 니시오카 선생님에 관해서는, 인터넷 담론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일단 60점쯤 감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 연구자 사이의 논쟁이 없다면 마치 공수(攻守) 교대가 없는 야구를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노예설 반대파는 대부분 니시오카 씨의 저작에서 배우고 있는 만큼 성노예설 반대파의 담론이 그의 의견과 비슷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25년 이상 연구해온 전문가 본인(니시오카 쓰토무)의 지식은 다른 사람들과는 깊이가 전혀 다르다.

구성에서 큰 실수

영화는 켄트 길버트 씨의 발언 부분은 거의 노컷으로 채용했다. 켄트 길버트 씨가 성노예설 반대파 논진(論陣)의 중심이 되어있다. 하지만, 사쿠라이 요시코 씨는 조금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유일한 학자인 후지오카 노부카쓰 씨도 위안부 문제 자체에 관해서는 그리 많이 얘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노예설 추진파에는 요시미 요시아키(역사학자), 하야시 히로시(역사학자) 외에도 나카노 코이치(정치학자), 아베 코키(阿部浩己, 국제법학자), 고바야시 세쓰(小林節, 헌법학자) 등을 등장시켰고, 한국에서도 이나영(사회학자), 김창록(법학자) 등 많은 학자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처럼 위안부 성노예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실증주의 학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영화 구성상 가장 기본적인 곳에서 큰 실수가 있는 것이다.

[위안부 20만명설]

이 숫자에 대해서 길버트 씨와 후지키 씨는 “그렇게 많은 위안부가 하루에 수십 번씩 성행위를 강요당했다면, 일본 군인은 매일 6번이나 섹스를 해야 한다는 계산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자 데자키 씨는 “이런 계산은 일단 제쳐 두고, 20만명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산출된 것인가?”라고 요시미 씨에게 질문한다. 요시미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일본의 육군, 해군 군인 수는 최대 350만명쯤이었습니다. 일단 최전선에는 위안소가 없었다고 보고, (최전선의 50만명은 빼서) 어느 시점에 300만명쯤의 일본군에 대한 위안소가 있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일본군에는 100명에 한 명 정도로 위안소를 설치하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준이라면 일단 위안부가 3만명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만일 절반이 바뀌었다고 하면 4만 5000명으로, 전체가 한 번 바뀌었다면 6만명이라는 숫자가 나오기 때문에, 아무튼 위안부는 최소 5만명 가량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만명의 계산 근거를 질문했던 것인데 이는 전혀 회답이 아니다.

정대협 윤미향 씨는 “우리는 연구자에 의한 숫자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일본 소재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女たちの戦争と平和資料館)’의 와타나베 미나(渡辺美奈) 씨는,

“큰 인권단체 등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할 경우에 상담을 요청받게 되면, 20만명이라는 숫자는 사용하지 말고 좀 더 대략적인 숫자를 사용할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40만명이라고 들으면 40만명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일부러 의식해서 무엇이 가장 좋을까를 생각하지 않고서 그저 많은 쪽을 사용하는 경우도 아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이 논의에서 20만명이라는 숫자는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시미 씨가 하는 설명을 들으면 늘 갖게 되는 생각이지만 “가정(假定)”이 너무 많다.

또한 “최소 5만명쯤”이라는 것은 수요 측면의 이야기이다. 만일 5만명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고 해도 전쟁 중에 5만명을 공급했다는 보증은 하나도 없다.



학습 부족 데자키 씨

이 숫자를 둘러싼 논의의 결론은 결국 “20만명설은 근거가 없다”가 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데자키 씨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낸다.

즉, 지금까지의 논의로 알 수 있는 것은 위안부의 실제 숫자가,

 · 분명히 양 진영에서 정치적 의도로 이용되어 왔었다.
 · 수정주의자들은 이 숫자의 계산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 위안부에 대한 실제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숫자 언급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숫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성노예설 추진파이다. 또한 “수정주의자들은 이 숫자의 계산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라는 말은 전혀 의미가 불분명하다.

요시미 씨의 주장도 포함해서 당연히 다 검증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데자키 씨가 해당 인터뷰 외에는 관련해 전혀 학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만명이라는 숫자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던 계기는 아사히(朝日)신문의 1992년 1월 11일자 조간이다. 당시에 아사히신문은 용어해설로 다음과 같이 썼다.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1930년대에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한 강간 사건이 다량 발생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반일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병을 방지하기 위해서 위안소를 마련했다. 전직 군인, 군의관 등의 증언에 따르면 개설 초기 위안부의 약 80%는 조선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면서 주로 조선인 여성을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했다. 그 수는 8만 명, 아니면 20만 명이라고도 한다”


즉, (20만명이라는 숫자는, 위의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했다”는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위안부(慰安婦)’와, 근로봉사의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전혀 다른 대상을 혼동해서 나온 숫자인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센다 카코(千田夏光)라는 작가에 이른다. (‘위안부’는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사실 ‘종군위안부’라는 별도 직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서를 통해서 센다는 지인으로부터 입수한 서울의 한 신문 스크랩 속에 “1943년부터 45년까지 정신대의 이름으로, 젊은 조선인 여성 약 20만명이 동원되었고 그중 5만명 내지 7만명이 위안부가 되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연구자가 그 기사를 찾아내어 살펴본 결과, 실제로는 “정신대로 동원된 여성은 한국과 일본 합쳐서 20만 명이며, 그중 5만~7만명이 조선인 여성이었다”는 기술이었다. 즉, 위안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었다.

아사히신문은 2014년 8월에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했던 것을 인정하고 그 기사를 철회했다.





이와 같이 아무 근거도 없는 숫자가 위안부 문제를 정치, 외교 문제화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이용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이런 문제도 니시오카 씨와 같은 연구자가 영화에 등장했다면 쉽게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 ‘아사히 신문 ‘일본인에 대한 대죄’(朝日新聞「日本人への大罪」)’,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고큐슈판(悟空出版)).

[강제 연행]

2007년도의 아베 수상 국회 답변 장면이 나온다.

“말하자면, 관헌이 집에 침입해서 노예사냥처럼 사람을 끌고 데려간다, 그런 강제성은 없었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노예(性奴隷)’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창작하여 유엔에 도입한 토쓰카 에쓰로 씨가 이렇게 반박한다.

“’강제’에 대해서 아베 씨는 마치 밧줄로 묶어서 데려갔다는 개념으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제’라는 것은 바로 법률에서 말하는 ‘자유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아니었다, 라는 것은 속았던 경우도 포함하여서, 자신의 진정한 의지가 아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지요, 일단 한국 여성 대부분은 속은 것이거든요.”


여기서 갑자기 ‘강제연행’이라는 개념이 “속았다”는 개념으로 변환된다.

길버트 씨, 후지키 씨는 “여성의 채용은 주로 조선인 업자가 실시한 것으로 속인 경우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스기타 미오 씨는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일본정부와 일본군(총독부 또는 경찰)은 악덕업체를 단속했다, 그런 신문 기사도 많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러자 하야시 히로시 씨가 이렇게 반박한다.

“조선반도의 신문기사들은 위안부와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 경찰이 기존 악덕업자가 속여서 매춘 목적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을 단속하기는 했지만, 군대의 의뢰라면 묵인하고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악덕업자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 과연 군대의 의뢰라는 근거에 따라서 단속하거나 아니면 묵인하거나 할 수 있었을까. 이전에 이러한 주장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결국 근거는 없었다. 그런 식이라면 치안을 유지할 수가 없었겠지만, 어쨌든 상세한 증거를 하야시 씨가 영화에서 제시해주면 좋았을텐데…

결국, 이제까지의 패턴으로서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스마랑 위안소 사건(スマラン慰安所 事件)’으로 또 다시 이야기가 이어진다. ‘스마랑 위안소 사건’은 네덜란드 여성이 강제로 위안부가 됐던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고서 조사를 했던 일본군 장교에 의해서 해당 위안소는 바로 폐쇄되었고 여성도 구출되었다. 이 점을 길버트 씨가 지적하자 요시미 씨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렇게 된 것은 피해자가 백인 여성이어서 연합국 측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여성을 해방했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백인 여성에 대한 대응과 아시아인 여성에 대한 대응이 달랐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주장도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지만 데자키 씨는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인도네시아 사건은 확실한 증거입니다. 조선인 여성이 강제연행됐다는 증거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국제적인 비판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백인 여성을 연행했던 것을 보면 아시아인 여성에 대해서도 그랬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도 또한 상상이다. 추측과 상상뿐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논의를 설정한 것인가?

스마랑 위안소 사건은 당시에도 물론 형사범죄다. 이러한 범죄 행위가 조선반도와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추측이 ‘일본군이 조선반도에서 수많은 일반 조선인 여성들을 강제연행했다’는 추측으로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그래서 토쓰카 씨도 “속인 것까지도 강제다”라는 논의를 하는 것이다. 데자키 씨는 완전히 순환 논법에 빠져있는 것을 모르는 걸까?

[성노예]

이 논의는 “위안부들은 임금도 지불받았고, 저축이나 송금도 할 수 있었고, 계약이 끝나면 귀국도 할 수 있었고, 쇼핑도 했었고, 일본인과 함께 스포츠 관전이나 야유회에도 갔었다고 하니까, 성노예라고 할 수 없다”는 성노예설 반대파 주장에 대해서, 성노예설 추진파가 “현재 국제법에 비추어 보면 그래도 노예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반박해온 것이 이제까지 패턴이다.

하지만 일단 요시미 씨의 반론에 관심이 갔다. 위안부에게 레크리에이션 기회가 있었다는 지적에 대해 요시미 씨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런 기회라도 없다면 아마 살 수가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흑인 노예도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모두 모여 음악회를 열거나 댄스를 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냥도 한다거나 말이지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노예주도 그런 것을 인정했습니다.


과연 노예주가 스스로 노예를 인솔하여 이벤트에 나가거나, 노예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었는지? 애인이었던 일본 군인을 그리워했던 위안부도 있었다. 요시미 씨가 그렇게 무리한 유추까지 해서 일본인을 무조건 악마화하려는 동기를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국제법 학자인 아베 코키(阿部浩己) 씨가 등장하여 국제법 관점에서 위안부 성노예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예제도라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위안부가 고액의 임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외출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적인 지배 하에서 허가를 얻어서 가능했던 것이므로 어떻든 노예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노예의 정의를 확장한다면 일반 직장인도 충분히 노예가 되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축(社畜, 회사의 노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농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노예설 추진파가 그런 국제법의 정의를 제기하겠다면 점잖게 다음과 같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말에서 바로 상상할 수 있는 통념으로서의 노예는 아니다.

・국제법상 노예의 정의를 적용하겠다면 일본군 위안부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의 대부분은 노예로 정의할 수 있다.

이처럼 데자키 씨의 ‘주전장’은 이제까지의 논의를 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지식이 깊지 않은데다가 처음부터 편견을 갖고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문가들을 불러서 논의를 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다.



후반부에서 단숨에 탈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에 새로이 등장한, 성노예설 추진파에서 가장 이색적인 인물은 케네디 히사에(ケネディ日砂恵, Kennedy Hisae) 씨가 아닐까.

케네디 히사에 씨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영화 나레이션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몇 년 전에는 일부 보수파가 찬양하던 인물이었는데 홀연히 사라졌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그녀가 갑자기 등장하여 과거의 동료와 지원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에 놀랐다. 그녀는 하타 이쿠히코 씨의 ‘난징 학살은 규모가 작았지만, 그래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라는 설을 접하고서 각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미국의 언론인들과 함께 일본에서 퍼뜨린 ‘IWG 보고서‘(정식 명칭은 ‘나치 전쟁 범죄와 일본 제국 정부의 기록의 각상정 작업반(ナチス戦争犯罪と日本帝国政府の記録の各省庁作業班, Nazi War Crimes &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Records Interagency Working Group)’에 의한 보고서다. 클린턴 정권 하에서 시작됐고, 8년의 기간과 30억엔 가량의 자금으로 과거 기밀 문서들을 검증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경우에는 (전쟁 범죄였는지와 관련하여) 특별히 색다른 발견은 없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일본 보수파가 생각하는 그런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IWG의 목적은 나치 전쟁 범죄를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한 정보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은, 주방 서랍에서는 양말을 찾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의 일이었습니다.”


종지(宗旨, 주장이 되는 요지)를 바꾸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사실까지 구부리면 안 된다.

IWG가 원래 나치 범죄 조사를 대상으로 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나중에는 재미 중국계 반일 단체인 ‘세계항일연합회(世界抗日連合会)'의 강한 요구에 따라서 일본군 전쟁 범죄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일본군에 관해서도 나치와 마찬가지로 조사한 것이다.

그 결과로서 재확인된 것은 당시 미군은 일본군 위안부를 일반적인 매춘부라고 봤기 때문에 범죄 행위로서 추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데자키 씨는 영화 속에서 빈번히 글렌데일과 샌프란시스코의 공청회 영상을 다루었으며, 또 어떻게 일본 측의 반대 운동이 결국 실패로 끝났는지, 이런 문제를 강조한다.

그런 속에서 위안부 동상이 세워지고 일본계 자녀에 대한 왕따가 시작됐다는 현지 일본계의 호소를 부정해버리는 반일 단체 측의 주장은 또 일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일본계 자녀 왕따 문제 담론은 스기타 미오 씨가 일본 국회에서 제기한 것으로서, 그러나 스기타 씨 자신은 피해자 일본계 엄마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아니라고 지적을 하기도 한다.

재미 일본계 엄마들의 호소를 사실무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반일 단체의 멘탈리티와 똑같다. 내가 북미를 돌아다니며 조사하여 얻은 결론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되어 일본계 자녀들에 대한) 왕따와 괴롭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나는 자녀를 둔 여러 명의 일본계 엄마들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 생활이 길다고 해도 일본인 엄마들은 피해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고 증거를 남긴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런 것을 지도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건 그 여성들은 공동으로 아베 총리에게 탄원서를 써 보냈다. 일반적인 엄마들이 상당한 우려가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데자키 씨도 인정하듯이 이 영화는 2시간으로 길다. 내가 데자키 씨에게 조언할 입장에 있다면 후반부는 필요없다고 강력히 권한다.

데자키 씨는 후반부에서 순식간에 탈선한다. 그것은 전단지에 적혀있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논쟁 뒤에 숨겨진 ’어떤 속임수’를 공개한다”는 부분이다. 그 속임수라는 부분이야말로 데자키 씨의 본령(本領)이 발휘되는 부분이었는데 불행히도 영화를 망쳐 버렸다.

가세 히데아키 씨가 흑막이라고!?

[일본 회의]

긴 영화의 후반부, 피곤해질 무렵, 갑자기 ‘일본회의(日本会議)’라는 문자가 화면에 나와서 깜짝 놀랐다. 위안부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게이오(慶應)대학 명예교수이며 헌법학자인 고바야시 세쓰 씨가 등장해 해설을 시작했다.

고바야시 씨에 따르면 일본회의는 아베 총리와 정치권에 강한 영향력이 있으며 “(이 단체는) 메이지 헌법을 부활시켜, 인권이 없던 시대 일본으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회의의 캠페인을 광고탑으로서 이끌고 있는 것이 바로 사쿠라이 요시코 씨다“라고 말한다. 

또한 계속해서 일본회의는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포함한 신도(神道) 조직에 의해 유지되며, 따라서 사쿠라이 씨는 아마도 무료로 신사 경내(境内)에도 사무실을 두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끝으로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일본 회의의 전쟁 회귀 사상은 무섭다. 그러나, 나는 이를 반대하다가 살해당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


매우 놀랐으며, 어이가 없었다. 우선, 일본회의이든 사쿠라이 요시코 씨든 메이지 헌법의 부활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그리고, 다음 소식은 고바야시 씨에겐 좋은 소식이겠지만, 나는 보수파에서 고바야시 씨의 이름을 들어본 경우가 거의 없다. 고바야시 씨의 목숨을 노리는 의미가 전혀 없으며 그런 동기를 가진 사람은 절대 없으니 안심해주세요, 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일본회의에 확인했지만 데자키 씨의 취재 요청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한다. 여기서도 데자키 씨는 또한 기본적인 검증 작업을 게을리하고있다. 대신, 영화는 외교평론가로서 일본회의 도쿄본부 회장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 씨가 등장하여 많은 보수 단체를 흑막(黒幕)과 같은 존재로 소개한다.

분명히 가세 씨가 한때 활발한 집필 평론 활동을 하고 정・재계와의 연결에서 보수 단체 관리인으로서의 명의를 내세운 사실은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가세 씨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 선도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회의 자체를 대표하는 입장도 아니다. 그래서 데자키 씨의 질문에 대해서도 거의 회답이 없는 것이다. 가세 씨 흑막설은 완전히 허구다.

데자키 씨가 찾아냈다고 하는 속임수라는 것은 이렇다.

“일본회의와 아베 정권은 일본의 재무장을 실현코저 하며, 또 일본은 실수가 없었다는 국사관(國史観)에 따라 영광스러운 전쟁 이전으로 회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역사상 치부인 위안부 문제는 불편한 것이므로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안부들을 침묵시키려는 것이고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입니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확인했어야 하는데, 어긋나던 끝에, 결국 아무런 검증도 없이 “터무니 없는 음모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데자키 씨는 일본 국민에게 경고한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재무장한다면, 나의 조국인 미국의 전쟁에 휘말리게 될겁니다!“라고.

데자키 씨는 모를 수 있겠지만 지금 일본도 자위대가 있고 재군비는 사실 벌써 이전에 실현됐다. 그러나 현행 헌법과의 부정합으로 인해 방어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아베 정권은 헌법 일부 개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은, 일본과 직접 상관이 없는 전쟁에는 휘말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제한을 두고 있다.

데자키 씨는 기자회견에서 “왜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은폐하려는지, 거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치우쳐 있다.

그래도 나는 데자키 씨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주전장‘을 보고서 위안부 성노예설 추진파가 얼마나 논점을 계속 바꿔가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방해하고 영원히 위안부 문제를 계속 제기하려 드는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 동기 자체가 편향

무엇이 위안부 문제를 큰 국제 문제로까지 발전시켰을까? 여기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일본 정부에 대한 ‘당초의 규탄(当初の糾弾, Original Accusation)’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사히신문과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라는 사기꾼이 퍼뜨린 이야기는 이렇다.

조선반도에서 일본군대가 민가에서 젊은 여성을 납치일본군인을 위한 성노예로 만들었으며여자 근로정신대로 징용한 후에 위안부가 되었다그 피해자는 20만 명에 이른다.”


설마 큰 신문사가 완전한 허위 보도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일본인은 (미국인인 켄트 길버트 씨도 포함해) 한동안 그것을 믿었다. 하지만 이후 그것이 황당한 허구임을 알게 된 일본 국민은 격분했다. 

아사히신문은 데자키 씨가 영화에서 말하듯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은 것이 아니다. 여론의 힘에 맞서지 못하고 허위를 인정하고 기사를 철회하면서 사장도 사임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는 여전히 ‘규탄‘이 앞서고 있으며, 위안부 동상은 계속 세워져서 (아사히신문과 요시다 세이지가 퍼뜨린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비문(碑文)에도 기록되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박약하다는 점을 알리고 나면, 당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증거인멸 목적으로 일본군에 의해서 살해됐다는 새로운 허위가 추가된다.

분명히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위안부를 동정했던 일본인도 반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주전장‘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요시미 씨를 필두로 하는 성노예설 추진파는 분명히 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극단적으로 과장된 규탄 내용은 실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요시미 씨는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 반일 활동가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기 보다는, 기술적(technically)으로는 당시의 위안부가 ‘강제연행’되었고 ‘성노예’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식의, 당초의 규탄 내용과 동떨어진 논의를 계속하면서 여전히 일본만을 악마화하고 결과적으로 반일 단체 활동을 승인하고 있다. 마치 이 문제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 정부와 반일 활동가들, 그리고 데자키 씨 같은 성노예설 추진파들이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식의 단순하고 일방적인 구조에 집착하는 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토마스 워드(Thomas J. Ward)와 윌리엄 래이(William D. Lay)라는 미국 코네티컷 주에 있는 브리지포트 대학의 학자 두 명이, 미국 공원에 세워지고 있는 위안부 동상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동상의 정치학 : 미국에서의 2차 세계대전 위안부 기념비(Park Statue Politics : World War II Comfort Women Memorials in the United States)’ )

이 논문의 결론은 “위안부 동상은 한국 측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기 때문에 불충분하다. 실제로는 조선인이 여성을 모으는 것을 장사로 삼고 위안부 제도 속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이들은 전쟁 후에도 독자적인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또한 미군도 전쟁 후에 위안부 제도를 이용했다. 미국에 세워질 위안부 동상은 정치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것도, 화해를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데자키 씨의 ‘주전장‘도 위안부 동상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인 것은 명백하다. 문제 해결을 멀리하는 균형을 잃은 저널리즘, 아니,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끝으로, 매우 건방진 얘기지만 보수 언론인들에게도 조언을 하고 싶다. 앞으로 취재 요청이 있으면 비록 대학원생이라도 반드시 배경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의뢰인이 유튜버로 자신의 동영상에 여장을 하고 등장해, “자지가 필요해!”라고 외치고 있으면 그 요청은 거절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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