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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제1 다이호마루 사건(第一大邦丸事件)’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15)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제1 다이호마루 사건(第一大邦丸事件)’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2월 22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이승만 라인(李承晩ライン)’(한국어번역) 항목, 그리고 특히  ‘다케시마(竹島), 시마네 현(島根県)’(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제1 다이호마루 사건(第一大邦丸事件, ‘다이이치 다이호마루 사건’ 또는 ‘제1 대방환호 사건’이라고도 불림)은, 한국 해군에 의한 일본 민간인 학살 및 학대 사건의 하나다.

1953년 2월 4일에 공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어선 ‘제1 다이호마루(第一大邦丸, 57톤)’ 및 ‘제2 다이호마루(第二大邦丸, 57톤)’가, 한국 어선 ‘제1 창운호(第一昌運号)’ 및 ‘제2 창운호(第二昌運号)’(각 약 55톤)을 이용한 한국 해군에 의해서 총격·나포되었고, 또 당시 제1 다이호마루의 어로장(漁撈長)이였던 세토 시게지로(瀬戸重次郎, 당시 34세)가 피탄(被弾)으로 사망한 사건을 일컫는다.

[* 제주도 앞바다 20마일의 농림어업구(農林漁区) 제284업구라고 여겨지는 해역이다. 한국 측의 주장은 제주도 앞바다 9마일이라고 한다.]
 


목차


1 배경


2 상황·경위

   2.1 나포 될 때까지

   2.2 조사가 시작될 때까지

   2.3 귀국까지


3 문제점

 


1 배경(背景)

1952년 1월 18일, 한국은 대일본제국 합병 이전의 구 대한제국의 판도에 따라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고서, 대한민국령(다케시마를 포함) 주변의, 쓰시마까지 포함한 해역에 대해서 한국의 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는 일한기본조약도 체결되지 않은 무국교상태였다.


2 상황 · 경위(状況・経緯)

2.1 나포 될 때까지(拿捕されるまで)

1953년 1월 22일에 ‘제1 다이호마루’와 ‘제2 다이호마루’는 후쿠오카를 출항하였으며 2월 4일에는 284농림 어업 구역에서 조업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7시경에 제1 다이호마루 남서쪽으로 한국 어선인 제1 창운호 및 제2 창운호가 북상하여 접근해왔다. 그리고 일본어로 “물고기가 잡힙니까?”라고 말을 걸어왔다. 이때는 한국 선박은 그대로 지나가고 일단 부근에서 정지한 후 조업(을 위장하여 일본 선박을 감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제1 다이호마루가 양망(揚網, 그물을 끌어올리는 일) 작업에 들어가자 바로 그 때  선미에서 3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던 한국 선박이 자동소총으로 제1 다이호마루에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 선박 2척은 모두 도망을 시작했지만, 8시 15분에 제2 다이호마루가 먼저 나포되었으며, 도주하던 제1 다이호마루도 총격이 치열해지자 도주를 포기했다. 이때 조타실내에 앉아 있었던 어로장이 뒤통수 왼쪽에서 총격을 받아 의식 불명이 된다. 

제1 다이호마루는 8시 30분에 나포되었으며 제1 창운호 선원은 “한림(당시 제주도의 북쪽에 있던 면)으로 가라”고 일본어로 명령했다.

2.2 조사가 시작될 때까지(取調べが始まるまで)

제1 다이호마루는 11시 30분에 제주도의 한림 면에 입항했으며 일본인 선원은 헌병에 의해 경찰에 넘겨졌고 선내의 중요한 사물, 장비 및 어획물이 한국 경찰에 의해 약탈당했다.

당시 일본인 선원 측이 헌병에게 부상자가 있다는 취지를 전했기 때문에, 선원은 한림 면의 ‘고의원(高医院)’이라는 곳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고의원’이란 명목상의 병원일 뿐이었으며, 병실은 물론 설비도 전혀 없었고, 의사는 그냥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어렵다”라고 하면서 어로장의 치료를 거부했다. 일본인 선원들은 경찰에게 군 병원 아니면 다른 곳에 입원시켜줄 것을 의뢰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는 군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일본인 선원들은 헌병대로 가서 병원 입원을 다시 의뢰했지만, 헌병대장은 “맹관총창(盲貫銃創, 탄알이 박힌 채로 아문 상처)이며, 치료가 매우 어렵다”고 말하며 다시 치료를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인 선원들의 거듭된 요청 끝에, 결국 군 병원에로의 입원은 허용되었다. 당시 “(병원으로 옮길) 차가 곧 올겁니다”라는 말만 듣고서 선원들은 일단 그냥 어로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일본인 선원들은 병원까지 이송 중에 어로장이 죽지 않도록 의사에게 링겔 주사를 요구했지만 의사는 링겔이 비싸다고 망설였다. 결국 선원들이 사물들을 팔아 돈을 지불할 약속을 하고서야 링겔을 하나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측은 결국 차를 내주지 않고서 어로장을 방치하였으며, 어로장은 2월 6일 밤 11시에 사망했다.

다음날 어로장의 시신은, 명중탄(命中弾)이 군의 것인지 경찰의 것인지를 판명키 위해 한국 측에 의해 해부되었으며 그 결과 헌병의 총격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선원들은 그날부로 경찰에 화장 준비를 부탁했지만 묵살되었다. 선원들은 남은 사물의 일부를 팔아 장례 세트를 갖추고 부족한 장작은 근처의 소나무 가지 등으로 보완하고 다음날 화장을 했다.

2.3 귀국까지(帰国まで)

2월 9일부터, 선원들은 전원이 경찰서 앞의 방공단(防空団) 대기소에 감금되었다. 대기소는 약 4첩(畳) 넓이로, 거기에 18명이 감금되었다. 식사가 일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원들은 선내 음식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조사에서 한국 측은 나포 지점이 제주도 한림에서 9마일 부근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인 선원 측이 창운호의 나침반 자차(自差) 및 속력(速力)의 모순을 지적했는데, 한국 측이 양자 주장의 중간을 취하려는 제안으로, 13마일 부근을 나포 위치로 날인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조사를 받던 제2 다이호마루의 통신사(通信士)에 따르면, 나포 지점은 한림에서 30마일이다. 

2월 12일에 일행은 제주로 보내졌지만 아무도 어로장의 유골을 안 가져왔기에 유골을 가지러 돌아가기를 요구했지만 경찰서장에게 거부당했다. 이에 일본인 선원들이 이송용 차량에 타는 것을 강경하게 거부하면서 결국 1명을 남겨두고 다음날 유골을 운반하는 것이 받아들여졌으며 나머지 선원은 차로 제주도로 이송되었다.

이날 밤 11시경, 선원들은 제주경찰의 사찰과 제2계에 넘겨졌으며 식사도 없이 그대로 유치장에 감금됐다. 이 유치장도 4첩 정도였으며, 게다가 다른 한국인들과 같은 방이었다. 이 유치장은 좋지는 않았지만, 식사는 있었다.

제주에서의 조사에서 ‘이승만 라인’에 대한 침범과 한국 측의 지적과 관련해 일본 측은 본 라인은 한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으로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클라크 라인(Clark Line, 미 해군이 대북 봉쇄 조치를 수행하게 된 기준선)’ 침범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도 미국 공사(公使) 측에서 작전의 방해가 되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설명했다는 점을 전했다.

이 때 한국은 자국의 영해는 섬과 섬을 연결한 선으로서 계측(計測)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군도(群島) 기선을 기반으로 한 주장이지만, 한국은 군도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으므로 국제법적으로는 무효인 것으로 보인다.

이 후, 경찰은 일본인 선원들에게 영해 침범을 했다는 허위 조서를 한글로 작성토록 하고, 여기에다다가 날인까지 시켜, 일본에 통보했다. 그러나, 해도(海図)를 조사할 때 쓰는 정자정규(丁字定規, T자 모양의 자) 하나와, 담배 및 성냥 따위로 측정하는 식 적당히 작성된 조서에서의 모순이 드러나고, 이 사건은 결국 공해상의 사건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에 일본 사세보(佐世保)의 조선해안봉쇄호위함대(朝鮮沿岸封鎖護衛艦隊) 사령관인 글리치(glitch, グリッチ) 소장은 이승만에 회견을 요구했으며 이승만은 유감을 표명하고 결국 제1 다이호마루의 석방에 응하게 된다.

2월 15일 오전 7시경, 선원들은 외사(外事) 주임으로부터 오늘 귀국시킨다는 취지를 통고받았으며, 중형 지프를 타고 수상서(水上署, 경찰서)까지 이송되었다. 선원들은 그 때 사찰과 과장으로부터 “사망한 사람에게는 매우 미안하다. 지금 한국은 전시 하이므로, 너희들에게 식량을 주고 싶어도 못 준다. 일본 내지에 돌아가서도 한국의 이른바 관헌에 대해서는 욕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인사를 받았다.

이날 오후 1시에 선체를 전달받아 선원들은 이날 제주를 출항하였다. 제1 다이호마루는 미국 해군의 프리깃(Frigate, 호위함)인 ‘에반스빌(Evansville)’의 호위를 받으면서, 2월 17일 오후 5시 반 경에 일본 사세보에 입항하였으며, 2월 21일에 다시 사세보를 출항하여 2월 22일 7시에 후쿠오카로 귀항했다.


3 문제점(問題点)

・민간 선박에 대한 무경고 공격행위

・당초보다 명확한 군사행위 목적을 갖고 있었다. 외무위원회(外務委員会) 연합심사회(連合審査会)에 따르면, 한국 선박 2척에는 승무원 각 12명 외에, 헌병 1명, 특무대원 1명, 정보대원 1명, 경라(警邏, 순찰) 4, 5명이 나눠 타고 있었다.

・나포 후 조사 시의 비인간적인 취급. (음식을 주지 않음, 의료 행위를 하지 않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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