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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해남 어란 이야기, "명령불복, 이순신 파직 당하다"

임지왜란, 세계해전사에 길히 빛나는 명량대첩의 승리뒤에 숨은 '어란'이야기


임진왜란(壬辰倭亂/1592년~1598년)중 소강상태를 보이며 화의교섭의 결렬로 정유년이던 1597년 조선을 재 침범한 전쟁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일본에서는文祿慶長の役, 중국에서는 萬曆之役)이라고 한다.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 장군에게 조정에서는 “곧,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즉시 출격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이는 일본의 계략임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투옥시켰다.

이어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그해 7월 16일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칠천량(漆川梁/지금의 거제시 하청면) 해전에서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가 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명량대첩(鳴梁大捷/전라우수영이 있던, 지금의 해남과 진도 잇는 진도대교 밑 해협)에서 왜선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무후무한 12대 133의 해상전투에서 영웅 이순신 장군의 승리에는 놀랍게도 ‘어란’이라는 한 여인의 첩보전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해남 송지면에 사는 박승룡 옹으로부터 나왔다. 이 같은 주장을 오래 전부터 해온 박 옹은 최근 어란 여인과 임진왜란을 연결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을 정리한 ‘전쟁과 휴머니즘’이란 책을 편찬했다.



박승룡옹은 명량해전 이틀전인 1597년 9월 14일자 ‘난중일기’를 토대로 ‘어란’여인을 추적했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앞바다에 들어왔다,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김중걸이 왜선에 결박을 당하고 있을 때 김해 사람인 어떤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 묶인 것을 풀어주면서 조선해군을 보복하기 위해 모든 전선을 모아 조선해군을 전부 몰살하고 경강으로 올라가겠다고 왜놈들이 말하더라고 해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 피난민들에게 육지로 올라가라고 타이르도록 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박 옹은 “이름 모를 어떤 이는 왜장하고 가까운 바로 ‘어란’일 것이며, 이 첩보가 있고 난 이틀 후 명량해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김해사람이라는 것은 성의 본관만 따서 김해김씨를 이름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자에 실린 이순신에 첩보한 배 안의 여인에 대한 것으로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도 않고 먼저 장계한 것입니다, 그 때에 왜선 안에서 여인을 얻어 사실을 탐지하고는 곧장 장계했다고 합니다”라는 부분에서 이미 이순신 장군은 여인 등을 포함한 첩보전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고 박 옹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박 옹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서도 어란 여인을 찾아냈다.
‘살아서 끌려온 여자를 심문하니, 조선 여자 세 명이 적장 구루시마의 몸시중을 들었는데 한 명은 해남에서 출항할 때 물에 뛰어 죽었다고 했다’라는 부분에서 바다에 뛰어든 여인을 박 옹은 ‘어란’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박 옹은 또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다.

자신의 선배인 해남 화산 출신의 김학래(당 85세/무등구락부 부회장·일본역사 연구가)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 여인이 달 밝은 밤 명량해협이 보이는 곳에서 투신하고, 그시체를 한 어부가 묻어주고, 훗날 마을에서 그넋을 기리기 위해 석등롱을 세워 불을 켜오고 있다”는 내용을 해남회의 창설자이며 2대회장인 다나구지 노보루씨와 일제강점기 어란진 주재 경찰관 출신 기무라 새이지의 차남 기무라 오시무에게서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 옹이 어란 여인을 찾아낸 책 사와무라 하지만다로의 유고집을 펴낸 장녀 시마구라 이구고씨, 현 해남회 회장인 새기 준이지씨로부터 구전 되어 온 어란 여인의 이야기에 대해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주민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박 옹은 이 책에 기록했다.
김학채씨의 말에 의하면 “어란 마을에 사는 70세 이상 된 사람이면 ‘석등롱’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란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의 신주를 일본 사람들이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사람들이 한사코 반대하여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서동씨와 최사홍씨에 따르면, “그 장소는 옛날 한 여인의 시체가 밀려와 그곳에 묻고 넋을 기리기위해 헌등대까지 설치하여 우리 젊었을 때 까지도 그 석등롱에 불을 켰다는 말을 작고하신 이평열씨로부터 들었다”는 증언을 곁들였다.

또, 주민 박문규씨는 “1952년 어란진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지낼 때 마을 노인들로부터 옛날 유명한 기생이 몸을 던잔 ‘여낭터’라는 곳이 있고 또 그녀를 묻어놓은 장소가 있다고 해서 현장을 가 본적이 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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