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폴리틱스워치 (정치/사회)


배너

홍보특보 깜짝 발탁, 김경재 전 의원은 누구?

민주당 정통 출신으로, 이해찬, 박지원도 두려워하는 인물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특보 등이 임명되었다. 그간 언론의 예상과 달리 홍보특보로 김경재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추가로 임명되었다. 김경재 전 의원은 구 민주당 출신으로서 홍보 이외의 야당과의 정무적 관계를 푸는데도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재 특보는 80년대 이래 10대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김형욱 회고록’의 저자로서 7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대선 도전 당시 캠프에 합류한 뒤, 미국으로 망명 16년 간 해외 민주화운동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87년 6.29 선언 직후 귀국,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대선 도전을 도왔으나, 양김 단일화 당시 동교동에서 유일하게 김영삼 후보에 양보할 것을 주장하여, 당시 김옥두 전 의원과 멱살잡이를 하는 등 사실 상 동교동 가신들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 때문에 88년 총선과 92년 총선에서 각각 강남, 종로라는 어려운 지역구에 출마, 낙선한 뒤, 96년 총선과 2000년 총선에서 순천에서 재선 의원을 지냈다.

김경재 전 의원은 정치권에서는 홍보 전문가로 92년 대선, 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 모두 홍보본부장을 맡으며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배출해낸 1등 공신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파트너인 기획본부장은 현 야권의 친노계 수장인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로서, 최근 20년 간 야권의 선거는 김경재, 이해찬 콤비가 만들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안하무인 수준의 대정부 질의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이해찬 의원이 유일하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인물도 김경재 특보이다.

2002년 대선 승리 일등 공신으로 승승장구하던 김경재 특보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시민 전 장관 등이 주도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부터 예상치 않은 시련을 겪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면서도 조순형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아,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탄핵을 주도했다. 특히 김경재 특보는 탄핵을 위해 상임위를 법사위로 옮기는데, 당시 탄핵의 총 책임자인 법사위원장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이번 인사에서도, 대통령 보좌를 위해 김기춘 실장이 직접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재 특보는 탄핵 이전부터 점차 세가 기우는 민주당을 재건하기 위해 재선 지역구 순천을 양보하고 서울 강북을에 출마를 선언한다. 당시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대구 지역에 출마를 선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 때 함께 서울 출마를 선언하기로 되어있던 민주당의 호남중진들이 하나둘씩 다시 호남으로 내려가며 혼자 서울 강북에서 고투했으나 탄핵 역풍을 이기지 못하고 낙선한다.

김경재 전 의원 다른 탄핵 주역들과 달리 복귀가 늦은 이유는 그의 중도 노선 탓으로 분석된다. 일단 그는 추미애, 김영환 의원과 달리 탄핵에 사과하지 않았다. 김경재 전 의원은 공식적으로나 사석에서 모두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총선에 개입한 대통령에 대한 정당한 민주적 절차였다”는 신념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2008년 총선에서 박재승, 박경철 등 친노인사가 주도한 공천심사위원에서 일찌감치 탈락하기도 했다.

탄핵의 결정적인 이유인 민주당 분당 사건은 유시민 전 장관 등이 구태연한 민주당 호남 기득권 세력 타파를 위해 기획되었으나, 실제로 분당 이후 열린우리당, 그리고 지금의 민주당은 낡은386세대와 친노시민단체의 개입으로 급격히 좌클릭하기 시작했다. 김경재 전 의원은 이에 대해 “내가 만약 미국에서 16년 간 살지 않았다면, 지금쯤 광화문 광장에서 시위나 하고 있었을 것”이라 회고하듯, 미국 생활 탓에 김경재 전 의원은 사고방식이나 정치적 입장이 기존의 민주화세력과는 다른 노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00년, 방북 뒤 김정일에 대한 부정적 견해 전해 DJ정권에서 용퇴한 김경재

김경재 특보는 미국의 경제력을 십분 이용할 수 있는 한미FTA 적극 찬성론자이다. 반면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이라크전 파병은 반대했다. 김 전 의원은 정치인의 존재 이유는 힘없는 서민의 편에 서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식의 무상복지 시리즈에는 반대한다. 김 전 의원은 “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김경재 특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동교동 주류와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은 북한에 대한 입장이었다. 김 전 의원은 2000년 초 김 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현역 의원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으나, 귀국 후 보고에서 “아무리 좋은 이념이나 체제라 하더라도 국민을 굶주리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신중히 접근하라”고 조언한 뒤, 사실 상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연은 끊기게 되었다. 김경재 전 의원이 물러나자 이를 수습한 인물이 바로 박지원 현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이다. 김경재 전 의원이 용퇴한 뒤, 박지원 원내대표가 주도하여 대북송금을 단행, 현재의 왜곡된 남북관계의 첫단추가 채워진 것이다.

박지원 대표의 미국에서의 사업, 가족사, 정치행적 등등 속속 꿰고 있어

현재 이해찬과 함께 야권의 투톱을 이루는 박지원 원내대표는 김경재 전 의원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미국 맨하튼에서 가발장수를 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에 줄을 대고 있던 박 원내대표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소개한 이가 바로 김경재 전 의원이다. 김대중 정권 시절부터 구축한 방대한 정보 네트워크로 정부와 여당을 유린하는 박 원내대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도 김경재 전 의원이다. 김경재 전 의원은 박 원내대표의 미국에서의 사업, 가족사, 정치 행적,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김경재 특보는 과거 “정치공작 수준의 박지원 원내대표의 입을 막지 않으면 민주당의 총선과 대선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런 김경재 특보가 정통보수세력과도 연을 맺게 된 것은 2011년 순천재보선 때였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주도하여 순천 후보를 현 통합진보당 김선동 의원에게 넘겨주자, 김경재 전 최고위원은 무소속 출마 “내 고향 순천에서 종북을 막겠다”며 출전했다.

김경재 전 위원은 무려 다섯 차례의 TV토론에서 김선동 의원에게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다그쳤으나 김선동 의원은 이에 대해 동문서답으로 일관하며 빠져나갔다. 오히려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 등이 김경재 전 위원을 색깔론자라 몰아붙여 결국 순천은 종북세력의 핵심인 김선동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2011년 순천 재보선 때 종북 김선동과 싸우면서, 정통보수세력과도 인연 맺어

이 과정에서 당시 정통보수세력인 지만원 박사, 법철 스님, 서경석 목사, 정베드로 목사, 최인식 시민협 집행위원장,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와 국민행동 등의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김경재 전 최고위원을 지지하고 선거를 돕게 되었다. 특히 당시 호남에서 북한인권 사진전을 열던 정베드로 목사 등은 순천에 상주하여 선거를 도왔고 김경재 전 위원도 “북한 인권은 침묵해선 안 되고 공론화해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인연 덕에 보수세력 역시 김경재 전 위원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김경재 전 위원 영입설이 나돌자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애국세력에선 호평이 대부분이었다. 애국세력의 대표 논객인 월간조선의 배진영 차장은 페이스북에 “김경재씨는 친노종북이나 DJ패당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라는 의견을 남기기도 했다.

집권 초기부터 소통 부족이라는 비판에 시달려왔던 박근혜 정부로서는 친이와 친박 계파로부터 자유롭고, 야당의 온건 합리세력과의 연이 깊은 정치권 최고 홍보전문가 김경재 특보 영입이 신의 한수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