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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야에야마닛포, “‘위안부 학살’ 근거 없다...중국 사료 직접 확인”

서울시·서울대·강성현교수 거짓말했나...日, 중국서 오히려 ‘학살설’ 부정하는 증거 찾아내

일본의 한 매체가 최근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가 찾아내고 서울시·서울대가 언론에 배포한 ‘위안부 학살' 자료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근거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중국 현지에서 다른 1차 사료까지 직접 확인한 결과 '학살'이라는 표현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위안부들이 생존했음을 시사하는 표현을 발견했다는 것.

일본 오키나와(沖繩)현의 지역신문인 ‘야에야마닛포(八重山日報)’는 지난 14일, “일본군에 학살당했다는 조선인 위안부 30명이 생존하여 국민당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당시의 신문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해당기사 바로가기: ‘위안부 학살’ 근거 없음. 오쿠(奥)씨, 중국에서 사료 확인(〝慰安婦虐殺〟根拠なし 奥氏、中国で史料確認)





야에야마닛포는 오키나와의 현청 소재지 나하(那覇)의 전 자위관으로,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를 추적해온 오쿠 시게하루(奥茂治) 씨가 중국 윈난성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찾아다녀 관련 서적을 입수, 마이크로 필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연구센터는 지난달 27일,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학살’이 발생했다며, 관련 사진과 영상을 공개했다. 이미 죽어 있는 여성들의 시신을 화면에 담고 있는 문제의 영상에 대해 한국 측은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자료를 입수하여 중국군인이 학살된 위안부 시체를 매장하는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대다수 언론은 이와 같은 서울시와 서울대의 설명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한겨레신문 인터넷판은 지난달 28일,  “일본군이 ‘위안부’ 피해자를 학살했다는 기록은 당시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 ‘소탕보(掃蕩報)’(1944년9월18일) 등에 일부 언론 기사로 남아있다” 고 주장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학살’ 영상 처음 나왔다)

그러나 야에야마닛포는 “오쿠 씨가 3월 초순에 원난성에서 확인한 결과,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 ‘소탕보1944년 9월 20일자 기사에 위안부 관련 기술이 있었으나 ‘학살’했다는 기술은 없었다고 한다”면서 심지어 “1944년 8월에서 10월까지의 기사를 모두 확인했으나 일본군 학살에 관한 기술은 없었고, 한국언론이 지적한 ‘소탕보’  9월 18일자 지면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오쿠 씨가 해당 신문 자료를 살펴본 바에 따르면 학살이 아니라 오히려 위안부를 ‘포로’로 삼았음을 적시하는 내용이었다고 야에야마닛포는 전했다. 

“오쿠씨는 “지면에서는 위안부를 학살이 아니라 포로로 했다고 기술했다. 일본군이 옥쇄했기 때문에 중국군은 위안부들을 포로로 했다”라고 설명했다. 위안부에 대해서는 “일본군은 전멸했지만 부녀자는 풀어줬다는 설이 많다. 학살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의 선전전(宣伝戦)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 야에야마닛포가 공개한, 오쿠 씨가 중국 원난성에서 발견했다는 중국 국민당 기관지 ‘소탕보’의 1944년 9월 20일자 기사 사진(마이크로필름)을 보면, 우측에 한문으로 ‘조선인 여성 30명이 투항했다’고 기술돼 있음이 확인된다. 

사실, 강성현 교수가 공개한 동영상은 공개 당시부터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우선 이번 영상과 사진 공개는 ‘최초’가 아니라 이미 공개된 것을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부터 나왔다. 해당 자료는 이미 20여 년 전에도 ‘위안부 학살기록’과 관련 “사진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발행한 〈‘위안부’ 문제 조사보고·1999(「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 에 수록된 논문, ‘윈난·버마 최전선의 위안부들 - 죽은 자는 말한다(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에서 이미 소개된바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발표됐던 논문에서도 사진 설명에 ‘(시체의) 대부분은 일본군 기지의 조선인 여성들’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촬영자도 중국 국민당군과 동행한 미국인이므로 정확한 정보라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 



무엇보다 일본군 측 자료에는 조선인 위안부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이 불리한 기록을 폐기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가능한 것이 사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조사보고서는 “이곳에서 위안부 18명 (대만인 3명, 조선인 2명, 그 외는 일본인)이 중국 국민당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다시 말해서 일본군이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살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일본 유칸후지는 지난 3일, 언론인인 이시이 다카아키(石井孝明) 씨를 통해 버마 전선에 직접 참전한 일본군 장교의 회고록 한 대목도 근거로 찾아내 보도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日 유칸후지, 한국 반일좌파가 공개한 ‘위안부 학살 영상’ 반박 칼럼 게재)

“북 버마에서 싸운 육군 제33군의 참모인 노구치 세이키(野口省己) 소좌는 수기 ‘회상 버마작전(回想ビルマ作戦)’ (고진샤(光人社))를 남겼다. 이 수기에 의하면 “위안부 약 20명이 라모(拉孟)에서 사망한 듯”이라는 보고를 받은 군작전참모 츠지 마사노부(辻政信) 대좌는 충격을 받아 반대를 무릅쓰고 위안부를 비롯한  민간인을 후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츠지는 전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유명한 군인으로 유능한 반면,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인물조차 위안부를 학살할 발상이 없었다. 일본군에 그 동기는 없다.”


이처럼 논리적인 모순이 대거 드러난 가운데, 이번에는 일본인이 직접 중국 현지에서 1차 사료를 찾아내 ‘학살’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밝혀낸 것이다. 심지어 ‘조선인 위안부 여성 30명이 투항했다’는 기록은, 일본군이 정말로 위안부를 집단 살해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다. 

‘위안부 학살’ 자료의 신빙성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번 동영상 발굴 공개의 주역인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강성현 교수는 난데없이 자신이 극우파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언론을 통해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강 교수는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밤 늦게 집으로 들어갈 때는 나도 모르게 좌우를 둘러 보게 된다”며 “수년 전부터 위안부 관련 자료 연구 결과를 공개할 때마다 협박 메일이 엄청나게 쇄도한다”고 발언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단독]日극우세력에 협박당하는 위안부 연구자들

그러나 강 교수가 지금 해야할 일은, 협박을 당하고 있다며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일이 아니라, 무수히 쏟아지는 논리적 반론과 반박 사료들에 대해 성실히 대답하는 일이다. 그것이 학자로서 책임있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강 교수는 학자가 아니라 반일선동꾼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본 기사에서 야에야마닛포 기사 내용 번역은 박아름 씨의 도움을 받아서 이뤄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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