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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고노 담화(河野談話)’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23)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고노 담화(河野談話)’ 항목, 정식 명칭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7월 19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위안부(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그리고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한국어 번역) 항목과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 문제(朝日新聞の慰安婦報道問題)’(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는 1993년(헤이세이 5년) 8월 4일, 당시 내각관방장관(内閣官房長官, 편집자주 : 한국 청와대의 비서실장, 국무조정실장, 대변인을 합친 직책. 현재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가 맡고 있음.)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가 발표한 담화이다. ‘고노 담화(河野談話)’로 알려져 있다. 이 담화에서 (위안부 관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을 표명했다.




목차


1 개요


2 담화의 내용


3 경위와 논란


4 일본의 여론


5 영향


6 고노 담화 이후 역대 내각의 대응


7 제1차 아베 내각에 의한 재검토 논의와 그 수정


8 제2차 아베 내각에 의한 재검증

  8.1 민주당 정권 하에서 고노 요헤이의 참고인 유치 요구

  8.2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

      8.2.1 담화 내용에 한국의 사전 참여

      8.2.2 검증에 대한 각국의 반응

            8.2.2.1 한국

            8.2.2.2 중국

            8.2.2.3 미국

 



1 개요(概要)

이 담화는 같은날 내각관방 내각외정심의실(内閣外政審議室)에서 발표한 문서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하여(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에 이어서 발표되었다. 

원안(原案)은 당시 내각외정심의실장이었던 타니노 사쿠타로(谷野作太郎)가 “어투까지 포함하여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이 담화에서는 ‘위안소의 설치를 일본군이 요청하였고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위안부 모집에 관해선 일본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일본인•조선인)가 주로 이를 맡았지만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다’고 하였다. 또한 ‘(위안부 모집의 경우)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으며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으로 참혹한 것이었다’도 했다.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와 고노 담화가 발표되기 이전 연도인 1992년(헤이세이 4년) 7월 6일, 미야자와 내각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이 ‘조선반도 출신의 이른바 종군위안부에 관한 가토 내각관방장관 발표(鮮半島出身者のいわゆる従軍慰安婦に関する加藤内閣官房長官発表)’를 발표했다.

당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이 주장하는 “위안부가 강제연행이 됐다”는 주장을 두고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강제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발견하지 못하고 대응에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노 관방장관은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한국에서 태평양전쟁유족회를 통해 소개된 16명의 위안부를 대상으로 청취조사를 하고서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를 발표하는데 이르렀다.

2014년(헤이세이 26년) 6월 20일, 일본 정부에 의해 공개된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결과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간 의견교환의 경위 ~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기금까지 ~(慰安婦問題を巡る日韓間のやりとりの経緯∼河野談話作成からアジア女性基金まで∼)’(고노 담화 작성 과정 등에 관한 검토팀)에서, 담화 발표 이전에 한국 측과의 문구 조정이 있었던 사실, 그리고 위안부 증언의 뒷받침 조사는 하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이 2014년 고노 담화 검증보고서를 통해 한국과의 문구 조정이 있었던 사실을 일한 양국에서 비공개로 하기로 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2 담화의 내용(談話の内容)

1993년 고노 내각관방장관의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밑줄이 특히 그 해석이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다.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왔으나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됐으므로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됐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甘言), 강압(強圧)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지(戰地)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한다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조선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어쨌거나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또 그런 마음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에 관해서는 식견 있는 분들의 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고 싶다.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한다.

덧붙여 말하면 본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에서 소송이 제기돼 있고 또 국제적인 관심도 받고 있으며 정부로서도 앞으로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 고노 요헤이,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외무성(外務省)



3 경위와 논란(経緯と論争)

1992년(헤이세이 4년) 7월, 내각관방장관 가토 고이치는 군 위안소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음을 인정하고서 “계속 조사할 것”을 약속했다. 

그 3주 후에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은 “모집을 포함하여 강제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에 물질적 보상은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読売)신문은 “한국 정부는... 금전적 지원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강제연행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세가 선명해졌다” “일본 정부는 강제연행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태의 타개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했다”고 썼다. 하지만, 고노 요헤이는 ‘밀약’을 부정하고 있다.

당시 내각관방장관을 맡고 있던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는 “문서상으로 강제를 입증하는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분명히 그녀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진실을 말했다”면서, “본인의 의사에 반한 강제가 있었다고 확신을 얻었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도 일본 정부의 지휘 명령 계통이 강제했음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추후 일본 정부가 실시했던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한 검증을 통해서도, 한국 측의 위안부 관계 문언(文言) 조사 요청에 대해서 내각외정심의실과 외무성이 협의를 하면서 “당시까지 실시한 조사를 토대로 사실관계를 왜곡하지 않은 범위에서, 관광정부(観光政府)의 의향•요망사항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거부”하였으며, 한국 측에서 요구한 ‘군 지시’ 등의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이에 대해 산케이(産経)신문은 “(고노 담화로 인해서) 전 세계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인정했다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기정사실화가 되어버렸다”, “사실판단이 아니라 정치판단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실시한 조사에서 “일본이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고 하는 공문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관해 고노는 “설사 조직적으로 강제연행을 했었더라도 ‘억지로라도 데려오라’는 명령서나, ‘무리하게 데려왔습니다’라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던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고, 강제를 인정한 근거로서 “모집•이송•관리 등의 과정 전체를 본 것이며, 자유 행동에 제한이 있었다”를 들고 있다.

1993년 고노 담화 발표 후, 기자클럽에서의 설명에서 고노는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시로우마 사건(白馬事件, 편집자주 : 일본군 점령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에 의해 네덜란드 여성에게 이루어진 감금, 강간사건으로 ‘스마랑 위안소 사건(スマラン慰安所事件)’이라고도 한다)’을 의미하며, 이 사건 이외에는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사실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동시에 열린 한국인 위안부에 대한 청취조사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을 기록했을 뿐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은 실시되지 않았다. 원 청취자료는 현재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안병직(安乗直) 서울대 교수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앞서 언급한 위안부라고 지목된 여성들에 대해 청취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증언자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케이스(는) 조사를 중단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보니 위안부 증언의 절반이 기각됐다. 

이 청취조사에서, 일부 위안부를 제외하고는, 다른 위안부들은 기본적으로 강제연행되었다고 주장하질 않았다. 또한, 위안부의 증언 중에서는 군 위안소가 아니라 민간의 매춘시설이 있던 도야마(富山) 현이나 부산으로 연행되었다고 하는 것도 있었다. 이처럼 민간단체의 조사에서 위안부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지적이 많았다.

2013년(헤이세이 25년) 10월 16일자, 산케이신문에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의 근거가 된 한국에서의 위안부 16명의 청취조사 보고서를 입수한 사실을 보도했다. 보고서 내용 검토 결과, 위안부 증언의 사실관계가 애매하였으며, 이들이 다른 기회에서 했던 증언과의 불일치도 눈에 띄었고, 이름과 생년조차 부정확한 사례도 있어서 역사 자료로서는 통용(通用)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나타내는 정부 자료는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결정적인 위안부에 대한 청취조사조차 실수가 있다고 밝혀진 것이기에 고노 담화의 정당성이 근본적으로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애초 위안부 청취조사 보고서 자체가 엉터리 조사였던 점이 부각되고, 또한 위안소가 없는 곳에서 “일했다”고 하는 등 위안부 증언의 애매함 문제로 인해 고노 담화의 근거가 무너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3년 12월 2일자 유칸후지(夕刊フジ)가 고노 요헤이 자신도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강제연행)를 뒷받침하는 “문서 증거는 없다”고 발언한 사실을 보도했다.

산케이신문 2014년(헤이세이 26년) 1월 1일자, ‘고노 담화의 기만성, 그리고 사실상 일한 ‘합작’ 증언(河野談話の欺瞞性さらに事実上の日韓「合作」証言)’이라는 기사는,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되었던 한국에서의 위안부 16명에 대한 청취조사는 완전히 엉터리였을 뿐만 아니라, “담화의 문안(文案)까지 한국 측이 직접 관여한, 사실상 일한합작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담화의 기만성을 이제 더 이상 은폐할 수가 없다”고 보도했다.



같은해 1월 8일자 기사는, “한국 측은 고노 담화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사전의) 조사결과 보고서 작성에서부터 크게 개입했으면서도, 이후에 담화의 취지를 확대 해석하고 이용하였으며, 이것이 세계의 일본 때리기 재료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해 2월 20일, 고노 담화 발표 당시 내각관방 부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의 도서관까지 가서 뒤져보았지만 여성들을 강제로 모집했음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 일로 인해, 한 보도기관의 여론조사에서는 고노 담화 검증에 대한 찬성 여론이 60% 를 초과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같은달 25일에는, ‘일본 유신의 회(日本維新の会, 편집자주 : 일본의 보수 정당)’이 고노 담화의 내용을 검증하는 기관의 설치를 각 당에 제안했고, 같은해 4월 18일에 고노 담화 재검토(철회) 요청을 요구하는 약 16만명의 서명을 스가 관방장관에게 전달했다.

같은해 5월 2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도쿄에서 강연하면서 “위안부의 증언을 전부 믿을 수 있는지 여부는 별도로 하고, (위안부 모집에서 있어 강제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상정(想定)은 할 수 있다. ‘사실이 아니다’, ‘기록이 없다’고 하지만, (위안부 모집을 강제로 했다고 하는) 그런 것을 기록으로 남길 리가 없다. 일부러 자민당 정권이 (담화로 발표까지) 했던 것을, 자민당 정권이 다시 발굴한 결과, ‘그런 사실(강제연행)이 없었다’고 하면서 문제로 삼고 있다. (재검토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라고 말하고, 고노 담화 검증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대해서 타다키 케이치(但木敬一), 아키즈키 히로코(秋月弘子), 아리마 마키코(有馬真喜子), 고노 마리코(河野真理子),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5명으로 구성된 검토팀에 의한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의 의견교환의 경위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 ~(慰安婦問題を巡る日韓間のやりとりの経緯∼河野談話作成からアジア女性基金まで∼)’를 발표했다.


4 일본의 여론(日本の世論)

요미우리신문이 2013년(헤이세이 25년) 7월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고노 담화를 “재검토(철회)해야 한다는 의견이 42%, 재검토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35% 였다.

산케이신문과 FNN이 2014 년 (2014 년) 2월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고노 담화를 “재검토(철회)해야 한다”는 응답이 58.6%,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23.8%였다. 이 여론조사에서는, 일단 고노 담화를 검증해야 한다는 응답이 아베 내각 지지층에서 70.3%, 비지지층에서도 65.5% 나 나왔다.

2014년 6월 28일부터 29일에 걸쳐, 산케이신문과 FNN 의 여론조사에서는 고노 담화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자민당(自民党)’ 지지층에서는 55.6%, ‘일본 유신의 회(日本維新の会)’ 지지층에서는 70% 전후로, 보수층에서는 50% 를 넘었다. 좌파 정당인 사민당(社民党) 지지층에서도 과반수인 55.6% 가 재검토해야 한다고 답했다. 기타로 ‘공명당(公明党)’ 지지층이 47.9%, ‘민주당(民主党)’ 지지층이 41.9%, ‘공산당(共産党)’ 지지층에서 35.5% 가 재검토해야 한다고 답했다.

테레비아사히(テレビ朝日)의 보도스테이션(報道ステーション)이 2014년(헤이세이 26년) 3월 29일부터 30일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고노 담화와 관련 아베 내각이 재검토하겠다는 움직임에 대해 “좋게 평가한다”가 48%,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가 28% 가 나왔다.


5 영향(影響)

고노 담화에서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을 표명했지만, 이것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옛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했다”는 이해가 퍼졌다.

고노 담화에 이어서 1994년(헤이세이 6년) 8월 31일에, 내각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평화우호교류계획’에 관한 무라야마 총리담화(「平和友好交流計画」に関する村山内閣総理大臣の談話)’을 통해,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에 관하여 “진심으로 깊은 반성과 사과의 뜻(心からの深い反省とお詫びの気持ち)”을 표하고서 (한국과의) 평화우호교류계획의 실시를 표명했다.

이 계획의 하나로 1995년(헤이세이 7년) 7월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이 출범했고, ‘위안부’에 대한 보상 사업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 후 역대 수상들이 한국에 대해 사과를 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일(対日) 비난 결의안을 제출한 민주당 의원 마이크 혼다는 강제연행의 근거 중 하나로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고 말하면서 “고노 담화에서 일본 정부가 인정했다”고 했다(하지만 실제로는 강제연행 문제는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한국인 위안소에 관해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의 시로우마 사건(스마랑 위안소 사건)에 관해서 인정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노 담화 발표 당시에는 “보상은 필요 없다”고 했던 한국 정부 측은 직접적인 청구는 하지 않았지만 이후 위안부가 일으키는 배상 소송에 대해서 간접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현재는 (한국의) 국회의원이 일본 정부 측에 위안부에 대한 사과•배상을 요구하는 등의 사례도 볼 수 있게 됐다.


6 고노 담화 이후 역대 내각의 대응(河野談話後の歴代内閣の対応)

호소카와 내각(細川内閣)

1993년(헤이세이 5년) 9월 9일,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 내각관방장관은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 “전 내각에서 고노 관방장관이 이미,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치유가 쉽지 않은 상처를 받은 모든 분들에게, 어떻게 사과와 반성의 뜻을 나타낼는지, 이 과제가 남아있고, 이 문제에 대해 정부로서는 앞으로도 예의(鋭意) 검토를 하고 싶다는 발표가 있었으며, 이것을 우리 새 정부도 계승할 생각입니다”라고 하면서 담화의 계승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동년 9월 24일에는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수상이 참의원 본회의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질문이 있었지만, 일한 양국 간에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보상 문제를 포함하여, 일한 양국과 양국 민간 재산 청구권 문제는 1965년 일한청구권•경제협력협정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입니다. 한편,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치유가 쉽지 않은 상처를 입은 분들이 계신 것도 사실이며, 정부로서는, 인도적 관점에서, 이러한 분들에게 어떻게 사과와 반성의 뜻을 나타낼는지에 대해 지금 예의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타 내각(羽田内閣)

1994년(헤이세이 6년) 6월 17일, 하타 쓰토무(羽田孜) 수상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야자와 내각 시대에, 위안부 문제, 이것은 인도적인 문제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이렇다 저렇다고 할 것이 아니라, 뭔가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 관방장관 발표의 내용이며, 우리는 그것을 이어 받았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담화의 계승을 표명했다.

무라야마 내각(村山内閣)

1994년(헤이세이 6년) 7월 18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은 중의원 본회의 소신 표명 연설에서, “우리나라의 외교를 생각하면 우선 우리나라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후 50주년을 앞두고, 나는, 일본의 침략 행위와 식민지 지배 등이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주었던 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깊은 반성을 하고, 부전(不戦)의 결의 하에, 세계 평화의 창조에 힘을 다하겠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아시아 이웃 나라와 역사를 직시하고, 다음 세대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교류나, 역사 연구 분야도 포함한 각종 교류를 확대하는 등, 상호 이해를 더욱 깊이 하는 시책을 추진하기 위해, 향후 그 구체화를 급히 하겠습니다“라고 표명했다.

이 후, 같은해 7월 22일, 무라야마 수상은 참의원 본회의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우리 나라의 입장은 견지하면서, 사과와 반성의 뜻을 어떻게 나타낼는지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소신 표명 연설에서 말했던 사고방식으로, 가능한 한 빨리 결론을 내기 위해 현재 예의 검토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하시모토 내각(橋本内閣)

1996년(헤이세이 8년) 5월 9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수상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그리고 전시 당시를 되돌아보았을 때, 우리가 매우 엄격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항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종군위안부라는 문제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 불행한 역사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가, 여성기금이라는 형태로 정말로 국민의 선의로 구성된 모금, 이를 재원으로 관계된 분들에게 대한 병문안이라고 할까요, 어떤 형태든 지급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 매우 성공적으로, 이것이 성공할 정도의 국민의 거금이 모아지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방금 사과문이라는 말씀이 있었지만, 나는, 거기에 어떤 식으로 그 뜻을 나타내면 좋을지, 이 여성기금이 생긴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고노 관방장관이 관방장관 담화로 언급한 것이 있었지만, 그 속에 담겨진 뜻으로 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담화의 계승 입장을 표명했다.

오부치 내각(小渕内閣)

1998년(헤이세이 10년) 8월 10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수상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은, 1993년 8월 4일 고노 관방장관 담화대로입니다”라고 하면서 담화의 계승 입장을 표명했다.

모리 내각(森内閣)

2000년(헤이세이 12년) 9월 27일, 모리 요시로(森喜朗) 수상은 참의원 본회의에서,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입니다만,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기본적 입장은, 1993년 8월 4일 고노 관방장관 담화대로이며,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깊게 손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담화를 계승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고이즈미 내각(小泉内閣)

2001년(헤이세이 13년) 10월 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은 참의원 본회의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깊게 손상시킨 문제라는 인식으로, 정부로서는 위안부들에게 국민적인 보상을 하는 사업 등을 실시하는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해, 이미 최대한의 협력을 해왔습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동년 12월 6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내각관방장관은 참의원 외교 방위위원회에서,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기본적인 입장은, 현재도 고노 관방장관 담화, 즉 1993년 8월 4일에 밝힌대로이며, 본 건은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깊게 손상시킨 문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담화를 계승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제1차 아베 내각(第一次安倍内閣)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은 보수파로 알려져 있었으며 총리 취임 전에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있었으므로 수상 취임 후에는 무라야마 담화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 받고 있었다.

2006년(헤이세이 18년) 10월 5일, 아베 수상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아시아 국가에 크나큰 피해를 주고, 상처를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무라야마 담화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아마도 이것은, 한국 분들이나 중국 분들을 비롯하여, 침략을 당했다, 혹은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바로 그 때의 각의(閣議) 결정을 한 담화로서 국가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하면서, 이와 관련 1993년(헤이세이5년)의 고노 담화와 함께 “나의 내각에서 변경할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후쿠다 야스오 내각(福田康夫内閣)

2007년(헤이세이 19년) 11월 9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내각은 질문주의서(質問主意書)에 대한 답변서에서, “정부의 기본적 입장은, 헤이세이 5년 8월 4일의 내각관방장관 담화 그대로”라고 하며 고노 담화를 계승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아소 내각(麻生内閣)

2008년(헤이세이 20년) 10월 15일, 아소 다로(麻生太郎) 수상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의 기본적 입장이라는 것은 현재도 헤이세이 5년 8월 4일의 고노 관방장관 담화를 계승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고노 담화를 계승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鳩山由紀夫内閣)

2010년(헤이세이 22년) 5월 11일, 니시무라 치나미(西村智奈美) 외무대신정무관 및 마쓰노 요리히사(松野頼久) 내각관방 부장관은,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의 기본적 입장은, 헤이세이 5년 8월 4일의 고노 관방장관 담화 그대로”라고 하면서 담화를 계승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노다 내각(野田内閣)

2012년(헤이세이 24년) 8월 27일,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관방장관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이른바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정부의 기본적 입장은, 이것은 지금 위원께서 말씀했듯이, 헤이세이 5년 8월 4일 고노 당시 관방장관 담화라는 것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현 정부의 태도이기도 합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수상도, “고노 담화에 대해서는 이것은 앞서 언급한 관방장관의 답변도 있었지만, 이른바 강제연행을 했다는 사실을 문서로 확인할 수는 없고, 일본 측의 증언도 없었으나, 이른바 종군위안부라고 하는 사람들의 청취내용도 포함하여, 그 담화가 생겼다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역대 정권이 계승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도 기본적으로 이를 계승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담화를 계승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제2차 아베 내각(第二次安倍内閣)

2014년(헤이세이 26년) 3월 14일, 아베 신조 총리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 필설로 다할 수 없이 고생하신 분들을 생각하면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이 점에 대한 생각은 나도 역대 총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른바 고노 담화가 나온 바 있습니다. 이 담화는 관방장관의 담화이지만, 스가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듯이 아베 내각에서 그것을 재검토(철회)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같은해 6월 20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 관한 검증 작업의 보고를 받은 기자회견에서 “헤이세이 19년의 정부 답변서대로, 이를 계승한다는 정부의 입장은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7 제1차 아베 내각에 의한 재검토 논의와 그 수정(第一次安倍内閣による見直し議論とその修正)

제1차 아베 내각 발족 직후인 2006년 10월 5일,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 담화에 대해서, “나의 내각에서 변경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계승하고 이어나갈 뜻을 밝혔지만,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내각관방 부장관은 “고노 담화에 대해서는 좀 더 사실관계를 잘 연구하고서, 그 결과가 어떠한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객관적, 과학적인 지식을 수집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면서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언급했다.

아베는 2007년 3월 5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고노 담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오가와 토시오(小川敏夫)의 질문에, “기본적으로 계승하겠다”고 답변하면서도, “협의의 의미로서의 강제성에 대해 말하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없었다” “관헌이 집에 침입하고 사람을 납치하는 것처럼 끌고 간다는 그런 강제성은 없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 정부 답변서를 각의(閣議) 결정했다.

이에 대해 전 자민당 부총재 야마자키 타쿠(山崎拓)는, “종군 위안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협의 또는 광의라는 식, 변명으로 보이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아베를 비판했다. 

고노 전 장관은 아시아 여성기금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모집에 군 정부가 직접 관여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던 문제와 관련, “그렇다고 하여 종군위안부가 없었다고 논의하는 것은 지적으로 성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의 가담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위안부로부터의 청취결과를 그 이유로 들면서, “분명히 어려운 상황을 겪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상황 설명이 속속 나온다”고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관헌이 위안부 모집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고 인정한 점에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사설을 통해 (강제연행과 관련하여) 증거가 없었다는 발언은 해외에서 일본의 책임 회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일본인 납북 문제로 국제적 지원을 요구한다면, 일본의 죄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아베 총리는 그러한 수치스러운 행위가 개인의 영리 활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민당내 우파에게 어필하려고 하고 있으며, 일본의 국제적인 명성을 복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진실을 왜곡하려는 그러한 노력은 일본의 명예를 떨어뜨릴 뿐”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산케이신문’은 사설 ‘주장(主張)’에서, "(고노 담화가)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일미 관계에까지 악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명확한 뒷받침이 없이 위안소 설치에 ‘군의 개입’이 있었다고 인정했기때문에, 위안부가 일본군 ‘성노예’였다고 하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렸다”면서 고노 담화를 비난했다. 아베가 참의원(2007년 3월 5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 답변에 대해서는 ”사실에 대해 성실하게 마주했던 결과“라고 평가했다.

또한 아베 발언에 대한 미국 측의 보도에 관해서는 “친중 성향의 ‘뉴욕타임스’ 등이 아베 수상의 발언을 왜곡하여 보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초부터 아베는 “내 발언이 해외에서 왜곡 보도되고 있다”고 반박했으며, 내각 관방장관 시오자와 야스히사(塩沢恭)도 “반론 게재를 요구한다”고 했지만, 이후엔 그런 입장을 수정했고, 국회 답변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동정과 사과”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베는 4월 17일, 월말의 방미를 앞두고서 미국 ‘뉴스위크’와 ‘월스트리트저널’의 취재에 답변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동정한다. 총리로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러면서 “그녀들이 위안부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우리에는 책임이 있다”면서 일본 측에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2007년 4월 말, 미국 CNN 과의 이례적인 방미 전 인터뷰에서 아베는 위안부에 대해, “인간으로서, 일본 총리로서, 과거에 고생을 한 위안부분들을 진심으로 동정한다. 20세기는 수많은 인권 침해가 있었던 시대로, 일본도 무관하지 않다. 위안부분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21세기는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 의해서도 나도, 일본도 적절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석한 아베 아키에(安倍昭恵) 여사는 “여성으로서 위안부분들을 동정한다.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아베가 강제연행의 증거는 없었다고 한 발언이 비판받는 것에 대해 “그 발언을 직접 듣지 않았기 때문에 경위를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남편은 그런 상황에 놓였던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8 제2차 아베 내각에 의한 재검증(第二次安倍内閣による再検証)

8.1 민주당 정권하에서의 고노 요헤이 참고인 유치 요구(民主党政権下での河野洋平の参考人招致要求 )

고노 요헤이에 대한 참고인 유치(招致) 요구는 노다 내각 때부터 존재했다.

2012년 8월, ‘국민의 생활이 제일(国民の生活が第一)’ 소속 도야마 이쓰키(外山斎, 후에 ‘희망의 당(希望の党)’에 참가. 현재는 무소속)이 “나는 이 고노 담화가 역사를 왜곡한 것이며, 심지어, 더 심각히 말하면 오늘의 일한 관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왜 증거도 없는데 이 고노 담화라는 것을 노다 내각은 계승하려는 것일까” “(증거도) 없지만, 뭐, 한국 측의 종군 위안부라고 하는 분들의 증언만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이 고노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나는 이건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담화에서는, ‘감언, 강압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또한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는 식으로 적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강제연행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근거는) 이 문언 뿐인 것으로, 이제 나는 (강제연행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하고, 고노 요헤이 참고인 유치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예산위원회는 “나중에 이사회에서 협의를 하겠습니다”라고 회답했다. 이사회에서 같은 당 모리 유코(森裕子, 현 ‘국민민주당(国民民主党)’)는 다시 한번 참고인 유치를 주장했다.

8.2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河野談話の検証)

아베 신조는 제1차 정권의 2007년 3월, 고노 담화의 전제가 되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재조사를 실시할 의향을 나타냈고, 역사학자 등에 의한 유식자(有識者) 기관에 재조사를 맡기는 방안 등이 부상하고 있었다.

자민당 총재 아베 신조는 고노 담화 재검토(철회)를 주장했었지만, 2012년 12월의 제46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의 자민당의 공약에는 고노 담화에 관한 기재가 없었다. 아베 신조는 총리 취임 후 “관방장관이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했으며, 2013년 5월, 내각관방장관의 스가 요시히데는 고노 담화의 재검토를 부정했다.

2013년 5월 7일, 제2차 아베 내각은 일본 공산당의 가미 도모코(紙智子)가 제출한, “도쿄 재판 관련 문서(국회 도서관)에, 강제연행의 증거 서류가 남아있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으며, 전쟁 범죄 사실을 무겁게 받아 들여야 한다”는 질문주의서(質問主意書)와 관련, 위안부 문제와 관련 “새로운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답변서를 각의(閣議) 결정했다. 2014년 3월 14일,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를 재검토(철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 대응을 높이 평가했다. 

2014년 2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재검토(철회)는 없이) 고노 담화의 근거가 된 위안부에 의한 증언 내용에 대해서는 검증을 할 의향을 나타내었고, 같은해 4월, 일본 정부는 유식자에 의한 검증 팀을 설치하고 동년 6월 22일까지 검증 결과를 정리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2014년 6월 20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의 의견교환의 경위 ~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 ~’를 공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고노 담화 작성 시에 일한 양국 간에 문서 조정을 한 경위를 명기했다. 또한 담화의 토대가 된  위안부 증언에 관해서 뒷받침 조사가 실시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8.2.1 담화 내용에 대한 한국의 사전 참여(談話内容への韓国の事前関与)

2014년이 되어서 산케이신문은 고노 담화의 내용이 원안 단계부터 한국 측에서 제시되었으며, 한국 측의 지적에 따라 강제성의 인정을 비롯한 내용, 어휘, 표현 등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의향을 반영시킨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고노 담화 발표 당시에 일본 정부는 한국 측에는 발표 직전에 취지를 통지했다고만 설명했고,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당시)도 “조사한 결과를 담담하게 정리했다”, “담화 발표는, 사전에 한국 외무성에 통보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 취지도 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과 조정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일한 사이의 문구의 조정 문제에 대해서는 양국 정부가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한 조정이 끝나고, 고노 담화가 거의 굳어진 1993년 8월 2일, 일본 정부는 한국의 각료에게도 문안을 전했다. 한국의 장관은 이것에 일정한 평가를 해주면서도 “한국 국민들에게, 일부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한국 측과의 문안 조정 작업 시에 ‘위안소의 설치 및 위안부 모집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 ‘위안부 모집 시의 ‘강제성’’, 이 두가지가 논점이 되었다.

전자에 대해 한국 측은 군의 ‘지시’ 또는 ‘지휘’가 있었다는 표현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위안부 모집은 군의 의향을 받은 업자가 한 일이라면서 ‘군’을 모집의 주체로 표현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업체에 대한 군의 ‘지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군의 ‘요청’을 받은 업체라는 표현을 제안했다. 결국, 한국 측 주장을 배려해서 위안소의 설치에 대해서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되었다”, 위안부 모집자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후자에 대해서는 일본 측이 “(업자의) 감언, 강압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다”라는 표현을 제시했고 한국 측은 (위안부 전부가 본인 의사에 반해서 모집됐음을 인정하라는 의미에서) “사례가 많다”는 부분의 삭제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위안부 전부가 본인의 의사에 반했던 사례라고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결국, 당시 조선반도를 일본이 통치하였음을 감안하고, 위안부 ‘모집’ ‘이송, 관리 등’의 단계를 통해 봤을 때, 어떤 경우라도, 전체적으로 개인의 의사에 반한 경우가 많았다는 취지에서 “감언, 강압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라는 문구로 조정되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의 응수의 경위 ~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 기금까지 ~’ 보고서에서는 또한 일본 정부의 조사에 의해서도 ‘강제연행’은 확인되지 않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8.2.2 검증에 대한 각국의 반응(検証に対する各国の反応)

8.2.2.1 한국(韓国)

• 6월 23일, 한국 외교부 제1차관은 벳쇼 고로(別所浩郎) 주 대한민국 특명 전권 대사를 불러 “고노 담화를 훼손하면 할수록 아베 정권의 신뢰성과 국제적인 명성에만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항의했다.

8.2.2.2 중국(中国)

• 6월 23일, 중국 외교부 보도국의 화춘잉(華春榮)은 “역사를 직시하려 하지 않고, 침략의 범죄 행위의 부정조차 기도하는 진정한 의도가 더욱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8.2.2.3 미국(アメリカ合衆国)

• 6월 20일, 미국 국무성 보도관은 고노 담화에 대해서 “일본이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 견지를 요구했다.

• 6월 22일, ‘뉴욕타임스’ 전자판은 사설에서 담화의 검증은 일한 관계와 미국의 대중 정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9월 24일, 미국 의회 조사국은 미국 의회에 아베 정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 수정주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2014년 6월, 아베 정권은 야당 의원들의 요청에 대한 답변에서 고노 담화가 역사적 사료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암시하면서 한국과 협의하에 작성된 담화라고 결론지은 검증 연구를 발표했다. 비록 아베 내각이 고노 담화를 부인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평론가들은 이 검증 결과가 고노 담화 사과의 신용을 훼손하고 도쿄의(특히 아베의) 수정주의자의 목적에 더 큰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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