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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변희재-뤼슈렌 특별인터뷰 “한국-대만 국교정상화” 한 목소리

뤼슈렌 전 대만 부총통, 1992년 한국-대만 단교에 비통...2019년 ‘한-대 국교정상화’ 운동에 감동

변희재 본지 대표고문이 뤼슈렌(呂秀蓮, 뤼슈롄) 전 대만 부총통과 특별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다. 변 고문의 질문에 대한 뤼 전 부총통의 답변은 지난 9일 도착했다. 각자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두 사람의 대담은 한국과 대만의 정치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뤼 부총통이 지난해 11월 방한 당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변 고문을 위로하며 “감옥까지 가봤던 사람만이 그 나라의 정치와 국가에 대해서 진정으로 잘 안다”고 말한 것 그대로다. -편집자 주




변희재 본지 대표고문은 뤼슈렌 전 부총통에게 총 17개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크게 ▲성장과정 ▲미국-대만 단교와 수감 ▲대만-한국 관계 ▲평화중립과 대만-중국 관계 ▲박근혜 사건 5개 줄기로 구성했다.

삼엄했던 국민당 계엄통치...미국 유학으로 진실에 눈 떠

뤼 전 부총통은 성장과정과 관련 중국 국민당의 계엄통치시대의 아픔을 증언했다. 그녀는 대만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도 “전면적으로 대만을 중국화하는 것”이 국민당 정권의 필연적 통치수단이었던 탓에 ‘중국어(국어)’ 시험에 낙방해 변호사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진 경험을 소개했다. 

또 변 고문이 대학생 때부터 언론사를 창간하고 활동하던 것처럼, 뤼 전 부총통도 “대학 1학년 때 ‘대학신문사’에서 기자를 했고 3학년 때 대만대 법대 학과 간행물을 창간했다”고 밝혔다. 

미국 유학은 뤼 전 부총통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국민당 정권은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문명국이라고 가르쳤는데 그와 다른 현실을 직접 보고 느낀 것이다. 뤼 전 부총통은 미국과 유럽의 10여개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은 후 “내면을 향해 ‘귀국 후 나는 대만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라고 물었다”고 회고했다. 

귀국한 그녀는 1978년 대만정치권의 신성으로 등장했다. 당시 국민당 정권은 급변하던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오로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데에만 골몰했다. 이는 마치 현재의 문재인 정권을 떠올리게 한다. 

국민당이 숨기려는 진실 알렸다가 5년여 옥살이

국민당 정권은 귀국한 그녀가 미국과 대만이 단교할 위기에 처한 사실을 폭로하자 탄압을 가했다. 1978년 12월 16일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그녀의 예견대로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선포했다. 그녀는 “장징궈 총통은 그날 정오에 선거중단을 선포했다”며 “제 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은 제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혹은 선견지명이 있다 생각하였으나 정치보안부에서는 제가 미국 CIA에서 파견되었다는 얘기를 퍼뜨려 저를 잡으려 하여 저는 한참 동안 숨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탄압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잡지를 창간해 국민당의 잘못을 비판했다. 그녀는 “월간지 3집이 나갔을 때는 큰 수입이 있었고 우리는 대만 각 현과 시에 서비스센터를 세워 연설했고, 위세가 급속히 커져 암암리에 반대정당을 만들어 국민당 계엄체계에 대해 직접적인 도전했다”며 “1979년 12월 10일 대만 남부 최대도시 가오슝시에서 ‘국제인권집회’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뤼 전 부총통은 체포됐다. “저는 그 집회의 주요강연자로 20분 정도 강연했고 3일 후 처음으로 체포당했습니다.”

변 대표고문은 2017년 5월 2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태블릿PC의 진실에 대하여 법정 증언한 이튿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과수 연구관은 23일 법정에서 JTBC가 보도한 태블릿PC가 최순실의 것이라고 확정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 

뤼슈렌과 변희재 모두 정권에 불리한 진실을 말했다가, 그 진실이 막 퍼져나가려는 시점에 강제 구금을 당한 셈이다. 뤼슈렌은 5년 3개월, 변희재는 1년간 옥살이를 했다. 

비통했던 한국-대만 국교단절과 변희재와의 만남
 
국민당 정권은 옥중에서도 거짓말로 그녀의 인권을 짓밟았다. 뤼 전 부총통은 “제가 (위중한) 어머님 방문을 위해 단식을 했고 옥중에서 저에게 병원진단서를 보여주며 어머님 병세가 안정적이고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단식을 중단하라 했다”며 “그러나 얼마후에 어머님은 병으로 별세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저는 발인식 때 땅바닥에 엎드려 울며 충성과 효도를 둘다 할 수 없음에 애통해했다”고 말했다. 

변 고문은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자 전체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다. 서울구치소가 문재인의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수갑을 채우지 않고 법정에 출두시킨 데 반발, 변 고문은 자신의 보석심리 공판을 보이콧해 큰 화제가 됐다.

뤼 전 부총통은 한국과 대만의 국교단절 당시를 매우 비통한 기억으로 회고했다. 그녀는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 노태우 정권이 예고없이 갑자기 대만과 단교를 선포했다”며 “한국은 중화민국 수교국 중 제일 중요한 나라였고 좋은친구와 인사도 없이 이별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비통했다”고 기억했다. 

이에 대해 변 고문은 “감옥에서 출소한 후, 한국과 대만의 국교단절일(8월 24일) 전날인 8월 23일, 대만대표부 앞에서 국교 정상화 촉구 선언식을 했다”며 어떻게 그 소식을 듣고 감사 인사를 했는지 물었다. 

뤼 전 부총통은 “당시 저는 각국 귀빈을 초청해 ‘제3회 동아시아 평화토론’을 개최했는데, 변 선생이 서울에서 ‘한-대 국교정상화’ 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 개막 축사때 그 소식을 선포했다”며 “전원이 다 박수를 쳤다”고 밝혔다. 

뤼 전 부총통은 평소의 지론인 대만 중립화 동맹에 대해서도 “대만의 유일하고도 가장 좋은 선택은 국민투표를 통해 전세계에 ‘평화와 중립’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대통령의 정치와 삶에 깊은 관심...현실 매우 유감

끝으로 변 고문은 박 대통령과의 인연을 물었고 뤼 전 부총통은 특별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녀는 “2002년 제가 부총통 취임후 2년 째 되던 해, 아시아 태평양국가의 여성정치자들을 초청하여 타이페이에서 ‘여성부녀리더’회의를 했고 이 자리에 박근혜 여사가 참석했다”며 “그 때 그 분이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저는 태생이 정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게 되었고 이미 국회의원을 수년간 했습니다. 원래는 일단락을 짓고 마무리 하려 했었는데 이번에 아시아 태평양 여자리더회의에 운 좋게 참석하게 되었고 특히 대만의 첫번째 여성 부총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국 후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변 고문은 뤼 전 부총통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 뇌물도 받지 않았음에도 정치적 음모에 걸려 투옥됐다”며 국제 구명운동을 부탁했다. 

뤼 전 부총통은 “일반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임기내에 ‘사법면제권’을 가지게 되어 있는데 왜 한국에서는 이를  중시하지 않는지 매우 답답하다”며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특사명단에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여 매우 유감스럽다”면서 박 대통령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촉구했다. 

이하 인터뷰 전문.

MediaWatch 專訪台灣前副總統呂秀蓮

(미디어워치-뤼슈렌 전 대만 부총통 특별인터뷰)




1. 성장과정(成長歷程)


Q1.

변희재: 막 태어났을 때, 언니가 목욕물에 큰 돌을 담아두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겁먹지 말라는 취지였다는데 대만에서는 목욕물에 큰 돌을 담아 용감한 아이로 키우는 전통이 있습니까.


뤼슈렌: 이 풍습은 제가 태어났을 때,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래된 것입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這個習俗是我出生時,第二次世界大戰以前流傳的,現在沒有了。)


Q2

변희재: 고등학교 시절, ‘제인에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강인한 여성이 주인공인 세계문학을 읽었다는데, 이런 게 훗날 여성권익 운동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습니까.


뤼슈렌: 대학 전 매 겨울, 여름방학마다 저는 동서고금 명작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제 사고와 인생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大學之前每年寒暑假期間,我都會規劃閱讀古今中外的世界名著,對我這一生的思想和人生價值,產生許多影響。)


Q3

변희재: 대만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했는데, 변호사 시험에는 두 차례 떨어진 것으로 압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해서 사법시험에 두 번 떨어진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저희 상식으로는 그런 사례란 찾아보기 어려운데요. 당시 국어시험에서 낙방했다고 하는데, 문학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국어시험에서 낙방을 한 것인지요.


뤼슈렌: 당시는 ‘중국국민당’의 계엄통치시대(1949-1987)였습니다. 당시 전면적으로 대만을 ‘중국화’하는 것이 ‘중국’정부가 대만을 통치하는 필연적 수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법고시는 전공과목인 법학 뿐 아니라 ‘중국어(국어)’를 60점이상으로 패스해야 했습니다. 중국어는 단 한 문제 작문시험만 보았습니다. 당시 중국 국학 노교수님들이 채점하였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었습니다. 제 사고와 개념은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편이어서 같은 해에 유학시험은 8점을 받았는데 사법고시 국어는 57점밖에 못받았습니다. 저는 수긍할 수 없어서 감찰원에 고소까지 했었습니다. (在「中國國民黨」戒嚴統治的年代(1949~1987,全面將台灣「中國化」是維繫「中國」政權統治台灣的必要手段。因此,司法官特考除法律專業外,必須「中文」科60分及格,而國文科只出一道作文題,由中國國學老教授打分數,並無客觀標準,而我的思想觀念比較開放有創意,在同一年的留學考試,國文我得了86分,但在司法官特考國文卻只有57分。我不服氣,還向監察院告了一狀。)


Q4

변희재: 60년대 서울대의 경우 박정희 정권에 맞선 대학생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60년대에 대만대를 다니셨는데 특별히 학생운동 경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만대 자체에 학생운동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그쪽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지.


뤼슈렌: 저는 1963-67년에 대만대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 당시 대만은 여전히 계엄시기였고 각종 자유가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 때 ‘대학신문사’에서 기자를 했었고 3학년 때 대만대 법대 학과 간행물을 창간하였고 ‘모의법정’을 창설하였는데 이것 또한 ‘체제 안’에서의 활동이었습니다. (我於1963~67年就讀台大,當時台灣還在戒嚴,各種自由仍受嚴格限制。我大一時參加「大學新聞社」擔任記者,大三時創辦台大法律系系刊,也創辦「模擬法庭」,算是「體制內」的活動。)


Q5

변희재: 남자친구? 좋아하던 오빠를 따라서 프랑스 유학을 갈지,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을 갈지 갈등하는 내용이 나오던데, 어느 정도로 고민을 했고 어떠한 기준으로 결정을 했는지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뤼슈렌: 1969년 여름에 저는 먼저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의 네덜란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대만대 유일한 최고영예 ‘이씨문중 미국유학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금액이 높을 뿐 아니라 2년 연속으로 주어집니다.  또한 이것은 대만대 총장이 전교 각과의 졸업생 중 성적이 3등안에 드는 학생에게 필기시험과 영어시험을 보게 한 후 ‘유일’하게 선정된 장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치엔스량(錢思亮) 총장님이 “이것은 네 개인적인 일일 뿐 아니라 대만 대학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씨문중 장학금(The Li Fellowship)’은 청나라 시기 미국 이민자 이씨 광부가 부를 이루고 성공한 후 설립한 장학금입니다. 매년 단 한 명의 출중한 대만대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합니다. (1969年夏天,我先獲得歐洲委員會(European Council)的留荷獎學金,後來又獲得台灣大學唯一一項最高榮譽的「李氏留美獎學金」,不只金額豐厚,連續給兩年,而且是由台大校長從全校各系畢業總成績前三名的學生經過筆試及英語考試後,選出來的「唯一」得獎人。校長錢思亮對我說:「這不只是妳個人的事,也是台灣大學的榮耀。」李氏獎學金The Li Fellowship是一位清朝移民美國的李姓礦工致富成功後設立的獎學金,每年提供一名給台大傑出畢業生。)


Q6

변희재: 미국 유학시절부터, 당시 대만의 독재정권 관련 민주화와 인권 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습니까?


뤼슈렌: 제가 처음 미국유학을 갔을 때는 1969년 9월부터 1971년 7월까지였습니다. 그 기간 중 1970년 여름에 유럽8개국을 80일동안 여행했습니다. 그때 제 인생 중 처음으로 문화적, 정치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출국 전까지 저는 국민당의 주입식 교육을 받아 중국은 제일 위대한 문명 고국이고 대만은 아름다운 섬나라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해외에 체류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10여개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은 후, 비로소 제가 국내에서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젊었던 제 자신의 내면을 향해 ‘귀국 후 나는 대만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해외에서 국민당 소행을 비판하는 책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고 여성문제에 대한 저술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젊었고 위력정치에 대해 감히 도전하지 못하여 ‘새 여성주의’를 선택하였고 남자중심의 전통에 대해 도전하였습니다. (我第一次留美是1969年9月到1971年7月,期間1970年夏天我到歐洲漫遊八個國家,共80天。這是我人生中首次遭受的文化和政治衝激。未出國前的國民黨教育灌輸大家,中國是最偉大的文明古國,台灣是美麗寶島。但我出國期間,遍遊日美歐共十國的見聞,完全推翻過去在國內所形成的觀念,當時就在年輕的內心深處問自己:「回國後我該為台灣做些什麼?」在國外有機會讀到批判國民黨種種作為的書刊,也接觸到婦女議題的論述,但當時年紀輕,不敢直接挑戰威權政治,就選擇「新女性主義」,挑戰男性中心的傳統。)



2. 미국과 대만의 단교와 수감 (美台斷交與坐牢)


Q7-8

변희재: 미국이 전격적으로 중공과 수교를 맺고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을 때, 복잡한 심경이었을 듯 합니다. 대만인으로서 충격도 받았을 테고, 또한 당시 독재정권이 이를 이용하여 오히려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도 했을 텐데요.


뤼슈렌: 1978년 저는 하버드에서 깊이 연구하고 미국-대만-중국의 삼각관계와 상호왕래에 대해 관심 가졌습니다. 저는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가 ‘중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대항한다’는 전략적 사고로 인해 미중관계는 변할 것이고, 미대(美台)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특히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중국을 상대해서 이득을 보지 못했고 당시 여론은 미군 철수를 요구하였습니다. 미국은 중국과 우호관계를 잘 유지하여야 베트남전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1978年我在哈佛大學深造,並關切美-台-中三角關係的互動。我擔心美國國務卿季辛吉的「聯中抗俄」戰略思維主導之下,美中關係將改變,而影響到美台關係,尤其美國在越戰中對抗中國並未得利,民意要求美軍撤離,美國需要與中國交好以結束越戰。)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대만의 계엄통치기에 진행되었고 대만 국내 언론에 충분히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은 늘 ‘만사 OK’라는 거짓말로 국민을 우롱했습니다. 당시 국민의 언론자유와 신문자유는 억압당했고 선거때만 비로소 후보자들이 군중의 힘을 빌어 언론자유를 조금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선되면 아무일도 없지만 선거에서 패배하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但這一切的發展在戒嚴統治時期的台灣,並不能充分被報導,執政的國民黨總是用「萬事OK」的謊言欺騙人民。當時人民的言論自由及新聞自由都被打壓,只有選舉時候選人仗著群眾力量才能享受一些言論自由,如果當選就沒事,但若敗選就要坐牢。)


1978년말에 국회의원과 입법위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저는 선거를 이용해 국민들에게 미국이 대만과 단교할 위기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고 대만국민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상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제롬 코헨(Jerome A. Cohen, 한자이름: 孔傑榮) 교수님이 주신 장학금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돌아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두 달 간의 짧은 선거기간에 저는 수만명의 청중들을 사로잡았고 정치계 라이징스타가 되었습니다. 저는 대만 역사를 분석하였고 미국과 대만은 곧 단교될 것을 예언하였었는데 선거 일주일 전인 1978년 12월16일 아침, 미국과 중국 양국이 동시에 1979년 1월1일에 수교할 것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장징궈(蔣經國, 장제스의 맏아들로 1978년부터 1988년 사망할 때까지 총통을 지냄 -편집자 주)은 그날 정오에 선거중단을 선포하였습니다. 제 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은 제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혹은 선견지명이 있다 생각하였으나 정치보안부에서는 제가 미국 CIA에서 파견되었다는 얘기를 퍼뜨려 저를 잡으려 하여 저는 한참 동안 숨어있었습니다. (1978年底有國大代表及立法委員選舉,我基於想利用選舉向國人講解美國可能會跟台灣斷交的危機,提醒台灣民眾要做好心理準備,因此放棄孔傑榮教授給我的獎學金,回台灣參選「國大代表」。短短兩個多月的競選,我吸引數萬聽眾,成為新興的政治明星。我分析台灣歷史並預言美台斷交,結果在投票前一個禮拜的1978年12月16日早上,美中雙方同時宣布將於1979年元旦建交,蔣經國在當天中午宣布選舉中止,而聽過我演講的人都認為我是「仙女下凡」,未卜先知,但情治單位卻散播我是美國CIA派回來的消息,準備捉我,我因此躲藏一陣子。)


선거가 끝난 후 더 이상 연설을 할 수 없어서 당외 분들이 ‘월간 메이리다오(美麗島月刊)’를 창간하였고 이 잡지를 통해 시대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대만의식’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잡지를 내자마자 2, 3일만에 경찰청에서 출판을 금지하고 잡지를 압수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다른 통로로 금서만 전문으로 판매하였고 매우 인기가 좋았습니다. 월간지 3집이 나갔을 때는 큰 수입이 있었고 우리는 대만 각 현과 시에 서비스센터를 세워 연설을 하였고 위세가 급속히 커져 암암리에 반대정당을 만들고 국민당 계엄체계에 대해 직접적인 도전을 하였습니다. 1979년 12월10일, 대만 남부 최대도시 가오슝시에서 ‘국제인권집회’를 열었고, 그날 저녁에 8~10만 명 정도가 참석하였습니다. 그 때 당국은 진압부대를 파견하여 집회 참석자들을 진압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회의 주요강연자로 20분 정도 강연했고 3일 후 처음으로 체포당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폭력반란범’으로 12년형을 판결 받았으나 다행히 국내외 각계로부터의 강력한 압력과 후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드디어 투옥 1933일(약 5년3개월) 만인 1985년 3월28일에 ‘치료목적 보석’ 명분으로 석방되었습니다. (選舉停止,不能演講,黨外人士就創辦「美麗島月刊」,批評時政,提倡台灣意識。雜誌一出,三兩天後就被警備總部查禁沒收,但我們另闢地下管道,專售禁書,十分受歡迎。月刊出三期,就大有收入,我們在台灣各縣市成立服務處,舉辦演講,聲勢快速壯大,暗中籌組反對政黨,直接挑戰國民黨的戒嚴體制。1979年12月10日在南台灣第一大城高雄舉辦「國際人權晚會」,當晚約有8~10萬人參加,當局派出鎮暴部隊鎮壓。我是晚會最主要的演講人,講了20分鐘,三天後第一個被逮捕。後來被以「暴力叛亂犯」判處12年徒刑,不過由於國內外各界強大的壓力和救援,我終於1985年3月28日以「保外就醫」獲釋,總共坐牢1933天。)


Q9

변희재: 근 5년 간의 투옥생활 중 모친이 돌아가시고 갑상선 암 투병도 하셨는데, 5년이란 투옥생활을 어떤 마음자세로 견디셨습니까.


뤼슈렌: 갑상선암에 걸린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저는 1974년 여름에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하였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셨는데 어느날 갑자기 TV에서 사랑하는 딸이 첫 번째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셔서 다리뼈가 부러져 병원신세를 지며 매일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내며 저를 그리워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님 방문을 위해 단식을 하였고, 교도소에선 저에게 병원진단서를 보여주며 어머님 병세가 안정적이고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단식을 중단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후에 어머님은 병으로 별세하셨고, 추모제 당일에 국내외 매체가 저를 기다리고 있기에 감옥 측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어머님께 향을 올리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저는 너무 분노하여 거절하였고 이튿날 발인식 때 땅바닥에 엎드려 울며 충성과 효도를 둘다 할 수 없음에 애통하였습니다. (得甲狀腺癌的是我,不是母親。我於1974年夏天因甲狀腺癌開刀,我媽媽因年紀高,忽然在電視上聽到愛女第一個被逮捕,就昏倒在地,跌斷腿骨,從此臥病醫院,每天以淚洗面,思念我。我為了爭取去探病,在獄中絕食,獄方交給我醫院診斷書,說母親病情穩定,無生命危險,要我停止絕食。但不久母親就病逝,公祭那天,因為國內外媒體都在等我,結果獄方只准我半夜回去拈香,我憤而拒絕,第二天出殯時我哭跪在地,哀慟忠孝難兩全。)



3. 대만-한국 관계 (韓台關係)


Q10

변희재: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만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임시정부 때 독립자금을 지원해준 것, 6.25 때 지원해준 것,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아시아반공연맹을 만든 것 등등 대개 장제스 정권의 일입니다. 장제스 정권에 의해 투옥이 되기도 했고, 장개석의 국민당과 맞선 민진당에서 정치활동을 했는데요. 장개석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십니까. 대한민국에선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경우 각기 건국과 산업화의 공은 인정하되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실책이다, 이런 정도로 평가하는데요.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분들의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더 복잡할 것 같습니다.


뤼슈렌: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설립된 100주년 기념일입니다. 그 해 중화민국총통 쑨쫑샨(쑨원의 별칭, 孫文)과 그 후임 장제스는 대한민국이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독립하는 것을 지지하였습니다. 장제스와 이승만 두 대통령이 미국의 지지로 ‘아시아반공연맹’을 설립 서로 연합하여 중공과 북한 공산정권에 대항하였습니다. 한국의 연세 있으신 분들이 장제스 지도자의 중국국민당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今年是「大韓民國臨時政府」在上海成立100週年的紀念,當年中華民國總統孫中山以及後來繼任的蔣介石都對大韓民國從日本殖民解放獨立予以支持,蔣介石與李承晚兩位總統在美國讚許之下成立「亞洲反共聯盟」,聯手對抗中共和北朝鮮共產政權。上了年紀的韓國父老因此對蔣介石領導的中國國民黨政府心懷感激,這是理所當然。)


그러나, 장제스 정권은 일본식민지였던 대만을 이어받아 대만사람의 동의도 없이 38년간 이라는 긴 시간동안 계엄통치를 하였습니다. 특히 1947년 ‘228사건’으로 전 대만에서 엄청난 인명살상을 자행하여 대만사람들의 마음에 한을 품게 하였고, 때문에 대만인들은 이 정권이 일본사람들보다도 더 잔인하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만사람들은 한국사람들처럼 일본에 대해 원통한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不過,蔣介石政權從日本殖民政府接收台灣,並未徵求台灣人民同意,來台後實施長達38年的戒嚴統治,尤其1947年的「二二八事件」,展開全台大屠殺,使台灣人懷恨在心,認為比日本殖民台灣還殘暴;對比之下,台灣人就不像朝鮮那麼痛恨日本。)


중화민국이 1912년에 난징에 설립되었지만 1949년에 마오쩌둥(모택동, 毛澤東)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장제스는 1949년 12월 7일에 대만으로 피난을 와서 1950년 3월 1일에 스스로 총통에 재취임하였고 대만에서 고압적 권력통치를 펼치다 1975년에 병으로 별세하였고, 이후 아들 장징궈가 총통직을 계승하였고 1987년에 이르러서야 강대한 반대세력에 인해 ‘계엄해제’를 선포하였습니다. 장씨 부자는 대만 민주화 운동세력들에게 ‘웨이추안즈이저’(위권주의자 또는 권위주의자. authoriatarianists)로 불립니다. (中華民國於1912年在南京成立,但1949年10月1日就被毛澤東推翻。蔣介石於1949年12月7日逃難到台灣,1950年3月1日宣布重新就任總統,開始在台高壓的威權統治。1975年他病逝,後來由其子蔣經國繼任,直到1987年,才在強大的反對勢力中宣布「解嚴」,因此蔣氏父子在台灣的民主化運動中被定為為「威權主義者」(authoritarianists)。)


Q11

변희재: 대한민국 노태우 정부에서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시키는데, 그때 심정 혹은 아쉬운 점은?


뤼슈렌: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 노태우 정권이 예고없이 갑자기 대만과 단교를 선포했습니다. 그때 저는 입법원외교위원회의 입법위원이었습니다.  외교부장 치엔푸(錢復)가 8월23일 저녁에 임시로 외교위원을 초청하여 타이페이빈관에서 식사를 하였고 사전에 한국과 대만이 단교한다는 비보를 통지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중화민국 수교국 중 제일 중요한 나라였고 좋은친구와 인사도 없이 이별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비통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민진당은 아직 집권하지 않았고 모든 외교는 국민당이 주도하였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1992年8月24日,大韓民國大統領盧泰愚政府在無預警之下,突然宣布與中華民國斷交。當時我是立法院外交委員會的立委,外交部長錢復於8月23日傍晚臨時邀請外交委員在台北賓館吃飯,提前告知韓台斷交的惡耗。當時韓國是中華民國邦交國中最重要的,好友不告而別,我們心中十分悲痛,但當時民進黨還未執政,整個外交由國民黨主導,我們很無奈。)


Q12

변희재: 저도 감옥에서 출소한 후, 한국과 대만의 국교단절일(8월 24일) 전날인 8월 23일, 대만대표부 앞에서 국교 정상화 촉구 선언식을 했습니다. 부총통님께서 바로 다음날 감사의 인사를 한 것으로 압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소식을 전달받으셨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뤼슈렌: 2019년 8월23일 미디어워치 설립자 변희재 선생이 서울에서 ‘한-대 국교정상화’ 운동을 시작할 때, 저는 유럽과 아시아, 미국 등 각국 귀빈을 대만에 초청해 ‘제3회 동아시아 평화토론’을 개최했습니다. 그 다음날 오전에, 저는 한국에서의 소식을 들었고 바로 대회 개막 축사 때 그 소식을 선포하였고, 전원이 다 박수를 쳤습니다. 특히 참석하신 한국 국회의원과 학자, 전문가 분들이 매우 흥분하였습니다. (2019年8月23日,當Media Watch 創辦人邊熙宰先生在首爾發起「台韓關係正常化」運動時,我邀請來自歐亞美各國貴賓來台參加第三屆「東亞和平論壇」,隔天上午我得悉消息,立即在大會開幕致詞時宣告,獲得全場鼓掌,尤其與會的韓國國會議員及學者專家們,特別興奮。)


Q13

변희재: 미디어워치 독자들이 성금을 거두어, 한화로 약 1천만원 정도의 돈을 들여 대만 중국시보에 광고를 냈는데, 이 소식은 전해받으셨습니까.


뤼슈렌: 10월 10일은 중화민국 국경일이고 그 날 중국시보에 검정배경에 흰 글자로 반면(半面) 광고가 있었는데 미디어워치가 ‘한국과 대만 국교정상화’ 촉구 운동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또한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저는 서울에 초청 방문하였고, 한국 국회 안에서 ‘한국-대만관계의 과거와 미래’라는 주제로 연설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변희재 선생님과 미디어워치 친구분들의 열정에 매우 감동하였습니다. (10月10日中華民國國慶日,當天的中國時報出現黑底白字的半版廣告,宣示Media Watch 主導推動的「韓台關係正常化」運動,令我十分感動。沒想到不到一個月,我就獲邀到首爾訪問,並在韓國國會大廈發表「韓台關係的過去與未來」演講,對邊熙宰先生及Media Watch 好友們的熱情十分感動。)



4. 평화중립과 대만-중국 관계 (和平中立與台-中關係)

 

Q14

변희재: 평소의 지론이 대만 중립화 독립, 특히 대한민국과 홍콩, 싱가폴도 함께 중립화 하자는 주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 토론회에서도 특히 이 지점 관련해서,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나올 테고, 대만 역시 독립을 하려면 오히려 더 미국의 힘을 이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텐데요.


뤼슈렌: 제가 2015년 8월15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70년 되던 날, 대만 입법원에 100명 각계인사들과 함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고 대만평화와 중립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중미 두 강대국에서는 대만이 전략 관건이라 생각하며, 안전과 평화를 보존하기 위한 대만의 유일하고도 가장 좋은 선택은 국민투표를 통해 전세계에 ‘평화와 중립’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합국이 2017년 2월2일 통과시킨 ‘71/225호’ 결의와 부합하며, 이는 전세계 각국에서 ‘중립정책’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동아시아의 이웃나라, 즉 한국을 포함해 일본, 필리핀과 대만 이 네 민주국가가 평화중립을 선포하면 강대한 평화중립동맹 지역을 형성할 수 있고, 동아시아의 민주, 평화와 변영에 매우 많은 이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我於2015年8月15日二次世界大戰結束70年那天,在台灣的立法院邀請100位各界人士共同發表宣言,開始推動台灣和平中立運動。除在台灣國內,我也遍訪世界各國宣揚「和平中立」的理念。台灣被中美兩強視為戰略關鍵點,為保安全與和平,台灣的唯一也是最好的選擇,就是透過公民投票向全世界宣稱「和平中立」,這也符合聯合國2017年2月2日通過的「71/275號」決議,呼籲世界各國支持「中立政策」。因此,我覺得如果東亞近鄰包括韓國、日本、菲律賓和台灣這四個民主國家,都能宣布和平中立,就可形成一個強大的和平中立區域同盟,這對東亞地區的民主、和平和繁榮絕對好處多多。)


Q15

변희재: 90년대 초반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대만 내에서 중국이 흔들리면, 홍콩, 대만, 상하이가 함께 남중국 독립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하던데, 혹시 아십니까.


뤼슈렌: 저는 그런 주장을 들어 본 적 없고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這個說法,我不曾聽過,也認為絕不可能。)


대만 현지 태생인 사람들, 혹은 1950년 이후 대만에 온 ‘중국내륙인’과 그 2세는 이미 대만의 민주와 자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상하이는 본질상 공산사회이고 홍콩의 최근 갈등은 대만 상황과 완전히 다릅니다. 대만은 차라리 ‘평화중립’을 추구하며 세상과 싸우지도 않고 타인과도 싸우지 않는 게 낫습니다. (在台灣土生土長的人,或者1950年代以後來台的「大陸人」及其第二代,早已習慣台灣的民主和自由,但上海本質上仍是共產社會,香港近年的掙扎,情況跟台灣完全不一樣。台灣寧可尋求「和平中立」,與世無爭。)



5. 박근혜 사건 (朴槿惠事件)


Q16

변희재: 부총통님께서는 2010년 방한 당시 한국의 데일리안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박근혜 후보를 잘 알고, 언니 박근영 이사장과는 저녁을 하면서 박근혜 후보를 위해 지원 유세를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두 사람은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뤼슈렌: 2002년 제가 부총통 취임후 2년 째 되던 해, 아시아 태평양국가의 여성정치자들을 초청하여 타이페이에서 ‘여성부녀리더’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한국 국회의원 8명이 초청돼 대만을 방문하였고, 그 분들이 떠나기 전에 총통부에 오셔서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중 한 분이 바로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 여사였습니다. 그때 그 분이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태생이 정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게 되었고 이미 국회의원을 수년간 했습니다. 원래는 일단락을 짓고 마무리 하려 했었는데 이번에 아시아 태평양 여자리더회의에 운 좋게 참석하게 되었고 특히 대만의 첫번째 여성 부총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국 후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인연으로 저는 그분의 정치와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매우 슬프기도 합니다. (2002年我就任副總統第二年,邀請亞太國家的女性政治家來台北召開「女性婦女領導」會議,當時韓國國會女議員有八位應邀來台,她們在臨行前到總統府向我辭行,其中一位是當時擔任國會議員的朴槿惠女士。當時她對我說了一句令我終生難忘的話:「我生性不喜歡政治,卻生長在第一家庭。我已擔任國會議員多年,本想就此告一段落,但這次有幸參加亞太婦女領導會議,尤其認識到台灣的第一位女性副總統,我已決定回國後,努力要更上一層樓!」有此因緣,我對她後來的從政,十分關注,也很難過。)


Q17

변희재: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 그 어떠한 뇌물도 받지 않았음에도 정치적 음모에 걸려, 3년째 감옥에 투옥되어있는데, 국제적으로 구명운동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뤼슈렌: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사건이 터진 후 얼마 안 되어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기도 전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저는 미디어를 통하여 이 사건에 대해 간접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임기내에 ‘사법면제권’을 가지게 되어 있는데 왜 한국에서는 이를  중시하지 않는지 매우 답답합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특사명단에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여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박대통령님  몸조심 하시길 바라며 많은 분들이 인간의 도리와 인권문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朴槿惠總統驚爆所謂「閨蜜門」事件後不久,總統任期未滿就被捕入獄。我透過媒體間接關注事件發展,覺得一般民主國家對民選總統在任期間的「司法豁免權」,為何在韓國未受重視,十分納悶。最近文在寅總統在特赦名單中並未包括朴前總統,令人遺憾,希望她保重,也希望大家多關心人道與人權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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