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자유통일강대국코리아 (역사/외교)


배너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쿠마라스와미 보고서(クマラスワミ報告書)’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26)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クマラスワミ報告書)’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7월 31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 내용 중 하타 이쿠히코(秦郁彦)의 입장에 대한 소개 등 일부 오류가 있는 부분에서는 편집을 가했다. 본 항목 내용은 일본 위키에서  ‘맥두걸 보고서(マクドゥーガル報告書)’(한국어 번역) 항목과 함께, ▲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위안부(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한국어 번역) 항목,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 문제(朝日新聞の慰安婦報道問題)’(한국어 번역) 항목,  ‘고노 담화(河野談話)’(한국어 번역) 항목,  ‘미국 하원 121호 결의(アメリカ合衆国下院121号決議)’(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쿠마라스와미 보고(クマラスワミ報告, Coomaraswamy Report)’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제출된 ‘여성에 대한 폭력과 그 원인 및 결과에 관한 보고서(女性に対する暴力とその原因及び結果に関する報告書, Report of the Special Rapporteur on violence against women , its causes and consequences)’의 통칭이다. 

여기서 ‘쿠마라스와미’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임명된 특별보고관인 라디카 쿠마라스와미(ラディカ・クマラスワミ, Radhika Coomaraswamy)를 가리킨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クマラスワミ報告書)’라고도 한다.


목차


1 개요


2 경위

  2.1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의한 유엔 로비 활동•IED 보고서

  2.2 일본 정부의 동향


3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3.1 E / CN.4 / 1996 / 53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특별보고서)

  3.2 E / CN.4 / 1996 / 53 / Add.1 (부속문서1)


4 위안부 문제에 영향을 준 부속문서1

  4.1 ‘미크로네시아 위안부 학살 사건’에 대해

      4.1.1 조지 힉스의 저작

  4.2 요시다 증언에 대한 언급

  4.3 북조선 위안부 증언

  4.4 일본 정부에 대한 권고


5 평가


6 일본 정부의 반론과 철회


7 그 후


8 참고문헌

 



1 개요(概要)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그 원인 및 결과에 관한 보고서’로서, 유엔 인권위원회가 제50회기에서 1994년 3월 4일 결의(1994/45)에 따라 스리랑카 출신의 라디카 쿠마라스와미를 특별보고자로 임명(임기 3년)하여 매년 동 위원회에 그 조사 결과를 제출시킨 것이다.

일본에서는 특히 1996년 1월 4일에 제출된 일본의 위안부에 대해 논한 부속문서(附属文書) 1의 ‘전시의 군사적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및 일본에서의 방문 조사에 따른 보고서(戦時における軍事的性奴隷制問題に関する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大韓民国および日本への訪問調査に基づく報告書,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의 내용을 문제시 하고 있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오늘날의 여성 문제에 대한 보고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이 보고서의 부속문서1(Add.1)은 한국 시민단체로부터의 “피해자가 현재도 생존해 있다”는 강한 압력을 받고 수록되었다. 부속문서2(Add.2)는 ‘가정내 폭력에 관한 입법’이다.

이 보고서는 1996년 4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그 작업을 ‘환영(歓迎)’하면서 내용에 ‘유의(留意)’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2 경위(経緯)

1990년 초에 시작된 ‘위안부’의 개인보상청구운동은 피해자의 주장에 찬동하는 국제 여론을 이끌어 내었고,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등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 전개되었다. 유엔에서의 활동은 1992년경부터 주로 유엔인권위원회 소위원회를 발판으로 이루어졌고 다양한 보고와 결의가 있었다.

2.1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의한 유엔 로비 활동•IED 보고서(日本弁護士連合会による国連ロビー活動・IED報告書)

일본변호사연합회(日本弁護士連合会, 일변연)는 1992년에 도츠카 에츠로(戸塚悦朗 또는 戶塚悅郞) 변호사를 해외조사특별위원으로 임명했다.

일변연은 해외 운동단체와 연계하여 유엔에 대하여 로비 활동을 하였으며, 1992년 2월 도츠카 변호사는 일본 NGO ‘국제교육개발(国際教育開発, IED) 대표로서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와 ’종군위안부‘ 문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기하고 ‘일본군 종군위안부’를 ‘성노예’로 국제사회가 인식하도록 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5월, 소위원회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에 대해 개인보상을 권고하는 국제교육개발의 최종보고서가 정식으로 채택되었으며 일본 정부에 유의사항으로 통지되었다.

1993년 7월, 유엔 인권위원회의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 보호 소위원회’에서 ‘전시 노예제 문제’ 특별보고자를 임명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스리랑카의 라디카 쿠마라스와미가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되었다.

1993년 8월, 유엔 인권위원회의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 보호 소위원회’는 특별보고자 반 보벤(ファン・ボーベン, Van Boven)에 의한 최종보고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를 받은 피해자의 원상회복, 배상 및 공정을 요구할 권리에 관한 연구(人権と基本的自由の重大な侵害を受けた被害者の原状回復、賠償及び公正を求める権利についての研究, Study concerning the right to restitution, compensation and rehabilit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 final report)’가 제출되었다.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의한 유엔 로비 활동과 관련하여 당시 일변연 회장이었던 츠치야 코겐(土屋公献)도 일변연이 유엔에서 위안부를 ‘성노예(Sex Slaves 또는 Sexual Slavery)’라는 용어로 다루었다는 점, 또 유엔이 일본 정부에 관련 보상을 하도록 제의했다는 점을 언명하고 있다.



그 결과,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있었던 세계인권회의(世界人権会議)에서 ‘성적 노예제’가 처음으로 ‘유엔의 용어’로 채용되었으며, 1996년에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도 ‘군대 성노예제(軍隊性奴隷制, military sexual slavery)’라고 명기된다.

아시아 여성기금의 이사인 오누마 야스아키(大沼保昭)와 운영심의회위원 요코다 요조(横田洋三)는, 유엔의 보고서는 유엔인권위원회의 심의를 하기 위한 재료일 뿐이지 유엔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본의 신문이나 NGO가 알고 있으면서도 외압에 의해서 유엔 보고서의 실상을 왜곡하는 보도를 했다고 비판했다.

2.2 일본 정부의 동향(日本国政府の動向)

이 시기, 일본 정부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설치하고 위안부 개개인들에 대해서 보상을 실시할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1995년 4월 유엔 인권소위원회의 ‘현대노예제 작업부회(現代奴隷制作業部会, Working Group on Contemporary Forms of Slavery is the United Nation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성노예가 된 여성의 문제에 관해’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지목하면서 행정적 심사위원회 설치를 통한 해결을 권고했다. 1995년 8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는 결의를 했다.


3 쿠마라스와미 보고서(クマラスワミ報告書)

3.1 E / CN.4 / 1996 / 53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특별보고서)(E/CN.4/1996/53(女性への暴力に関する特別報告書))

1996년 2월 5일,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특별보고서’(E / CN.4 / 1996 / 53)가 제출되었다. 이 E / CN.4 / 1996 / 53의 정식 제목은, ‘Report of the Special Rappoteur on violence against women, its causes and consequences, Ms. Radhika Coomaraswamy, submitted in accordance with Commission on Human Rights resolution 1995/85’이다.


3.2 E / CN.4 / 1996 / 53 / Add.1 (부속문서 1)(E/CN.4/1996/53/Add.1(付属文書1))

주요 보고서인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특별보고서’(E / CN.4 / 1996 / 53)에 앞서, 1996년 1월 4일, 이 E / CN.4 / 1996 / 53 / Add.1(부속문서1 ‘전시 군사적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및 일본 방문 조사에 따른 보고서(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가 인권위원회(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되었다.



4 위안부 문제에 영향을 준 부속문서1(慰安婦問題に影響する付属文書1)

보고서의 부속문서1 ‘전시의 군사적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및 일본 방문 조사에 따른 보고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고, 특히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배상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책임자의 형사책임과 관련해서는 일본 정부에 소추할 의무가 있다고 하면서도 “최대한 할 의무가 있다”라는 표현에 그치고 있는데, 권고의 마지막에 “범행을 최대한 특정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실시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문서의 기초자료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시 미군에 의한 ‘위안부’ 등에 대한 청취 조사, 조지 힉스의 서적, 그리고 쿠마라스와미 본인에 의한 한국•일본의 정부 관계자와 ‘전(前) 위안부’에 대한 청취조사다. 북조선에 관해서는 북조선의 관계기관에서 제공된 자료와 인권센터대표단의 ‘전(前) 위안부’에 대한 청취조사가 기초자료다.

또한, 당시 증언 중 하나로 ‘요시다 증언(吉田証言)’도 두 줄 정도 언급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 위안부에 대한 청취 조사는, 북조선•한국•일본 각 정부나 비정부조직을 통해 사전에 입수한 자료에 따라서 1995년 7월 북조선의 평양에서 4명(7월 15일~18일) • 한국의 서울에서 13명(7월 18일~22일) • 일본 도쿄에서 재일조선인 1명과 대일본제국육군병사 1명에 대해 실시(7월 22일~27일)하였으며, 3개국 16명의 증언 중 일부를 이 보고서에 요약했다고 한다.

쿠마라스와미는 위안부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의 시설인 ‘나눔의 집’에도 방문했다. 쿠마라스와미는 이들 위안부의 증언을 특히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수많은 사실오인이나 왜곡이 지적되고 있다. 역사가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도쿄에서 쿠마라스와미와 한 시간 가량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던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위안부의 고용계약은 일본군이 아니고 민간 업체와 체결된 것”이라고 쿠마라스와미에게 답변했던 것이 정작 보고서에서는 “하타는 위안부가 일본 육군과 계약을 체결했다 (...) 고 말했다”는 식으로 왜곡 기재되었다면서,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まことの心外)”고 비판하고 있다.

4.1 ‘미크로네시아 위안부 학살 사건’에 관해(「ミクロネシア慰安婦虐殺事件”について)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II. 역사적 배경 A. 총론 21절’에는 “미크로네시아에서는 일본군이 하룻밤에 70명의 ‘위안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진주해 오는 미군에 의해 체포됐을 경우, 이 여성들이 거추장스럽거나 방해가 되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일본군은 생각한 것이다(ミクロネシアでは日本軍が一晩に70人の「慰安婦」を殺した事件が起きた。進駐してくるアメリカ軍に捕まるようなことになれば、女性たちは足手まとい、邪魔者になると日本軍は思ったのである)”(‘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 번역)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기재는 호주인 저널리스트 조지 힉스(ジョージ・ヒックス, George Hicks)가 쓴 ‘The comfort women : sex slaves of the Japanese imperial forces’(1995년)이라는 서적을 참조로 했음을 밝히고 있지만, 이 서적에서도, 심지어 이 서적이 제시하고 있는 또 다른 출처인 김일면(金一勉) 씨의 저작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天皇の軍隊と朝鮮人慰安婦)’(1976년)에도, “70명”이라는 숫자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타 이쿠히코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대부터가 애매하기 때문에 ‘미크로네시아 위안부 학살 사건’은 완전히 사실오인이며,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일본공산당 출신으로 교토(京都) 시의회 의원 및 부의회 의원을 역임한 작가 니시구치 가쓰미(西口克己)에 의한 소설 ‘구루와(廓)’(1969년)에서의 기술(이 소설의 마지막에 1944년 2월 17일, 미군의 미크로네시아 트럭섬(トラック島, chuuk Islands)에서의 공습 중에 일본군이 위안부를 기관총으로 몰살했다는 내용이 나옴)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고증하고 있다. ‘구루와’는 나오키상(直木賞) 후보로도 올라간 회고록 스타일의 소설이다.

하타 이쿠히코는 또한 그런 학살이 있었다면 트럭섬 관련 전범 법정에서 대규모로 재판을 받았을 것이지만, 이 문제가 전범 법정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트럭섬 제4해군 시설부에 있던 아베 키요(阿部キヨ)의 회상에 따르면, 공습 직후 여성들에 대해서는 전부 귀국 명령이 내려져서 1944년 2월 28일 히카와마루(氷川丸) 등을 갈아타고 귀국했고 여기에 100여 명의 위안부도 동승했다면서 “그런 사건(학살)은 당시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는 또한 트럭섬에서 2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던 전 해군 주계(主計) 중위인 가네코 토오타(金子兜太)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는 사실 등을 통해 위안부 학살은 니시구치에 의한 픽션이라고 했다.

4.1.1 조지 힉스의 저작(ジョージ・ヒックスの著作)

조지 힉스(George Hicks)가 쓴 ‘The comfort women’이라는 서적은, 센다 가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김일면 씨의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 요시다 세이지,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등의 저작을 참조자료로 제시하고 있는데, 조지 힉스는 이런 서적들의 내용이나 증언 전부를 진실로 취급하고 있다.

자기 저서의 자료와 관련해서 조지 힉스는 먼저 도쿄대 교수 다카하시 아키라(高橋彰)의 소개로 재일조선인 3세 이유미(リ・ユミ)가 정보의 80%를 수집해주었고, 또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이해균(リ・ハイキュン) 교수로부터도 자료를 제공받았으며, 그 밖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의 협력도 받았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 그리고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참고문헌이 바로 이러한 조지 힉스의 저작에만 의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는 조지 힉스의 저작과 관련, 어떤 문헌을 참조했는지 각주도 붙어 있지 않고 원저에 없는 부분을 담고 있는 등 초보적인 실수와 왜곡이 많다면서 통속서(通俗書)로 평가하고 있다.

4.2 요시다 증언에 대한 언급(吉田証言への言及)

한편,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보고서 작성 당시에 지바(千葉)대학 교수였던 하타 이쿠히코의 요시다 저서에 대한 이의(異議) 내용도 게재하고 있다.

-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II. 역사적 배경 40절

The Special Rapporteur noted that historian Dr. Ikuhiko Hata of Chiba University, Tokyo, refuted certain historical studies made on the issue of "comfort women", in particular Yoshida Seiji’s book, which describes the plight of "comfort women" on Cheju-do island. Dr. Hata explained that he had visited Cheju-do, Republic of Korea, in 1991/92 seeking evidence and had co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major perpetrators of the "comfort women crime" were in fact Korean district chiefs, brothel owners and even parents of the girls themselves who, he alleged, were aware of the purpose of the recruitment of their daughters.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종의 역사 연구로서 특히 한국 제주도의 ‘위안부’가 얼마나 곤경에 처해 있었는지에 대해서 다룬 요시다 세이지의 저서에 대해서, 지바대학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 박사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하타 박사에 따르면 1991년부터 1992년에 걸쳐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하여 ‘위안부 범죄’의 주된 가해자는 조선인 지역의 가부장, 매춘숙소의 소유자, 또한 소녀의 부모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4.3 북조선 위안부 증언(北朝鮮人元慰安婦の証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채택한 옛 위안부 4명의 증언 중에서 북조선에 거주하는 정옥순(チョン・オクソン)의 경우는, “13살 때 일본인 수비병에 의해 납치되었으며 경찰서에서 여러 명으로부터 강간당했다. 왼쪽 눈을 맞았으며 이후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연행된 혜산(恵山) 시 육군 수비대에는 조선인 여자가 400명 쯤 있었고, 5,000명이 넘는 일본군의 성노예로 매일 40여명의 상대를 강요당했다. 위안부 동료 중 한 명이 왜 하루에 40명씩이나 상대해야 하느냐고 따지자, 야마모토(ヤマモト) 중대장은 다른 위안부 앞에서 그 여자의 옷을 벗긴 후에 못이 박힌 판 위에 굴렸으며 못판은 피와 살점으로 뒤덮였다. 그 후 그 여자의 목을 잘라서 그 고기를 삶아 다른 위안부에게 먹으라고 명령했다”(발췌)고 밝히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이러한 정옥순의 증언은 사실오인이 심하다면서, 정 씨가 납치됐다고 하는 1933년의 조선반도는 평시로서 전쟁터가 아니었으며 유곽은 있었지만 군대용 위안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북조선 평양에서 발행된 ‘로동신문’ 1992년 7월 15일에 게재된 다른 옛 위안부인 이복녀(李福汝)의 신상 이야기와도 꽤 닮았다고 지적했다(이복녀는 1943년에 만주 위안소에서 낙인이 찍혔으며, 이후 목이 잘린 사람의 머리 고기로 된 스프를 강제로 먹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었다).

4.4 일본 정부에 대한 권고(日本国政府への勧告)

1. 일본군에 의해 설치된 위안소 제도가 국제법 위반임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다할 것

2.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개개인(위안부)에 대해 원상회복과 배상을 할 것

3. 위안소와 관련, 일본 정부가 갖고 있는 모든 문서의 전체 공개

4. 이름을 밝히고 나선 일본군 성노예제 여성 피해자, 개개인에게 서면으로 공개 사과를 할 것

5.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도록 교육 내용을 수정할 것

6. 위안소에로의 모집 및 수용에 관여한 범행자를 가능한 한 특정하고 처벌할 것


5 평가(評価)

- 요시미 요시아키(역사학자)(吉見義明 (歴史学者))
사실조사와 관련하여 쿠마라스와미의 방문을 받았으며 보고서에 자신(요시미 요시아키)의 지론(持論)이 채용되었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일부 사실오인이 있는데 그 점을 수정하면 확고한 보고서”라고 평가했다(단, 후에 “식민지에서의 노예사냥적 강제연행은 확인되지 않았다”, “정신대가 위안부로 된 사례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 하타 이쿠히코(역사학자)(秦郁彦 (歴史学者))
하타 이쿠히코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서 사실오인이 상당히 많으며 “학생 보고서라면 낙제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오누마 야스아키(아시아여성기금이사이며 도쿄대 명예교수)(大沼保昭 (アジア女性基金理事で東京大学名誉教授))
오누마 야스아키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관해서 “학문적 수준이 낮고, 신뢰할 수 없는 출처에 의존하고 있다. 법적 논의에도 문제점이 있다”고 총평하고서 낙제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6 일본 정부에 의한 반론과 철회(日本国政府による反論と撤回)

1996년 3월, 일본 정부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매우 부당하다” “무책임하고 예단으로 가득하다” “역사왜곡에 다름아니다” “받아들일 여지가 전혀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전체 42페이지에 달하는 반박 문서를 작성해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했으나 이내 철회했다. 그 이유로 “반박을 하는 것으로 오히려 위안부 문제의 논의를 크게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철회된 일본 정부의 반론 문서는, 이후에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부정을 요구하는 기술은 삭제한 채로 아시아 여성기금의 위안부 지원 활동 등을 설명할 뿐인 "일본의 시책(日本の施策)”이라는 반 페이지 쯤의 간소한 형식적인 문서로 교체되었다.


7 그 후(その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이후의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것으로는 유엔 인권위원회 ‘인권위원회 차별 방지・소수자 보호 소위원회’의 특별보고자 게이 맥두걸(ゲイ・マクドゥーガル, Gay McDougall)에 의한 ‘맥두걸 보고서’(1998년 8월 채택)가 있다. 일본 정부는 맥두걸 보고서가 게이 맥두걸의 개인 보고서에 불과하다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변했다.

도츠카 변호사 등의 정치적 활동은 일변연 내부에서도 목적 외•직무 외의 행위라고 비판받았으며, 도츠카 변호사는 1998년에 일변연에서 해촉됐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인용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은 1983년도에 그의 저서 ‘나의 전쟁 범죄(私の戦争犯罪)’에서 언급된 것이지만, 1995년에 그 내용이 창작이었음을 요시다 세이지 본인이 인정했다. 요시다 증언을 세상에 퍼뜨린 아사히신문사도, 2014년 8월 5일에 요시다의 증언이 허위였다면서 19개 기사를 취소 정정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라디카 쿠마라스와미는 같은해 9월 4일까지 교도통신(共同通信)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에 대한 청취 조사 결과 등을 거론하면서 보고서의 내용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요미우리 신문도 같은해 9월 5일에 라디카 쿠마라스와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쿠마라스와미는 “보고서는 여러 위안부에 대한 청취조사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아사히신문의 오보가 있었더라도) 보고서를 검토(철회)할 필요는 없다” “요시다 증언은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입수한 증거의 하나다” “요시다 증언은 보고서의 핵심이 아니며 위안부의 증언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면서, (위안부의 어떤 증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미우리신문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의 조사에 협력했던 하타 이쿠히코가 “보고서는 ‘낙제점’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는 점도 전했다.

보고서 내용에 대해서 철회 의사가 없다는 라디카 쿠마라스와미의 발언에 대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같은해 9월 5일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입장과 노력을 토대로 하지 않았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일본 정부의 입장을 표명했다.

2014년 10월 14일, 일본 외무성 사토 쿠니(佐藤地) 인권인도(人権人道) 담당 대사도 뉴욕에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를 만났다. 사토 대사는 32년 전인 1982년 9월 2일에 있었던 요시다 증언은 허위였다고 하는 아사히신문의 2014년 8월 5일의 정정 보도에 따라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내용 일부인 요시다 증언의 인용 부분의 철회를 신청했다. 하지만 사토 대사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라디카 쿠마라스와미는 “요시다 증언은 증거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거듭 말하면서 보고서 내용 철회에 응하지 않았다.


8 참고문헌(参考文献)

- 아리마 테츠오(有馬哲夫), ‘1996년, 일본의 위안부 문제 반론문은 왜 봉인된 것인가(1996年、日本の「慰安婦問題反論文はなぜ封印されたのか)’ ‘신쵸(新潮) 45’ 2017년 5월호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 신초샤(新潮社) ‘신초센쇼(新潮選書)’, 1999년 6월. 전국 서지 번호 : 99104376. ISBN 978-4106005657

- 라디카 쿠마라스와미(ラディカ・クマラスワミ), ‘여성에 대한 폭력을 둘러싼 10년(女性に対する暴力をめぐる10年)’ VAWW-NET 재팬 번역, 아카시쇼텐(明石書店), 2003년 12월. 전국 서지 번호 : 20545568. ISBN 978-4750318325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