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은 2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고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이간질 중단하고 한국을 떠나라”고 외쳤다. 국민행동은 이날 호사카 유지 교수가 쓴 ‘신친일파(봄이아트북스, 2020. 3.)’의 내용과 일제시대 당시 1차 자료들을 비교한 포스터를 들고서 공창과 사창조차 구분 못 하는 호사카 유지 교수를 비판했다. 이날 현장에는 반일좌익 성향 유튜브 ‘서울의 소리’도 찾아와 “호사카 유지 교수를 지켜라”는 제목으로 라이브방송을 했다. 국민행동은 매주 월요일 오후 2시 세종대 정문 앞에서 집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아래는 국민행동의 집회 사진과 국민행동의 성명서. [성명서] 호사카유지, 한‧일 간 이간질 중단하고 양국 국민에게 사죄하라! 2020년 초,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신친일파』라는 이름의 책을 냈다. 그는 이영훈 교수를 주축으로 발간된 『반일종족주의』를 두고 ‘기이한 제목’이라는 비아냥조로 시작한 머리말에서 ‘노예근성’이라는 모욕적 표현을 동원하여 저자들을 비난했다.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문제 삼았다’고 하였으나, 애초에 정치적 색깔과 무관한 저자
정의기억연대(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관련 위안부 사기의 진실을 규명해온 시민단체가, 대학 수업에서 한 발언을 두고 학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검찰을 규탄하는 성명문을 발표했다. 지난 29일 검찰은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가 지난해 9월 19일, 연세대 발전사회학 강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춘에 종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류 교수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에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30일, 페이스북을 통해 “(류 교수의 발언) 녹취록에서는 류 전 교수가 매춘 진입 과정에 대해 “살기가 어려워서”라거나 “생활이 어려워서 그렇지 내가 원해서가 아니에요”라며 가난이 원인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여성(李如星)이 조사한 ‘조선의 예기·창기 및 작부의 수’(‘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2012)에 의하면, 1910년 당시 조선총독부에 등록된 조선인 접객업부 수가 1762명(일본인 4942명)이었던 것이 1942년에는 총 1만4472명(일본인 7229명)으로 8배 이상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난한’ 그녀들 중의
28일 수요일 오후 2시 서울 강북구청 소녀상 앞에서 “성노예상 철거, 정의연 해체”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집회가 열렸다. 현재 강북구청 앞 소녀상은 도로 점용허가 없이 건립된 불법 조형물인데다 불법으로 기부금을 모아 세워진 것으로 확인돼, 경찰이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이번 집회는 국사교과서연구소,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유튜브 정희일TV 주최로 열렸다. 집회는 앞으로도 매주 수요일 오후2시 계속된다. 정희일TV는 강북구청 소녀상 앞에서 24시간 집회를 개최한 지 열흘째이며 앞으로도 계속한다. 이하 사진은 청년스피릿 제공. 관련기사 : "강북구청 앞 소녀상은 불법이다" 고발장…경찰 조사중 [단독] 소녀상에 날아든 고발장…불법 조형물 위기
시민단체 국사교과서연구소·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은 26일 낮 12시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동원은 없었다”라는 주제로 마지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기자회견은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진행할 예정이다.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제시대 당시 위안소 이용규정과 위안부 서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며, ‘조선인 소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주장은 허구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자회견 후, 김 소장과 이인규 단장은 청와대 민원실에 서한문을 제출했다. 제6차 기자회견은 27일 수요일 낮 12시 수유역 8번출구 서울 강북구청 위안부상 앞에서 개최한다. 이하 사진은 청년스피릿 제공.
근래 한국 언론들은 반일의식을 기초로 군함도(하시마섬)를 아우슈비츠와 같은 곳으로 묘사하는 보도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반면, 일본 언론들은 군함도에 살았던 실제 도민들의 증언들을 하나하나 수집·청취·기록해가며 일제시대 당시 군함도의 진짜 모습을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19일, 일본의 자유보수계열 언론사인 세카이닛포(世界日報)는 1면 톱과 3면 하단에 걸쳐, 우에다 이사미(上田勇実) 편집위원의 ‘삽화집 ‘군함도의 시’에서 옛 도민 회고(挿絵集『軍艦島の詩』で元島民回顧)’ 제하 기사를 내보냈다. 군함도 옛 도민들이 당시를 회고하여 편찬한 신간 삽화집인 ‘하시마(군함도)의 시(端島(軍艦島)の詩)’의 내용을 단독으로 보도한 것이다. ‘하시마(군함도)의 시’의 편찬자인 이와사키 마쓰코(岩崎松子) 씨는 군함도 출신의 작가이자 시인이다. 그녀는 전후인 1949년에 군함도에 태어났지만, 전쟁 당시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언니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와사키 씨의 언니는 이와사키 씨에게, “조선의 음식 ‘하타이코(はったい粉)’(한국 전통 음식 ‘미숫가루’의 일종으로, 당시는 쌀가루나 밀가루 등을 뜨거운 물에 섞어서 다져 먹었다)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이것을 받
시민단체들이 19일 낮 12시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미향·유은혜 등 여권 정치인들을 향해 위안부 거짓선동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국사교과서연구소와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은 여당의 윤미향 의원(비례), 정춘숙 의원(용인시병)과 정부의 이정옥 여성부장관, 유은혜 교육부장관을 향해 “조선여인을 일제가 강제동원한 증거를 제시하라!”는 주제로 제3차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인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미야모토후지코 씨가 참석했다. 또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역시 한국에 사는 ‘김치와사비キムチわさび’ 유튜버도 참석했다. 이들은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본 관련 역사왜곡에 대해 발언했다.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은 초중고 교과서 속 수많은 왜곡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일본 관련 역사 왜곡 중단을 호소했다. 이하 사진은 청년스피릿 제공. 하단 기자회견문은 국사교과서연구소와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공동 명의로 발표됐다. [제3차 국민행동 기자회견문] 초등사회5-2 집필자 한춘희, 강제동원의 증거를 제시하라! 아이들 교과서가 난장판이다. 아이들 교과서에 문법조차 안 맞는 글이 실려 있는가 하면, 집필자도 설명 못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2019학년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 論争)’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18년 12월 7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은 일본 위키에서는 늘 이런저런 내용 변경이 존재하는 항목 중에 하나이지만, 큰 골격은 그대로다. 일본 내에서는 2000년대 이전부터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한 대논쟁이 있었던 탓에 관련 더 이상 급작스런 연구의 진전이나 인식의 변화는 없다. 난징사건 자체보다 오히려 이 사건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서사를 형성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미디어워치 편집부는 앞으로 일본 위키의 관련 항목들인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도 차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은, 일중전쟁(日中戦争, 지나사변(支那事変)) 도중인 1937년(쇼와 12년) 12월에 수행된 난징전(南京戦)에서 발생했다고 여겨지는 ‘난징사건(南京事件)’에서의 학살 존재 여부 및 그 규모 등을 논점으로 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일본과 중국
이전기사 :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1) 3.3.2 편의병 및 전시국제법 3.3.3 투항병・포로의 취급 및 전시국제법 3.3.4 포로 살해 논쟁 예 : 무푸산(幕府山)사건(야마다 지대의 포로 처단) 3.4 기간 및 장소 3.4.1 사건 기간 3.4.2 지리적 범위 3.5 당시 국제사회의 인식에 대한 의논 3.5.1 국제연맹의 결의 (계속)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4) 3.3.2 편의병 및 전시국제법(便衣兵と戦時国際法) 난징전에서 병사가 민간인으로 가장해 전투행위를 하는 ‘편의병(便衣兵, 게릴라병)’이라는 이유로, 중국 병사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 1937년 12월 14일~16일 난징의 안전구역에서, 일본군이 중국 병사를 약 6500-6700명 가량을 적발하여 처형한 바 있다. 이 편의병 처형에 대한 전시국제법에 따른 해석(
이전기사 :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2) 3.5.2 당시 중국 정부의 인식 3.6 당시 국제보도에 대한 의논 3.7 중국과 연합국 측에 의한 프로파간다라는 주장 3.7.1 중국의 프로파간다 3.7.2 국민당 정부(장제스 정권)의 프로파간다 3.7.2.1 코민테른과 미국 공산당의 중국 지원과 대일 선전 3.7.3 미・중 합작 프로파간다 3.7.4 팀펄리 저작에 대한 프로파간다 의혹 3.7.5 에드거 스노의 저작 3.7.6 기록 영상에 의한 피해과장설 3.7.7 아이리스 장의 ‘천황의 음모론’ 3.7.8 아이리스 장 등의 난징홀로코스트설 (계속)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4) 3.5.2 당시 중국 정부의 인식(当時の中国政府の認知) 일본 자민당의 토이다 토오루(戸井田徹) 중의원 의원은 아지아(亜細亜)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의 연구를 인용해
이전기사 :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3.8 전후 전범재판의 검증 3.8.1 난징재판 3.8.2 도쿄재판 4 문헌기록과 구술자료, 사진 및 영상 4.1 히로타 고키 외상의 전보 4.2 증언 4.3 일기사료 4.3.1 진중일지 4.3.2 구미인의 일기 기록 4.3.3 중국인의 일기 4.4 공식기록(전투상보) 4.5 시신 매장 기록과 논쟁 4.6 문학작품・영화 등 4.7 서한사료 4.7.1 의문의 사진(학살긍정파에 대한 반론) 4.7.2 의문의 사진(학살부정파에 대한 반론) 4.8 기록 영상 자료 4.9 세계기록유산 등록에 관하여 5 관련 작품에 대한 논쟁 6 논쟁에 대한 평가 7 참고문헌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4) 3.8 전후 전범재판의 검증(戦後の戦犯裁判の検証) 3.8.1 난징재판(南京裁判) 이 재판에 관한 비판으로는, 판결을 통해 책임자로 처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난징사건(南京事件)’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18년 7월 16일판, 번역 : 박아름). 본 역사적 사건은 80여년 전 중국에서의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역사적 사건은 아니다. 하지만 본 역사적 사건은 마찬가지로 관련 평가와 인식에 있어서 ‘학살’ 개념이 동반되었던 우리나라의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 광주 5.18 사건 등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여러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의 수준있는 정치·역사 토론 문화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미디어워치 편집부는 앞으로 일본 위키의 관련 항목들인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도 차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난징사건(南京事件) ‘난징사건(南京事件)’은 1937년(쇼와 12년) 12월의 난징전(南京戦)에서 일본군이 중화민국(中華民国)의 수도 난징(南京) 시를 점령한 후 약 6주간 내지 최대 2개월
이전기사 :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1) 8.2 도쿄재판 8.2.1 판결 8.2.2 ‘인도에 대한 죄’와 소인 9 일본과 중국의 전후처리와 전쟁 배상 9.1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9.2 일화평화조약(1952) 9.3 일중공동성명(1972) 10 명칭의 종류와 변천 10.1 도쿄재판 10.2 연구서 등의 표기 10.3 교과서 속의 표기 10.4 일본 국외에서의 표기 11 역사상의 ‘난징대학살’ 12 난징사건을 다룬 작품 12.1 소설 12.2 영화 12.2.1 전시중의 기록영상을 사용한 영화 12.2.2 일본영화 12.2.3 중화권영화 12.2.4 구미영화 12.3 만화 12.4 음악 13 참고문헌 ‘난징사건(南京事件)’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2) 8.2 도쿄재판(東京裁判) 1946년 5월 3일에 개정한 도쿄재판에서는 ‘제2류 살인죄(第二類殺人の罪)’ 소인(訴因, 소를 제기한 이유) 45로서, 피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하시모토 긴고로(橋本 欣五郎), 하타 슌로쿠(畑俊六), 히라누마 이치로(平沼騏一郎), 히로타 고우키(広田弘毅), 이타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일본의 국기 국가 문제(日本における国旗国歌問題)’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9월 26일판, 번역 : 황철수). 일본의 국기 국가 문제(日本における国旗国歌問題) ‘일본의 국기 국가 문제(日本における国旗国歌問題)’에 대해 설명한다. 현재 일본의 국기국가법(国旗国歌法, 1999년 8월 13일 법률 제127호) 규정에 따라서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국기(国旗)는 ‘일장기’(日章旗, 히노마루(日の丸)로, 국가(国歌)는 ‘기미가요(君が代)’로 지정하고 있다. 목차 1 기미가요 현황 1.1 의견 대립 1.2 유명 인사의 의견 1.3 국제 스포츠 경기 1.4 방송국에서 기미가요의 연주 1.5 교육 현장 1.5.1 기미가요를 대체하는 국가 제정 운동 1.5.2 기립 제창 문제 1.5.2.1 최고재판소 판결에 대한 지식인의 평가 1.5.2.2 오사카 부 오사카 시의 조례 1.6 국기 국가에 대한 논의 2 공립학교와 국기 국가에 대해 2.1 직무 명령과 관련 판결 2.1.1 확정 판결 2.1.2 분쟁 중 2.2 관련 항목 2.3 각계의 반응 2.3.1 아키히토 천황 (당시) 2.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서경덕(ソ・ギョンドク)’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9월 26일판, 번역 : 황철수). 서경덕(ソ・ギョンドク) 서경덕(徐 坰徳, ソ・ギョンドク, 1974년 5월 25일 ~)은 한국의 반일 활동가다. 한국 성신여자대학교(誠信女子大学校) 객원교수(편집자주 : 2011년에 전임교수로 승진)다. 한국의 중앙일보(中央日報)에 따르면 “자칭 타칭 홍보 전문가”다. 서경덕(ソ・ギョンドク, 徐 坰徳) 생탄(生誕): 1974 년 5 월 25 일 (46 세), 한국 서울 특별시 출신교(出身校):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 직책(肩書き): 성신여자대학교 객원 교수, 독립기념관(한국) 명예 홍보 대사, 전 국가브랜드위원회 자문위원 서경덕(ソ・ギョンドク) 각종표기(各種表記) 한글(ハングル): 서경덕 한자(漢字): 徐坰德 발음(発音): ソ・ギョンドク 일본어 읽기(日本語読み): じょ・けいとく 영어표기(英語表記): Seo Kyoung-Duk 목차 1 경력 2 반일 활동 3 불상사 • 부정 1 경력(経歴) 서울특별시 출생. 성균관(成均館)대학교 졸업. 고려(高麗)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