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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우시민이 되고 싶은 변희재'에 답한다

사회통합의 힘은 오직 진실이다


지난 6월 27일 동아일보 사회부 박정훈 차장이 <‘우시민’이 되려는 변희재>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일단 변변치 않은 인물에 대해, 나름 자료 검토를 통해 차분히 평가를 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안 그래도 SNS 상에서 필자에게 가끔 물어오는 질문에 대해 답도 하고, 신규 독자들에게 필자가 걸어온 노선 등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박정훈 차장의 칼럼은 이에 대한 훌륭한 질의와 조언이라 판단된다.

박정훈 차장은 먼저 다음과 같이 필자의 활동을 평가했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39)는 젊은 강경우파를 대표하는 논객이다. 그는 다른 우파논객에 비해 주장이 선명해 주목받는다. 진보를 ‘논리적 함정’으로 모는 기술도 탁월하다. 변희재는 지난해 11월 북방한계선(NLL)을 놓고 벌인 ‘사망유희’ 맞짱토론에서 서울대 미학과 12년 선배인 진보논객 진중권 교수를 ‘무차별 팩트 공세’로 무너뜨리면서 스타가 됐다. 진중권은 “준비가 부족했다”며 KO패를 인정했다. 논리 싸움에서 진보에 밀려왔던 우파 입장에서는 젊은 논객의 등장이 반가운 일이었다. 우파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일베)에서는 “보수의 희망”이라며 그를 영웅시하는 시각도 있다. 26일 통화에서는 그 스스로도 “행동하는 20, 30대 보수가 일베를 통해 에너지를 폭발시키면서 내 입지도 커졌다”고 했다.

그동안 보수논객 시장은 척박했다. 미래가 불확실한 시장이었다. 뜨뜻미지근한 보수의 반응 탓이었다. TV 보면서 혀나 차는 보수를 대신해 싸울 맛이 날 리 없다. 그렇다 보니 젊은 논객이 뛰어들지 않았다. 논객도 장사가 돼야 먹고산다.

변희재는 자신의 전문성이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전문적 식견으로 논쟁하는 것이 토론의 본질이다. 말장난은 토론이 아니다. 언어의 구체성이 내 말과 글의 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준만 교수로부터 배운 ‘팩트주의’와 ‘실명 비판 원칙’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필자의 위상이 높아졌다면, 그것은 일베를 중심으로 한 20대와 30대 내에서의 진취적인 청년 애국세력의 성장과 맞물려있다. 그리고 이것은 몰락하는 북한 김정은 3대세습 체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90년대부터 한류를 통해 문화강국 코리아의 위상을 세계에서 확인한 청년세대들은, 더 이상 북한 김정은 세력에 굽실거리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 10대까지 더 크게 확산될 대한민국의 새로운 자유통일 노선이 될 것이다.

그러다보니, 박정훈 차장을 비롯한 여러 매체와 게시판 등에서 필자의 과거 민주당 지지 노선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한다.


변희재는 진보진영에서 ‘변절자’로 통한다. 실제 그는 대학 2학년 때 인터넷 진보언론을 창간했고,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친노 매체였던 서프라이즈에 글을 쓰며 밥벌이를 했다. 그러다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 창당과 함께 그와 친분이 있었던 김경재 한화갑 전 의원 등 옛 민주계가 버림받으면서 ‘우파의 전사’로 변신했다. 변절 논란에 대해 그는 “예나 지금이나 무당파다. 보수든 진보든 내가 가진 원천사상을 추구하는 쪽이 내 편”이라고 했다. ‘천재들이 넘쳐나는 레드오션(진보 시장)을 떠나 참신한 인재가 드문 블루오션(보수 시장)으로 돈벌이하러 왔다’고 평가절하 하는 시각도 있다.


필자가 공식적으로 논객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9년 1월 인터넷신문 대자보를 창간한 이후부터이다. 이 당시 대학에 복학했을 때였다. 필자가 처음 투표를 했던 97년도에 DJP연합의 김대중 후보에 표를 던졌다.

당시 필자는 미국식 양당 정치를 모델로 삼아, 건국 이래 최초의 정권교체야말로, 민주주의 완성이자, IMF 경제위기를 초래한 낡은 구체제 관치 경제를, 글로벌 개방경제로 개혁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이라 판단했다. 그 당시 벤처창업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관련 책도 집필했고, 이명박 정권 때는 직접 청년창업포럼을 결성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대학가는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운동권의 비판이 주류

필자는 그 이후 인터넷신문 대자보 편집장을 맡으면서, 민주당 지지 노선의 방향을 잡았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김대중 정부를 신자유주의 원흉으로 보고, 민주노동당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보니 당연히 대학 내에서, 좌파 운동권 세력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사안에 대해 충돌했으며, 성폭력 조작사건 당시에는 20대 인생 전체를 걸고 좌파운동권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 그 시대에는 지금처럼 민주당이 종북운동권과 한몸인 시절이 아니었던 것이다.

2002년 대선을 맞아, 인터넷신문 대자보에서는 공희준, 장신기 등등이 대선에 집중하는 정치 프로젝트 사이트 웹진 서프라이즈를 기획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당시 국민일보 기자였던 서영석씨가 참여했었다. 그러나 서프라이즈의 ‘서’가 서영석의 ‘서’라는 것, 또한 서프라이즈가 노무현 개인을 지지하는 사이트라는 점은 오픈한 뒤에야 알게 되었다. 필자는 미국식 양당 정치를 모델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인 개인을 지지하는 것보다는 정당을 지지하여 정당을 개혁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참여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로 노무현 집권 1년차에 친노세력과 결별하게 된다.

친노세력은 집권하자마자, 민주당 분당을 획책했다. 예나 지금이나 필자의 눈에는, 민주당의 후보로 집권한 대통령이 그 당을 깨고 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이 정당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친노세력은 웹진 서프라이즈 운영에도 깊이 개입하여, 결국 서프라이즈 대표 자리에서 떠나, 웹진 시대소리를 거쳐, 인터넷신문 브레이크뉴스 편집장을 맡게 된다. 브레이크뉴스의 논조는 친노세력이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떠나고 남은 한화갑, 김경재 체제의 민주당 노선이었다. 박정훈 차장의 글대로, 한화갑, 김경재가 친노세력에 버림받아 필자가 우파노선을 택한 것은 아니다. 단지 민주당 분당을 정당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반대했고, 한화갑, 김경재는 그뒤 총선 정국에 들어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달리, 정권에 충성하거나 필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리와 돈을 나눠주며 보상해주는 정권이었다. 노무현 정권 5년 내내 멀쩡한 교수나 공무원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온갖 충성글을 썼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노무현 정권 내에서, 인터넷 여론을 이끌었던 웹진 서프라이즈 대표란 자리는 막강했다. 친노세력의 핵심 실세들과 당시 청와대 수석급들은 전화 한통으로 저녁, 점심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친노세력에서는 당시 만으로 29세에 불과했던 필자를 차세대 언론과 정치 리더로 육성할 계획들을 세웠다. KBS 정연주 사장 체제가 들어서자,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시청자위원으로 위촉해주었고, 실현될지는 미지수이겠으나,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최연소 KBS 이사, 최연소 방송위원회 위원으로 올라서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친노세력들은 그들의 전담매체 라디오21에서 당시 대중문화 평론가로 활동했던 필자를 위해 ‘스타바이러스’란 프로그램까지 기획해주었다. 필자는 그때 처음으로 방송 MC의 경험을 했었고, 그때 신참 PD가 나꼼수의 거짓선동꾼 김용민이었다.

이제와서 밝히지만, 당시 필자의 위상은 공인된 친노세력의 차세대 리더였고, 김용민은 그 리더를 떠받드는 시다바리 수준이어서, 필자에게 늘 ‘선생님’이라 부르며 모셨었다. 물론 필자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자, 김용민은 온갖 욕설과 성폭언을 밤새 연습하여, 나꼼수를 통해 친노종북 세력의 차세대 리더 자리를 꿰찼다.

대통령이 총선에 개입한 노무현 탄핵 찬성하면서 친노세력과 완전 결별

필자가 열린우리당 분당에 반대했을 때만 해도, 친노세력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언젠가는 다시 합쳐질 거란 전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탄핵이 벌어지자, 상황은 크게 바뀐다.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했던 인사들조차도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을 공격하며 하나 둘씩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필자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 구성을 위한 총선에 개입하여, 총선의 결과를 자신의 재신임와 연계시키는 행위는 명백한 3권분립의 위반으로 탄핵감이라 판단했다. 친노세력의 사형선고를 의미하는 탄핵을 지지하게 되자, 친노세력과는 완전히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훈 차장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천재들이 넘쳐나는 레드오션(진보 시장)을 떠나 참신한 인재가 드문 블루오션(보수 시장)으로 돈벌이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다.

돈벌이와 권력을 위해서였더라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웹진 서프라이즈에 그대로 남아서, 열린우리당 창당을 지지하고 탄핵에 찬성만 하지 않았으면 되었다. 집권 초기의 정권과 결별하고,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고, 9석밖에 안남은 야당 민주당을 지지하는 매체를 운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당시 친노세력에서 필자를 아꼈던 선배들이 여러차례, 찾아와서 “대체 왜 탄핵을 찬성하고, 이미 다 끝장난 민주당을 지지하느냐”고 꽤나 많이 설득하기도 했다. 그래도 막강한 보수세력과 손잡지 않았느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보수세력과 손잡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언론계 최대 현안 포털 비판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과 인연

보수세력과 선이 닿은 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언론계 최대 현안인 포털사 문제였다. 필자는 이념을 떠나 포털의 언론권력 남용이야말로 언론계를 죽이는 원흉이라 판단, 2005년부터 포털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거대 자본의 여론 장악을 비판해온 친노세력의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친노세력이 포털을 제어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중동 등 종이신문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 여론을 장악하여 영구집권 세력을 만들기 위해 포털의 독점과 언론장악을 두둔하고 찬양하고 보장해주었다. 이것이 정치에 이어서 언론에서의 친노세력과의 완전한 결별 이유였다.

2006년부터 필자는 조선일보 아침논단 필진에 합류하는데, 주로 포털에 대한 비판글을 쓰겠다는 합의를 했었다. 실제로 그 당시 기고한 6편의 글 중 5편의 글이 포털 비판이었다. 그러다 2008년부터는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 참여하여 1년 정도 활동한 바 있다. 이 때는 청년창업, 문화개혁 등등 다양한 주제를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모두, 창사 이래 최연소 고정 칼럼니스트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필자는 2003년, 2004년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 박정훈 차장의 두 번째 문제제기 거친 싸움 스타일에 대해서도 해명할 수 있을 듯하다.


일각에서는 “관심 끌어 출세하려고 막말만 한다”고 그를 비판한다. 이슈가 될 만한 포인트를 잡아 독설로 주목을 끄는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품격을 존중하는 보수에서도 “공격적인 말투가 거슬린다”는 평이 많다. 맞는 말도 싸가지 없게 한다고 욕먹었던 유시민 전 장관에 빗대 ‘우시민(우파+유시민)이 되고픈 사람’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고, 미국의 극우 성향 라디오 진행자인 러시 림보의 추종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20대 후반에 한겨레와 경향신문, 30대 초중반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고정칼럼을 썼던 사람이, 30대 후반에 들어 갑자기 막말을 퍼부어 관심끌어 출세를 해보려 한다? 더구나 바로 20대 후반 때는 친노세력 기관지 웹진 서프라이즈 대표를 하면서, 아무 때나 정권 실세들하고 만날 수 있는 위치까지 경험해본 인물이?

트위터는 나꼼수 등 친노종북 세력이 장악한 전쟁터, 애국세력이 악전고투하던 상황

필자가 거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2월, 나꼼수들이 맹위를 떨치며, 대한민국을 위협할 때, 이들과 정면으로 싸우겠다고 작정하고 트위터에 들어갔을 때부터였다. 나꼼수들 뿐 아니라 조국, 진중권, 이외수 등등이 트위터 공간을 장악하여 거짓선동을 퍼붓고 있는 상황에서, 칼럼만 갖고는 도저히 이들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트위터라는 공간에서의 정치적 기술이지, 방송과 같은 제도권 매체에서 거친말을 쏟아낸 적은 없다. 철저히 트위터 공간에 걸맞는 전술을 폈다는 것이다.

트위터 공간은 하나의 전쟁터이다. 필자는 트위터 공간에서 팩트를 무기로, 거짓선동을 잡아내는 역할을 주로 하지만, 노골적으로 거짓선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사기를 꺾는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그것이 거친말로 드러난 것이다.

그 전술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트위터에서 필자의 전술 이외의 다른 전술로 친노종북 세력의 거짓선동을 막는데 성공을 거둔 인물과 사례를 제시해주었으면 한다. 전술은 맞지만 출세를 위해서?

필자는 바보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출세하는지를 20대 후반부터 현장에서 생생히 지켜봤다. 노무현 정권이었더라면 필자는 원래 친노세력의 계획대로 방송위원 정도 자리 하나 따고, 강력한 친노매체 하나 운영하는데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노정권은 자신에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면 물불 안가리고 자리와 권력을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등 보수정권은 전혀 다르다. 이들 정권에서 출세하려면, 절대 친노종북 세력과 정면에서 맞붙으면 안되고,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권력자들과 어울리며 기회를 엿봐야 한다.

만 29살 때 KBS 시청자위원을 2년을 지냈음에도, 이명박 정권 시절, MBC의 거짓선동을 도저히 참지 못해, MBC 시청자위원에 지원했으나 “좌파들과 너무 강하게 싸워 부담스러워 임명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게 보수정권이다. 2007년부터 보수우파매체의 단체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의 운영진으로 참여해온 필자가 이런 보수 정권의 기회주의적 습성을 모르겠는가. 이제 박정훈 차장의 마지막 당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생긴다.


변희재가 우파논객으로 한 단계 성장하려면 ‘장사꾼’ 굴레부터 벗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사회 통합을 해치는 언행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우쭐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적 사고’다.


우쭐한 마음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다. 지금은 보수매체들의 연합체인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회장임에도 국회의원 한명, 청와대 행정관 한명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권력에서 멀어져있다. 노골적인 친 박근혜 매체라는 주간 미디어워치의 상반기 정부 광고가 단 1건이다. 그 1건도 정부 사람이 소개해준 게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보다 박근혜 정권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져있다.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애국시민들과 함께, 짱돌 던지면서 의병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애국단체 지도자들과 달리, 필자는 주간 미디어워치라는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그 우쭐함도 가질 수 없다. 4년에 걸쳐 이제서야 정기독자 5천명 정도의 매체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우쭐한 마음을 갖겠는가. 전국을 돌며 올해까지 독자 1만명 이상 확보하는게 목표이다.

안철수 거짓말 100만인 국민소송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회통합 운동

사회통합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필자는 사회통합의 기준은 진실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짓으론 통합을 만들 수 없다. 일시적으로 국민들을 봉합해놓아도, 작은 진실이 발견되면 또 다시 분열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진실을 기준으로 국민통합을 이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믿는 국민통합의 중요한 수단은 안철수 거짓말 100만인 국민소송이다. 국민의 힘으로 진실을 찾아, 그 힘으로 더 많은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방식이다. 설마 박정훈 차장이 “안철수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사회통합을 해치는”이라 평가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전체적으로 박정훈 차장의 글을 읽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필자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많은 왜곡보도가 쏟아졌기 때문에 기자 입장에서 그런 자료들 틈에서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아무리 필자 개인에 대한 글이라 하더라도 필자의 글이 모두 진실이라 볼 수는 없다. 아전인수격 해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이 다를 수는 있어도 팩트가 틀린 것은 없을 거라 장담한다. 이 글이 공개되면 역시 해석은 박정훈 차장 등 언론사 기자들, 그리고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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