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유용욱 주필 | 선거는 끝났지만, 이번 선거가 남긴 가장 중대한 문제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개표 결과를 둘러싼 정치적 해석보다 더 심각한 것은 선거 당일 오후 6시, ‘과학’이라는 권위를 두른 채 전파를 탔던 수많은 출구조사와 그 이름조차 생소한 예측조사였다. 그 숫자들은 최종 개표 결과와 어긋난 정도를 넘어, 민심의 방향 자체를 거꾸로 가리켰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실패나 일시적 착오가 아니다. 한국의 여론조사와 선거보도가 오랫동안 누적해 온 구조적 결함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우연(偶然)을 넘어선 체계적 오류(誤謬)와 '남 탓' 퍼레이드(parade) 서울을 비롯한 주요 광역단체장 선거, 대구와 경남, 그리고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드러난 예측 실패는 예외(例外)가 아니라 패턴에 가까웠다. 문제는 몇 퍼센트포인트의 오차가 아니다. 승패의 방향 자체를 잘못 예측한 사례가 반복됐다는 점이다. 통계학에서 오류(誤謬)는 무작위(無作爲)로 발생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이번 출구조사들과 예측조사는 이상하게 유독 특정 정치 성향의 후보를 과대평가하고, 다른 쪽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하는 방향성을 보였다. 이는 우연의 범주를 벗
인싸잇=유용욱 주필 | 대한민국 헌법 제 31조 4항이 규정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도입된 ‘정당 공천 없는 교육감 선거’가 주민직선제 도입 이후 오랜 세월을 거쳐왔다. 정당의 이해관계로부터 교육을 독립시키겠다는 취지는 숭고했으나, 오늘날 우리 앞의 현실이 남긴 성적표는 사뭇 무겁다. 기호와 정당이 사라진 자리에 ‘깜깜이 선거’가 고착화되었고, 정책 대결 대신 음성화된 진영 논리와 막판 단일화 셈법만이 선거판을 지배하는 역설을 낳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도적 검증 장치가 부족하다 보니 후보 난립으로 인한 표 분산은 고스란히 유권자의 몫이 되었다. 그동안 교육계 안팎이 이념 과잉의 우려 속에서 갈등을 겪는 사이, 교육 현장은 고충과 교실의 위기를 목격하면서도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 구조적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번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지역 교육의 미래를 바로 세울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또 교육 정상화를 바라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최근 철저한 검증과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정책적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에 민심의 이목이 쏠리는 현상은 눈여겨볼 만하다. 반복된 불복과 분열의 역사, 잔혹사로 남은 ‘각자도생(
인싸잇=유용욱 주필 | 오늘부터 지방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됐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말이 있다. “투표해도 달라질 게 없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냉소와 체념(諦念)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체념 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참여하지 않는 시민의 몫까지 정치가 스스로 절제해 주리라는 기대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투표는 권력을 통제하는 최소한의 장치 투표는 결과를 바꾸는 행위이기 이전에, 권력을 통제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누가 당선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이 유권자 앞에서 긴장감을 느끼느냐다. 그 긴장감이 사라질 때 정치는 민심보다 자기 논리에 충실해지고, 국민보다 진영(陣營)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런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재명 정권이 출범한 지 채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 성격은 단순한 ‘지역 일꾼 선출’에 머물지 않는다. 정권 초기의 국정 운영 방식 전반에 대한 첫 번째 중간 평가이자, 민심의 향방을 가를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개 유세에 나선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示唆)한다. 탄핵(彈劾)과 사면(赦免)이라는 헌정사의 거대한 굴곡을 몸소 겪은 전직 대통
인싸잇=유용욱 주필 |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정치인들의 언어와 태도는 유난히 따뜻해지고 겸손해진다. 평소엔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던 이들이 갑자기 민생을 말하고, 수년간 해결하지 못한 구조적 문제들이 선거를 몇 달 앞두고는 ‘당선 후 즉시 시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가 유난히 부지런해진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부지런함의 방향이다. 원칙보다 표 계산이 앞서는 정치 최근 정치권의 움직임을 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책의 일관성보다 표 계산이 앞선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특정 이슈에서는 시장을 적대시하다가, 다른 국면에서는 시장의 편에 서고, 원칙에 충실하기보다는 그때그때의 여론과 선거 지형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꾼다. 특히 여야를 막론하고 유력 정당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내로남불식 태도가 갈수록 선명해진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운 것은 비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면 ‘개혁’이고, 불리하면 ‘선동’이라는 이 지긋지긋한 이중 잣대는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만 키울 뿐이다. 최근 불거진 이른바 ‘기업 때리기’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특정 기업을 정치적 메시지의 도구로 삼는 방식은 어쩌면 아주 쉽
인싸잇=유용욱 주필 |스타벅스코리아의 이른바 ‘탱크데이’ 텀블러 마케팅은 변명의 여지 없이 명백히 경솔했고 또 부적절했다.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현대사의 가장 깊은 상처와 비극을 상업적 이벤트의 제물로 삼은 역사 감각의 부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점에서 이번 사안의 본질을 흐릴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정작 우려스러운 사안의 핵심은 그 이후 전개되는 논란의 양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잘못된 마케팅 하나에 대해 국가 권력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개입은 과연 헌법적 절제의 원칙 범위 안에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이다. 이번 사안에서 진정 놀라운 장면은 기업의 실책이 아니라 정부의 과민 반응이었다. 스타벅스코리아는 논란 당일 대표이사를 경질했고, 그룹 차원의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 그룹으로선 쉽지 않았을 결정들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실행에 옮겼고, 필요한 조치를 최대한 빠르게 취했다. 다시 말해 실무선의 판단 오류와 결과적 실패에 대해 조직이 즉각 책임을 지는, 전형적인 시장 자정(自淨)의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재명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격한 언사를 동원해 가며 “도덕적·행정적·법적·정치적 책임”을 거
인싸잇=유용욱 주필 |제 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후보등록이 마감됐다. 이제 다음 주 공식 선거운동이 본격 시작되면 각종 선거 홍보물과 현수막 등이 거리를 가득 채울 것이다. 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늘 그래왔듯, 각 정당의 총천연색 현수막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다양한 정치 뉴스를 보고 있자면 숨이 턱 막힌다. 왜냐하면 그 어느 곳에도 참된 미래를 위한 비전이나 민생을 위한 치열한 고민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상대 진영을 향한 날 선 독설과 과거 들추기, 그리고 “저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악마화만 난무할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선거판은 ‘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겨루는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니라, ‘누가 더 추악한가’를 폭로하는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렸다. 정책과 비전은 실종되고 분노와 증오만 유령처럼 떠도는 이른바 ‘감정 정치’의 과잉으로 정치가 실종되고 ‘축제의 장(場)으로서의 공정한 선거 분위기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버린 상황이다. 분노를 파는 ‘게으른 장사’, 갈등의 늪에 빠진 정국 정치권이 이토록 네거티브 공방과 진영 논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표를 얻기에 가장 쉽고 효율
인싸잇=유용욱 주필 |오늘날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균열은 어디서 오는가. 정치적 이념, 계층의 양극화, 젠더(gender) 갈등 등 수많은 진단이 쏟아지지만, 그 이면에는 더 근본적이고 무서운 결핍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세대와 계층을 가로질러 서로를 이해하게 했던 ‘공통 서사(Common Narrative)의 실종’이다. 지하철 안의 두 세계, 단절된 행성 출근길 지하철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라.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는 태블릿 PC를 눈앞에 바짝 대고 한 시간짜리 정치 비평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 옆의 20대 청년은 무선 이어폰을 낀 채 손가락을 쉼 없이 튕기며 15초짜리 숏폼 영상을 넘긴다. 겉보기엔 평온한 동승(同乘)이다. 그러나 이들이 마주하는 세계는 결코 같지 않다. 각자의 스마트폰 안에서 작동하는 ‘알고리즘’이 서로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성벽을 쌓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도, 서로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다. 미디어 광장의 붕괴와 필터 버블의 역설 과거의 미디어는 세대 간의 거대한 ‘광장(廣場)’이었다. 전날 밤 온 가족이 함께 본 뉴스와 드라마는 다음 날 밥상머리와
인싸잇=유용욱 주필 | 부산 북구갑 경선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한쪽에는 장관 출신의 재선 국회의원, 탄탄한 당 조직과 책임당원의 지지를 등에 업은 ‘거물’이 서 있다. 반대편에는 조직도, 정치적 이력도 일천한 신인이 홀로 서 있다. 산술적인 데이터만 놓고 본다면 이 싸움은 공정하기보다 가혹해 보이기까지 한다. 냉소적인 이들은 벌써 결론을 내린 듯 말한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경선은 요식행위일 뿐이다”라고. 하지만 정치가 오직 숫자와 기득권의 계산기로만 움직였다면, 우리 정치사에서 ‘희망’이나 ‘변혁’ 같은 단어는 진작에 사라졌을 것이다. ‘이영풍’이라는 이름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 이영풍 전 KBS 기자가 부산 북구갑에 던진 승부수는 단순한 후보 등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승패의 계산표를 두드리기 전, 우리 정치권을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치는 과거의 안전한 선택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당하며 전진할 것인가.” 물론 현실의 벽은 높고 견고하다. 책임당원 중심의 구조, 복잡한 경선 산식, 그리고 신인이 극복하기 힘든 가산점의 한계까지. 이영풍이 넘어야 할 산은
인싸잇=유용욱 주필 | 대부분의 순직 의무복무자는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다. 군복을 입고, 경찰 제복을 입고, 또 소방복을 입은 채 일상의 경계에서 국가의 일을 하다 떠난 이들이다. 전쟁터가 아니어도 언제나 죽음은 찾아왔고, 그 순간은 늘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왔다. 그들이 떠난 뒤 남는 사람은 대개 부모다. 배우자도, 자녀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순직 의무군경을 떠올릴 때면 한 가지 질문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꽂혀 오래오래 남는다. 그들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누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것인가..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 애도(哀悼)의 목소리도, 분향소의 꽃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사람의 이름은 불리지 않으면 잊힌다. 그 사실 앞에서 국가는 비록 뒤늦긴 했지만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선택을 하나 했다. 개인의 슬픔에 머물러 있던 기억을 공동체의 책임으로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매년 4월 넷째 금요일, ‘순직의무군경의 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날은 단순한 추모의 시간이 아니다. 잊히기 쉬운 이름들을 국가가 직접 불러내는 날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혹 가족의 기억이 닿지 않는 순간에도, 국가는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선언이다.
인싸잇=유용욱 주필 | ‘검색의 종말’이 예고된 자리에 ‘답변의 독점’이 들어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 생태계의 대동맥은 검색 엔진이었다. 사용자가 궁금한 키워드를 입력하면 검색 엔진은 수십 개의 문을 열어주었고, 독자는 그 문을 통과해 언론사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우리가 알던 ‘링크의 문법’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기 시작한 지 오래다. 구글과 네이버가 전면 도입한 AI 기반 답변 엔진은 이제 사용자에게 길을 안내하는 대신, 스스로 목적지가 되기를 자처한다. AI는 수천 개의 기사를 제멋대로 학습하고 요약하여 단 몇 줄의 결론을 내놓는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뉴스 생태계의 근간을 지탱하던 ‘트래픽’이라는 혈액이 증발하는 미디어적 재앙에 가깝다. 이러한 ‘제로 클릭(Zero-Click)’ 현상의 확산은 언론사에게 단순한 방문자 감소 이상의 공포를 던지고 있다. 미디어의 비즈니스 기본 모델은 독자의 시선이 머무는 시간에 비례하는 광고 수익에 기대어 왔다. 그러나 AI가 뉴스를 재가공해 직접 답변을 제공하면서, 독자가 언론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공들여 지은 농작물을 플랫폼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