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 (건축사)
제 아버지와 혁이 아버지 모두 한전에 근무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한전 사택 동네에서 함께 컸습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전부터 친구였으니 제게는 혁이가 제일 오랜 친구입니다. 50년 넘어 친구인 셈입니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거리는 어릴 적 추억이지만 혁이 저 놈이 엄청 ‘별난 놈’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또렷한 어릴 적 추억이 몇 있습니다.
혁이는 집안의 막내였고 그러니 아버지가 한전의 고위직이셨습니다. 아마 지점장으로 부임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요즘 말로 좀 살고, 잘 나가는 집 애였습니다. 당시로 키도 크고 덩치도 컸지만 얼굴이 귀공자처럼 생기고 피부가 하예서 동네 친구들은‘똥돼지’라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외지에서 이사 온 낯선 애가 있으면 소위 왕따를 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심하진 않았지만 ...
동네 애들이 은근히 왕따를 했지만 애들을 집에 초대하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찜뽕 ...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금방 동네 친구들과 사귀었습니다. 아마 그 때부터 정치에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지금 막 생각났지만, 혁이는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다 잃으면 딸 때까지 배팅을 했습니다.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그렇지만 따면 소위 ‘개평’이라고 통 크게 돌려줬습니다.
혁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착하고 성격 좋은 제가 동네에서 꽤 인기가 높았습니다. 근데 혁이가 이사오고 몇 달 만에 혁이 저 놈이 동네친구들을 장악했습니다. 그때는 어린 만에 샘도 났지만 저도 어느 새 혁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돼, 서로의 집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혁이랑 나랑은 동네친구,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합니다만 ... 어느 날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원처럼 둘러싸고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싸움판이 벌어진 것이죠. 비집고 들어가 보니 혁이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상대는 학교에서 싸움 제일 잘하는, 요즘 말로 ‘짱’이랑 붙었습니다. 혁이 절친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싸움을 말리러 들어갔다가 저까지 ‘짱과 그의 패거리’에게 물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싸움이 벌어진 이유를 알아보니 상대방이 혁이의 같은 반 여자애들 고무줄 놀이를 하는데 고무줄을 자르며 괴롭혔고, 그 광경을 본 혁이가 뛰어들면서 싸움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싸움으로 혁이는 일약 학교서열 1~2위를 다투는 존재가 됐고 여자 애들 사이에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교조 명단 공개 사건’의 예고편이 아닌가 합니다. 그후 6학년에 진학해서 혁이는 우리 토성초등학교 전교 학생회장까지 하게 됩니다. 지금도 혁이 저 놈은 그때 자기가 상대방을 더 많이 때려주었다고 허풍을 칩니다. 제가 목격한 바로는 혁이가 조금 밀렸습니다.
중학교 시절로 기억 합니다. 여름에 우리는 충무동 방파제에 놀러갔습니다. 육지에서 이어진 방파제가 아니라 방파제까지 헤엄쳐 건너야 합니다. 약 20미터 정도 되는 걸로 기억납니다. 모두 옷은 벗어 한 곳에 모아놓고 팬티만 입고 수영을 했습니다. 건너가다 갑자기 한 친구가 파도에 휩쓸려 위험에 빠졌습니다. 허우적댔습니다. 모두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발 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혁이가 그 친구를 향해 갔습니다. 혁이가 데리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배가 터질 정도로 바닷물은 먹었으나 위험한 상황은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바로 접니다. 혁이가 제 생명의 은인인 셈이죠. 그후 저는 지금까지 바닷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도 식는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형제처럼 지낸 친구로서 저는 혁이가 한 사람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친구로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저 놈은 아직도 어렸을 적 불같은 열기를 간직하고 사나봅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으면 어떤 위험도 마다 않고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 저는 제가 오히려 불안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말을 할 때마다 혁이로부터 돌아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 별 것 있겠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자. 미안하다.” 가까운 사람은 아는 조전혁이의 특유의 웃음이 있습니다. 그 웃음을 씩~ 하고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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