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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⑩] “우리 모두는 사실상 위안부와 위안소 관리인의 자손”

“그들의 자손은 적어도 300만명… 오늘날 한국인의 20분의 1이 그들의 자손인 역사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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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모두가 위안부나 위안소 관리인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조선인 군 위안부민간의 창기와 작부는 (모두 합하면) 10만명도 넘었을 것이다만주나대만일본중국 관내로 나간 조선인 창기와 작부도 따질 필요가 있다그중 상당 수는 해방 이후 귀국했다그로부터 세월이 70~100년이 흘렀다그들의 자손을 모두 헤아려 볼까적어도 300만명은 된다는 어림수가 금방 생각난다오늘날 한국인의 20분의 1이다. (그들의 자손들은우리 이웃들이다” -이영훈 교장(위안부 진실 9회차 강의에서)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10회차 동영상 강의 '어느 위안소 쵸우바의 일기'(428)를 통해 당시 위안부들의 실생활을 들여다봤다.



여인들은 전대금 갚으면 위안소에 구속될 필요가 없었다

 

이 교장이 소개한 이 일기의 주인공은 미얀마(버마)와 싱가폴에서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인으로 근무하던 박치근 씨(1905~1979). 이 교장에 따르면 그는 본래 소실(小室, )과 함께 대구에서 매춘을 겸하는 여관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다. 그와 소실 사이에는 2명의 자녀도 있었다.

 

그는 19428월 일본군 위안소를 경영할 목적으로 처남과 처남의 아들, 처조카와 더불어 여성 19명과 함께 부산항에서 버마로 향하는 군용 수송선을 탔다. 이때 박 씨를 비롯한 10여 명의 업자와 150~200명의 여인들도 이 배를 탔다.

 

1942820일 버마 랑군에 도착한 일행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각 지역으로 배치됐다. 박 씨와 그의 처남은 19명의 여인들을 데리고 최전선인 아카브란 곳에서 칸파치클럽이란 위안소를 경영(19428~19431)했다. 사업이 호황을 맞아 박씨는 19432월 경 오늘날 10억원 가량(32000)에 달하는 돈을 본가로 송금하기도 했다. 불과 6개월만에 엄청난 거금을 벌어들였던 것.

 

어느날 처남과 조카, 위안부 2명이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몇 명의 위안부가 심하게 다치자, 박 씨와 나머지 위안부들은 랑군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박 씨에게 여자들을 데리고 위안소를 차리라고 권유했지만 박 씨는 그럴 의사가 없었고, 나머지 위안부들은 각자의 희망에 따라 다른 위안소로 흩어졌다.

 

이영훈 교장은 박 씨는 위안부들에 대해 어떤 채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 저는 대단히 인상적이라며 “(흩어진) 여성들이 전대금을 갚았으니 박 씨가 채권을 행사하더라도, 여인들은 거기에 구속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라고 부연했다.



위안부들은 매우 민첩하고 영민하게 살았다

 

박씨는 사고 이후 랑군을 거쳐 싱가폴에서 19442월부터 기쿠수이클럽의 관리인으로 근무했다그가 이곳에서 맡은 업무는 각종 부식재료를 구입하거나, 위안소의 취업폐업 신청허가 등을 받는 일이었다. 당시 싱가폴에는 일본군의 군정청이 설치됐는데, 박 씨는 군정청 보안과, 격무과, 보안과에 위안부 취업폐업 신청과 허가를 받는 일을 도맡아했다.

 

자국으로 귀국하는 여인들의 폐업허가, 여행허가를 받아 승선 수속을 밟아주는 것도 그의 중요 업무였다. 아울러 정기적으로 위안부들을 지정된 보건소로 데리고가 성병검사를 받게 하기도 했다.

 

또한, 박 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위안소의 영업 일보와 월보를 각 개인별로 작성하고, 월별수지계산서를 작성해 소속 부대 경무부 보안과에 보고제출해야 했다. 이때 소속부대로부터 콘돔을 받아오기도 했다또 하나의 중요 업무는 위안부를 대리해 은행에 가서 저금을 하거나 송금을 하는 것이었다. 위안부들은 대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직접 이런 일을 하기에 어려운 상황이 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이 교장은 여인들은 돈을 열심히 모아서 본가에 송금했으며, 상황의 변화에 매우 민첩하고 영민하게 대응했다. 송금액이 11000엔에 달하기도 했다“(여인들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거나 목표한 액수의 저축이 이루어지면 폐업 신청을 하고 여행허가서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박 씨가 키쿠수이 위안소에서 일하던 1년간 20명의 여인중 15명이 이곳을 떠났다“4분의 3 이상이 42년도 5~ 8월에 출발한 여자들이라고 강조했다그러면서 “(여인들은) 2년의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전대금도 갚고, 목표한 돈도 벌고, 그리고 전황의 낌새가 이상하니까 다들 (위안소를) 떠나간다떠나가는 여자들 이름을 보면 자매도 있다. 언니와 동생이 용감하게 싱가폴까지 와서 2년간 열심히 일해 상당한 액수를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이영훈 교장은 이 위안부들을 결코 어리석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라며 그들은 상황의 변화를 빠르게 판단했고 거기에 민첩하게 대응했다고 평했다.



미군 위안부 보고서 위안부 일부, 이전부터 가장 오래된 직업에 관계하고 있었다

 

이영훈 교장은 박치근 씨 일기를 바탕으로 위안소 여성들이 한 곳에 감금되거나 얽매인 성노예적 상태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이 교장은 “(위안업은) 고수익이었으므로 전대금이 쉽게 청산됐으며 이후 여인들은 주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위안소 업주나 관리인, 여인들의 관계는 사업적 관계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다만 최전선의 놓인 여인들은 달랐다. 아카브의 경우 폭탄이 떨어지는 위험한 곳이었으므르 (위안소) 이탈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교통편도 없고 군의 보호를 벗어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또한 이 교장은 위안소의 여인들은 한달에 두 번 정도 휴일을 받아 외출을 나갔다. 단체로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다방공훈련이 있으면 함께 나가 훈련을 받아야 했고, 중요한 시국 연설회가 있으면 단체로 연설을 듣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싱가폴에는 공장운영해운업목장업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번성한 업종은 위안소 영업이라고 생각한다박 씨의 일기는 전선후방에서 돈과 섹스로 번성하는 조선인 사회를 그리고 있다. 위안부들 역시 전쟁의 특수를 이용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인생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세상 물정에 어두운 무능력의 존재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위안부들이) 강제로 끌려와서 감시당하고 매를 맞는 노예적인 존재라는 이미지를 갖고 이 일기를 읽어보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분위기는 전혀 상이하다고 강조했다.

 

이영훈 교장은 위안부들의 유입 경로를 보여주는 미군의 위안부 심문 보고서도 소개했다. 이 보고서는 버마 지역에 서포로로 잡힌 위안부들을 심문한 기록인데, 이 자료에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이전부터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풍속업)에 관계하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위안부들이 부상병의 붕대를 감는 일’, ‘장병을 즐겁게 해주는 일’, ‘고되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는 주선업자들의 허위 설명을 믿고 위안부에 지원했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관련기사 : [전문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

 


우리 모두는 위안부나 위안소 관리인의 자손

 

이영훈 교장은 박치근 씨가 한국으로 돌아혼 이후 행적들을 소개했다. 그는 “194412월 박치근은 자신의 딸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24개월의 동남아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김해로 돌아온다“(당시) 그가 본가에 송금한 것은 39000엔의 거금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이후) 일기를 읽어보면, 그는 김해에서 대서업을 하는 가운데 과수원을 경영했다지역의 유지로서 어느 중학교의 이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과 일본 제국의 번성을 기원하는 매우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일본군 승전소식에 더없이 기뻐하기도 했다그렇지만 해방 이후에 또 누구보다도 충실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됐다. 그는 반공주의자였고, 이승만 대통령을 대단히 존경했다고 전했다.

 

이 교장은 저는 (박치근 씨의)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아버지 일기를 (어떠한 경위로) 고물상에 팔게 됐는지 조사를 하려다 그만뒀다박 씨의 아들은 대구에 살고 있는데 그를 추적하면 그의 아들, 친인척은 나와 가까운 누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밝혔다.

 

그는 저는 우리 모두가 위안부나 위안소 관리인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인 군 위안부, 민간의 창기와 작부는 (모두 합하면) 10만명도 넘었을 것이다만주나, 대만, 일본, 중국 관내로 나간 조선인 창기와 작부도 따질 필요가 있다. 그중 상당 수는 해방 이후 귀국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로부터 세월이 70~100년이 흘렀다. 그들의 자손을 모두 헤아려 볼까? 적어도 300만명은 된다는 어림수가 금방 생각난다오늘날 한국인의 20분의 1이다. (그들의 자손들은) 우리 이웃들이라고 덧붙였다.

 

 

 


다음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⑪] 한 사람의 일생을 지워버린 ‘위안부’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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