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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학은 좌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 : 비판에 대한 응답

“오늘날 대학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서구 문명의 전통적인 근간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 본 글은 미국 파사데나대학(Pasadena City College)의 철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페저(Edward C. Feser)가 2004년 2월경 테크센트럴스테이션(Tech Central Station)이라는 웹기반 매체에 기고한 ‘Universities and the Left: A Reply to the Critics’(현재는 링크가 없어짐)라는 에세이를, 원 저자의 허락을 얻어 미디어워치 편집부 현대사상팀이 번역해 공개하는 것이다. 이 글은 앞서 번역 공개된 △ ‘왜 대학은 좌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Why Are Universities Dominated by the Left?)’ ‘좌파주의는 바로 대학 교수의 아편이다(The Opium of the Professors)’로 불붙었던 논쟁에 대한 응답 형식의 글이다. 아래 글의 사진과 캡션은 모두 미디어워치 편집부 현대사상팀이 첨부한 것이다.



왜 대학은 좌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 : 비판에 대한 응답
(Universities and the Left: A Reply to the Critics)


오늘날 상아탑이 과연 좌파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은 항상 감정적인 토론이 되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주제에 대해 필자가 테크센트럴스테이션(TCS)에 기고했던 앞서 두 편의 글은 뜨거운 호의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뜨거운 호의적 반응은 주로 보수우파 성향의 교수, 학생, 학부모로부터 나왔는데, 이는 그들이 학계 체제로부터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느껴 왔으며,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우려를 진지하게 고려한 글을 읽는 것에 기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글에 대한 몇 가지 이의 제기도 있었기에, 이에 대해 답변을 하고자 한다. 반대 의견 중 일부는 진지했지만 일부는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 자신들을 굉장히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낸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교수들, 무게를 잡다 The Professors Weigh In

먼저 진지하지 않았던 후자의 경우부터 다뤄본다면, 학계에서 존경받을 만한 모든 것의 중재자로 자찬하는 브라이언 레이터(Brian Leiter) 교수는 오늘날 대학에서 보수우파가 비하당하고 적대적인 대우를 받는다고 하는 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적대감을 품고” 있으며, “괴짜”인 “미친놈”이며, 나의 “시끄러운 불평”과 “편집증적인” “거짓말”은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 상태에 대해 “심각한 정신의학적 의문이” 들게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자기 나름의 지적 포격을 시작했는데, 나의 글을 “X소리,” “쓰레기”라고 부르고 나를 개인적으로 “미친놈”, “네안데르탈인”, “멍청이”, “우둔한 인간”, “바보”, “천치”이자 “살의를 갖고 있는 반낙태주의 깡패들과 우익 민병대, 유사 신학자들의 병적인 보수주의에 기반을 둔 이 나라의 카오스와 증오의 산란장”의 결과물이라고까지 칭했다.

그리고 — 이게 바로 결정타인데 —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앤 쿨터(Ann Coulter, 편집자주 : 미국의 대표적인 여류 보수우파 논평가로 날카로운 독설로 유명하다)의 실종된 쌍둥이 형제”라고 비방하는 한 블로그(Pharyngula, 편집자주 : 미국 진화생물학자 PZ Myers 의 블로그로, 과학자이지만 좌편향적 견해를 많이 드러내기로 유명하다)에 대해서 링크까지 걸어 놓았다. 이 시점에서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와 그의 블로거 동지들은 그들의 유의어 사전에서 더 이상 남아있는 표현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익살꾼이 말하기를, 한 철학자가 기포드 강의(Gifford Lectures)를 하는 중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실패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만약 내 논문의 진실성에 일말의 문제라도 있었다면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는 친절하게, 무의식적으로였는지는 몰라도, 그의 설득력 있는 “반박”을 통해서, 그들의 주장으로는 필자의 논문에 없다는 그 증거를 오히려 제공해 준 셈이다.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는 또한 내 논문이 나의 경력에 끼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헌신적인 블로그 독자들을 동원해 인터넷에서 나 에드워드 페저와 관련된 불분명한 소문들을 이것저것 긁어 모아 블로그에 올린 후 아주 꼼꼼히 분석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나에 대한 관심은 고마운 것을 넘어 무서울 정도다. 그러나 이는 나를 의아케 한다. 앞서 필자의 논문이 그의 말대로 틀린 내용이라면(그러니까 학계를 오히려 보수우파가 지배하고 있다면), 왜 이 논문이 내 경력에 문제가 되겠는가?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의 말대로라면 학계 내에 바글거린다는 보수우파들이 그들의 대의를 위해 노력한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해주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가 보기에는 이제는 보수우파 학자들조차도 학계의 에티켓에 따라서 감히 현대 학계를 비판하고나선, 그러니까 점잖은 동료 교수들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는 우익 학자들과 연관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어쩌면, 대학이 기업과 군산복합체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좌익 교수는, 아무리 동지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도저히 참지 못하는 어떤 격분한 다른 좌익 동지에 의해서 대학을 모독했다는 사유로 쫓겨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노암 촘스키도 어쩌면 MIT에서 내일 당장이라도 해고당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는 나의 논문에 대한 코멘트에서 보수우파가 학계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나 그의 블로그의 앞선 포스트를 보면 — 이는 로버트 브랜든(Robert Brandon) 교수의 학계의 보수우파에 대한 악명 높은 발언과 관련된 것인데 —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는 여기서는 “학계에서 보수우파는 소수파”라고 인정하면서 “특정한 보수적 시각은 학계에서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 그는 내가 중세 철학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존경심을 명백히 멸시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 본인이야말로 중세 철학의 다소 부정적인 견본이라 할 수 있는 악명 높은, 이른바 아베로에스-주의자(Averroist,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이중 진실(double truth)”에 편승한 것일 수 있다.

즉, 로버트 브랜든 같은 좌익 교수가 학계에서 보수 교원의 부족을 확언할 때에는 이는 진실이 되는 반면, 우리 같은 미개한 보수우파가 그와 똑같은 주장을 할 때에는 그와 반대되는 주장이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철학에서 주목할 만한 전개인데, 흥미진진한 학자 세계의 성쇠(盛衰)와 표리(表裏)를 헌신적으로 블로그에 낱낱이 기록하는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가 이에 대해 명시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다. 물론, 이는 단순히 그의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몇 달 전에 학계의 보수우파들에 대해 ‘크로니클오브하이어에듀케이션(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誌에서 본의 아니게 우스꽝스러운 글을 기고한 마이클 베루베(Michael Bérubé) 교수가 있다. 

그는 문제의 글에서 보수우파 성향 학생들이 대학교수에 의해 무시 당한다는 주장에 대해 당혹스러운 분노를 표했다. 그러고는 남은 글을 그의 보수우파 성향 지도 학생 중 한 명인 “존(John)”을 편집증적인 떠버리로 세부적으로 묘사를 하는데 할애했다. 

이는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와 같은 부류의 숨막히는 무지함이던지, 자기 비하적인 풍자로 밖에는 볼 수 없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런 농담은 결국 마이클 베루베 교수 본인에게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그가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여하튼 마이클 베루베 교수는 나의 논문에 대해 코멘트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좋지 않다. 그는 내가 이전에 테크센트럴스테이션(TCS)에 기고한 글에 대해서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에드워드 페저는 최근 ‘퍼시피카 라디오(Pacifica Radio Network)’ 청취자나 ‘마더 존스(Mother Jones)’지 구독자, 또는 시기에 더 적절한 논급을 하자면 ‘무브온(MoveOn.org)’의 기고자의 이상적인 대통령 후보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돌프 히틀러라고 썼다.”(에드워드 페저 교수가 좌파 매체 독자들이 전체주의자를 숭상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의미)


해당 글을 읽어본 독자들은 물론 알겠지만 이는 내가 실제 말한 것에 대한 저급한 왜곡이다. 마이클 베루베 교수가 문학을 가르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국적 출판물을 통해 모욕한 불운한 학생처럼 문자 그대로 밖에 이해를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내가 실제로 전달하고자 한 의미(알고보니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미묘했었던)를 간략히 설명하겠다.

아니, 나는 진짜로 좌익들이 히틀러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한 점은 파시스트 및 국가사회주의 교리의 실제 내용과 역사적 전개과정을 보았을 때, 그것은 현대 우파보다 현대 좌파와의 접점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좌파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당나귀에 스와스티카 꽂기(pin the Swastika on the donkey, 편집자주 : 미국의 아동 게임으로, 당나귀 그림의 엉덩이에 꼬리를 붙이는 게임으로, 눈을 감고 몇 번 돈 뒤에 손에 꼬리를 들고 그림에 붙이는데 엉덩이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 이긴다.)’ 놀이를 굳이 할거라면 우파 쪽보다 좌파 쪽에 꽂는게 훨씬 이치에 맞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으로 정직하다면, 좌파들은 그런 멍청한 게임은 그만두고 특히나 자신들과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나치”, “파시스트” 딱지 붙이기를 당장 그만둬야 한다. 이 정도면 분명하게 이해했나?

어쨌든 마이클 베루베 교수의 투박한 ‘문자 그대로 해석함’이 그의 유머 감각을 앗아갔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일류 광대의 모습을 보였다. 좋은 예로서, 아부하는 듯하는 수상한 이메일이 내게 왔지만 나는 당시 그냥 생각이 단순한 독자라고 생각하여 호의적인 답장을 보냈다. (고백하건데 나는 마이클 베루베 교수보다 멍청이를 기꺼이 참아낼 의향이 있다 — 박사학위를 가진 멍청이들은 빼고 말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처럼 도저히 진정성 있어 보이는 독자를 모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알고보니 이 이메일은 마이클 베루베 교수의 “독자” 중 한 사람이 조작한 사기였다고 장난꾸러기 교수가 자신의 인기 블로그에서 밝혔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브라보, 베루베 씨! 나를 보기 좋게 속였군! 앨런 소칼은 비교도 안되게 능가하는 실력이야, 형씨. 

그런 조잡한 “장난 이메일”이 수완이 뛰어난 마이클 베루베 교수가 할 줄 아는 장난의 전부가 아니다. 대학의 좌익에 대한 나의 글에 대해 코멘트를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자신이 미묘하면서도 신랄한 풍자의 대가라는 점을 증명했다.

“나는 매주 강의 6시간을 강의실에서 부시 대통령이 술 취한, 거짓말쟁이 철딱서니라고 비난하고 학생들에게 레포트에서 얼마나 부시 대통령이 술 취한 철딱서니인지 잘 주장하느냐에 따라 점수를 줄 것이라고 말하는데 할애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지만, 나의 이런 중요한 교육 철학이 간과되기를 원치 않는다.” (주의, 마이클 베루베 교수처럼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는 독자들에게: 방금 했던 것은 풍자였다. 혹시나 해서 그러지만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 이해하겠지? 그러니까 불쌍한 교수에게 장난 이메일이든 아니든, 문의 이메일은 보내지 말길.)


이게 웃기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마이클 베루베 교수는 ‘진지한 사상가’니까 설마 언젠가는 장난을 집어치우고 내가 쓴 글에 대해 정식으로 반박을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사실 그는 반박을 하고 있다. 비록 그의 위트 사이에 교묘히 숨겼지만 말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다수의 대학 교수들은 수업 시간을 좌파 정치 이념을 주입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다만 부시 대통령을 신랄하게 욕하기만 하면서); 그러므로 교육 과정은 좌편향이 아니다. 

마이클 베루베 교수의 전제는 사실이라고 흔쾌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 전제로부터 그의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오류가 담긴 주장과 비교해보자. 이 주장의 오류는 마이클 베루베 교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다수의 목사들은 설교 시간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설교는 유신론 쪽으로 편향되어 있지 않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명백하다. 목사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의 설교가 유신론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가의 여부와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택하는 설교 주제와 설교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들 자체가 유신론의 진리를 전제로 하거나 암시하고, 그 반대 관점은, 아예 논의되지 않거나, 비하하는 방식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이미 유신론 쪽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 내가 앞서 사실이라고 주장했듯 — 일반적으로 좌파 교수들이 교실에서 노골적으로 좌파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선택하는 주제,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 교재가 이미 정치, 도덕, 문화, 종교 영역에서 좌익 이데올로기가 진실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치 철학 수업에서 리버럴 철학자 존 롤스, 리버테리언 철학자 로버트 노직, 그리고 그밖에 존 롤스에 대한 여러 페미니스트적, 중도좌파 공산주의적 비평가들의 교재를 이용하면서도 보수 학자들의 문헌은 전혀 교재로 쓰지 않고 동시에 로버트 노직은 그나마 읽을 가치는 있더라도 어떻든 어떤 현대 철학자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견해를 가진, 그냥 쉽게 반박되는 괴짜 정도로 다룰 수 있다. 이랬을 때 학생들은 당연히 좌익적 시각이 유일한 현실적 옵션이라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현대의 상아탑에서 너무나도 흔하다고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아까 언급했던 목사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종류의 일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즉, 교회 예배에 가는 사람이라면 유신론을 진실로 전제하는 내용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참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재단의 대학을 가는 사람이라면 교육 과정이 어느 정도 특정 종교적 관점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비슷한 논리로, 특정 학교의 이름이 “리버럴 대학교,” 또는 “마르크스 엥겔스 대학교,” 또는 “민주당 대학교”라고 한다면, 입학하고 나서 교육 과정이 좌편향인걸 알았다고 해도 누구도 항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세속 대학교들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교회나 종교 소속 대학이나 아니면 공산당 부모 자녀들이 다니는 “붉은 학교”와는 달리, 현대의 세속 대학교들은 대립되는 세계관 사이에서 중립인 척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반박증거? Counterevidence?

내가 언급한 교묘한 ‘정치화(politicization)’가 모든 대학교, 모든 교실, 모든 교수 사이에서 일어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이 오늘날의 대학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라는 것이다.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와 마이클 베루베 교수는 로버트 노직이나 나와 같은 비좌파를 이따금 대학에서 포착해내는 능력이 나의 바로 논리를 부정할 근거가 된다고 믿는 듯 하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애완견을 콩고기 햄버거만 먹도록 훈련시킨 채식주의자가 그렇게 함으로써 개과는 육식동물이라는 일반적 원칙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여기 교수 두 사람(브라이언 레이터, 마이클 베루베)과 그들보다 덜 명석한 그의 블로그 이웃들은 오늘날의 대학이 학생들에게 전통적인 태도에 대한 믿음을 저해하시키는데 한 몫 한다는 나의 주장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지만 그 웃음은 부끄럽게도 어색하다.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들의 말을 단순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해야겠다. 많은 보수 성향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충분히 사실이고, 그들 중 다수가 졸업 후 시간이 흘러도 계속 보수 성향으로 남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대학 경험의 결과로 대체로 학생들이 더 좌익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다. 더 분명한 논의를 위하여 이 문제를 여러 소문제로 나눠볼 수 있다:

1. 대체로 오늘날의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자본주의에 대해 더욱 적대적인 태도를 가질 공산이 큰가?

2. 대체로 오늘날의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현대 산업사회는 비인간적이고 환경을 파괴하며 제3세계를 빈곤하게 한다고 생각할 공산이 큰가?

3. 대체로 오늘날의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성별 그리고 민족 사이의 재산, 임금 등의 차이가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할 공산이 큰가?

4.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학생들은 대체로 서구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압제와 착취의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하는가?

5.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학생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에는, 그 중 특히 기독교 계통의 신념에는, 이성적인 근거가 없으며 기독교는 유례없이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인 교리라고 생각하는가?

6.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학생들은 대체로 전통 도덕 규범 중 특히 성과 관련된 부분은 아무런 이성적인 근거가 없고 미신과 편견으로 치부되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목록은 더욱 길게 쓸 수 있지만 이정도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의 목적은 이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이다. 

마이클 베루베 교수를 위해서는 내가 던진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네’라고 일일이 답해줘야 하겠다. 브라이언 레이터 교수를 위해서는 로버트 브랜든 교수가 비슷한 것을 말했는지 확인해보라고 조언하겠다. 그래야 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그가 결정할 수 있을테니까. 

어쨌든 이런 상황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에 대해서는 나는 그의 지적인 진실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 아니면 그 사람이 적어도 대학생들과 같이 보낸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네’라는 답이 나온다는 사실은, 오늘날 대학의 실질적인 기능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서구 문명의 전통적인 근간에 대한 믿음을 훼손하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브라이언 레이터나 마이클 베루베와 같은 사람들의 이의 제기를 꼼꼼히 읽어보면 그들이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은 오늘날 대학의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생각하기에, 모든 합리적인 사람은 위의 질문들이 맞다는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 

한 블로거가 말하기를 (그는 어떤 반어법적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대학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비합리적인” 보수들뿐이라고 말했다. “합리적인” 보수는 -- 그 블로거가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 “보수주의”가 하워드 딘(Howard Dean, 편집자주 : 전 버몬트 주지사 출신의 미국 민주당 정치인으로, 미국 민주당 내에서도 좌파적 성향이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보다는 존 에드워즈(John Edwards, 편집자주 : 2004년 미국 대선 민주당 존 케리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민주당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미국 민주당에서는 상대적 보수성향이다)를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 남학생 사교클럽 파티만큼이나 대학에 흔하다는 것이다. 

이는 대학이 어쨌든 정치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지만, 그 균형의 대가는 결국 멍청함이다.  

추가적인 이의제기 Further Objections

여러 독자들은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에서 현재 선호되고 있는 학적 경향이 교수들이 좌편향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대 증거를 제공한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이 이의제기를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마 그들은 진화심리학자들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공화당에 투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심리학자들의 투표 성향이 얼마나 진보적인지와 무관하게 그들의  생각은 보수적이라는 주장인가? 이것도 아닌듯하다.

실제로 진화심리학자들은 전통적인 태도를 지지할 의도는 전혀 없다면서, 단지 평등주의 사회정책이 좀 더 현실적인 경험주의적 토대를 가질 수 있도록, 전통적인 태도의 생물학적인 근거를 설명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강조한다. 우익적인 태도는 억압이나 기득권의 경제적 이익의 산물이라는 프로이트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설명”만큼이나 이는 전통주의자들에 대해 비하적이다.

사실 진화심리학이 본질적으로 “우익”적인 학문이라고 여겨지는 진짜 이유는, 진화심리학에서 인간에게는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의 존재를 믿는 것이 현재 사회에서 특질상 우익적인 것이 되버렸다는 사실은 내 주장을 더욱 뒷밤침해 줄 뿐이다: 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상정하는 사항들이 지난 세기 동안 너무나도 좌편향되어서 인간에게는 타고난 행동적, 심리적 경향이 있다는 뻔한 말조차도 엄청나게 반동적인 주장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진화심리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이 진보적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 노력하는데도 교수진 사이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 오고 있으며 학계에서 수 십년 동안의 논란을 겪은 후에야 지금 정도의 수준으로 발전해왔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된다.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만큼 분야의 명망있고 고상한 권위자조차도 어떤 과격주의 모임에 의해 행사가 중단될거라는 걱정없이 이 주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하는게 불가능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다. 이는 해당 분야가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는데, 이는 너무나도 지저분한 오명이 되버려서 아예 이름을 바꿔버려야 했고 이를테면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 편집자주 : 미국의 민주당 출신 42대 부통령으로 미국 민주당 내에서 상대적 보수성향이다)보다 더 우파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해당 분야 사람들은 늘상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동성애 혐오자, 기타 등등이라며 비난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진화생물학의 역사에 대한 언급은, 학계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의견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대학의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는 반자본주의 교수들이 점령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내 주장이 반박된다고 한다. 이 독자들은 정신없이 이메일이나 모욕적인 블로그 글을 쓰는라 바빠서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듯 하다. 

나는 사회주의가 학계내에서조차 죽은 이론이라고 썼고 경제학자들이 다른 학자보다 평등주의 정책의 결점을 발견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는 자신이 받은 교육을 비즈니스 현장에서 이용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에 헛소리 같은 아이디어가 지배하는 교육 과정으로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반면에 인문이나 사회과학 쪽은 보통 개인적 교양을 추구하는 학생들을 유인하며, 그 중 대부분이 보통 교편을 잡거나 정치에 뛰어들고자 한다. 그런데 이같은 분야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진실한 지식이라서가 아니라 공직이나 관료 내에 안전하게 자리를 지켜줄 지식이다. 따라서 이들 분야에서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은 훨씬 낮다(물론 이 사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니다; 나쁜 공공 정책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래서 이런 학과들에는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만큼 잘못된 생각을 뿌리뽑아야 할 유인이 적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는 공화당 지지나 보수주의자로 넘쳐난다는 것이 아니다. 일단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 편집자주 : 하바드총장을 지낸 경제학자로 역시 강력한 민주당 지지자이나, 하바드의 흑인학 연구과정과 여성 학자에 대해서 비판적 포지션을 취해서 논란을 낳았다)같은 “신 민주당 지지자(New Democrats)” 부류가 훨씬 흔하며, 기업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가 가망 없이 우편향이라는 것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라고 믿는 정신이상자들만이 이를 보고 대학의 강력한 보수집단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종교 Religion

마지막으로 일부 독자들은 “나는 무신론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고백에 대해 혼란을 드러냈다. 그들은 좀 더 주의 깊게 읽어 보았어야 했다: 

그것은 나의 고백이 아니라 내가 ‘마지막 한마디(The Last Word)’라는 책에서 인용한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의 고백이다. 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내가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에 대해 격분한 회의주의자들은 나에게 이메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 인간의 정신이 유물론적 관점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 플라톤 철학이 사실이라는 것,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 기독교가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외 오만 가지의 것들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명백하게도 내 글은 그들에게 내가 시간의 여유가 넘고 넘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종교, 형이상학, 마음의 철학, 변증론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기도 귀찮아하는 여러 익명의 독자들과 3,000자 이메일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할 거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 듯 하다. 

이 회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질문을 마이클 베루베 교수나 그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거짓 이메일이나 보낼 시간적 여유가 넘치는 것을 봤을 때 마이클 베루베 교수와 그의 독자들은 신학적 논쟁을 위해 몇 분을 기꺼이 투자해줄 듯하다. 

그러나 베루베 종파 사람들이 이러한 논의에 딱히 가치있는 기여를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므로, 나는 나의 회의주의자 독자들에게 이 분야에서 여러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책 한 권을 추천하도록 하겠다. 이는 유용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J.C.스마트(J.J.C.Smart) 교수와 J.J.할데인(J.J.Haldane) 교수의 ‘무신론과 유신론(Atheism and Theism)’이라는 책으로, 현재 두 번째 판이 발행되어 있는데 무신론자(J.J.C.스마트)와 유신론자(J.J.할데인) 사이의 다양하고 고차원적인 토론을 다루고 있다. (보라, 양쪽 입장 모두를 반영한 책을 추천함으로써 나는 언행일치를 실천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여기서 J.J.할데인 교수가 말하는 대부분에 동의하며, J.J.할데인 교수는 적어도 독자들이 나에게 물어본 형이상학적 주제를 조금이나마 모두 다루고 있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나와있는 “추천 도서” 목록은 더 깊이 공부하고 하는 독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두 저자 모두 그들의 책에서 학자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예시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는 아이디어들을 포함하는, 어떤 주제의 모든 측면에서의 진지하고 공정한 논의는 안타깝게도 너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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