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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도 사회를 더 낫게 변혁시킬 수 있는가?

“거짓말의 만연함을 인식하고, 동시에 거짓말에 대한 간파 능력을 키우는 일은 사회 변혁을 위해 중요하다”



※ 아래 글은 호주 울롱공 대학교(University of Wollongong)  사회과학과 브라이언 마틴(Brian Martin) 교수의 논문 ‘‘거짓말’도 사회를 더 낫게 변혁시킬 수 있는가?(Telling lies for a better world?)’를 원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진실성검증센터가 번역해 공개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학술지 ‘소셜아나키즘(Social Anarchism : A Journal of Theory and Practice)’에 참고문헌(references)은 생략된 채로 게재됐다(No. 35, 2003-2004, pp. 27-39). 아래 사진과 캡션은 모두 연구진실성검증센터가 덧붙인 것이다.





서론 Introduction

‘거짓’을 말하는 일은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다. ‘진실’을 말하는 일이 일반적으로는 좋게 받아들여진다.

거짓말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 중 하나는, 이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며 따라서 혹시라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절대주의적 도덕론에서의 관점이다. 

거짓말에 대한 또 다른 전통적인 관점은, 거짓말을 했을 경우 결과가 보통은 좋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셀라 복(Sissela Bok)은 이제는 고전이 된 자신의 논의를 통해서 거짓말은 통상 그 결과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를 최소한으로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Bok, 1978).

학자들은 이른바 미덕이라는 것을 좇아서 ‘진실’에 대한 연구들에 엄청난 정력을 기울여왔으며, 그렇기에 ‘거짓’에 대한 연구들은 그저 무시해왔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여러 학자들이 거짓말에 대한 전통적 지혜에 도전하면서 거짓말이 통념처럼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거짓말에 대한 그간의 다른 여타 믿음들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왔다(Bailey, 1991; Barnes, 1994; Ekman, 1985; Ford, 1996; Lewis and Saarni, 1993; Nyberg, 1993; Robinson, 1996).

거짓말에 대한 이러한 수정주의적 접근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함께 발달해왔다. 하지만, 거짓말에 대한 수정주의적 접근은 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와는 크게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거대한, 어떤 설명적인 ‘서사(narrative)’의 형태로 존재하는 단일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은 진실과 거짓의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해왔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조차 거짓말 문제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들의 주장이 의도적인 속임수라고 여겨지기를 원치는 않았다.[1]

아나키스트들도 ‘진실’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갖고 있다.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객관적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실증주의적 믿음부터 시작하여 여러 형태의 상대주의까지 말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조차도 거짓말 문제를 엄밀히 연구해보지는 않았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사회 변화를 위한 대중적 지지의 확대 수단으로써, 특히 정부기관들이 행하는 거짓말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에게 해방을 약속하는 혁명 세력들의 거짓말을 논파하는데도 두드러진 성과를 내왔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혁명 세력들은 결국 새로운 형태의 지배자가 됐을 뿐이다.

정부기관들과 혁명 지도자들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이 과연 그래도 되는가? 이 질문은 한마디로 거짓말도 인류 해방을 위한 유효한 참여 방식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이성적 설득에 높은 가치를 둔다. 예를 들어서 그런 관점은 아나키스트들의 격주간 잡지인 ‘프리덤(Freedom)’의 칼럼에서도 빈번히 출현하는 관점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관점과는 잘 융합되지 않는다. 

또 다른 아나키스트의 접근법으로서 반자본주의 시위에서의 ‘블랙 블록(Black Bloc)’으로 대변되는 ‘직접행동(direct action, 파업·시위 등을 일컫음)’이 있다. 비록 시위 참가자들이 자신들의 신상과 계획을 숨길 수도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목표나 방법과 관련해서까지 체계적 기만을 범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경찰 프락치들과 기관의 선동가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의도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고 기만적으로 행동하기가 쉽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나키스트들은 일단 체계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필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어떤 아나키스트 한 사람의 진실과 거짓 문제에 대한 성향까지 굳이 일일이 검증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의 접근법은, 거짓말 문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서 그것이 아나키스트들의 기획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몇 가지 개괄을 통해 관련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이어서 ‘개인적인 거짓말’과 ‘제도화된 거짓말’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아나키스트들을 위한 몇 가지 함의를 제시한다.


서두 Preliminaries

에크만(Ekman, 1985: 41)은 ‘거짓말(lying)’을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주변에 전혀 알리지 않고서, 상대방을 호도키 위해 벌이는 고의적인 선택(a deliberate choice to mislead a target without giving any notification of the intent to do so)”으로 정의했다. 

거짓말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는 ‘허위사실(falsehoods)’은 물론, ‘진실에 대한 은폐(concealing the truth)’라는 개념까지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은폐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거짓말은 오직 의도적으로 허위사실을 전하는 경우일 뿐이라며 자신들의 속임수를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다. 

한편, 에크만의 거짓말에 대한 정의에는 비언어적인 속임수도 포함된다. 미소라든지 몸짓은 언어만큼이나 거짓을 전할 수 있다.

거짓말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 있어서 또 다른 측면은, 거짓말이 ‘어떤 고의에 의한 선택’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고의가 없이 허위사실을 전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속임수가 포함됐다고(즉, 그것이 허위사실이라고) 증명할 수는 있다(Evans, 2001). 가령, 자신이 외계인에 의해서 감시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망상증을 가진 사람들은 적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에크만의 거짓말에 대한 정의는 “양해된 속임수의 영역(domains of acknowledged deception)”에서의 거짓 문제는 그 분류에서 제외하고 있다. 소설이나 기타 창작물도 고의적인 거짓말을 수반한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픽션이 실제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이를 진정한 거짓말로 평가하지는 않는다.(픽션이 피상적 사실의 제시를 넘어서 어떤 “깊숙한 진실(deeper truth)”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이를 위한 속임수에 대해선 우리는 충분히 수용한다.) 

이와 비슷하게 포커와 같은 게임에서도 특정한 속임수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지며, 이러한 속임수는 거짓말로 여기지 않는다. 가령, 축구에서는 선수가 페인트 동작을 통해 이쪽을 향할 것처럼 하면서 저쪽으로 뛰어 나가 상대 선수를 속인다면, 이는 비겁한 속임수가 아니라 기술적인 플레이로 여겨진다. 마술사들은 충격적인 속임수를 통해 관객들을 놀라게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직 ‘진실을 말하는 것’과 ‘의도적 속임수’의 영역이 서로 뒤섞일 때에만 문제가 발생한다. 히틀러의 가짜일기와 같이, 픽션이 논픽션 행세를 한다면 이는 사기 행위로 비난을 받는다. 포커에서는 자신의 패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속임수를 흘리는 일(이른바 ‘블러핑’)은 게임의 일부로 여겨지지만, 정말로 패를 조작해버리는 일은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끔찍한 일로 여기기 때문에 거짓말에 대한 논의에서 이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이 거짓말이라는 개념이 갖는 감정적인 무게는, 영국 의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국 의회는 어떤 의원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공식적인 징계를 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의원이 만약 다른 의원을 두고서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했을 경우에는 의원직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는 경우’, 또는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에는 이 거짓말에 대한 개념을 오용하거나 잘못된 정의를 내리게 된다.

가령, “진실을 아껴서 말하는 일(being economical with the truth)”과 같은, 거짓말에 대한 새로운, 완곡한 정의가 빈번하게 내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완곡어법 그 자체가 바로 거짓말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거짓말 Individual lying

진실은 마치 단단한 토대 위에 서있으며 또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 아이들조차 어린 나이부터 거짓말을 배우는데, 그것도 아주 상세한 수준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할머니에게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렴”, “아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주기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부모는 작위(作爲)건, 부작위(不作爲)건, 어린이들은 부모가 보여주는 사례를 통해 거짓말을 배운다. 

고전적인 ‘이중구속(double bind, 반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상황에서 서로 대립되거나 불일치하는 메시지들이 지속적으로 전달되는 인간관계의 상황)’의 일환으로서, 실상 모든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정결핍에 처해있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우리는 너희 어린이들을 사랑한다”와 같은 거짓말에 합세해주길 기대한다.

“잘 지내십니까?”류의 인사, 그리고 “잘 지냅니다”류의 대답처럼 일부 평범한 거짓말은 관습의 문제이며, 어차피 관습에 불과함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거짓말은 에크만의 거짓말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비즈니스 거래에서 거짓말은 일상적인 일이다.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라든지 “파티가 정말 즐거웠습니다”와 같이 예의를 차리는 거짓말도 일반적이다. 거짓말은 개인이 상대방을 끌어들여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사람간의 관계에서 있어서 진실을 얘기하는 것은 자칫 파괴적인 결과를 부르기 때문에, “나 어때?”라고 했을 때는 “정말 멋져”와 같이 일부분 속임수가 허용된다. 이에는 성관계의 만족도를 함부로 말하지 않거나 재미없는 농담에 웃어주는 것 등도 포함한다.

수정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거짓말의 만연함부터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수정주의자들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까지 주장한다. 

전형적인 사례로는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 살고 있는데 나치가 집으로 찾아와 “여기 유대인이 살고 있나”라고 물어보는 경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본다.[2] 

그다지 극적이지 않은 사례들도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위로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된다. 또한 우리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그의 인생을 더욱 나아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본인이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부분이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요점은, 진실을 말하는 것에는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가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정도의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생명을 살린다거나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것과 같은 다른 가치가 진실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의 가치가 너무 고평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경우는 어디까지나 ‘선의의 거짓말’의 경우에만 인정되는 것이다. 타인을 해할 의도가 있는 ‘악의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스(Barnes, 1994: 164)는 우리가 거짓말의 만연함을 인식하는 것으로서 뭇 사람들이 선의의 거짓말은 더욱 잘 받아들이게 되고, 반대로 악의의 거짓말은 거부할 수 있다고 본다.



여러 종류의 거짓말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무엇이 거짓말인지 규정하는 것은 까다롭다. 거짓말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흔히 ‘거짓말은 상황 특정적(lying is situation-specific)’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베일리(Bailey, 1991: 6)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한다:

“나는 예의바른 젊은 인도인들이, (나 역시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실제로는 내 요청을 수락할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요청에 대해 ‘일단 필요하다는 일을 해보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의아했고 불쾌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들의 문화에서는 타인의 요청을 직접적으로 거절을 하는 일은, 마치 상대방에 대해 완력으로써 우위를 점하려는 것과 거의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요청을 대놓고 거절하는 일은 노골적인 무례를 드러내는 일이며, 이는 우리 [미국] 문화로 친다면 “엿 먹어! 다른 병신이나 찾아서 그런 일 시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즉, 인도인들의 표면적인 거짓 약속은 물론 진실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이는 진짜 거짓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정체성, 자존감을 지켜주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예의바른 거짓인 것이다.“


베일리는 여러 문화권의 사례를 들며 무엇이 거짓말인지 정의내리기가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에 집중해온 시셀라 복(Bok, 1978)의 거짓말에 대한 정의와 같은, 거짓말에 대한 기존의 도덕적, 철학적 평가를 훼손시키는 것이다. 

요점은, 어떤 말 자체만으로 거짓말을 직접적으로 추론할 수는 없고 문화나 상황에 따른 조심스러운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Barnes 1994: 166).

거짓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이다. 이는 진실을 두고 ‘이를 수용하는 자아’와 ‘이를 거부하는 자아’, 두 자아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는 듯 하다. 하지만 세심한 조사(가령, Ford, 1996; Nyberg, 1993)를 통해서 이를 실용적인 개념으로도 만들 수 있다.[3] 

거짓말만큼이나 자기기만 역시 만연하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기여, 매력을 과대평가한다. 여러 설문조사들은 뭇 사람들 중 대략 80%가 자신이 다른 일반적인 운전자보다 운전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Frank and Cook, 1995: 103ff). 과학 논문의 공동저자들에게 자신의 기여분의 비율을 각각 물어본다면 보통 그 합은 100% 를 넘으며, 여러 저자가 논문의 경우에는 각각 기여분의 총합이 아예 200%를 넘겨버리기도 한다!

포드(Ford, 1996)는 거짓말을 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자기기만을 돕기 위함이며, 이는 곧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시민단체의 활동에 직결되어 있는 사람은 그 시민단체가 정말 중요하다는 자기기만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시민단체에 대한 평판이나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의 숫자를 부풀리거나 시민단체의 잘못은 언급하지 않는 등의 거짓말을 통해서 이를 가능케 한다.

자기기만은 본인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거짓말을 하도록 장려한다.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활동가의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은 조직에 대한 그러한 거짓말에 합세하며 과장이나 은폐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며 잘못된 것이고 거슬린다고 조언하는 일은 특별한 용기가 있거나, 또는 아예 어리석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한 거짓말에 대해서 포드(Ford, 1996: 278)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은 그런 류의 거짓말은 거짓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 사람들은 그저 소수파가 아니다: “정제되지 않은 진실을 계속해서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보다도 더 과장해서 평가한다는 연구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평가는 정신건강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현실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거짓말과 자기기만은 정상적인 정신상태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주장해볼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면 이를 간파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린아이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부모를 통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배운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놀랍지 않은 일이다.

에크만(Ekman, 1985)은 간호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직업관계 훈련 차원에서 화상 환자들과 절단 환자들의 비디오를 본 후 감정을 숨기도록 하는 실험을 했다. 어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욱 잘 숨기긴 했지만, 이러한 개인적 테스트에서 능숙한 거짓말쟁이와 어설픈 거짓말쟁이 사이에서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 실험은 에크만이 거짓말의 실용성과 관련해 수행했던 많은 연구 중 하나이다. 

에크만은 사람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거짓을 가리는데 능숙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용의자를 취조하는 경찰처럼 자신이 거짓을 잘 가린다고 믿고 있을 뿐이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운으로 맞추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설득력 있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꾸며야 하고(모순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행에 옮기면서는 감정을 잘 숨겨야 한다. 이는 거짓말이, 발화과 함께 특히 얼굴과 같은 신체를 통해, 양쪽 모두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크만은 대부분의 거짓말들이, 미소와 같은 기만적 ‘가면(mask)’을 쓰기 바로 직전에, 얼굴의 특정 근육에서 미세한 움직임과 같은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몸짓 표시들(tell-tale body markers)’을 수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몸짓 표시들을 관찰한다면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긴 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이는 단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땀을 흘린다, ‘눈을 빨리 깜빡이거나, 또는 딴 곳을 쳐다본다, 와 같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몸짓이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몸짓 표시들은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때의 행동과 비교해서 평가해야 한다.

에크만은 누군가에게 어떤 맥락 하에서의 몸짓 표시들을 관찰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거짓말을 간파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누군가를 능숙한 거짓말쟁이로 육성하는 것보다도 더 쉽다고 결론내리면서 거짓말 탐지의 과학적 초석을 닦았다.



비슷하게 ‘디미트리우스’와 ‘마차렐라’(Dimitrius and Mazzarella, 1998)는, 누군가에 대해서 최대한의 관찰을 하고 난 후에 판단을 하는 이른바 “사람 읽기(people-reading)” 접근법을 정립했다. 디미트리우스와 마차렐라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어떤 패턴을 찾고, 신체적 외형, 환경, 그리고 말과 행동에 집중을 하고 나서야 특정한 판단을 내리기를 권하고 있다.

거짓말 탐지 기술은 모든 거짓말쟁이에게 먹히지 않는다. 이른바 ‘자연스러운 거짓말쟁이들(natural liars)’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리상 특징을 보이지 않는다. 거짓말 탐지기들을 실제로는 감정 탐지기이기에,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속일 수 있다. 자연스러운 거짓말쟁이들은 거짓말 탐지기로도 잡아낼 수 없다.

그러나 매우 설득력 있는 거짓말까지도 포함해서 상당수의 거짓말은 그 사람의 발언과 객관적 증거의 차이에 대한 관찰을 통해 거짓말임을 간파해낼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특정 시각에 특정 장소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과 기타 증거가 그 사람의 부재를 보여준다면, 그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망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거짓말의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대부분은 진실하다고 믿는 ‘진실 편향(truth bias)’ 역시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진실 편향은 누가 누구에 대해서 그렇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우리는 특히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더 진실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런 현실은 판사나 배심원이, 용의자가 대놓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특히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게 된다(Robinson, 1996: 86). 진실 편향은 문화권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요약하자면, 거짓말은 우리 도처에 깔려 있으며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기만은 더더욱 간파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은연중에 그 사람의 자기기만을 유지시키면서 함께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되기 때문이다.  

일부 거짓말만이 피해를 끼친다. 대부분의 거짓말은 그 대상에게는 오히려 이익이 되며 자존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거짓말도 있다. 악의적인 거짓말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이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릴 가치가 있다.


제도화된 거짓말 Institutional lying

대규모 집단이 거짓말을 할 때, 이를 ‘제도화된 거짓말’이라고 칭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 책임 소재를 가려내기는 어렵지만 어떻든 개인들이 모여 제도화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좀 더 일반화하자면 ‘개인적인 거짓말’은 주로 사적인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에 반해, ‘제도화된 거짓말’은 공적인 영역에 있기 때문에 “공적인 거짓말(public lying)”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사적인 거짓말과 공적인 거짓말의 경계는 모호하다.

정부와 관련된 정치의 영역은 제도화된 거짓말의 주된 장이다(Edelman, 1971). 정치인들은 주기적으로 거짓말을 하는데, 이를 또한 주기적으로 부인한다. 정치인들의 거짓말이 탄로 난다면 이는 보통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며, 다른 정치인이나 정치 생명 전반에는 별 영향이 없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affair)’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지만 테이프가 공개되었고 이로써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정치인들은 말을 모호하게 하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에 대해서도 능히 부인한다. 조지 부시(George Bush)는 “제 입을 보십시오, 새로운 세금은 없을 것입니다(Read my lips, no new taxes)”라고 정말 명백한 발언을 했지만, 대통령이 되자마자 약속을 깼다. 정치인들의 공약은 선거가 끝난 뒤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진다.

제도화된 거짓말은 특히 전쟁 시기에 더욱 횡행하며 이 시기에는 검열과 허위 정보 유포가 정당한 것으로 받아 들여 진다. 이 경우 군사적 승리와 적군의 잔혹 행위와 관련된 보도가 일상적이다. 히틀러는 정치와 군사에 관련해서는 거짓말의 귀재였지만, 이러한 일이 드문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 참전을 위해서 의회의 지지를 얻고자 이용된 1964년의 일명 ‘통킹만 사건(Tonkin Gulf incident)’은 조작이었다. 

특정한 사실을 은폐하고 누락하는 거짓말은 더욱 흔하다. 2003년에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미국 당국자들은 이라크가 1980년대에 화학 무기를 사용한 점을 비난했다. 하지만 정작 1980년대에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했었던 것, 또한 그에게 여러 무기들을 제공했음은 물론, 화학 무기 사용도 심각한 일로서 비판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잔혹 행위에 대한 정부의 거짓말과 자기기만은, 결국 개개인의 거짓말과 자기기만을 양성한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과 같은 인권 단체들은 이러한 정부와 개인의 거짓말의 강력한 매커니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Cohen, 2001).

제도화된 거짓말의 또 다른 장이자 기만의 안식처는 광고다. 가장 효과적인 거짓말은 바로 이미지 광고로서, 이에 대해서는 흡연을 하는 장면이 깨끗한 산 공기와 남성적인 카우보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예시가 있다. 여기에는 언어적 거짓말은 없지만 기만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어떤 직업들은 거짓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변호사들은 직업상 자신의 의뢰인이 유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객을 변호해야 하기 때문에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로 알려져 있다.

거짓말은 거대 조직의 건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고위관리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는지, 또 조직이 얼마나 잘 돌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문제에서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한다. 눈치가 빠른 부하들은 이러한 환상을 깨면 안 된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부하들보다는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유발하기 쉽다(Robinson, 1996: 107, 321). 

순응을 위한 압박이 너무 강력해서 저항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정책이나 정당성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Jackall, 1988; Margolis, 1979). 내부고발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자들에게 조직의 부패 문제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파멸하고 만다. 기관 내부의 기만이 심각해지면 필요한 피드백 수단들이 차단되며 엔론(Enron) 사태와 같이 조직 실패의 가능성은 높아진다(Schwartz, 1990).

같은 원리는 국가 수준에서도 적용된다. 국가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칭송받는 반면, 적군을 위해서 아군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은 가장 악독한 범죄로서 곧 반역으로 여겨진다. 

거의 틀림없이, 중앙 통제가 강할수록 만연했던 국가 조직의 기만에서 비롯된 피해는 더 커진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대약진운동의 재앙적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정책을 지속했다. 저항과 행동을 촉발할 자유로운 토론이 부재했으며 이에 수천만 명의 사람이 1959년에서 1961년까지 굶어 죽어야 했다(Article 19, 1990; Becker, 1998). 그리고 이 막을 수 있는 참상이 수 년 동안 은폐됐다.
 
대중 매체들은 광고들을 유포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정한 기사들을 검열함으로써 ‘체계적인 오도(systemic misrepresentation)’에 연루된다(Borjesson 2002; Project Censored). 명성이나 갈등과 같은 “뉴스 가치”가 기사의 보도 여부를 결정하며, 이는 지도자들의 발언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무비판적인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이어지거나, 또는 인종차별이나 노동의 가치하락과 같은 기저의 과정에 대한 제도적인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대중 매체는 심각한 왜곡을 자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야말로 현실을 반영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기자들은 대부분의 기사가 인위적인 것으로써, 정부나 기업 같은 뉴스 메이커들의 목적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그들의 우려는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Weaver, 1994). 

텔레비전은 아마 가장 심각한 정보 왜곡을 유발하는 매체일 수 있는데, 텔레비전 편집자들은 자신들이 찍은 영상들 중 특정한 몇 가지의 이미지만 추출하여 정보를 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집회에서도 난폭한 소수의 시위자들을 찍은 장면만 보여줌으로써 상황을 왜곡시켜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영역도 있다. 사례로는 학문과 과학에서의 연구가 있다. 연구 주제들부터가 자본과 권력에 의해 형성되고, 학적 성취라는 것도 상당수가 조악하기는 하지만, 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의 내용이 의도적으로 기만적인 경우는 드물다. 이 영역에서 기만을 저지르는 자들은 사기꾼으로 고발될 위험성이 있다. 윤리적인 연구의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만(Ravetz, 1971),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인 진실 추구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이를테면, 역사 저술에 대한 검열은 대체로 정부 및 다른 조직화된 이익단체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가 있는데, 많은 역사가들 개개인은 어떻든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De Baets, 2002).

개인적인 차원의 거짓말과 자기기만은 유익하거나 무해하다는 이유로 정당화할 수도 있겠지만, 제도적 차원에서는 그것들의 피해 가능성이 아주 막대하다. 정부, 기업, 전문가, 언론의 거짓말과 자기기만은 사회 전체보다 권력자들과 특권층의 이익에 부합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직성에 대한 미사여구적 찬양은 권력자들과 특권층의 이익에 부합한다.

포드(Ford, 1996: 282)는 진실을 말하는 일을 도덕적으로 정당화 시키는 것이야말로 권력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며, 권력자들은 자기 자신들은 정보를 마음껏 통제하면서 타인에게는 진실을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권력자들의 거짓말은 조직 전체의 선으로 정당화되는데 반해서, 일반인들의 거짓말은 조직에게 해가 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로빈슨(Robinson, 1996: 306)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이득을 보는 불평등의 체제를 정당화하는데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화에는 실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는 진리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로빈슨(Robinson, 1996: 304)은 알맞은 사람을 고위관리자로 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별한 보상을 제공해야 된다는 통념에 의문을 표하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는데 있어서 무직자로 된 예비적 집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대안적 주장을 한다: 무직자 임원 집단을 만들어 기업의 비용 효율성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이러한 로빈슨의 관점에서는,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것을 통해서 얻는 것이 많지만, 평등한 업무 조직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와 같이 이단적 이론을 가진 학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알려서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엘리트들에게 별로 위험이 되지 않는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는 막대한 연구비 지원이 이뤄지지만, 이를테면 대안 정치라든지 대안적인 사회 체제를 실험하기 위한 사회과학이나 행동과학에는 이와 동등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 : “권력 엘리트들은 인문과학의 발전이 현상 유지에 해가 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가로막아왔다.”(Robinson, 1996: 337).

베일리(Bailey, 1991)는 사회 질서가 “원초적 거짓말(basic lies)”을 토대로 만들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예를 들면, 다들 우리가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소수의 사람만이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일리에 따르면, 피치자들은 통치자들이 사리사욕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정의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뻔한 모순의 결과로 사람들은 “정의의 영웅(champions of justice)”의 존재를 믿게 된다. 서구 사회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법정, 옴부즈맨, 소비자단체, 정직한 정치인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정의의 영웅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구이며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식의 원초적 거짓말을 계속 떠받치는데 활용된다.
 
베일리(Bailey, 1991: 84)는 이런 영웅들이 (권력을 위한) 안전밸브와 같다고 말한다. 게다가 “특정한 인기 있는 기관들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들은 정의를 위해 싸우고 부당한 권위에 맞서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배자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에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개인을 비판적 대상으로 하여 탐사 보도를 하고 있는 기자들도 포함된다. 

베일리(Bailey, 1991: 125)는 권력 문제에 연루되었을 때 즉각 토론에 돌입할 것을 추천한다: “원초적 거짓말(앞서 말했듯 원초적 진실을 숨기는 거짓말)은 설사 의문시된다고 해도, 논란의 대상이 될 만큼 의문시 되지는 않는다.” 

요약하자면, ‘제도화된 거짓말’은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며, ‘개인적인 거짓말’보다 사회에 큰 피해를 끼친다. 권력구조가 거짓말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거짓말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불평등과 압제로서의 체제에 대항하는 한 요소다.



아나키스트를 위한 함의 Implications for anarchists

거짓말 문제에 대해서 아나키스트들과 관련이 있는 수정주의적 관점을 제시했으니 이제 그 함의를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원래 ‘아나키즘(anarchism)’은 고전적 아나키스트인 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과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이들에 대해서는 마샬(Marshall, 1992)의 연구를 참조), 그리고 콜린 워드(Colin Ward, 1973)의 실용적인 일상적 접근법을 포함하여 그 외 최근의 다양한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Ehrlich, 1996; Purkis and Bowen, 1997). 

다만,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는 당대의 아나키즘을 ‘모든 지배 구조, 특히 국가에 반대하면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다스리는 평등한 사회 구조를 지지하는 전반적인 정치 철학’으로 정의하겠다. 사회 비판의 측면에서 아나키즘은 마르크시즘이나 페미니즘 같은 여러 사상들을 자유롭게 참고하고 있다.

사회 변화의 방법론 차원에서는 아나키즘은 수단이 결과를 반영해야 한다고 하는 예시(豫示, prefiguration, 미리 보이거나 알림)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Franks, 2003). 이는 국가 권력을 잡아야만 국가가 소멸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극명히 대립되며, 사회민주주의 같은 국가 권력에 의지하려는 개혁 사상과도 역시 대립된다.

예시의 철학이 거짓말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나키스트의 핵심적 가치라면, 무엇이 예시되어야 하는지 개념을 잡아야 한다. 특히, 인간의 자유는 최대화하면서 지배의 영역은 최소화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거짓말의 역할은 무엇인가? 

먼저 두 가지 대척점에 있는 입장을 살펴보자.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입장은 그 어떤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원치 않는 엄청난 결과(이를테면 안전 문제와 관련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를 불러일으킬 수 있거나,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시각(개인적인 차원이나 제도적인 차원에서)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상(ideal)으로서의 입장으론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은 세상의 거짓말을 모두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이 없는 사회는 바람직한가? 그러한 사회가 존재는 할 수 있는가? 아마도 불쾌한 사회일 것이다. 그런 사회는 아이들에게 네 그림은 너무 조악하다고 한다든가, 노인들에게 당신의 인생은 무의미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친구나 가족에게 마음 속에 있는 고약한 생각을 무턱대고 말하는 사회일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한다면야 그러한 노골적으로 솔직한 판단과 표현에도 적응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우라도 이러한 미래는 현대의 일상과는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에, (특히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굽히지 않고서)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거짓말이 없는 사회를 예시로 한다는 것은 참혹하다. 예를 들면, 직접행동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에서 대부분의 회원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기술이 실은 얄팍하고, 자신들의 태도는 퇴행적이며, 불쾌한 악취를 풍긴다는 식의 말을 듣는다면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거짓말이 없는 사회의 예시인 거짓말에 대한 완전한 배격의 문제점은 동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출처를 적을 때 우호적인 쪽의 출처는 과장하고 적대적인 쪽의 출처는 최소화하거나 그냥 누락시키는 것이 관례이다. 이러한 출처표시 관행에 따르지 않는 작가는 잠재후보로서의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스미스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정직하다, 그녀는 가끔씩만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해보라. 경찰이나 언론에 친구들의 결점을 전부 말하고 다닌다면 사회적 직접행동 조직으로서의 신뢰도는 떨어질 것이다. 

물론, 간디의 전통을 따르는 일부 활동가들은 직접행동을 하기 전에 경찰에 미리 신고하는 것을 포함하여 개방성을 믿지만, 이런 이들의 조직에서조차도 외부에다 조직원의 모든 입장과 행위를 포함한 신상 정보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극단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설사 거짓말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사회를 상상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이 사안에 대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고려해 볼 만하다. 오늘날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어서, 그 중도적 입장이라는 것은 어떤 거짓말은 용인될 수 있고 어떤 거짓말은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스트에게 핵심 원칙은 바로 어떤 주장이나 행동이 억압을 촉진하거나 아니면 저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가장 쉬운 사례는 억압을 뒷받침하는 ‘제도화된 거짓말’이다: 이러한 거짓말은 당연히 모든 경우에 간파되고 폭로되고 배격되어야 하며, 특히 체제를 지탱하는 “원초적 거짓말”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거짓말을 간파해내는 일은 오랫동안 아나키스트들의 주된 일거리였고, 아나키스트들은 정부 운영자나 기업 경영자의 거짓말을 알리는 팸플릿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정규 지도자들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일 그 자체로는 사람들이 계급 체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왜냐하면 통치 체제 그 자체인 몸통이 아니라, 단지 일부 부패한 지도자들인 “썩은 사과”만 제거하는 대안이 권력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화된 거짓말’을 폭로하는 것보다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그냥 거짓말의 만연함을 알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단순히 거짓말들을 폭로하려고 하는 대신, 아나키스트들은 ‘거짓말의 만연함에 대한 인식(a greater popular awareness of lying)’과 ‘거짓말에 대한 간파 능력(competence in detecting lies)’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쏟을 수 있다. 만약에 에크만(Ekman, 1985)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간파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면, 거짓말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전반적인 인식수준을 높이고 그들에게 특히 제도화된 거짓말을 간파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크게 유익할 수 있다. 

거짓말을 간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분석 방법을 훈련시켜서 권력 구조의 정당화를 파훼토록 것을 가르치는 것을 장려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 특히 권력자들이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뭇 사람들의 통념을 깨트리는 것이 바로 여기서의 목표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쉬운 사례는 악의성이 있는 개인적인 거짓말이다. 이는 지배구조를 뒤엎는 조건으로서 벌충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지배구조와 싸울 때, 적어도 단기적인 관점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해로운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 

중요한 투쟁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고, 정력적이면서 존경받는 리더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캠페인에 큰 손상을 주거나 운동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그런 정보로서 밝혀지는 내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떻든 정적들에 의해 사회운동의 인상을 깍아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당사자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거나, 불법 마약을 이용하거나, 비정상적인 섹스를 하거나, 소득세 납부 문제를 속이거나, 정기적인 치료가 필요하거나, 경찰에 거짓말을 하거나, 학계 실적이 좋지 못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오히려 경탄할만하다고까지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어떻든 이런 문제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을 경우에는 피해가 클 수 있다. 

마틴 루터 킹은 사후에야 표절을 해서 박사논문을 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비록, 이 문제가 미국 민권 운동에 있어 그의 리더십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었지만, 당시에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면 그의 명예에 손상이 갔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FBI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킹을 위협하기 위해서 그의 성추문 문제를 조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운동에서 두드러진 리더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떻든 조직에서 모든 회원들의 결점이 비판가들에게 알려진다고 생상해보라. 이 경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비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정보를 숨기는 데에는 분명 정치적인 이익이 있다. 

폭로된 문제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그 때문에 조직의 성취를 이루는데 한계가 그어지게 된다. 가령, 동료 활동가가 불법 마약을 투약한다는 것을 밝힌다면, 경우에 따라 그것은 당사자의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 것인가, 또는 대의를 위해서 철저하게 침묵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대립되는 가치가 있다: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반대로 거짓말이 없는 사회를 예시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4]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쉬운 해답은 없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지배 구조의 다양한 형태에 주목하면서 조심스러운 분석과 논의를 바탕으로 판단을 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인 입장이라고 하겠다.

개개인의 행동을 노출시키는 것은 반자본주의 활동가의 효율성을 떨어트릴 수 있지만, 특정 개인의 행동이 여성 동료에 대한 성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한다면 그것은 남성의 지배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고려사항은 문제가 될 수 있는 해당 행동이 타인에 의해서 까밝혀질 수 있는 것인가인데,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미리 스스로 밝히는 것이 낫다.

마지막으로 악의가 없는 개인적인 거짓말의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지배 구조의 큰 변화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악의가 없는 개인적인 거짓말은 ‘자주·자립·자치 공동체(self-managed society, 아나키스트의 이상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예시의 원칙은 뚜렷한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은 악의가 없는 개인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실로 악의가 없다는 점만 정말로 분명하다면, 크게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솔직하게 말을 하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한 가지 예시로는 격려하는 형태로 말을 하는 것이 있다: “시작은 잘 했어. 그러니 계속 해봐”라든지, 또 다른 예시로는 그 사람의 강점에 집중을 해서 약점에서는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너는 말을 너무 못해”가 아니라, “네가 보도자료를 썼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대부분의 상황에서 거짓말을 완전히 거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짓말에 대해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중요한 평가 기준은, 결국 거짓말이 지배구조와 권력구조를 약화시키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적어도 ‘제도화된 거짓말’과 ‘악의성이 있는 개인적인 거짓말’만큼은 폭로하고 배격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지배구조에 저항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러 지배구조가 복합적으로 관계되었을 때에는 신경을 써야한다.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는 것이 일부 수용될 수가 있겠으나, 거짓말에 대한 세간의 안 좋은 인식을 고려한다면 일단은 진실을 말하는 쪽에 서있는 것이 안전하다. 

거짓말도 대의에 기여할 수 있지만, 거짓말이 폭로되는 쪽에 서있다면 피해를 입게 된다. 악의가 없는 개인적인 거짓말은 지배구조에 기여하는 경우도 드물고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주제가 분명하게 논의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의 흔함, 맥락, 함의에 대해 보다 크게 의식해보는 일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타인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것, 그리고 본인의 거짓말을 성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일단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을 폭로해내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도 역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자기기만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의 변혁과 개인의 변화와 관련된 자기기만이다. 일부 있을 수 있는 자기기만들 중에서는, 이 세상은 이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또 자신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남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 또한 개인적 인간관계를 어지럽히는게 내가 하는 사회운동의 중요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 등이 있다. 

자기기만과 거짓말은 함께 번성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운동 단체는 그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거짓말 - 상호적으로 조장된 기만 - 을 토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 어떤 집단적 기만은 해롭지 않지만, 어떤 집단적 기만은 정치적, 개인적 효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해로운 기만을 밝혀내고 대처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거짓말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은 거짓말의 만연함을 폭로하고서, 거짓말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자들조차 사회변혁을 꾀하고 있는 조직에서의 악의가 있는 거짓말, 또는 악의가 없는 거짓말, 양자 모두에 대해서 대처를 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철학은, 거짓말에 대한 대부분의 수정주의적 연구부터가 실은 거짓말에 불과하며 인류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떻든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Nyberg, 1993). 실로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로서는 아직 배워야할 것들이 많다.


미주 Endnote

[1] 사례로는 표절(plagiarism)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저자자격(authorship) 문제의 개념을 해부하면서 어차피 자신만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온전하게 창조해내는 사람은 적다는 추정을 드러내왔다(e.g., Coombe, 199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쓴 책인 ‘인류애를 위하여 거짓말할 권리에 대하여(On a supposed right to lie from benevolent motives)’라든지, 또는 시셀라 복(Sissela Bok, 1978)이 쓴 책인 ‘거짓말 : 공공과 개인의 삶에서 도덕적 선택(Lying: Moral Choice in Public and Private Life)’에 대해서, 자신의 저자자격을 함부로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많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스트처럼) 모든 ‘진실(truth(s))’은 어차피 다 ‘만들어진 것(constructed)’이라고 믿는 사람들조차, 진실이라고 일컫어지는 일부 ‘만들어진 것들(constructions)’은 너무나도 신빙성이 떨어져 의도적인 기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2] 모든 거짓말을 배격하는 칸트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결과를 고려해서 할 것이다.

[3] 윌슨(Wilson, 2002)은 인간이 두 가지 자아 - 의식에 기반을 둔 자아와 그가 “적응 무의식”이라 부르는 무의식적 정신 체계에 기반을 둔 자아(이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무의식과는 구별된다) - 를 갖고 있다는 관점과 양립이 가능한 최근 실험들을 조망한다. 윌슨에 따르면, 의식이 무의식적 처리과정에 직접적인 접근을 하지 못했을 경우, 의식 자아는 무의식적 생각과 감정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의식적 단계에서는 아무런 편향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타인을 대상으로 한 행동에 바탕하고 있는 무의식적 편견이 있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의 자기기만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피하기도 어렵다.

[4] 경험이 많은 활동가들은 많은 시민단체들이 역기능을 하고 있거나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회 변혁 운동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내부자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시겔 등(Siegel et al., 1987)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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