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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칸세이론] 위안부 문제 담화로써 전후 일본을 가장 깎아내린 정치인, 고노 요헤이

일본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한 고노 전 관방장관 ... 일본의 동포, 후손에게 헤아릴 수 없는 화근을 초래



※ 본 콘텐츠는 일본의 유력 시사잡지 ‘겟칸세이론(月刊正論)’ 2014년 9월호에 게재된 일본 조치(上智)대학 명예교수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의 ‘위안부 문제 담화로써 전후 일본을 가장 깎아내린 정치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は戦後最も日本を貶めた政治家である)’ 제하 기사를 ‘겟칸세이론’ 측의 허락을 얻어 완역게재한 것이다. 이 글은 2014년 6월, 일본 정부가 공개한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 보고서(정식명칭 :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간 의견교환의 경위 ~ 고노 담화 작성에서 아시아 여성기금까지 ~(慰安婦問題を巡る日韓間のやりとりの経緯∼河野談話作成からアジア女性基金まで∼)’(한국어번역)) 공개에 맞춰서 고노 담화의 문제점을 다시금 짚은 글이다. 온라인 버전은 일본 보수 오피니언 사이트인 iRONNA(https://ironna.jp)에도 공개돼 있다. (번역 : 황철수)





어떤 경위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담화가 나온 것인가. 


원래 이 문제는 산케이(産経)신문이 오랜 세월에 걸쳐 시비해온 것이다. 고노 담화의 문구 작성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 간에 조정이 있었다고 밝힌 것도 원래 산케이신문의 특종이었다. 고노 담화는 처음부터 한국의 주장을 통째로 받아들면서 결과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청취 조사를 정확히 하지 않았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지적은 앞서도 있었지만, 이번 보고서를 통해 이런 문제들이 사실이라고 명확하게 특정됐다.

매우 큰 공적이라고 생각한다. 고노 담화에 대한 이번 일본 정부 보고서는 그간의 산케이신문의 보도가 증명된 내용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제, 그리고 앞으로, 이 문제를 논의할 때 필요한 기초가 되는 사실관계가 확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후에 관련 논의가 벗어나건, 뒤섞이건 간에 결국 여기서부터 논의가 이뤄진다는 것이 좋은 점이다. 출발선이 명확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이 보고서가 공표된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계승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고노 담화에 대해서는 검증 조사는 하더라도 재검토(철회)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여 왔다. 나는 두 담화에 큰 문제가 있어 재검토를 해 주었으면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가 이번에 조사를 끝까지 계속한 것은 좋았다. 결국 이제 “조사 결과, 재검토(철회)할 필요가 있다”고 언제든지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아베 내각은 지상 명제를 장기집권에 두고 있다. 그래서 타협할 수 있는 것은 타협한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대도 당분간 고노 담화를 방치하더라도 고노 담화에 대한 조사 결과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언제든지 고노 담화를 재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가(日本の政治家としてどこに心を置いているのか)

다만, 역시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은 담화를 낸 고노 요헤이 씨의 태도다. 이번 6월 21일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열렸던 고노 씨의 강연 내용을 읽었다. 강연에서 위안부 문제로 화제가 옮겨졌을 때도 결국 그는 고노 담화와 관련 사과를 하지 않았다.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에 대한 취급과 관련 아베 내각이 계승하기로 결정했던 것에 대해서도 “내각이 인정한 이상, 이외의 비공식 발언은 국제 사회에도 ‘그것은 비공식 발언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일본의 정식 발언, 일본의 공식 발언은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이며 이를 인정했다고 국제 사회에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진정으로 비공식인 것은 과연 어느 쪽인가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다.

실은 고노 씨가 담화를 냈던 1993년 당시엔 나는 그에게는 그리 큰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기자회견에서 그가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긴 했으나 어차피 전후의 어느 시기에 일본 외무성부터가 만사에 있어 마찰을 회피하는데 몰두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 일본 외무성의 손아귀에서 고노 씨가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그냥 그렇거니 하는 식으로 보고 있었다. 

담화의 내용에도 물론 문제가 있었지만, 한국 측의 주장만을 듣고 그저 원만하게 마무리 하려고 한 외무성에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봤었고, 고노 요헤이라는 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노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나의 이러한 견해는 바뀌었다. 그 계기는, 고노 씨가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자기변호를 시작한 데 있다. 예를 들어 2012년 8월 12일자 한국 조선일보에서 고노 씨는 “나는 신념을 갖고 담화를 발표했다”고 말했다. 또 잡지 ‘세카이(世界)’ 5월호에서도 자기변호를 하면서 아베 수상을 비판했다. 말하자면, 정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변명이 성공한다면 다음 세대까지 일본의 수치가 되는 거짓말이 세계 역사에 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일까. 그가 일본 정치인으로서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를 일본인으로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고노 씨의 강연록을 읽고, 정치인으로서 그를 진정한 ‘국가의 적(国賊)’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일본인의 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후 일본에서 이만큼 일본인의 명예를 깎아내린, 일본인을 망신시킨 정치가는 없는 것이 아닐까.

무라야마 담화를 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수상이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수상, 혹은 간 나오토(菅直人) 수상도 괘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본인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일본인을 모욕했다는 의미에서 고노 씨의 죄는 너무나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강연의 내용을 좀 보도록 하자. 사실, 국제사회의 군대에서 ‘종군위안부’에 해당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예는 없었다. 이러한 위안부 같은 존재가 일본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당연하게 있었지만, 어느 나라도 그것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세히 밝혀오지는 않았었다. 이 문제를 고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역사에서 틀렸던 것은 틀렸다고 인정해야 하고 사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맑은 나라라고 불리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예전에는 그것이 문제가 없었다,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하고 있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비겁한 변명은 없다고 봅니다. 속도위반으로 잡힌 사람이 ‘위반한 것은 나만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말하더라도 어떻든 자신의 위반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잘못이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본만이 오명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일까. 위안부가 일본 고유의 존재가 아닌 것 정도는 그 어떤 나라도 내심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성심성의로, 일본이 한 일에 대한 사과를 했습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고 되어 버린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내가 일본을 폄하시키는 것을 말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립니다. 내각관방장관으로서 자국을 폄하시키는 것을 말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성심성의, 어떻게든 일한관계를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미래를 향해. 그런 마음으로 다양한 자료를 모아 여러 상황을 확인하면서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꼭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일본이 해야 할 일은, 양국 간의 신뢰 관계를 최대한 빨리, 진정한 신뢰 관계로 복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존중과 존경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현재 일본은 주변국의 악의에 둘러싸여 있다. 고노 씨의 발언은 너무 심한 자기변호다. “내가 일본을 폄하시키는 것을 말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은 자신의 발언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자신이 일한관계를 좋게 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일시적으로 좋아지고도 다시 험악해졌다. 그게 반복이었다. 매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고노 씨의 책임이 큰 것임에도 마치 이는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식의 말투라는 것이다.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말을 했어야 좋았다(強制連行がなかったといえば良かった)

더구나 고노 씨는 강연에서 여전히 위안부 문제로 군이 관여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사실, “군이 관여했다”는 논리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씨도 사용한 바 있다. 주오(中央)대학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고노 씨 정도로 비겁한 말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원래라면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발표할 당시에 “군의 관여” 문제에 대해 이것저것 말하지 말고 분명하게 “강제연행 등은 없었다”고 말해야 했었다.

일본은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반도의 부녀자를 강제로 납치한 적이 없다. 이것은 조선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간부였던 분이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때 경찰관(순사) 자체를 대부분 조선인이 맡았다. 그런 가운데서 만약 조선인 젊은 여성만을 강제로 납치하고 모집한다면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그 어느 곳에서도 평온했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강제연행이 없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위안부는 확실히 존재했었지만 이것이 일본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혹시 매춘부를 모으는 민간의 업체나 뚜쟁이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사건이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강제연행을 했다는 사실은 절대 없다.

그런데, 고노 씨가 그런 핵심 부분을 바로 잡지 않고서 “군의 관여” 등의 말을 꺼냈던 것이 문제였다. 

전쟁터에서 매춘부 영업을 하는 곳에 군인이 출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으로서는 그 영업을 하는 곳에 “위생 관리를 제대로 하라”라고 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위생 관리를 하는 업체에 한해서는 군을 위한 영업을 인정한다. 이것은 전 세계 군대가 어디서나 해오던 일이고 비난받을 수 있는 관여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괄적으로 ‘군의 관여’라는 지극히 넓고 애매한 말로 묶어버리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일을 그르치는 잘못된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런 식의 인정은 오히려 일본악옥사관(日本悪玉史観)에 근거하는, ‘국가의 적’으로서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고노 씨의 강연에는 기본적인 오류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서 지나(シナ, 중국)와 국교를 맺을 때의 이야기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이 한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중국은 참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군대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중국이 피해를 입은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한 것이다. 일본인은 물론 군국주의자뿐만이 아니다.  반대로, 일본도, 일본인 자신도 군국주의 하에서 많은 사람이 전사했다. 특공대대원도 있었다. 전부 군국주의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중국도 일본의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다’ (중략) 적(敵)은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논리였습니다. (중략) 그래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일본의 군국주의의 전형으로 전쟁범죄자인 A급 전범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근본이며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 그 이외는 이 사람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움직였던 피해자이다’ (중략) 그러한 도리로 중국은 일본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 논리로 손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일본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거나, 또는 일본 군국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에 대해서 존중한다, 존경한다,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파생한 군국주의의 전형, 상징적인 사람들이 모셔져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지도자들이 가서 참배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반갑지 않다,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는 앞으로 일본 측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말자, 라고 되었던 것입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아들이나 아버지, 남편이 모셔져 있는 사람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당연하다’라고. 그러나, ‘(정치인들의) 군국주의 상징에서 만큼은, 상징에 참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황이 나쁘다’는 것이, 현재 야스쿠니 신사 문제입니다.”


고노 씨는 A급 전범에 대해서 중국과 국교를 맺는 당초부터 문제가 되었다는 듯이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시간적으로 어긋나 있다. 그리고, 애초에 이러한 설명은 ‘지도자=악’이며, ‘국민=선’이라는 식의 분단을 도모하는 것이며, 전후 좌익들이 늘 사용해온 혁명으로 이어지는 논리다. 이는 또한 일찍이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으로부터 초래한 논리로서 도쿄재판사관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논리라고 해도 좋다. 이것은 전쟁 이전을 모르는 사람이나 말하는 것이다.



고노 씨의 공부 부족을 지적한다(河野氏の不勉強を指摘する)

고노 씨가 가장 중요한 사항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어 그중에 하나가 도쿄재판을 벌였던 맥아더 자신이 도쿄재판을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전쟁(한국전쟁) 때,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의견이 맞지 않아 미국으로 귀환했고 상원 군사외교합동위원회라는 중요한 청문회에서 증언을 했다. 그래서 그는 청문회에서 여러 가지를 말한 후에 일본과의 전쟁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Their purpose, therefore, in going to war was largely dictated by security.”


이 말은 “일본이 전쟁을 한 목적은, 따라서, 주로 자위를 위해 할 수 없이 했던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앞서 도쿄재판에서 “이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위전쟁이며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 ‘국가변호’를 관철하면서도 다만 ‘패전의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도조 히데키 총리의 선서구술서 요약과 똑같은 논리로서, 맥아더도 결국 도쿄재판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합군은 맥아더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도쿄재판을 열었다. ‘A급 전범’이라며 당시 지도자들이 처벌되었지만 이것은 국제법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맥아더의 주재 하에서 재판을 했던 것이다. 도쿄재판은 맥아더 그 자체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저 맥아더 증언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사석에서의 의견이나 개인의 일기 등이 아니다. 미국 상원 군사 외교 합동위원회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증언이었다.

그런데 고노 씨 뿐 만이 아니라, 오늘날 일본의 정치인, 외교관이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여러 대사급 인사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이 이야기를 알고 있고, 또 정확하게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만나지 못했다. 일본의 외교관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원래라면 미국에 대해서 “맥아더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이 전범국이며 나쁜 짓을 했다는 견해는 없어진 것입니다”라고 가르치는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그렇다면 왜 맥아더는 그와 같은 발언을 했을까. 최근 알게 된 내용으로 미뤄보면, 그가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대학 2학년생이었다. 대학에는 미국에서 온 신부들도 있었는데 다들 전쟁이 단시간에 결론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사령관이 맥아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는 그래도 연합군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맥아더가 지나의 동해안 항구를 봉쇄하거나 폭격하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 참전국이었던 영국이 반대를 해서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막기 위한 다리에 대한 폭격도 금지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쓰나미와 같이 밀려드는 인민해방군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부하가 수많이 전사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맥아더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억울한 감정이 아마도 상원에서의 증언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진실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던 것 같다.



일본악옥론에 빠진 고노 씨의 강연(日本悪玉論に浸かった河野氏の講演)

어쨌든 맥아더의 해당 증언을 전후 정치인들 대부분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에 아첨하는 일 등은 전혀 없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나카소네 내각 이후다. 야스쿠니 신사에 수상이 가지 않게 된 것도 나카소네 수상 이후이며, 그때까지만 해도 자민당 지도자들은 결코 일본이 전쟁 시기에 나쁜 짓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의 경우야 당연하고,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수상 시기까지는 옛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이 압박을 받음에 따라서 나 자신의 생활도 서서히 압박을 받는 느낌이 있었다. 지나가 자꾸 일본에 참견하는 것을 씁쓸하게 보고 있었던 것도 잘 기억하고 있다. 이는 최근 지나(シナ)가 센카쿠 열도에서 대해서 벌이고 있는 광경과 동일한 것인데, 당시엔 중국 재류 일본인이 다수 습격당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었다. 이처럼 그 전쟁은 명백히 지나가 시작했던 것이라는 인식은 당시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대동아전쟁에 져서 억울하다, 전쟁에 패배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래도 지나와 한국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생각 등은 조금도 없다.

그렇지만 고노 씨는 다르다. 그의 이야기는 일본악옥론(日本悪玉論)에 서있다. 중국과 한국에 대한 불필요한 속죄의식까지 있다. 그것은 그의 무지 때문이다.

고노 씨는 분명 일본이 중국에 전쟁을 걸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도쿄재판에서도 지나사변에 대한 책임을 일본에 묻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던 사실을 그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맥아더 증언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일한병합(日韓併合)도 그렇다. 일본은 한국과의 병합에 별로 열정적이지 않았다. 가장 열정적이었던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일본은 병합을 할 용기가 없어서 당시 청나라에도, 러시아에도, 프랑스에도 관련 의견을 물어볼 정도였다. 일한병합에 대해서 한국에서 그것이 나빴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당시 러시아에도, 지나에도, 전 세계에 불평을 했으면 한다. 일본의 정치인이라면 이런 정도의 인식을 갖고서 일에 임해야 한다. 

게다가, 일한병합은 불과 삼십 수 년의 기간에 불과하며, 크게 뒤져 있던 조선반도를 단번에 근대화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별로 자랑할 필요도 없겠지만 아첨할 필요 등도 절대 없는 일이다. 실제로, 전후 총리대신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한국에 아첨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노 씨는 그렇지 않다.

막연하게 “일본은 나쁜 일을 했다, 사과하는 것이 맞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고노 담화로 인해서 우리 동포, 후손에게 헤아릴 수 없는 화근을 초래한 문제에 그가 둔감하다는 것이다. 둔감함을 가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강연에서는 고노 담화가 초래한 문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간과할 수 없다. 

고노 담화로 인해 오늘날 일본인들은 엄청난 치욕을 당했다. 그가 강제연행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종군위안부 문제로 일본이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 젊은 여성을 강제연행을 했다고 전 세계에 잘못 알려지고 동포들은 물론,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이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을 받게 될 것이다.

최근에는 성노예라는 부당한 말이 전 세계에 선전되고 있다. 사실이라면 몰라도, 사실이 아니다. 오명을 쓰게 된 것이고 우리 동포가 앞으로 열등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을 깍아내리는 이야기가 유럽에서 상당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걱정이다. 예를 들어 독일은 그동안 “히틀러는 너무 심했다”는 말을 평소에 듣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도 그랬다”는 식 이야기가 들려오면, 유감스럽게도 독일인으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죄의식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이다.

프랑스도, 영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동안 일본인을 유색인종 중에는 나름 우수하다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일본인조차 깎아내려지는 이야기가 그들에게 있어선 가슴이 후련해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후손들에게 화근을 초래한다는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글렌데일 시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위안부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재류 일본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치욕과 굴욕을 당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그것이 앞으로 대대로 수백 년 이어져서 세계 역사에 남아 버릴 수도 있다.

일본 국민에게 있어서 이처럼 용서 받지 못할 잘못은 없다. 정치인이라면 동포의 미래를 단단히 염려하여 대처해 나갈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노 씨의 발언에서는 그러한 사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느낄 수가 없다. 자신이 말한 사항이 주는 영향력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은 것이다. 후손들이 입을 화근에 대한 발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섭기까지 하다.

백보 양보하여 담화 발표의 시점에서는 오늘의 사태가 예견할 수 없었더라도,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과 책임은 어떻든 있을 것이다. 결국, 이후의 다양한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또한 끝끝내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고노 씨는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정치인이라면 일본을 위해 말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은 일본과 일본인을 사랑하는 태도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인정했기에 해결이 되지 않는다(政府が認めたのでは埒が明かない)

또 내 경험을 얘기해보겠다. 2007년 미국 하원의원인 마이크 혼다 씨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위안부에 대한 사과 요구 결의안’을 제출했다. 당시는 제1차 아베 정권이었다.  아베 씨는 방미하여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방미 직전에 아베 씨와 식사할 기회가 있어서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때 아베 씨는 “부시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는 테이블에 올리지 않을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외무성 직원도 있었다. 아베 씨는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는 더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방미 이후에 신문기자들이 물어 봤을 때 밝혔던, “20세기는 인권침해가 많았던 세기이며, 21세기가 인권침해가 없는 좋은 세기가 되도록 일본도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베 씨가 갖고 있다는 사실도 바로 그때 이미 들었었다.

그리고선 아베 씨는 방미를 했다. 외무성을 비롯한 일본 정부가 결의안 문제에 대해서 어딘가 가볍게 생각했던 인상을 부정할 수 없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회담의 시작 부분에서 부시 대통령은 “미스터 아베, 오늘은 위안부 문제와 미국산 쇠고기의 대일본 수출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으로 해두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회담 이후에 아베 씨는 “(위안부들이) 지극히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20세기는 인권침해가 많았던 세기이며, 21세기가 인권침해가 없는 좋은 세기가 되도록 일본도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이라고 (미 의회에서) 말씀드렸다. 이런 말씀을 오늘 미국 대통령에게도 말했다”고 하자, 부시 대통령은 “나는 아베 총리의 사과를 받아들인다”라고 했다.

아마도 미국 대통령은 선의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미디어는 위안부 문제에서 아베 씨가 미국 대통령에게 사과하고 미국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아베 씨는 “미국에 사과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냥 당연한 이야기”라고 강조했지만, 늦었다. 사과를 하지 않았는데도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보도를 보고서 나는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쿠사카 고진(日下公人, 다마(多摩)대학 명예교수) 씨와 함께 외국인 기자를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 임했다. 위안부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바란다는 생각으로 기자회견에서도 긴 시간 역설했지만, 정작 내 이야기는 외국 언론에 거의 거론이 되지 않고 그렇게 끝나 버렸다.

그때 내가 정말 실감한 것은 “당신네들 정부가 인정하고 있잖아요”라고 해버리면 사실상 반박을 못한다는 현실이었다. 

당시 마이크 혼다 씨의 움직임을 우려하여 작곡가인 스기야마 고이치(すぎやまこういち) 씨 등이 ‘워싱턴포스트’에 ‘THE FACTS’라는 의견 광고를 내고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강제성은 없었다고 호소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미국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있었고, 또 대일 사과 요구 결의가 채택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여서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민간인들이 아무리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해도 고노 담화에서 사과를 해버린 이상, 억울하다고 얘기하더라도 통용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힘겨운 현실이었다.



지금, 일본인이 해야 할 일(今、日本人がなすべきこと)

일본인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인은 고노 담화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내외에 보여 주어야 하는 일이다. 강제연행이 사실이 아니라고 분명히 해야 한다. 

고노 담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산케이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고노 담화를 검증한 정부보고서도 나왔다. 문제점이 있다는 근거가 되는 사실이 다 모였다. 고노 담화를 검증한 정부보고서를 읽어보면 일목요연한데, 어떻든 석연치않은 경위로 고노 담화가 나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이 고노 담화를 계속 인정하고 있으면, 동포는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일본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화근을 남기게 된다. 

이 지점에서 고노 담화를 철회하는데 데 있어서 먼저 중요한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2011년 11월 고노 씨가 수상한 훈장인 도카다이주쇼(桐花大綬章)부터 먼저 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퍼포먼스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고노 담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이 있었다고 말한 당사자에게 국가가 훈장까지 수여하는 광경은 다른 나라에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통용되지 않는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노 씨를 만난 적도 없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훈장을 박탈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은 대동아전쟁(大東亜戦争)의 개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진주만 공격 전에 현지시간 오후 1시에 국교단절인증서를 전달하는 절차를 준비하고서 미국의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과의 예약을 1시로 했다. 그런데 번역, 타자가 늦어서 2시로 미뤄졌다. 진주만 공격이 현지시간 1시와 2시 사이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나중에 “외교 협상 중에 공격을 했다”는 빌미를 주게 되어 버렸다. 분명 외무성 파견기관의 책임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 일을 철저하게 따지면서 세계에 “일본은 교활한 나라”라는 오명이 퍼져버렸다. 지금도 이 일은 전 세계, 특히 미국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문제는 일본 외무성에서 이 일의 책임자들에겐 그 책임이 불문에 부쳐졌고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은 그들을 전후에 중용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훈장마저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주변에서 일본은 “교활한 나라다”라고 계속 수군거리고 있다. 

역시 이런 일을 생각하면 고노 씨에 대한 훈장은 비논리적이다. 요시다 수상은 일본의 명예보다 외무성의 명예를 중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지금 자민당이 고노 씨를 국회로 불러야 하는데도 자민당은 일본의 명예보다 동료의 명예를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노 씨가 국회 등 공공의 자리에서 자신의 발언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종군위안부 문제는 끝난다. “그것은 나의 오해에 근거한 잘못된 발언이었습니다. 위안부는 있었지만 강제연행을 인정한 발언은 실수였습니다”라고 사과를 하면 된다. 일단 나는 그가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논란이 마무리된 이후에는 그에게 다른 공적도 있으므로 다시 훈장을 수여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노 씨가 반성을 하지 않은 이상에는, 불쌍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고노 씨의 훈장을 박탈하고서 이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인의 의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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