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자유통일강대국코리아 (역사/외교)


배너

[이우연 칼럼] 하버드대 위안부 논문 논란, ‘반일 종족주의’ 쇠퇴 전환점 될 것

강제연행? 성노예? 일제시대 위안부와 위안소 업주의 관계도 결국 ‘연계봉공 계약’으로 봐야

[이우연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지난달 28일 이후 약 2주간,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는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존 마크 램자이어(John Mark Ramseyer) 교수가 ‘국제법경제학리뷰(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에 투고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 언론은 램자이어 교수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주장했다”고 일제히 보도했고 한국 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MBC TV는 비록 인용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램자이어 교수를 “노랑머리 일본인”이라고 인종주의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한국인들의 반응을 여과없이 방송으로 내보냈다. 그는 “친일파”, “일본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에서 돈을 받는 자” 등으로 매도되었다. ‘메시지를 반박하지 못하면 메신저를 죽여라’라는 말에 딱 맞는 보도 행태였다. 반일 종족주의의 소용돌이가 모든 이슈를 삼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다시 한번 연출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언론인들은 정작 논문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다고 해도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사실은 전자(前者)일 가능성이 높다. 이 논문에 대한 초기 보도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 연합통신이 배포한 기사를 모든 미디어가 거의 있는 그대로 베껴 쓰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익숙한 관행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직접 논문을 읽으라고 요구하는 내가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모든 학술 논문은 첫머리에 초록을 붙이고 3-5개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이 논문에서는 “매춘(Prostitution)”과 “연계봉공(年季奉公, Indentured servitude)”이다. 일본 경제사(經濟史)에서 연계봉공인으로 유명한 것은 에도(江戶)시대의 여성 중에서 즉 여관, 음식점 등의 여자종업원이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차금(借金)으로 받고 취업처에 가서 수년동안 일했다. 

세계 경제사 차원에서 유명한 연계봉공인(Indentured labor)은 18-9세기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도항에는 선임(船賃), 음식비 등이 필요했고 유럽의 빈곤한 노동자에게는 고액의 부담이었다. 이에 미국 현지의 고용주들은 도항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고 미국에 도착한 뒤 보통 7년 동안 그들을 사역(使役)하였다.

램자이어 교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일본 유곽의 매춘부, 개전(開戰) 이후 군위안소의 위안부와 업주 사이의 계약을 연계봉공 계약으로 파악했다. 업주들은 취업=성서비스의 개시 이전에 매춘부들이나 위안부들에게 전차금(前借金)이라는 이름으로 거액을 제공하고 그녀들은 취업 이후 수년에 걸쳐 그것을 갚아나갔다. 그녀들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금액, 즉 매출액은 일정한 비율로 업주와 여성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여성들은 이 돈의 일부를 전차금을 갚는 데 사용했다.

램자이어 교수의 아이디어는 좋은 논문이 보통 그러하듯이 간단하다. 먼저 ‘매춘부와 위안부의 계약은 왜 이런 특수한 형태를 취하는가?’하고 묻는다. 일반적인 노동자는 먼저 일을 하고 그 보수를 일급(日給), 주급, 월급 등의 형태로 받아 간다. 그런데 왜 매춘부나 위안부는 업자들과 전차금, 수년의 계약기간, 매출액의 분할 비율 등이 정해진 독특한 계약을 하게 되었는가?

해답도 간단하다. 취업을 제안받은 여성은 하나의 문제에 봉착한다. 매춘산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녀의 평판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킨다. 따라서 업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업자가 과연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킬 것인지, 그녀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업자가 미리 고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차금이다.

업자도 문제에 부딪힌다. 이 산업의 특성상, 그들이 성실하게 근무하는지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이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저들에게 후한 대우를 하지만 저들이 과연 열심히 노동할까? 손님이 다시 찾아와 프론트에서 같은 여성의 이름을 호출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여성들이 벌어들인 돈(매출액)을 일정한 비율로 주인과 함께 분할하는 것이다. 정액의 급여를 준다면 여성들은 최대한 불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최선이 되지만 이렇게 되면 그녀들도 최대한 열심히 일할 것이다.

결국 앞서 말한 특수한 형태의 계약, 일종의 연계봉공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상이 램자이어 교수 논문의 요지다. 따라서 그를 비판하려면, 그가 제기한 “문제”와 “해답”을 비판하면 된다. 먼저, ‘매춘부나 위안부가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 관헌에 의해 끌려갔다’고 말하고 그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소위 “강제연행”이다. 그러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러한 증거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자들이 “강제연행설”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전(前) 위안부들의 “증언”뿐이다. 자신이 일본인 군인에 의해,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는 증언. 그러나 나는 그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다. 램자이어 교수와 같이 외국인으로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더 유리한 입장에 서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금도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공격하는 데 열심이며, 한국에서 국가원로(?) 취급을 받는 전 위안부 이용수의 증언조차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녀가 커밍아웃할 당시, 1993년 경에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보고 따라갔다고 말했지만, 2000년 무렵부터는 일본 군인이 끌고 갔다고 말을 바꿨다. 그간 소위 위안부 운동가들과 연구자들이 내건 강제연행의 증언들이 모두 이와 같다. 업자와 위안부 사이의 “계약”을 비판할 수 없게 된 그들, 그리고 한국의 미디어들은 램자이어 교수라는 메신저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위안부에게 거액의 전차금을 주고 수년에 걸쳐 갚아나가게 했다는 주장(이것은 주장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을 비판하려면 주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면 될 일이다. 위안부들이 전차금을 모두 갚거나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자유가 되었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이나, 그녀들은 매출액을 분할받아 고액의 소득을 누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그와 상반되는 증거를 제시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구조에서 비약이나 오류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메신저를 비난하는 것만 남았다.



램자이어 교수에 대해 “위안부가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라고 주장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논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초점을 맞추지 못한 비난이다. 하물며 이 논문에는 “성노예(sex slave)”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매춘부나 위안부와 업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이것은 램자이어 교수가 처음으로 말하는 바가 아니라, 위안부 연구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이 비록 그녀들이 매춘부였음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녀들이 성노예가 아니었음을 주장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반일종족주의자들은 그에 대해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역사적·객관적인 사실과 자료는 존재하지 않고 그러한 논리적 문제를 제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램자이어 교수에 대해 괜한 난리법석을 피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윤미향의 부정행위로 위안부 “운동”이 한국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상황에 처하였지만 그에 대처할 수 없었다. 또 2019년부터 한국 사회에서 파란을 일으킨 책 ‘반일 종족주의’를 통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롭고 설득력이 있는 설명과 자료를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위안부는 결코 “성노예”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위안부를 “성노동자”로 이해한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는 이번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역공의 빌미가 필요했다. 마침 산케이신문이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을 소개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물고 늘어졌다. 인신공격을 벌였고 반일 여론몰이에 나섰다. 상황을 잘 모르는 한국인들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논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미디어는 이 문제에 대해 조용하기만 하다.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의 학내신문에 실린 한국인 학부생 기자의 메아리 없이 공허한 아우성뿐이었다. 

반일 종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소란은 국내적으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큰 성과를 거뒀는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 때리기에 실패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될 것 같다.




관련기사 :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