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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1년 5월 10일판, 번역 : 황철수).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은, 1937년 11월부터 12월까지 난징공략전(南京攻略戦)에서 상하이 파견군 제16사단 보병 제9연대 제3대대 부관인 노다 츠요시(野田毅) 소위, 그리고 같은 대대 포병 소대장인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가 적병 100명에 대한 참수(競争, 목베기)를 누가 먼저 달성하는가를 경쟁하면서 노다 츠요시는 105명, 무카이 도시아키는 106명을 참수했었다고 보도된 이야기다.
난징군사법정에서 관련 보도 기사들이 증거가 되어 두 사람은 사형 판결을 받았고 결국 중국 위화타이(雨花台)에서 처형되었다. 100인 참수 경쟁은 전쟁 중에는 전선 용사의 무용담으로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전후에는 난징사건(南京事件)을 상징하는 장면의 하나로서 비판을 받게 됐다.
100인 참수 경쟁은 전후에는 아사히신문 기자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의 저서 ‘중국 여행(中国の旅)’에서 소개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스즈키 아키라(鈴木 明)가 저서 ‘‘난징대학살’의 환상(「南京大虐殺」のまぼろし)’, 또 보수파 평론가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가 저서 ‘내 안의 일본군(私の中の日本軍)’에서 각각 ‘100인 참수 경쟁은 허구’라는 비판을 하게 되면서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인 호라 도미오(洞富雄)가 반론을 펼치기도 했다.
2003년 4월 28일,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의 장녀와 차녀, 그리고 노다 츠요시 소위의 여동생 유족, 세 사람을 원고(原告)로 하여, 반대편인 △ 마이니치(毎日)신문(과거 도쿄니치니치신문), △ 아사히신문과 저자인 혼다 가쓰이치, △ 카시와쇼보(柏書房) 출판사*를 각각 피고(被告)로 한 소송이 제기됐다. 원고 측은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가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보도, 출판이 이뤄져 지금도 계속 명예가 훼손당하고 있다”면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를 했으며 출판금지, 사과광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 카시와쇼보(柏書房) 출판사는 100인 참수 경쟁이 ‘시험참수(据えもの斬り, ’스에모노키리‘라고 하며 전투 중의 참수가 아니라 포로를 참수하는 것) 경쟁’이었다고 주장하는 혼다 가쓰이치의 논고(論稿)가 포함된 책 ‘난징대학살 부정론 13가지의 거짓말(南京大虐殺否定論13のウソ)’을 간행한 출판사다.]
2005년 8월 23일, 도쿄지방재판소 판결(도이 아키오(土肥章大) 재판장)에서 원고들의 청구가 기각되었다.*
[* “적어도, 본 건 니치니치(日日)의 기사는 두 소위가 센카이 카즈오 기자 등이 신문 기자에게 ‘100인 참수 경쟁’의 이야기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재된 것이며, 그 보도 후에도 노다 소위가 ‘100인 참수 경쟁’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었던 것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연재기사의 행군 경로나 살인 경쟁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허위, 과장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두 소위가 ‘100인 참수 경쟁’을 한 것 자체에 대해선 아무런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는 신문 기자의 창작에 의한 것이라고까지는 인정하기가 어렵다.”]
2006년 5월 24일, 항소심인 도쿄고등재판소 판결(이시카와 요시노리(石川善則) 재판장)에서도 항소가 기각되었다.*
[* “난징전투 당시의 전투수행이나 두 소위의 군대에서의 임무, 한 개 일본도의 강성(剛性) 내지는 오늘날 전쟁에서의 전투 무기로서의 유용성 등에 비추어 보더라도, 본 건 니치니치(日日) 기사에 있는 ‘100인 참수 경쟁’의 실체 및 그 살상 숫자에 대해선 이 기사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며, 이 기사의 ‘100인 참수’ 전투 성과는 심히 의심스러운 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경쟁의 내실이 본 건에서 니치니치 기사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해도, 다음 점들에 비추어 보면 두 소위가 난징전투의 군무(軍務)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100인 참수 경쟁’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던 내용과 관련, 위화감이 없는 경쟁을 한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며, 본 건에서 니치니치 기사 ‘100인 참수 경쟁’을 신문 기자의 창작 기사이며 완전한 허위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006년 12월 22일, 상고심·최고재판소(이마이 이사오(今井功) 재판장)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원고 패소가 확정했다.
목차
1 당시의 보도
2 반향
3 난징군사법정
4 논쟁 4.1 ‘시험참수’설 4.1.1 혼다 가쓰이치에 의한 ‘시험 100인 참수’설 4.1.1.1 주장의 근거 4.1.2 하타 이쿠히코의 ‘시험참수’설 4.1.3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회고록 4.2 주요 부정설 4.2.1 사토 신주의 증언 4.2.2 긍정측 주장에 대해 4.2.3 기사를 의심하는 주장 4.2.4 논쟁 당시의 저명한 저술가의 반응 4.3 제3자의 견해
5 명예훼손 재판 5.1 소송의 주요 쟁점 5.1.1 ‘전투에 의한 100인 참수’를 말하기 시작한 이는 누구인가 5.1.2 무카이 소위의 부상에 대해 5.1.3 전투에 의한 100인 참수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5.1.4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5.1.5 시효 5.2 비고
6 기타
7 참고문헌
8 관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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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의 보도(当時の報道)
‘100인 참수 경쟁’과 관련하여 전시(戦時) 중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도되었다.
2 반향(反響)
이 경쟁은 두 소위의 고향에서 영웅담으로 크게 칭송받았다. 가고시마(鹿児島) 시의 소무타 진조(草牟田尋常) 소학교의 부교재에서 100인 참수 경쟁을 다루면서 “핏발이 서고, 살이 떨리면서도, 유쾌한 이야기입니다(血わき、肉おどるような、ほがらかな話であります)”라고 소개되었다. 노다 츠요시는 지역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많은 강연을 하면서 100인 참수 경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3 난징군사법정(南京軍事法廷)
1947년 여름, 함께 육군 소좌(소령)로서 재향제대(復員除隊)했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츠요시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의해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류됐다. 이후 스가모(巣鴨)구치소, 이어서 중국 난징 전범구류소로 이송되어,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오늘날 마이니치신문)과 재판에 번역 자료로서 제출된 ‘외인목격중지일군폭행(外人目睹中之日軍暴行)’*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 사람(我国人)”을 살인한 혐의로 12월 4일에 난징군사법정에서 기소되었다.
[* 편집자주 : ‘외인목격중지일군폭행(外人目睹中之日軍暴行)’은 직역하면 ‘중국에서 일본군의 잔학 행위를 목격한 외부인’으로, 이 책은 호주 기자 해럴드 J.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가 (자신이 아닌) 다른 저널리스트들의 정보 등을 바탕으로 난징사건과 관련해 1938년에 쓴 저작 ‘전쟁이란 무엇인가(What War Means: The Japanese Terror in China)’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12월 18일 첫 공판이 열렸고 스메이위(石美瑜) 재판장에 의해 “연속하여 포로 및 비전투원을 학살한” 죄로서 당일 사형 판결을 받아, 중화민국에 의해 1948년 1월 28일 난징 교외(위화타이(雨花台))에서 처형당했다.
이 재판과 관련하여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교수인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는 해럴드 J.팀펄리에 의한 애초의 각색과 ‘전쟁이란 무엇인가(戦争とは何か)’ 중국어 번역판에 있어서 사실이 덧붙여진 것에 의한 영향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판결은 ‘신문 보도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중국 최고 법원의 판례에도 위배되어 고소장의 “우리나라 사람(我国人)”을 설명없이 “포로 및 비전투원”으로 바꿔서 판시했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스즈키 아키라(鈴木明)는 1972년경 스메이위 전 재판장을 만나서 “이런 종류의 재판에는 허잉친(何応欽) 장군과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직접적인 의견도 들어 있었다“는 증언을 얻었다.
4 논쟁(論争)
1971년에 혼다 가쓰이치는 아사히신문에 연재하고 있던 르포르타주인 ‘중국여행(中国の旅)’(후에 단행본화)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이 때 혼다 가쓰이치는 두 소위를 A 소위, B 소위라고 익명으로 표현했다.
이에 대해, 이자야 벤다산(イザヤ・ベンダサン,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의 필명)은, “100인 참수 경쟁은 없었다”고 하면서 “왜 두 소위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했는가. 실명을 밝혀 주길 바란다. 이 이야기는 ‘전설’인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명을 밝힐 수 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혼다 가쓰이치는 두 소위의 실명이 들어간 신문 기사와 스즈키 지로(鈴木二郎) 기자와 시시메 아키라(志々目彰)의 수고(手稿, 이 기록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를 제시하면서 “그래도 전설이라고 주장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반박했다.
이때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군대의 상식이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논법으로써, 또 스즈키 아키라는 난징군사법정 기록과 무카이 소위를 아는 사람에 대한 취재라는 방법으로써, 100인 참수 경쟁이 허위라고 다시 반박을 하고 나섰다.
그 후, 스즈키 아키라는 잡지에 나눠서 연재했던 주장을 정리한 책 ‘난징대학살의 환상(南京大虐殺のまぼろし)’을 간행했고, 오야(大宅)상을 수상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타테사(殺陣師, 배우에게 살인, 난투 장면을 지도하는 사람)의 담화(발언), 그리고 군도(軍刀)에 대한 수리를 담당했던 나루세 간지(成瀬関次)의 저서 ‘싸우는 일본도(戦う日本刀)’, 군도의 강도 시험에 입회한 재료공학 O 공학 박사의 편지, 자신의 체험 등을 종합해 “일본도로 참수할 수 있는 대상은 최대 3명”(타테사) 등을 인용하여 “일본도로 연이어서 백 명의 참수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1. 무저항의 포로를 잡아서 참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상 밖으로 하고 있음”(즉, 전투에서 적을 베는 것과는 난이도가 전혀 다르다.), “2. 나루세 간지의 저서에서 편리한 부분만 이용하고 ‘불편한 사례’는 무시하고 있음”(‘싸우는 일본도(戦ふ日本刀)’의 내용은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인용한, 벨 수 없었던 사례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일본도의 우수성을 각인시키는 내용이다.)이 확인된다고 지적하면서, “트릭(속임수) 내지는 미스리딩(오해)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역사학자인 호라 도미오(洞富雄)도 같은 관점에서 야마모토 시치헤이와 스즈키 아키라를 비판했다(야마모토 시치헤이에 대한 비판은 ‘‘난징대학살’은 환상인가(『南京大虐殺"はまぼろし』か)’(혼다 가쓰이치 편집 ‘펜의 음모(ペンの陰謀)’에 수록) 스즈키 아키라에 대한 비판은 ‘난징대학살 - ‘환상’화 공작 비판(南京大虐殺―「まぼろし」化工作批判)’).
한편, 야마모토 시치헤이에 대한 “(무저항의 포로에 대한) 시험참수는 예상 밖으로 하고 있음”과 관련하여서 하타 이쿠히코의 비판은 논란도 있다.* 또한, ‘불편한 사례’, 즉 하타 이쿠히코에 따른대도 나루세 간지의 저서에서 일본도의 우수성을 강조했다는 부분도 4개소 뿐이다.
[*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시신의 손목과 다리를 군도로 절단한 후에 군도의 칼자루가 흔들렸던 자신의 체험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는 우노 신타로(鵜野晋太郎, 중귀연(中帰連) 활동가)를 인용하면서, 시험참수라면 몇 명(10명)이라도 고장이 없이 벨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도에 대한 현대적 연구(日本刀の近代的研究)’(고이즈미 히사오(小泉久男))에 따르면, 두 명만으로 고장이 발생하고 치명적인 고장도 생긴다. 이하 그 연구에서 시험참수 한정으로 베었던 인원수, 고장 개소의 여덟 가지 예 : (1) 2명, 무(無) (2) 1명, 무(無) (3) 1명, 무(無) (4) 7명, 조금 칼날의 이가 빠짐 (5) 42명, 무(無) (6) 몇 명, 칼날의 이가 빠짐 (7) 2명, 두 세 부분 칼날의 이가 빠짐 (8) 2명 구부러진 고켄(護拳, 도검 등의 자루를 손으로 쥘 때 손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구)이 부서져 사용상 심히 불편 (32쪽, ‘100인 참수 경쟁과 난징 사건(百人斬り競争と南京事件)’) 여기서 (5)의 42명 참수에도 고장 없음은 소위 돌출 데이터다.]
노다 츠요시 소위가 편지를 통해 친구인 나카무라 세키로(中村硯郎)에게 100인 참수를 고백하면서 신문 보도 내용에 대해서 전혀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지 않았다는 기사(위 ‘당시의 보도(当時の報道)’에서 8번 기사), 그리고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 스스로도 센카이 카즈오 기자, 스즈키 지로 기자, 미쓰모토 기자와 다른 특파원에게 ‘305명 참수’에 관해 난징사건 2년 후에 이야기했던 ‘305명 참수’ 기사가 2004년에 다시 발견됨으로써(위 ‘당시의 보도(当時の報道)’에서 12번 기사), “100인 참수 경쟁은 센카이 카즈오 기자 등의 일방적인 창작 기사였다”라는 스즈키 아키라,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설은 결국 부정되었다.
한편, 1960년대에 중국 공산당 고위관리인 랴오청즈(廖承志)는 센카이 카즈오 기자와 그의 아내와 딸을 베이징에 불러 좋은 조건으로 일자리를 주었고 딸은 베이징대학에 입학시켜줬다. 1970년대에 100인 참수 경쟁 문제가 일본에서 쟁점화 됐을 때 센카이 카즈오는 베이징에서 가서 그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4.1 ‘시험참수’설(「据え物斬り」説)
4.1.1 혼다 가쓰이치에 의한 '시험참수'설(本多勝一による「据えもの百人斬り」説)
혼다 가쓰이치는 적시된 사실에 대한 추론 형식에 따라 한 논자로서 개인적인 위치에서의 견해를 밝힌다는 체면을 취하면서 두 소위의 행위는 이른바 ‘시험참수(据えもの斬り 스에모노키리)’(보통은 군도(軍刀) 등을 이용하여 앉아있는 사람 등을 참수하는 것을 의미한다)였으며, 포로 학살 경쟁을 벌였던 사실 및 그 결과로 두 소위가 난징군사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진 것을 사실이라고 적시했다.
4.1.1.1 주장의 근거(主張の根拠)
혼다 가쓰이치 등은 ‘100인 참수 경쟁’이 사실임은 다음과 같은 각종 자료에 뒷받침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1. 당시 신문 등의 자료(도쿄니치니치신문(오늘날 마이니치신문) 기사)
2. 도쿄니치니치신문 기사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다.
1) 노다 츠요시 소위가 나카무라 세키로에 보낸 편지가 소개된 바 있다. 이 편지에서 노다 츠요시 소위는 “100인 참수 경쟁이라는 스포츠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했고, 또 난징 입성까지 “105명을 참수했다”고 했으며 그 후에 “253명을 참수했다”고 하면서 ‘100인 참수 경쟁’ 사실을 자인했다.
2) 노다 츠요시 소위가 귀국했을 때의 기사에서도 “374명을 참수했다”고 하면서 노다 츠요시 소위가 ‘100인 참수 경쟁’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
3)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는 “이번에는 1,000명 참수다”, “노다 소위와 헤어진 후에 약속한 500명 참수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305명을 참수했다”고 말했다.
3. 노다 츠요시 소위의 아버지인 노다 이세쿠마(野田伊勢熊) 씨도 1967년 6월 단계에서 노다 츠요시 소위가 “난징 입성 전에 같은 연대의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100인 참수 경쟁을 했다”는 것을 인정했었다.
4. 노다 츠요시 소위와 같은 중대에 소속됐던 모치즈키 고사부로(望月五三郎)의 수기인 ‘나의 지나사변(私の支那事変)’(사가판(私家版, 판매 목적이 아니라, 개인이 비용부담으로 자가출판하고서 지인들과 나누어 갖는 책)(P42-45)에는 노다 츠요시 소위가 비무장 일반 농민을 참수했던 것, 지나인을 찾아냈을 경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쟁탈전을 벌일 정도로 고조됐던 것 등에 대해 적혀 있다.
5. 시시메 아키라(志々目彰)는 ‘중국(中国)’ 1971년 12월호에 투고한 논고에서, 노다 츠요시의 강연 내용에 대해 “향토 출신의 용사라든지, 100인 참수 경쟁의 용사라든지 신문에서 쓴 것은 나(노다 츠요시)를 가리키고 있다. 실제로 돌격해서 백병전에서 참수했던 경우는 네다섯 밖에 없다. 점령한 적의 참호 쪽으로 “니라이라이(ニーライライ, “나와라”는 뜻)”하고 외치니까 지나병은 바보인지 줄줄이 나와서는 이쪽으로 왔다. 그대로 줄 세워놓고 닥치는 대로 참수했다. 100인 참수라는 평판이 돌았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참수한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시시메 아키라의 동급생이었던 카라시마 가쓰이치(辛島勝一)는 시시메 아키라에 보낸 편지에도 노다 츠요시가 포로를 참수한 이야기를 했던 취지를 적었다.
6. 두 소위가 작성한 유서에도 두 소위가 ‘100인 참수 경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신문기사가 됐다고 인정하는 내용이 있다.
7. 센카이 카즈오, 스즈키 지로 두 기자와 사토 신주 카메라맨의 논고에서도 기자들이 두 소위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사로 했다고 일치하는 언급을 하고 있다.
8. 난징전투에서 포로나 일반 민중에 대한 학살이 매우 흔한 현상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료가 다수 존재한다.
9. 이상 소개한 각 자료들은 노다 츠요시 등이 농민 등을 살해한 현장을 목격한 것, 노다 츠요시 소위가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이고 포로를 살해했다는 취지로 언급한 것, 두 소위가 취재 기자에게 스스로 ‘100인명 참수 경쟁’에 대해 언급한 것인데, 나아가 이러한 자료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또 존재하는 등 서로의 자료를 지지하고 있으며, 각 자료가 서로를 보충하는 식으로 ‘100인 참수 경쟁’의 사실과 포로 살해의 사실을 밝히고 있다.
4.1.2 하타 이쿠히코의 ‘시험참수’설(秦郁彦による「据え物斬り」説)
저널리스트인 센다 가코(千田夏光)는 하타 이쿠히코와의 대담에서 “실은 제가 ‘100인 참수 경쟁' 기사를 썼던 도쿄니치니치신문(마이니치신문의 전신) 기자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조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마이니치신문을 만들었을 때 사회부장으로 가셨던 분입니다. 그분도 정확한 숫자 확인까진 못했다고 했습니다. 허구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쓸 필요가 없는 것을 썼다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계속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 후 중국으로 이주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타 이쿠히코는 “다소 있었다는 것이죠. 100인 참수 문제에 대해서 나는 통설과는 조금 다른 견해입니다. 이것은 포로에 대한 ‘시험참수’였던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백 명까지는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백 명을 참수했다는 두 사람의 소위 중에서 한 사람이 유명해진 후에 모교의 소학교(초등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학생들에게 그것은 포로에 대한 참수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포로에 대한 시험참수라면 ‘100인 참수 경쟁’은 가능한 얘기입니다"고 말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1991년 여름 시시메 아키라의 증언에 대한 뒷받침 증언을 얻기 위해 가고시마 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초등학교) 동창 명단을 확보하고 문의에 나섰다.
하타 이쿠히코는 “노다 츠요시 중위(당시)가 허리에서 칼을 빼고 시험 참수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카라시마 가쓰이치(辛島勝一)의 증언, 그리고 “사실은 포로들을 참수했다고 말했으며 그들이 면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참수가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는 키타노소노 요토쿠(北之園陽徳)의 증언을 소개했다.
또한 노다 츠요시가 전교생을 앞에 두고 검도장에서 포로에 대한 시험참수를 시연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을 기억하며 나중에 검도 교사로부터 “터무니없는 소행”이라고 경고를 받았다는 히다카 마코토(日高誠)의 증언 등도 소개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일반 주민에 대해서도 참수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노다 츠요시가 백병전에서의 참수뿐만이 아니라 포로를 늘어놓고 시험참수를 했다고 ‘고백(告白)’을 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4.1.3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회고록(望月五三郎の回想録)
노다 츠요시 소위의 부하였다고 하는 모치즈키 고사부로(望月五三郎)는 사가판(私家版, 판매 목적이 아니라 개인이 비용부담으로 자가출판하고 지인들과 나누어 갖는 책)의 회고록인 ‘나의 지나사변(私の支那事変)’에서 노다 츠요시 소위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노다와 무카이 두 소위의 100인 참수가 시작됐다. 노다 소위는 견습사관으로 제 11 중대에 부임한 우리 교관이었다. 당시 소위로 임관하고 대대 부관으로서 행군 중에 말에 올라타 부하 중대의 명령 전달에 분주했다. 그는 100인 참수의 용사로서, 일본 내지의 신문, 라디오 뉴스로부터 칭송받고 일약 유명해진 사람이다. “야, 모치즈키, 거기에 있는 지나인을 데려와”, 명령대로 지나인을 끌고 왔다. 살려달라고 애원도 해보지만 결국 체념하고 앞에 앉았다. 소위가 치켜든 군도를 등지고 돌아보고 증오가 섞인 웃음을 머금고선 다시 군도를 쏘아봤다. 단칼에 목을 치고 몸통이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돌멩이가 대굴대굴 움직였다. 눈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소위 앞에서는 꾹 참았다. 전우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수많은 시체를 건너온 나였지만 저항 없는 농민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유 없이 죽이는지 그 행위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 노다 소위의 이런 행위는 지나인을 찾아내면 무카이 소위와 쟁탈을 벌일 만큼 커져갔다.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농민을 두 소위는 무참하게 베어 버렸다. 지나 병사를 전투 중에 참수했다면 모를까. 이런 행위를 연대장도, 대대장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했다. 그리고 이 100인 참수는 계속됐던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명예훼손 재판에서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이 회고록을 증거로 제출했고 재판소는 반증이 없는 것으로서 이 회상기를 진실의 증거 중에 하나로 삼았다.
4.2 주요 부정설(主な否定説)
두 소위와 같은 대대(보병 9연대 제 3대대)의 오노(大野) 소위(제 3대대 9중대 1소대) 진중일지에 의거하여 아지아(亞細亞)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가 검증에 나섰다.
1. 당시에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는 딴양의 포격전에서 부상을 당해 전선을 떠나 ‘100인 참수 경쟁’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증언을 했다. 위생병 T씨가 스즈키 아키라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무카이 소위의 부상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부상 후의 행적도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명예훼손 소송의 판결은, 일단 토야마(富山) 대대장의 수상(受傷, 상처를 입음) 증명서는 사후에 제출되었고 이누카이 소이치로(犬飼総一郎)의 수기는 구체성이 부족하다고 하여 증거능력이 부정되었다. 따라서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의 부상이 인정되지 않았다. T씨의 편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2. 총기가 발달한 현대육상전투의 백병전에서는 개인의 전과(戦果)를 경쟁한다는 개념은 거의 없다.
3.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는 포병대 소대장이며, 노다 츠요시 소위는 대대 부관이었다. 둘 다 소속이 다른데다가, 병과도 최전선에서 적극적으로 백병전에 참여하는 병과가 아니다. 더욱이 병과가 다른 두 사람이 상의까지 해서 ‘어떤 전과를 경쟁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또,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는 군도(軍刀)를 갖고 전투를 해본 경험도 없다. 두 소위와 센카이 카즈오 기자의 회견자리에서 두 소위의 사진(도쿄니치니치신문(쇼와 13년 12월 13일자)에 게재)을 촬영한 도쿄니치니치신문 카메라맨 사토 신주(佐藤振寿)는 1994년 5월 산케이신문을 통해 "수라장(修羅場)이 펼쳐지면 (노다 츠요시 소위가 맡았던) 대대 부관의 역할은 일단 대대장의 명령 지시를 받고서 ‘어떤 중대는 어떻게 한다’고 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가 맡았던) 보병포 소대장의 역할은 ‘거리 수백 미터, 쏴라!’고 해야 했습니다. 이를 과연 어떻게 계정(勘定)해야 할는지.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4. 전시 보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두 소위의 증언은 전의고양(戦意高揚), 무용전(武勇伝)의 일환인 것이다.
5. 만일 발도(抜刀)에 의한 전투가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민간인을 살해하고, 승자가 상을 받는다는 ‘살인게임’과 같은 것은, 어떻든 도쿄니치니치신문의 설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도쿄니치니치신문 등의 기사에서는 노다 츠요시 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가 전쟁터에서 ‘100인 참수 경쟁’을 비롯하여 그 도중 경과를 기자들에게 순차적으로 전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노다 츠요시 소위가 전후에 남긴 수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37년 가을 중국의 우시(無錫)에서 도쿄니치니치신문의 기자로부터 “어떻겠습니까, 우시에서 난징까지 몇 명 참수 가능한지 경쟁한다면 말입니다. 기사의 특종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고 무카이 도시아키가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응하자 기자는 “100인 참수 경쟁 무용전이 기사화되면 신부가 쇄도할 겁니다” “기사는 일절 기자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두 소위와 기자는 우시에서 이별했는데, 노다 츠요시 소위에 따르면 이 건의 기자와 재회했을 때는 이미 ‘100인 참수 경쟁’ 기사가 일본에서 화제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7.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가 1940년, 1941년 무렵, 모교인 경성공립상업학교(京城公立商業学校)를 방문했을 때 “교장으로부터 ‘학생들에게 꼭 100인 참수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권유받았지만 왠지 고사를 해서 강연을 하지 않았다”고 함께 방문한 동급생 타나베(田辺)의 증언이 있다.
8. 3년 후에 무카이 도시아키 중대장 직속 부하가 된 미야무라 키요하루(宮村喜代治)는 1940년 가을 무렵 광둥(広東)에서 무카이 도시아키 중대장으로부터 “그건 농담이야” “농담으로 한 이야기가 신문 기사가 됐어” “농담이 신문에 실려서 일본 내지에서 논란이 됐어”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 취지는 재판에서도 진술서로 제출되었다. 무카이 도시아키는 “보도진은 제1선까지며 오지 않았으며 돌격 연습이 실전으로 방영되기도 했었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고 했다. 당시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의 직속 부하였던 타나카 카네히라(田中金平)는, 일본의 근현대사 연구가인 아라 켄이치(阿羅健一)의 취재에 1983년경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주변 군인들도 그 이야기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 우시(無錫)에서 난징에 갈 때까지 그는 거의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대장이 칼을 뽑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중국 병사 같은 건 없었습니다.”(“이야기를 들었을 때 칼로 백 명 따위는 베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래서 기억도 잘 납니다. 주변 병사들도 그 이야기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소대장은 포격은 우리 분대장에게 맡기고 전체를 보았으며 우시에서 난징으로 갈 때까지 거의 내 곁에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소대장님이 칼을 빼든 것은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백 명을 베거나 어쩌거나 그전에 우리 주위에 중국 병사가 없었습니다. 중국 병사는 없었기 때문에 베거나 말거나 할 일도 없었습니다.”)
10. 둘 다 딴양(丹陽)에도 쥐롱(句容)에도 입성하지 않았다. 중산릉이 보이는 지점에 가지 않았다. “기사는 일절 기자에게 맡겨주세요”라는 말 그대로 기사는 창작이다. 13일 기사의 사진을 11월 29일(또는 30일)에 촬영했던 것은 세 사람(두 소위와 기자)이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 제 3보(12월 6일)에 게재된 “기사 옆의 기사도 센카이 카즈오 기자가 앞서 12월 5일 딴양에서 취재한 기사이며, 딴양에서 취재하고 있어야 할 센카이 카즈오 기자가 거기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쥐롱(句容)에서 두 소위에게 ‘100인 참수 경쟁’의 결과를 취재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센카이 카즈오 기자는 그 후에도 딴양에 머물러 12월 10일 스즈키 지로 기자와 합류했다는 것이 전후 도쿄재판 심문조서를 통해 알려졌다. 이 점에서도 “12월 5일 쥐롱(딴양과는 다른 쪽)에서의 기사는 허위이다” 또, 검사로부터 “1937년 12월 5일 기사의 저자는 당신입니까?”라고 질문을 받고 “네, 제가 이 글의 집필자입니다”고 답했다. 따라서 기사는 미쓰모토(光本) 기자가 아니라 센카이 카즈오 기자가 쓴 것으로 확인됐다.(기사를 쓴 것은 미쓰모토 기자라는 견해도 일부 있지만, 두 소위의 수기, 유서에는 센카이 카즈오 기자는 몇 차례 나오지만 미쓰모토 기자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미쓰모토 기자는 니치니치신문 교토(京都)지국의 특파원으로, 현지 부대 9연대의 활약을 보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12. “마이니치 신문사 자신, 마이니치신문이 1989년 3월 5일에 발행한 ‘쇼와사 전기록’에서 100인 참수에 언급하고서 ‘이 기사는 당시에 전선 용사의 무용담으로 화려하게 보도되었고 전후에는 난징대학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난 받았다. 그런데 이 기사의 100인 명 참수는 사실 무근이었다’고 쓰고 있다”
13. “(군대에서) 나(ボク)·너(キミ)·당신(アナタ)·나(ワタシ) 등의 표현은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금기와 다름없었다” “1인칭 대명사는 원칙적으로 사용하지 못했고 ... 사용하는 경우에도 ‘자신(自分, 지분)’뿐이며 다른 표현은 사용할 수 없었다”, “군대어의 2인칭 대명사는 속설(俗説)로는 ‘네놈(貴様, 키사마)’이지만 ... 나 역시 장교들이 ‘네놈’이라고 서로 말했던 예를 모른다”, “‘귀공(貴公, 키코오)’일 것이다.”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자신의 장교 경험에서 회화문을 분석했다. 군대에서 이를 주입당하고 3개월쯤 지나면 반사적으로 군대 용어가 나온다고 한다.
14. 혼다 가쓰이치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앞으로 상대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이 논쟁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4.2.1 사토 신주의 증언(佐藤振壽の証言)
제 1보 회견자리에 있어 마침 두 소위의 사진을 찍은, 도쿄니치니치신문 카메라맨 사토 신주는 나중에 ‘100인 참수 경쟁’과 관련된 명예훼손 소송의 진술서에서 “기사를 본 것은 이듬해 1월에 난징에서 상하이에 돌아간 이후이지만, 그 때 인상은 ‘센카이 카즈오 기자가 허위를 썼다’는 소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소송의 증인신문에서도 “(100인 참수는) 100% 믿을 수 없습니다” “(기사는) 허위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4.2.2 긍정측 주장에 대해(肯定側主張について)
• 민중학살에 대해
‘민중에 대한 학살’ 문제에 관해 연구자들은 다음의 유의(留意)를 기록하고 있다. 일단 중지(中支, 중국 중부)에서는 민중에게 “(일본군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상하이에서 일본군 환영의 깃발을 흔드는 부인의 행렬 뒤에서 편의대(便衣隊, 게릴라)가 일제 사격을 했다. 허를 찔린 일본군은 순식간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여성이 갓난아기로 가장한 수류탄을 나르고, 게릴라를 끌어들여 일본군 진지로 유도하거나 하물며 장년 남자가 숨겨놓은 무기로 갑자기 테러를 할 위험이 있었다”, “비록 어린 아이라도 한시라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원을 돌아다니며 식사를 하고 있다가 집중 포격을 당한 사례도 흔했다”). 그리고, “노파라고 해도 정보를 캐내어 신고할 염려”가 있었다. 모 카메라맨의 말, “한번 내가 당할 뻔 했을 때, 결국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당하는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통감하게 되었다.”
또한, 1945년에 일본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이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을 위해 ‘국민의용대(国民義勇隊)’를 조직한다고 발표했을 때, 난바라 시게루(南原繁) 교수(도쿄제국대학 법학부장)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던 바 있다. “우리가 게릴라전을 벌인다면 (미군에 의해서 일본인) 학살이 발생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진짜 전투원이라면 포로 대우도 받고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지만 게릴라라면 즉시 살해되어도 불평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경우에는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 시시메 아키라 및 회상기(1971년 발표)에 관해
- 시시메 아키라(志々目彰)가 노다 츠요시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강연 내용에 따르면, 점령한 적의 참호 쪽으로 “니라이라이(ニーライライ, “나와라”고 하는 뜻)”하고 외치니까 지나병은 바보인지 줄줄이 나와서는 이쪽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줄 세워놓고 닥치는 대로 참수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선 ‘100인 참수 소송’ 재판에서 원고 측은 “중국 국민당은 독일식의 조직 방어전을 했고 일본군과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는 무기를 휴대한 현대군대인데, ‘니라이라이’라고 호소한다고 해서 참호에서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 두 소위의 처형에 대해서 “일본의 신문은 뉴스로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노다 츠요시의 동기생인 테시마 키요타다(手島清忠)도 “총살된 것을 알게 된 것은 훗날이다”라고 1972년에 말했다. 시시메 아키라가 ‘신문기사’를 읽고서 “총살은 당연했다”고 생각한 것(시시메 아키라 증언 “극동재판이 열렸다 ... 난징학살사건 보도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얼마후에 지방신문에서 N소위 등이 난징에서 전범으로 총살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아, 그래야지, 당연하지.”)은 극동재판(1948년) 당시가 아니다. 후의 정보(다음에 화제가 되는 것은 23년 후)를 기준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당시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회상기(1985년 간행)에 관해
-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회상기에는 “중기관총, 경기관총의 맹사(猛射)로 성벽은 파괴되어 갔다” “전차가 성문을 향해 격돌파(激突破)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실제 체험기인지 싶을 정도로 오류가 많다고 일본의 근현대사 연구자인 아라 켄이치(阿羅健一)는 지적했다.
- “100인 참수의 용사로서 ... 일약 유명해진 사람이다” 모치즈키 고사부로는 이 내용을 1937년 11월 27일 - 11월 28일 조(条)에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도쿄니치니치신문의 제 1보가 나온 것이 1937년 11월 30일이며, 100인 참수 경쟁이 유명해진 것은 그 후이다. 또, 제 1보가 나오기까지는 ‘경쟁’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관련 명예훼손 소송에서의 사토 신주의 증언이 있다.(“(지금부터인지,) 현재 100인 참수 경쟁을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사토 신주 “지금부터입니다”)
-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회상기에서는 “연대장도, 대대장도 ... 묵인했다”고 적혀있지만, 카타기리(片桐) 연대장이 노다 츠요시를 질책했다는 증언도 있다.
-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한 친척은 명예훼손 재판의 원고 측 변호사인 이나다 토모미(稲田朋美)의 전화 취재에 “아무도 그 사람(모치즈키 고사부로)이 말하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친족에게도 폐만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책을 쓰고 관계자들에게 보냈다고 하지만, 아무도 상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 혼다 가쓰이치의 르포에 관해(本多勝一のルポについて)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100인 참수 전설’을 “혼다 가쓰이치 기자는 중국 여행 중에 난징에서 듣고” “‘아사히신문’의 연재에서 다시 썼던 것”이다. 스즈키 아키라는, "혼다 가쓰이치 기자의 르포는 그 소재가 된 35년 전의 ‘마이니치’의 기사와 비교해 1. 전투 중의 공훈 이야기가 고의로 평시의 살인게임으로 둔갑됐고 2. ‘상관 명령’이라는 허구가 덧붙여졌으며, 3. ‘100인 참수’가 세 번이나 반복된 것처럼 과장된 표현으로 되어있는 등 분명 ‘착각’이 아니라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어 ... 수십 배 강렬했다”고 말했다. 명예훼손 재판(후술)의 원고 측 증인으로 출석한 사토 신주는 증인 심문에서 혼다 가쓰이치의 취재 방법의 문제, 그리고 검증이 없었다는 점을 비판했다. 사토 신주는 “내게 묻지 않고서 100인 참수 이야기에 대해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허위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기자가 하나의 사실을 보도 할 때는 어디까지나 그것이 진실임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원고를 쓰면 안 됩니다”고 말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 근현대사 비평가인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가 혼다 가쓰이치를 “무책임한 기자”라고 평했던 것을 소개하고 있다.
4.2.3 기사를 의심하는 주장(記事を疑問とする主張)
제 1보 : 회견은 우시(無錫)가 아니라 창저우(常州).* 센카이 카즈오(浅海一男) 기자는 “우시에 맨 먼저 도착”이라는, 11월 27일 발의 기사를 썼다. 두 소위가 속한 토야마(冨山) 대대는 26일, 이미 창저우(우시와는 다른 쪽)를 향한 추격을 하고 있었으며, 우시에서의 회견은 불가능했다. 29일(또는 30일) 창저우의 회견에 참가한 사토 신주는 ‘경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센카이 카즈오 기자는 거슬러 올라가서 우시에서 창저우까지 “25명을 참수”했다, “칼의 이가 빠졌다” 등의 내용을 기사에 썼다. 또 명예훼손 소송의 판결도 “들었던 내용을 기사로 했다”는 기자의 진술에 신뢰를 뒀다. 결과가 이 제 1보이며 2,3,4보다.
[* 아지아(亞細亞)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우시(無錫)에서 창저우(常州)까지는 불면불휴(不眠不休)의 격전이었다”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창저우는 오류일 것”이라고 했고, 가사하라 도쿠시는 “역 앞 광장의 일본군의 모습을 통해 우시가 아니라 창저우임은 틀림없고” “두 소위가 소속된 토야마 대대가 우시 입성 후 곧바로 추격선발대로 우시를 출발했던 것은 전투상보(戦闘詳報)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우시역 앞에서는 두 소위가 인터뷰할 시간 등이 없었다”며, 우시에서 먼저 센카이 카즈오 특파원과 무카이 도시야키 소위 간의 담합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창저우에서 노다 츠요시가 그들과 접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 2보 : 당시 당사자가 쓴 ‘오노 일기(大野日記)’(진중일지)에도 두 소위가 속한 토야마 대대가 딴양에 입성한 흔적은 없다.
제 3보 : 토야마 대대가 속한 9 연대는 쥐릉(句容)을 우회했다. 5일 센카이 카즈오 기자는 아직 딴양에 있었고 쥐릉에 없었다 (부정론의 제 3보 참조).
제 4보 : 11일 무카이 츠요시 소위와 만났다고 기사에 쓴 스즈키 지로 기자는 “저항도 점점 약해져 정상에 몰려갔습니다. ... 쫓아낸 적을 소탕했을 때입니다, 두 소위를 만난 것은”이라고 1972년 취재에 답한 바 있다. '쯔진산(紫金山, 488m) 공격'의 전황에 한정하면, 스즈키 지로 기자는 틀리지 않았다. 그 후에 공문서나 제 1차 자료가 대량으로 발굴되어 정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난징전사(南京戦史)’(1989년) 기타에 따르면 토야마 대대가 싸운 것은 쯔진산 기슭이지만 ‘본가도 지구 전투(本街道地区の戦闘)’로서 양자에는 명확한 구분이 있었다. “중산릉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도 가지 않았다. 9일(9연대는 10일)부터 시작된 이 전투는 11일에도, “더더욱 적의 사격 맹렬”로 위에서 하루 종일 사격을 당하여 고립 내지 고전하고 “전황은 진전되지 않았다” 제 3 대대가 당초 목표로 한 73(m) 고도도 아직 공략되지 않았다.
한편, 센카이 카즈오 기자는 전쟁터가 아니라 직접 “쑨원릉(孫文陵) 앞의 공도(公道) 근처”에서 “두 소위의 방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무카이 도시야키 소위, 노다 츠요시 소위, 센카이 카즈오 씨, 나(스즈키 지로) 4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스즈키 지로 기자는 도쿄재판의 검사에게는 “기사는 센카이 카즈오 씨가 주로 집필”했고, ‘슈칸신초(週刊新潮)’에 취재에서는 “어느 쪽이 직접 집필했는지는 기억하지 않습니다”라고 각각 답했다.
기사의 사진은 창저우 중산문(中山門)을 배경으로 사토 신주가 11월 29일(혹은 30일)에 촬영한 것으로, 쯔진산 기슭과 일치하지 않는 문(門)이 확실한 부분은 삭제되고 게재되었다.
또한 판결은 기사로서 구체적으로는 유일하게 제 4보만 언급하고선 “토야마 대대가 대략 쯔진산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던 것조차 없었던 것으로까지는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하나의 이유로 하여 신문 보도가 완전한 허위는 아니었다고 판시했다.
4.2.4 논쟁 당시의 저명한 저술가의 반응(論争当時の著名著述家の反応)
우스이 요시미(臼井吉見, 작가·평론가) “특파원 서명 기사로, 후방에서 큰 화제를 일으키려고 한 특종게임의 엉터리 얘기였다 ...”
카이코 타케시(開高健, 작가·평론가) “저널리즘의 유치와 무책임을 잘 찌른 작품으로 ... 더 정면으로 고발해도 좋을 것이다.”
오다 마코토(小田実, 소설가·운동가) “100인 참수와 같은 사건은, 진실로는, 그 자체는 분명히 없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4.3 제3자의 견해(第三者の見解)
군사역사가인 하라 다케시(原剛)에 따르면 “두 소위는 전투 중에 백병전 또는 포로 포획 시에 수 명을 참수했던 것에 대해서 센카이 기자 등의 권유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100인 참수’라는 대언장어(大言壮語)를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말한다.
역사학자인 밥・T・와카바야시(Bob T. Wakabayashi)는 “종합하면, 센카이 카즈오 기자의 기술은 두 장교가 그에게 한 자랑하는 얘기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완전히 날조된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든 두 장교는 부당하게 처형된 것이고 사건은 허구였다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다. 이 결론은, 난징에서의 ‘아트로시티(atrocity, 잔혹행위)’ 전체가 날조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제국 육군이 전쟁 범죄에서 면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5 명예훼손 재판(名誉毀損裁判)
2003년 4월 28일, 노다 츠요시와 무카이 도시아키의 유족이 유족 및 사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면서 마이니치신문, 아사히신문, 카시와쇼보(柏書房, 출판사), 혼다 가쓰이치 등을 제소했다. 원고 측 대리인 변호사는 후일 방위상 등을 역임한 이나다 토모미(稲田朋美)였다.
5.1 소송의 주요 쟁점(訴訟の主な争点)
5.1.1 ‘전투에 의한 100인 참수’를 말하기 시작한 이는 누구인가(「戦闘による百人斬り」を言いだしたのは誰か)
• 원고의 주장 - 보도된 신문기사는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도쿄니치니치신문의 기자들이 전의고양(戦意高揚)을 위해 창작한 것이다.
• 피고(마이니치신문)의 주장 - 보도된 신문 기사는 두 소위가 기자들에게 말한 그대로 전한 것이다. 기자들은 실제로 두 사람이 중국인을 참수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 재판소의 판단
1. 도쿄니치니치신문에 게재된 사진을 찍은 사토 신주 카메라맨(원고 측 증인)은, 기사 집필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도 ‘100인 참수 경쟁’의 이야기를 두 소위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이것은 당시 종군메모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빙성이 높다.
2. 두 소위들 스스로도 유서 등을 통해 두 소위 중에서 한 명이 기자에게 말했다고 적은 바 있다.
3. 노다 츠요시 소위가 나카무라 세키로에 100인 참수를 자랑하는 편지를 보내거나, 또 현지 가고시마에서 100인 참수를 인정한 코멘트를 하거나 강연을 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노다 츠요시 소위는 100인 참수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었다.
이상의 이유로 재판소는 “두 소위가 센카이(浅見) 기자 등 신문기자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100인 참수 경쟁’ 기사가 작성된 것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5.1.2 무카이 소위의 부상에 대해(向井少尉の負傷について)
• 원고의 주장 – 당시에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는 딴양의 포격전에서 부상을 당해 전선을 떠나 ‘100인 참수 경쟁’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 소위의 수기나 토야마 대대장의 인증서에도 같은 취지의 기재가 있다.
• 피고(혼다 가쓰이치)의 주장 - 그런 자료들은 난징군사재판에서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가 사형을 피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다.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면 사형이 되기 때문에 이 행위 자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부상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없고, 신빙성이 없다.
• 재판소의 판단
1. 두 소위의 수기나, 토야마 대대장의 증명서는 난징군사재판에서 처음으로 제출된 것이며 난징전투 당시에 작성된 객관적인 증거는 제출된 바 없었다.
2.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가 딴양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이대(離隊, 대오 이탈)했더라면,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의 직속 부하였던 타나카 카네히라(田中金平)가 행군 기록에 당연히 기재를 했겠지만, 그런 기재는 없다.
이상의 이유로 재판소는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가 딴양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전선을 떠나서 쯔진산(紫金山)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주장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5.1.3 전투에 의한 100인 참수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戦闘による百人斬りは実際に行われたか)
• 원고의 주장 -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저서 ‘내 안의 일본군(私の中の日本軍)’에서 “일본도는 세 사람만 전투에서 참수해도 쓸모가 없게 된다. 그래서 100인 참수가 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에 100인 참수 보도는 허위다“라고 주장했다. 원고도 그것을 인용해 비슷한 주장을 했다.
• 피고(혼다 가쓰이치)의 주장 –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나 사사키 코지로(佐々木小次郎)도 아닌, 일반인이 100인을 전투에서 참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두 소위는 포로나 농민을 참수했으면서 그것을 신문 기자에게 애매하게 전했던 것이다.
• 재판소의 판단 - 난징전투 당시의 전투 실태나 두 소위의 군대에서의 임무, 한 개 일본도의 강성(剛性) 내지 현대 전쟁에서의 전투 무기로서의 유용성 등에 비추어 보더라도, 본건 도쿄니치니치신문 기사에 있는 ‘100인 참수 경쟁’의 실체 및 그 살상 숫자에 관해서는 이 기사의 내용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사의 ‘100인 참수’의 전투 전과는 심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5.1.4.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実際には何が行われたか)
• 피고(혼다 가쓰이치)의 주장
1. 노다 소위를 교관으로 받들었던 모치즈키 고사부로가 야스쿠니 신사에 기증한 체험기 ‘나의 지나사변(私の支那事変)’에 노다 소위가 농민을 끌고 와서 참수했었고, 중국인을 찾아내면 무카이 도시아키의 소위와 쟁탈전을 벌일 정도 그런 행위가 커져갔다는 기술이 있다.
2. 노다 츠요시 소위와 동향인 시시메 아키라는 소학교(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노다 츠요시 소위가 강연을 했던 적이 있고 당시 노다 츠요시 소위가 스스로 “실은 100인 참수는 포로를 베었던 것”이라고 말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3. ‘난징대학살의 환상(南京大虐殺のまぼろし)’을 쓴 스즈키 아키라도 대상자가 포로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4. 난징 공략전 당시에 일본군에는 포로나 농민의 살해는 흔히 있었던 일이며, 그런 일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다수 존재한다.
이상의 근거에서, 실제로 두 소위는 포로나 농민에 대한 살인 숫자를 경쟁하는 ‘살인게임’을 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재판소의 판단
1. 모치즈키 고사부로의 기술(記述)은 진위가 분명하지 않다고 할 수 밖에 없겠으나 이를 즉시 허위라고 할 객관적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2. 시시메 아키라의 소학교 동창인 카라시마 가쓰이치(辛島勝一)도 시시메 아키라와 함께 했었던 기회에 노다 츠요시 소위로부터 백 명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도주하는 포로를 본보기로서 처형하기 위해 참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카라시마 가쓰이치가 노다 츠요시 소위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런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일부러 허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렵고, 적어도 노다 츠요시 소위가 “포로를 베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두 사람의 기억이 일치하고 있다.
3. 혼다 가쓰이치는 포로를 베었다고 하는 우노 신타로(鵜野晋太郎)의 수기를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도 진위는 분명하지 않다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자신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로서 구체성, 박진성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점에서, 그 중요한 부분에서 완전히 허위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다른 전제에 선 원고들의 주장은 모두 채용할 수가 없다.
5.1.5 시효(時効)
• 피고(마이니치신문)의 주장 - 신문 기사는 1937년이며, 민법 724조의 제척기간(3년)을 경과하고 있으며, 정정·사죄의 의무는 없다.
• 원고의 주장 - 신문 기사는 60년 전이지만 그 기사는 허위 보도이며 허위 보도를 시정하지 않고 계속 방치하는 한 시효는 연장된다.
• 재판소의 판단 - 전술한 바와 같이 신문 기사가 “허위임이 밝혀졌다고는 인정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시효는 고려할 필요도 없다(“따라서, 그 나머지 점에 대해서는 검토할 필요도 없이 원고의 상기 주장에 이유는 없고, 피고 마이니치신문에 대한 청구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원고들의 청구권이 존재하더라도 제척 기간을 경과한 것이며 시효도 성립한다.
이상의 이유로, 2005년 8월 23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원고 청구 전면 기각의 판결이 나왔다.
원고는 항소했으며, 2006년 2월 22일 도쿄고등재판소는 1회 심리로 결심(結審)을 했다. 또한, 항소인이 제출한 제 2 준비서면의 일부 진술에 대해서 재판장은 내용 부적절(판사 모욕)로 진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심 후에 항소인 측 변호사는 재판관에 대한 기피를 신청했지만 3월 1일 기각됐다(결심 후의 신청이나 소송 지휘를 이유로 한 재판장 기피는 보통 인정되지 않는다).
5월 24일, 항소 기각 판결이 나왔다. 원고 측은 상고했지만 12월 22일, 최고재판소에서도 상고 기각 판결이 나왔다. 원고 측의 패소가 확정됐다.
5.2 비고(備考)
• 증인의 제한 - 원고 측 증인으로 출석한 사토 신주는 원고 측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원고 측 변호인을 맡은 이나다 토모미에 따르면, 원고 측은 사토 신주 이외에도 증인을 신청하고 상신서(上申書)도 제출했으나 재판소에서 기각됐다.
• 증언의 변용 - 최고재판소까지 갔을 때, 시시메 아키라의 증언에 대해서 소학교(초등학교)에서 그런 강연은 없었다는 증인이 나왔다는 사실이 아주 작게 전해졌다. 하지만, 그 후 시시메 아키라는 3년 이상 지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学校)에서 두 사람을 상대로 한 이야기였다고 증언을 변경했다.
6 기타(その他)
• 2004년, 슈에이샤(集英社)의 ‘주간영점프(週刊ヤングジャンプ)’ 43호에 모토미야 히로시(本宮ひろ志)의 만화 ‘나라가 불탄다(週刊ヤングジャンプ)’ 제 88회가 게재되었다. 여기서 난징사건이 다뤄졌는데 두 병사가 포로를 나란히 세워놓고 빨리 참수하는 경쟁을 묘사했었지만, 정치결사 세이키쥬쿠(正氣塾)와 ‘슈에이샤 문제를 생각하는 지방 의원 모임(集英社問題を考える地方議員の会)’의 항의를 받고서 슈에이샤는 “현재, 전범으로 처벌받은 분들의 유족 분들이 재판 중입니다. 재판 중이라는 시기에 오해를 초래할 수 있는 묘사를 게재한 건에 대해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하면서 해당 장면을 삭제했다.
• 마이니치신문사가 1989년에 간행한 ‘쇼와사 전체 기록 Chronicle 1926-1989(昭和史全記録 Chronicle 1926-1989)’에는 무카이 도시야키 소위가 부상당하고 부재였음을 이유로 해당 기사의 100인 참수는 사실무근이었다고 기재했다.
• 중국 난징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는 도쿄니치니치신문 기사를 ‘학살의 증거’로 삼아 등신대(等身大) 판넬을 만들어서 전시를 하고 있다.
• 대만(중화민국) 타이베이 시에 있는 중화민국 군사자료관인 국군역사문물관(国軍歴史文物館)에는, 위병문(魏炳文) 소장의 친족이 보낸 칼의 몸통에 ‘난징의 역 살해 107명(南京の役 殺一〇七人)’이라고 새겨진 군도(軍刀)가 전시되고 있다. 국군역사문물관은 이 군도가 “난징대학살 시에 동포인 중국인 107명을 참수한 일본 군도”이기 때문에 무카이 · 노다 두 소위 중 한 명이 사용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사람이 참수한 것으로 알려진 숫자(무카이 105명 · 노다 106명)보다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100인 참수 문제가 일본에서 보도된 이후에 한 명 더 참수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고 있다.
7 참고문헌(参考文献)
- 노다 타케시(野田毅), 미조구치 이쿠오(溝口郁夫) (편(編)), 2011년, ‘난징 ’100인 참수 경쟁‘ 허구의 증명 - 노다 타케시 옥중기 및 재판 기록 전문 공개(南京「百人斬り競争」虚構の証明―野田毅獄中記と裁判記録全文公開)’ 슈쵸샤(朱鳥社) ISBN 978-4-434-16309-8
- 100인 참수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百人斬り訴訟を支援する会) 편(編) ‘‘100인 참수 소송’ 재판 기록집(「百人斬り訴訟」裁判記録集)’ (텐카이샤(展転社), 2007년) ISBN 9784886563095
8 관련문헌(関連文献)
-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사실은 이랬다 난징사건(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일본도서간행위원회(日本図書刊行会), 1999년) ISBN 4-8231-0504-4
- 우노 미쓰히로(鵜野光博) ‘100인 참수 경쟁의 허위 보도를 입증한 노다 소위의 일기(百人斬り競争の虚報を証明した野田少尉の日記)’ (‘세이론(正論)’ 2001년 8월호)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100인 참수경쟁’과 난징사건(「百人斬り競争」と南京事件)’(오쓰키쇼텐(大月書店), 2008년) ISBN 978-4-272-52080-0
- 쿠마가이 신이치로(熊谷伸一郎) ‘역사수정주의와의 투쟁 검증 난징 사건·‘100인 참수’ 소송 - 거론되는 전후 책임·보도 책임(歴史修正主義との闘い 検証 南京事件・「百人斬り」訴訟--問われる戦後責任・報道責任)’ (‘세카이(世界)’ 745, 2005.11)
- 오노 켄지(小野賢二) ‘보도된 수많은 ‘100인 참수’(報道された無数の〈百人斬り〉)’ (‘전쟁책임연구(戦争責任研究)’ 50, 2005 동계(冬季))
- 스즈키 치에코(鈴木千慧子) ‘‘100인 참수 경쟁’ 소송은 왜 일어났는가(〈百人斬り競争〉訴訟はなぜ起こされたか)’(‘역사지리교육(歴史地理教育)’ 666, 2004.3)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소위 ‘100인 참수’ 사건의 허위와 사실 (1) (2)’(‘정경연구(政経研究)’ 제42권 제1호, 제4호 일본대학법학회(日本大学法学会))
- 호라 도미오(洞富雄) ‘군대 교육에 길러진 청년 장교의 정신 구조- ‘100인 참수 경쟁’은 ‘사실’이었는가 ‘창작된 사실’이었는가(軍隊教育に培われた青年将校の精神構造--「百人斬り競争」は「事実」であったか「語られた事実」であったか)’(‘역사비평(歴史評論)’ 269, 1972.11)
- 무카이 치에코(向井千恵子)(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의 차녀), ‘심판된 100인 참수 날조 보도(裁かれる百人斬り捏造報道)’(‘쇼쿤!(諸君!)’ 2003년 9월호)
-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호시 토오루(星徹)·와타나베 하루미(渡辺春己) ‘난징대학살과 ‘100인 참수 경쟁’의 전모(百人斬り競争」の全貌)’(주식회사 킨요비(株式会社金曜日)) ISBN 9784906605538
-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내 안의 일본군(私の中の日本軍)’(상·하) (분슌문고(文春文庫)) ISBN 9784167306014 ISBN 9784167306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