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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형 토오이츠닛포 논설주간이 까밝힌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의 민낯

조선대학교 학생 ‘200명’ 김일성 환갑 선물로 북한에 보내져 ... 총 10만 명을 야만세계로 보낸 비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에 한국은 무관심

홍형(洪熒) 토오이츠닛포(統一日報, 통일일보) 논설주간이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의 민낯을 낱낱이 고발했다.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란 1959년부터 20여 년간 일본 정부와 북한, 조총련 등이 일본에 거주하던 10만 명에 가까운 재일조선인들을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홍형 논설주간은 지난해 12월 13일 유튜브 ‘조갑제TV’(모두가 잊은 10만 재일동포 북송 사건의 내막)에 출연해 조갑제닷컴 조갑제 대표와 함께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둘러싼 내막을 밝히며 이 사건에 무관심한 우리 국민들에게 반성을 주문했다.     


“북한의 야만적 폭압체제를 사회주의 성공사례인 것처럼 허위 선전”

이날 홍형 논설주간은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건 1959년 12월”이라고 운을 떼며 북송사업 경위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6.25 전쟁을 전후해 북한에 거주하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초엘리트 계층들은 월남을 시도했다. 이에 북한은 전후(戰後) 복구를 위한 인력이 부족하게 됐고, 김일성은 인력을 보충할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극심한 빈곤을 겪던 일본은 재일조선인 생활 보호비 지원 등으로 인해 재정적 부담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은 물꼬를 텄다. 

사업은 북한과 일본 적십자사의 협정 후 본격화됐다. 북한, 일본 정부, 일본 언론의 적극적인 협조도 이뤄졌다.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실상을 알고 있던 이승만 정부는 이에 반대했지만, 일본엔 사회주의 풍조가 만연했었고 공산주의 조직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주도권을 쥐면서 사업이 가속화 됐다는 게 홍형 논설주간의 설명이다. 

그는 “일본과 평양 양측 적십자 당국은 해방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사업이라는 식으로 마치 인도적인 사업인 것처럼 (위장)했다”며 “당시 일본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는데, 조총련과 북한이 (재일 교포들에게) ‘사회주의 낙원으로 가야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의) 야만적인 폭압체제를 사회주의의 성공사례인 것처럼 허위 선전했는데, 일본사회가 그것을 걸러주지 못했다”며 “평양의 일방적 프로파간다를 여과 없이 전달해 결과적으로 북한이 일본 사회보다 발전된 사회인 것 같은 허상을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조선대학교 학생 ‘200명’ 김일성 환갑 선물로 북한에 보내져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으로 인해 북한으로 건너가게 된 사람들은 약 9만3,000명으로, 대부분 남한 출신이었다. 

홍형 논설주간은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에게 솔깃한 선전이 대대적으로 나오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선택들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홍형은 이들의 2세, 3세 자손까지 합치면 현재의 생존자가 20만 명 이상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북송 과정에선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들 또는 한일 혼혈으로 태어나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인들도 다수 포함됐다.  

특히 조총련이 운영하던 조선대학교의 교사들은 자신의 제자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김일성 환갑 때는 이 학교의 학생 200명이 ‘선물’로 북한에 보내졌다는 게 홍형 논설주간의 설명이다. 일종의 ‘인신공양’ 성격이었던 것.

결과적으로 북송을 선택한 이들은 일본에서보다 훨씬 비참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들은 북한이 전후(戰後) 복구 사업을 하는 데에 노예 노동자로 활용됐으며, 일부는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숙청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정권 체제 유지를 위한 비자금은 조총련으로부터 조달”

또 하나의 문제는 북한이 아직까지도 북송된 재일동포들을 인질로 삼아 자신들의 공산화 전략을 펼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형 논설주간은 “1965년에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일본과 한국이 선진화되면서 북송된 모든 사람들과 혈육을 북으로 보낸 모든 사람들이 후회하게 된다”며 “문제는 북한에 인질이 잡혔기 때문에 (북한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북송사업으로 결속력이 강해진 조총련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남북한 대결을 공산권에 유리하게 끌고 가는 공작을 펼쳤다”며 “(이 공작은) 최소 30년 이상 성공하며,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 노동당의 유일한 해외 지부인 조총련이 대남공작을 한 결과가 지금의 한국에 만연해 있다”며 “(지금) 정권을 차지한 주사파들의 씨를 뿌리고 키워온 것이 바로 조총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형 논설주간은 “지금까지 북한 정권 체제 유지를 위한 비자금은 조총련으로부터 조달됐다”며 “북한 핵개발을 위해 조총련의 과학자들이 전면적으로 협력했고, 돈과 기술, 사람과 정치 프로파간다, 대남 공작 모든 것이 (조총련으로부터 나왔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조갑제 대표는 “10만 명을 야만세계로 보낸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비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인데, 여기에 대해서 한국은 무관심하다”며 “한국, 일본에 양심있는 사람들이 협력해 이 문제에 대한 국가적 조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 13일 유튜브 ‘조갑제TV’ "모두가 잊은 10만 재일동포 북송 사건의 내막" 방송]



[지난해 12월 13일 유튜브 ‘조갑제TV’ "모두가 잊은 10만 재일동포 북송 사건의 내막" 방송 녹취 전문]


[조갑제 대표] 조갑제 TV 시청자 여러분 도쿄에 행사 때문에 와 있는데, 아주 소중한 분을 만났습니다. 홍형 선생인데, 옛날에 주일 한국 대사관에 공사를 역임하시고 오랫동안 안기부에서 근무하셨습니다. 지금은 통일일보의 주필로 계십니다. 한국 사람이 잊고 지내는 중요한 문제 하나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20세기의 국가에 의한 인권 범죄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북한 정권의 인권말살인데 두 개가 더 있습니다. 하나는 북한이 6.25 전쟁 중에 억류한 국군포로 6만명을 송환하지 않는 것, 그다음에 일본 정부 언론 공산당 당시 여당까지 합작해서 재일 동포 10만명을 생지옥으로 보낸 이른바 재일동포 북송사건입니다. 피해자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이 문제를 짚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홍 선생님이 재일동포 북송사건의 전체적인 개황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홍형 논설주간] 오늘 사장님하고 별안간 말씀을 나누게 돼서, 제가 자료준비를 전혀 못한 상태라 그냥 관심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는 범위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건 1959년 12월입니다. 연말에 시작됐는데, 배경이 여러 가지 설명이 있겠습니다. 6.25 전쟁 전시에 김일성이 남한에서 많은 사람을 납치해갔습니다. 6.25전쟁 전부터 시작된 월남자들이, 특히 전쟁 기간 중에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50만명에서 어떤 분은 300만명까지 이야기하시는데, 북한에서 가장 엘리트 계층이 주로 월남하지 않습니까. 남쪽으로 왔기 때문에 전후복구에서 엄청나게 인력이 부족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김일성은 사할린에 있던 한국이이라든지,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만 그 중국, 지금 만주지역에 있던 옛날 조선인들, 한국 사람들을 북으로 대대적으로 데려가고... 그것이 인력보충이라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북송사업 재일교포들을 데려가게 됩니다. 이것은 그동안 연구를 해서 논문이나 이런 것도 적지 않은데, 아마도 처음에 시작은 재일교포가 먼저 시작했는지... 해방 직후에 일본 공산당 당원들이었던 재일교포들이 전국적으로 지금의 조총련 전신인 조련을 만들어서 그 주도권을 쥡니다. 일본 공산당의 전위대 역할을 하면서 주도권을 쥐어서, 당시에는 한일간에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았을 때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주 편협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경향이 아주 강했습니다. 일본의 좌경 풍토속에서 재일동포사회가 거의 조총련에 지배되는... 아마 객관적으로 봐서 80% 이상이 조총련에 지배되는 상황이 지속됐습니다. 그것이 북한이 전후 재건과정에서 겪는 인력난과 겹쳐져서, 조국에 돌아가면 사회주의의 남부상으로, ‘무료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제 당시에 일본도 지금같이 풍요로운 사회가 아니고, 전후에 극심한 빈곤속에서 어려웠기 때문에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도성장으로 들어가는게 60년대였으니. 어려운 일본사회에서 당연히 재일동포들만 어려운 게 아니라 일본 사람들 자신도 어려웠으니, 그런 과정에서 취업난이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까, 그걸 차별이라고 대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사회주의 낙원으로 가야한다는 캠페인을 조총련과 북한은 벌였고...

[조갑제 대표] 그런데 북한이 공작은 한 것에 대해서 일본 정부, 언론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으므로 이게 가능해진 일입니다. 일본과 북한의 합작이라고 보면 됩니다. 

[홍형 논설주간] 합작입니다. 합작은 예를 들어 일본이 군국주의 시대에 반동이라는 형식으로 전후에 사회주의적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지식인들을 비롯해서 언론에 만연했고, 당시 동서냉전이 격화되면서 일본에서 공산당 사회당이 아주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갑제 대표] 일본 정부는 자민당 아닙니까.

[홍형 논설주간] 자민당은 1955년에 자유당과 민주당이 하나로 합쳐져서 자유민주당. 지금 자민당입니다. 왜 소위 우파 보수계 정당이 왜 단일화 되냐면 당시에 일본의 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게 아니냐 할 정도로 좌익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그 위기의식 때문에 보수정당이 하나로 된 풍토였습니다. 그러니까 해방 직후에 일본 공산당, 일본 혁명을 부르짖는 일본 공산당의 전위대 역할을 조총련이 했습니다. 일본 공산당 내에 민족 대책부라는 게 있어가지고, 조총련을 처음에 주도한 세력들은 일본 공산당의 당 중앙위원회 정도로 서열이 높은, 그래서 그 시대에 일본이 패전후 조총련이 당시에 그랬다고 합니다. 당시를 살았던 분들의 경험에 의하면 조총련이 마치 자신들이 전승국 국민인냥 행세 했다고 합니다. 

[조갑제 대표] 거기에 대해서 일본쪽에서 불만이 많은 거죠.

[홍형 논설주간] 예 그거에 대한 반감 이런게 복합적으로 작용이 돼서 결국 뭐랄까, 배척?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강했다고 합니다. 

[조갑제 대표] 문제는 지금 결과적으로는 가장 반인도적인 범죄가 국가차원에서 이뤄졌는데, 북한 공작과 일본의 적극적인 협력. 근데 여기에 일본 적십자도 앞장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일본 언론이 뒷받침하고, 일본 공산당 세력이 뒷받침하고, 당시 집권 여당인 자민당도 하고, 지식인들도 해서 마치 이게 무슨 인도적 사업인 것처럼 위장한 것 아닙니까?

[홍형 논설주간] 그렇습니다. 당시에 국교가 없으니까. 이걸 적십자 차원으로 이제 그게 인도사업화 한겁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해방된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려하는 사업이라는 식으로, 이게 마치 인도적인 사업인 것처럼 일본과 평양 양측에 적십자 당국이 나서서 합의를 해서 그것에 의해 북송 사업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조갑제 대표] 지나고 나선 생지옥으로 보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데, 문제는 1950년대 말의 상황에서는 이승만 정부도 김일성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게 일본 사람들, 또 조총련 재일동포사람들의 일반적 생각 아니었을까요?

[홍형 논설주간] 잘 아시는대로 사회주의 공산체제에서의 그 일사불란한 프로파간다... 저쪽은 사회주의 낙원처럼 선전했거든요. 그런 강력한 프로파간다 통제가 없는 사회에서는 있는 그대로... 전후에 피폐하고 어려웠던 한국사회는 있는 모습 그대로 됐고. 그보다 더한 야만적인 폭압체제는 마치 그것이 사회주의의 성공사례인 것처럼 허위 선전이 됐는데 그것을 걸러주지 못한 거죠,  일본사회가. 전혀 그것을 거르지 않고. 평양의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를 여과없이 전달을 해서 결과적으로 북한이 일본사회보다 발전된 사회인 것 같은 허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조갑제 대표] 이승만 정부는 궐기대회도 하고 여야가 다 재일동포 북송을 반대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한때 무역 단절까지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이게 일본 정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모양이죠?

[홍형 논설주간] 그렇습니다. 한국은 말씀하신대로 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 체제가 무언지, 스탈린주의가 무언지 알았기 때문에 동포들을 생지옥에 보낼 수 없다고 했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당시 자민당의 총리가 지금 아베 수상의 외조부에 해당하는 기시노부스케 총리였는데, 이분들은 일본자체도 어려웠으니까 조금이라도 정치적, 사회적, 재정적 부담을 덜기 위해서는 본인들이 적십자 차원에서 합의된 것에 (사람들이 북에) 가겠다고 하니까 보내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처리해버렸습니다. 

[조갑제 대표] 북한에 간 분들이 출신으로는 남한 출신들이 더 많죠?

[홍형 논설주간] 뭐 압도적으로 남한입니다. 식민지 때 한반도 북쪽 지역에 사시던 분들은 대게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서 북으로 갔고요, 남쪽에 있던 분들은 현해탄을 넘어서 일본으로 왔기 때문에, 재일동포의 99%는 남한출신입니다. 

[조갑제 대표] 그러면 이분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조국에 돌아간다는 게 국적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것보다는 조국에 돌아가서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식으로 자진해서 생각했던 사람도 없다고는 볼 수 없겠네요.

[홍형 논설주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게.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게, 일본에서도 다큐멘터리나 소설로도 나오는 게 있는데. 사는게 고달프면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는게 고달프다 보니까, 어느 한쪽에서 자기가 믿고 싶은 솔깃한 선전이 아주 대대적으로 나오니까, 집요하게 나오니까, 고달픈 삶속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선택을 많이들 했습니다. 

[조갑제 대표] 조총련계 재일동포에 대한 집중적인 선전 공작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는 일본의 언론도 일부 협조한 것 아닙니까. 

[홍형 논설주간] 뭐 일부 협조가 아니라 대대적으로 동조를 했죠. 그리고 당시에 조총련 학교를 통해서... 예를 들면 고등학교 학생들 교사들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교사들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고 그 뒤에도 문제가 되는데. 소위 수령의 혁명 전사를 양성한다는 조선대학교 같은 경우에는 클래스 하나가 통째로 간다던지, 그 뒤에 김일성 환갑 선물로 조선대학교 학생 200명으로 기억하는데요. 증언이 나옵니다. 예전에 역사에서 중국에서 조선의 조공을 바쳐라 하면 사람을 바치지 않습니까. 김일성 환갑선물로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조갑제 대표] 일종의 인신공양이네요.

[홍형 논설주간] 인신 공양을 헀습니다. 그것이 70년대까지 지속될 정도였으니까.

[조갑제 대표] 지금까지 보낸 사람 수는 총 10만명 잡으면 되죠?

[홍형 논설주간] 공식적으로 9만 3천명 정도입니다. 

[조갑제 대표] 중요한 게 거기에 일본 여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들도 보냈다는 거죠.

[홍형 논설주간] 그러니까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처들입니다. 그 수에 대해서는 2000명이다, 6000명이다 여러 가지 숫자가 있는데, 일본에 현재, 일본 국민이죠. 일본 정부가 얼마나 비정했냐면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조차도 그렇게 보내버렸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자기 배우자, 가족을 따라서 할 수 없이 가겠다고 하는 그런 분들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자기들이 싫어하는 조선인하고 억지로 결혼한 일본인 여성들은 가족으로부터도 국가로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은 그런... 

[조갑제 대표] 일종의 인종차별적인 생각이 깔려 있네요.

[홍형 논설주간] 그 당시에는 지금하고 다른 시대였으니까요. 더구나 태평양 전쟁 직후에 그런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사실 이걸 제대로 된 모습을 살펴보기 어렵습니다.

[조갑제 대표] 결국 10만명 되는 사람이 북한에 와서, 이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북한에서 숙청당하고 그런 강제수용소에 보내지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역시 자유를 맛본 사람들이니까 북한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홍형 논설주간] 말씀하신대로 저희가 문명사적 차원에서 또 하나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재일동포북송사업이 갖는 의미가 지금 아직 거의 연구가 안됐습니다. 근데 저도 한 20년 30년 이 문제를 보면서 최근에야 느끼는 게 많은 것이, 이 북송사업이 저희가 단순한 게 일본이 자유세계에서 전체주의 야만적인 체제로 사람을 보낸 대규모로 송환한 사업이라는 점을 넘어서...

[조갑제 대표] 유일한 경우죠.

[홍형 논설주간] 그렇습니다. 유일한 경우고 또 하나는 이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결과적으로 북쪽에 가서 2세, 3세 자손들까지 계산하면 아마 현재 생존자가 최소한 20만명이 넘을 겁니다. 즉 북한 인구의 1%가 되는데 이것이 남북한, 저희 한국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이걸 연구하고 연재시작하려고 하는데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 인질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 이후에 1965년에 국교 정상화되고 일본이 선진국이 되고 한국도 선진화되면서 북송된 모든 사람들이 후회하고, 자기 혈육을 북으로 보낸 모든 사람들이 후회하게 됩니다. 문제는 ‘인질이 잡혔기 때문에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갑제 대표] 조총련 사회 전체가 북한의 인질이 된 것이죠. 그 조총련은 북한 노동당의 한국 지부가 되어 버린 것이고.

[홍형 논설주간] 본래 조선노동당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해외 지부가 조총련입니다. 지금 민단 단원들은 사실 한국 국적이, 전후 초기에 조총련이 한 80% 실질적으로 90% 지배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지금 한국 국적을 가진 분들도 아버지, 할아버지 때로 올라가면 거의다가 조총련이었다는 소리입니다. 즉 다시 말해 북한에 북송 인질화 된 혈육들이 있는 겁니다. 그 인질작전 때문에 조총련이 살아남았고, 이 인질화 된 존재를 처리 못한 일본 때문에, 거꾸로 일본은 그것 때문에 북송사업을 계기로 남북한 등거리 정책을 취합니다. 

[조갑제 대표] 국교정상화하고 나서도?

[홍형 논설주간] 국교정상화하고 나서도 그것이 이제 등거리 정책에서 이분들이 전환하는 것이 뭐랄까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에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바뀌면서...

[조갑제 대표] 그때는 또 공산권이 무너지니까.

[홍형 논설주간] 공산권이 무너지니까 그렇게 되는데, 이 등거리 정책이 예를 들어 한일 양국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했던 2002년에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2주후에 고이즈미 총리가 북으로 국교정상화 회담을 하기 위해 가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남북한 등거리입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미사일이나 일본 안보에 대한 도발과 인도적인 범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에 고이즈미 총리가 수교를 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수교를 하기 위해서 갔는데, 당시 동행했던 아베 총리가 납치 문제가지고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에 그게 좌절된 거지. 한국 사람들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을 정통 정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남북한 등거리 정책을 추구하게 한 것이 조총련과 평양의 공작의 승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실은 북송사업 때문인 것입니다. 

[조갑제 대표] 이게 동북아의 전략을 바꿨는데. 10만명이 인질이 되니까 조총련이 북한에 충성하고 돈 갖다 바치고, 한국에 간첩 보내는 기지 역할을 하고 조총련이 일본 사회당과 연계돼서 일본의 여론을 이끌고, 언론이 끌려가고 해가지고 이 10만명을 생지옥으로 보낸 이 사건은 일본에서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한국에서는 무관심하고, 그러는 사이에 10만명은 지옥에서 쓰러져갔고, 아들 딸 중에서 가끔 탈북하고. 강철원씨가 대표적입니다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65년 수교한 뒤에도 80년전까지 일본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북한으로 보냈다는 거 아닙니까. 그건 어떻게 가능했던 거죠.

[홍형 논설주간] 그래서 이제 그게 문제입니다. 실은 1953년에 우리 6.25 전쟁이 휴전된 다음에 열전이 냉전화되는 과정에서, 전쟁터가 한반도의 열전 전쟁터에서 전 세계가 냉전의 전쟁터가 되고, 일본이 냉전의 주 전쟁터가 됩니다. 일본이 바로 북송사업을 계획해서 결정적으로 결속력이 강해진 조총련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남북한 대결, 냉전을 공산권에 유리하게 끌고 가는 공작이 일본에서 전개돼서... 그것을 북한이 최소한 30년 이상 성공했다는 거죠. 그것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의 종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일본에서. 해외에 가진 유일한 노동당 지부인 조총련이 대남공작을 한 결과가 지금의 한국에 만연하고 정권을 차지한 주사파의 씨를 뿌리고 키워온 것이 바로 조총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실은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바로 조총련. 거기에 가장 큰 요소 중 하나가 북송사업에 의한 20만명 이상의 인질을 만들어낸... 한두 명의 인질을 가지고도 해결하기가 어려운데, 20만명의 인질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다만 이 상황을 거꾸로 당초에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북한이 가지고 있던 20만명의 인질을 사실 저희가 현대사에서 저희는 전혀 의식하지는 않았는데, 인질이 북한에 독이 됐던 사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작한 재일동포 북송사업 아니 성묘단 사업으로 북한...

[조갑제 대표] 동포 방문단 사업.

[홍형 논설주간] 예 70년대에 시작됐죠. 7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요, 그거 때매 북에 인질이 있던 수많은 동포들이 인질이 있어도 한국으로 다시 선택을 하게 되고. 거꾸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이분들에 의해서 북에 대대적인 외부 세계. 한국의 발전상이 알려지고 소개되는... 

[조갑제 대표] 역사의 역전인데. 그래서 그 결론으로 맺으면, 지금 조총련 숫자가 수십만 되다가 이제 한 3만으로 줄었고, 민단은 45만. 이게 스코어로 나왔으니까. 결국 악은 패배한다는 것이 증명되는데, 증명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비용을 쏟았고 더구나 가장 비효율적인 것은 이 인간 말살 냉전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문명세계에 살던 10만명을 야만세계로 보낸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비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인데 여기에 대해서 한국이 무관심하다는 것. 특히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은 여기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한국의 보수 세력도 이 문제를 덮고 위안부 문제를 더 클로즈업 시키고 있는 것은 이게 비례감각에도 안 맞고... 하여튼 앞으로 한국 일본이 양심 있는 사람들이 협력해서 이 문제에 대한 국가적 조사. 국가적 조사를 공동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홍형 논설주간] 예 맞습니다. 제가 이제 꼭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게. 그 김일성, 김정일 공동정권일 때, 김일성 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비자금 통치자금이 어디서 조달됐느냐. 지금 악의 체제가 살아남는... 북한의 수령의 비밀자금이 몇 십억 달러냐하는 문제가 나올 때 반드시 저희가 짚어야 될 것이 조총련. 그 체제를 유지가능하게 만든 비자금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종북의 원조이고, 다음에 저쪽에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비자금의 원조가 이것이 또 조총련입니다. 

[조갑제 대표] 북한 핵개발을 위한 자금과 기술도...

[홍형 논설주간] 그것도 거기에도 조총련. 조총련의 과학자들이 전면적으로 협력했고 돈과 기술과 사람과 정치전쟁 모략 프로파간다 대남 공작 모든 것이. 그러니까 조선노동당이 가진 각 지부 단위의 당중에서는 결정적으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체제를 유지한 결정적인 노동당의 지부 중에선 최대의 공헌을 역할을 한 것이 일본지부 조총련이었고, 일본 당국은 오랫동안 한국 정부가 무심했던 것처럼 그 문제에 눈치를 못챘습니다.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눈치를 못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갑제 대표] 다음에 조총련 문제로 한번 같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홍형 논설주간] 예 이건 저희 현대사를 위해서 한번 꼭 사장님과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조갑제 대표] 예 10만명을 생지옥으로 보낸 책임을 김일성에게만 뒤집어씌우기에는 그렇고. 이 일본의 여야 언론 지식인까지 가담했다는 거. 이 사실을 반드시 규명해서 진실을 통해서 남북통일을 해서 20만명으로 드러난 북송가족을 구출하는 어떤 진실의 힘으로 구축하는 그런 활동을 기대를 하면서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홍형 논설주간]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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