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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정치적 올바름’이 곧 좌파적 생각이란 데 무관심한 교사들

학교 교사들의 생각에 녹아 든 ‘진보’가 좌편향 교육의 근본 원인

학교 사회를 보수적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현재 한국사 교과서가 문제시 되고 있지만, 몇 년 전의 국정교과서 반대 때와 비교했을 때, 작년 한국사 교과서들이 검정을 통과하고 학교에 채택될 때까지 현장에서 교사들이 낸 거부의 목소리는 미미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국정 교과서 문제 당시 이를 반대했던 교사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반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애당초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경도된, 소수 목소리가 힘을 얻기 힘든 한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정서 그리고 이들에 의한 한국사 교과서 시장독점 체제를 고려하면, 그 자유주의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들 주장의 근거가 되는 자유주의의 원칙 대로 한국사 교육과정이 운영될 수가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교사들, 진보적 생각이 곧 좌파적 생각이라는 데 별 관심 없어

이는 비단 역사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 전체가 그렇듯, 학교 교사들 안에 소리없이 녹아 든 진보의 생각 자체가 그 본질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진보’적 생각이 대개 좌파적 (leftist), 사회주의적 생각이기도 하다는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진보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교사들조차도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것에 대해선 경계하기도 한다. 딱히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생각하지 않는 (그럼에도 많은 진보정책들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한국의 교사들은 자신의 생각이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단지 보수주의적 생각을 가진 자들 보다 자신들이 더 양심적이고 더 개방적이고 더 인간적이고 더 진취적이라고 믿는다. 

한국의 진보적 이데올로기가 대부분의 학교 교사들의 머리 속에 소리 없이 녹아 들게 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약자를 더 보호하고, 빈부 격차에 더 분노하고, 정의를 더 철저히 추구하고, 평화를 더 열렬히 염원하고. 어찌됐든 좋은 느낌이 드는 것 (what feels good)을 다 지지하고 그러한 모습들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꾼다고 말한다. 

그런데 위에 적은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것이 ‘진보’일까?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그 사회에 진보가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사회과학적으로 이는 좌파적 생각일 뿐이다. 물론 그런 사회를 꿈꾸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단,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그렇고 다른 사람의 의도와 인격을 함부로 재판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 

사회의 진보를 ‘꿈꾼다’고 진보한다는 보장 없다

먼저, 그 사회의 진보를 ‘꿈꾼다’고 해서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경험론적 관점에서 ‘what feels good’은 ‘what does good’과 일치하지 않으며, (특히 장기적으로 볼 때) 반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과학은 수학 및 인문학과 다르다. 한 반에 시험을 치고 나서 100점 맞은 학생에게서 50점을 떼어 0점 받은 학생에게 나누어 주면, 수학적으로는 (혹은 마르크스의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 관점에서는) 부의 균등한 배분이 실현되는 것이고, 인문학적으로는 분배정의 실현을 통한 보다 인간다운 사회의 모습에 가까워 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100점 맞았던 학생은 다른 학교로 전학 가거나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 방식으로 학교의 방침에 저항할 것이다. 

그렇게 저항할 생각을 하는 100점 맞은 학생이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진보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너가 100점 맞은 것은 너 혼자의 능력이 아니라 너가 부모님을 잘 만난 것이고, 이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에서 너가 0점 맞은 학생에게 눈감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것이야’. 이 진보주의자의 말이 맞을까? 알 수 없다가 정답일 것이다. 학교가 그 100점 맞은 학생의 인생과 인격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학종과 같은 수시 제도 역시 근본적으로 내재하는 위험은 학생의 ‘인격’에 대한 교사의 ‘판단’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현재 학교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의 구체적인 활동만 기재하도록 되어있으나 이는 지침일 뿐, 현실은 교사에 의한 학생의 능력, 인격 칭찬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것이 학교 현장이다. 그 과다 칭찬 경쟁에서 낙오자와 선의의 피해자가 없을까? 사람들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듯, 교사들도 ‘아, 저 학생 참 예쁜 학생이에요’와 같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예쁘지 않은’ 학생이 따로 존재하는 이분법적인 관념을 가정한다. 만약 어떤 학생에게 ‘야, 넌 왜 얌체처럼 그렇게 행동해?’ 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미 그 학생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얌체라고 인격재판을 해 놓은 상태에서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교사는 선악 이분법적 관념과 학생 인격재판 경계해야

선과 악의 이분법적 관념으로 인격재판을 남발하고 살아가는 것은 사회의 일상 풍경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칸트의 도덕적 정언명령을 따르며 살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뒷담화와 진영논리, 확증편향 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어두운 면이라기 보다 오히려 본질에 가까워서, 사람들의 뒷담화에 맞장구 치지 않고 진영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오래가지 않아 외톨이가 될 확률이 높다. 만약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수직적으로 인식되는 한국의 학교 현실과 이런 일상화된 인격재판이 중첩될 때, 교사는 소수의 학생에게 상처를 주면서 다수의 학생을 꽤 편하게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학생의 인권 유린은 교사의 인격재판과 교실 민주화가 만날 때 더 쉽게 발생할 수 있다.  

마찬가지 원리로 국가 역시 국민 개인의 인생과 인격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시장에서의 개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적 행위의 ‘의도’를 국가가 ‘판단’할 수 있고 또 하겠다는 것은 위험하다. 개인의 자유를 언제든 침해할 수 있기에 그렇다. 온건한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에는 반대할 지도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의 어느 정책이든 말로만 되는 정책은 없다. 돈을 많이 가진 자와 돈을 못 가진 자 사이의, 돈을 여기에 쓰자는 자와 돈을 저기에 쓰자는 자 사이의 이해관계와 신념들 사이의 조정이 정치의 핵심인데,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나 그렇듯 좌파는 많이 가진 자로부터 그 자들의 돈을 더 많이 취해서 정부가 더 많은 좋은 일 (what feels good)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큰 정부 (big government)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러한 모습은 한국에서도 진보주의자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교사의 진보주의 시각=좌파 사회주의적 인간관

이러한 진보주의 시각, 사실상 좌파 사회주의적 인간관의 본질적 문제점은 개인일 때와 집단 (군중)일 때 사이에서 전혀 달리 행동하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인간 존재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일 때에는 ‘선택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며 그나마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분명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집단 속에서의 인간은 ‘따르는 존재’로 살아가며 그로 인해 책임 소재가 애매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면책 특권을 향유한다. 이로 인해 대중의 집단적 선택은 대개 그 사회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합리화하는, 감성적 욕구 충족을 위한 비현실적 대안인 경우가 많다. 한국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인,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라는 이상주의적, 낭만주의적 테제 역시 그러한 예이다. 

하지만 대중 속의 ‘개인’들은 알고 있다. 감성적 욕구에 휘둘린 비현실적 선택으로 자신의 돈을 날려선 안된다는 사실을. 자신들은 결코 손해보는 선택을 하지 않을 개인들이, 집단적으로는 이상주의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경우 필히 희생양 (자유가 짓밟히는 집단)이 나타난다. 어찌됐든 비용은 사회적으로 지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매혹된 어린 지지자들을 ‘젊은 진보’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인들을 ‘늙은 보수 반동’으로 framing 했던 20세기 독일 민족사회주의자들(Nazi)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듯,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일본이라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듯한 모습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도는 상관없다. 좀 냉정하게 들리지만 어쩔 수 없다. 의도만 좋으면 그 자체로 진보라고 치켜세우거나, 타인의 의도와 인격을 함부로 재판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모순된 개개인의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환경만 만들어지면 그 안에서 나름 합리적으로 인생을 선택하고 책임지고자 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시장(the market)의 존재,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통해 시장이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보수주의(conservatism) 가치의 가장 핵심 철학인 이러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도 요즘 서울시 교육청에서 강조하는 ‘민주시민교육’ 만큼이나, 아니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시민교육의 원칙이 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숭의여고 역사교사 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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