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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스마랑 위안소 사건(スマラン慰安所事件)’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8)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스마랑 위안소 사건(スマラン慰安所事件)’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1년 5월 20일판, 번역 : 미디어워치 편집부).

위안부 문제를 사죄했던 일본의 고노담화에서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대목이 바로 이 스마랑 위안소 사건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위키 ‘고노 담화(河野談話)’(한국어 번역) 항목 참조)

스마랑 위안소 사건은 위안부 문제가 추궁될 때마다 종종 거론돼왔지만, 이 사건은 어떻든 당시에도 군 상부에 의해서 시비가 됐고 이후 사형 등 공식 처벌까지 받게 된 적성국 국민에 대한 명백한 전쟁범죄 사건이다. 이에 당시 공식적으로 합법이었던 일본과 조선 등에서의 위안부 모집과는 범주 자체가 다른 사안으로, 고노담화에서 굳이 이런 전쟁범죄 사건을 거론했던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스마랑 위안소 사건(スマラン慰安所事件)’이란 일본군 점령 중인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의 군령(軍令)을 무시하고서 일부 일본군이 네덜란드 여성을 감금 강간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을 말한다. ‘시로우마(白馬) 사건’, 또는 ‘스마랑 사건’, 그리고. ‘오헤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백인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시로우마(백마) 사건’이라고 불렀다는 의견(우츠미 아이코(内海愛子))과, 피해자가 백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 사건을 '백마사건'이라는 천박한 이름으로 불렸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편, ‘스마랑 사건’은 1945년 스마랑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인도네시아 독립파 사이의 무력 충돌 사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1944년 2월 남방군(南方軍) 관할 제16군 간부후보생대(幹部候補生隊)가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민간인 억류소에서 자바섬 스마랑의 위안소로 강제연행해 강제매춘을 시키며 강간한 혐의로 전후 국제군사재판에서 군인과 병참책임자인 좌관(佐官) 등 고위 장교 포함) 해당 군인들과 군속들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 이 사건은 바타비아(Batavia) 군법회의 69호로 재판됐다. 기소된 것은 이하의 12명이다. 이케다 쇼이치(池田省一) 육군 대좌 징역 15년 // 미하시 히로시(三橋弘) 스마랑 지청 육군 사정관 무죄 // 오카다 케이지(岡田慶冶) 육군 소좌 사형 // 카와무라 치요마츠 육군 소좌(河村千代松 ) 징역 10년 // 무라카미 류조(村上類蔵 ) 군의 소좌 7년 // 나카지마 시로(中島四郎) 군의 대위 징역 16년 // 이시다 에이치(石田英一 ) 육군 대위 징역 2년 // 히토시 토라노스케(齊寅之助) 육군 소장 무죄 // 후루타니 이와오(古谷巌) 군속 징역 20년 (스마랑 구락부(スマラン倶楽部)) // 모리모토 유키오(森本雪雄) 군속 징역 15년 (히노마루 구락부(日の丸倶楽部)) // 시모다 신지(下田真治) 군속 징역 10년 (청운장(青雲壮)) // 카츠라기 겐지로 군속 징역 7년(장교구락부(将校倶楽部)) // 덧붙여 노자키 세이지(能崎清次) 육군 중장(간부 후보생 대장, 사건 당시 소장)은 바타비아 재판 106호로 징역 12년의 판결을 받았다.(사건의 중심적 인물, 오쿠보 아사오(大久保朝雄) 육군 대좌는 소추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목차


1 개요


2 부기




1 개요(概要)

네덜란드령 동인도 군사재판 보고서를 조사한 주오(中央)대학 교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에 따르면,

 • 당시 스마랑에는 이미 위안소가 있었으나 성병의 만연으로 인해 새로운 위안소 설치가 계획되었다. 위안소 설치를 요청받은 간부후보생대 대장은 위안소에는 자유의사로 일할 자만 고용하라는 자카르타 16군 사령부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했다.(가이드라인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증언이나 수마트라 제25군의 유사한 통달에서 가이드라인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여러 장교와 위안소 업체는 할마헤라(Halmahera) 억류소, 암바라와(Ambarawa) 억류소, 겐단간(Gendungan) 억류소에서 17-28세 사이 모두 35명의 네덜란드 여성을 강제로 모아 스마랑 시내 카나리(Canary) 거리 건물에서 일본어로 쓴 취지서 서명을 강제한 뒤 스마랑의 4개 위안소(장교 구락부, 스마랑 구락부, 히노마루 구락부)로 연행했다.

 • 3월 1일부터 영업을 시작했고 여성들은 매일 강간당했다. 월급은 주지 않았으며 폭행당하고 심지어 성병이 옮겨진 사람, 임신한 사람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의사의 신체검사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 그러나 자신의 딸을 납치당한 네덜란드인 리더가 육군성 포로부에서 억류소를 시찰하러온 오다지마 히가시(小田島董) 대좌에게 호소하였고, 오다지마 히가시 대좌의 권고에 따라 16군 사령부는 1944년 4월말 4개 위안소를 폐쇄했다. (오다지마 히가시 대좌의 시찰은 사건을 전후해 억류소 관리가 군정감부에서 현지 군사령부로 이관됐기 때문이다.)

 • 종전 후인 1948년 바타비아 임시군법회의에서 BC급 전범으로 1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죄명은 강제연행, 강제매음, 강간이다. 유죄자는 군인 및 위안소를 경영하고 있던 일본인 업자 등이며 책임자인 오카다 케이지(岡田慶冶, 출생지는 히로시마 현 후쿠야마 시) 육군 소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목받는 오쿠보 아사오(大久保朝雄, 센다이 출신) 육군 대좌는 전후 일본에 돌아가 있다가 군법회의가 끝나기 전인 1947년에 자살했다. 재판에서는 위안부가 된 35명 중 25명이 강제였다고 인정됐다.

 • 요시미 요시아키는 당초 군이 관련자를 처분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후에 적어도 책임자를 엄벌하지는 않았다는 식으로 설명을 보충했다.

한편, 네덜란드 여성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젊은 여성들이 끌려가는 것을 막았던 억류소(스모워노, 만혼, 람페르사리)도 있었다. 연상의 여성들이 지원함으로써 젊은 여성들이 살아난 사례도 있었다. 이들을 대신한 여성은 ‘지원자’로 불렸다(이 건에서는 전범재판에서 무죄).



1994년 네덜란드 정부 보고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의 위안소에서 일했던 200~300명의 네덜란드 여성 중 적어도 65명이 ‘거의 확실히(most certainly)’ 강제매춘 희생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1990년에 대일도의적채무기금(対日道義的債務基金, JES)이 결성되고, 일본 정부에 대해 그 법적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1인당 약 2만달러의 보상을 지불하도록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총 2억5500만엔의 의료복지지원을 개인에게 실시, 2001년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보상사업’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2007년 네덜란드 의회 하원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위안부’ 문제로 위안부 사죄와 보상 등을 요구하는 위안부 문제 사과 요구 결의가 이루어졌다. 2008년 방일했던 네덜란드의 막심 페르하헨(Maxime Jacques Marcel Verhagen) 외무장관은 “법적으로는 해결됐지만 피해자의 감정이 강하고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의 상처는 생생하다. 네덜란드 의회·정부는 일본 당국에 추가적인 의사 표시를 요구한다”라고 말해 일본측 보상 사업의 지속을 요구했다.

 2007년 미국 의회 위안부 청문회에 이 사건의 피해자·증인으로 나선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 ‘얀 뤼프 오헤르네’로도 표기)은 “당시 19세이던 1942년 일본군 점령 후 수용소에 끌려가 일본식 꽃 이름이 들어간 이름으로 불렸고 머리숱이 없는 일본군 장교가 기다리는 방으로 끌려갔다. 그는 칼을 뽑아 죽이겠다고 위협한 뒤 옷을 찢어 가장 잔인하게 나를 강간했다. 그날 밤은 몇번 강간당했는지 모른다” ,“함께 연행된 네덜란드인 소녀들과 3년 반 동안 매일 이러한 만행을 당하면서, 굶주리고 고통받는 짐승같은 생활을 했다”고 증언하고 “일본은 95년 아시아위안부재단을 만들어 사적인 보상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위안부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잔학행위를 인정하고 행동으로 사과를 입증해야 하며 후세에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리고 “일본인은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며 일본이 정식으로 사죄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2 부기(付記)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을 통해 관련 판결에서 네덜란드인 35명 중 모두가 강제로 끌려갔던 것은 아니라고 했던 사실, 또 위안소로 끌려가기 이전에 매춘부였던 여성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서술했다. 

재판 내용 자체(증언 내용 등)는 현재까지 피해자의 감정을 고려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2025년에 기록이 개시될 예정). 그러나 이미 네덜란드 정부는 1994년에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일본 점령 네럴란드령 동인도의 네덜란드 여성에 관한 강제매춘에 관한 네덜란드 정부 소장 문서 조사 보고’를 발표한 바 있다. (Bart van Poelgeest, ‘Report of a Study of Dutch Government Documents on the Forced Prostitution of Dutch Women in the Dutch East Ind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24th January, 1994)

그 밖에도 연구자 등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자료를 공개하는 경우가 있으며 다음과 같이 일본어로 된 자료도 존재한다.

 • 1992년 아사히신문은 네덜란드 국립공문서관에서 사건에 관한 판결문 및 법정심문서를 입수하여 일부를 조간을 통해 공개했다.

 • 1993년 네덜란드에서 내무부 관료인 바트 반 포헬지스트(Bart van Poelgeest)가 재판과 증언 자료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강제매춘에 대한 의회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는 영어·일본어로도 번역됐다. (Poelgeest, Bart van. 1993. Gedwongen Prostitutie van Nederlandse Vrouwen in Voormalig Nederlands-Indie, Tweede Kamer, vergaderjaar 1993-1994, 23 607, nr.1. Sdu Uitgeverij Plantijinsraat 's-Gravenhage) 

 • 2008년에는 카지무라 타이치로(梶村太一郎), 무라오카 타카미츠(村岡崇光), 카스야 히로이치로(糟谷広一郎)에 의해 ‘위안부 강제연행·사료 – 네덜란드 군법회의 자료 x 르포 – 나는 일본귀신의 아이(『慰安婦』強制連行・史料ーオランダ軍法会議資料xルポー私は日本鬼子の子)’가 잡지 ‘긴요비(金曜日)’에서 출판됐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정부가 1993년 의회를 위한 보고서 전문이 네덜란드어 원문으로 일본어 번역되어 있다. 군법회의에서의 증언도 모두 일본어로 번역됐다. 귀중한 1차 사료다.

또한 1999년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이(‘시로우마 사건’의 재판 증언 기록을 포함) 네덜란드 국립공문서관, 암스테르담 국립 전쟁 자료 연구소, 네덜란드 외무부 공문실의 자료를 조사하여 ‘위안부’ 문제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야마모토 마유미(山本まゆみ)·윌리엄 브래들리 호튼(William Bradley Horton), ‘일본 점령 하 인도네시아에서의 위안부:-네덜란드 공문서관 조사 보고-(日本占領下インドネシアにおける慰安婦 : -オランダ公文書館調査報告-)’ )

이들 자료에는 이 사건 외에 △ ‘마겔랑 사건(マゲラン事件, 편집자주 : 인도네시아 마겔랑(Magelang)에서 억류소에 있었던 네덜란드계 중심으로 여성 13명이 일본군에 의해 연행되어 위안소에서 강간당하고 매춘을 강요했다고 여겨지는 사건. 전후 관계자들은 BC 급 전범으로 기소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이나,  ‘플로레스섬 사건(フローレス島事件, 편집자주 : 스마랑에서 네덜란드계 주민의 억류 장소 밖에서 살던 네덜란드계 주민을 포함 현지 여성을 플로레스(Flores)의 위안소로 연행해 성매매를 강요한 사건)’ 등 일본군 장병의 여성 납치나 헌병대의 지위 남용, 네덜란드인의 저항이나 군의 무리한 ‘지원자’ 징모에 대해 제25군 헌병대(수마트라 헌병대)가 개입해 여성을 보호한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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