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는 사도광산(佐渡鉱山)이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1차 사료, 히라이 에이이치(平井栄一) 편집의 ‘사도광산사 제 2(佐渡鉱山史其ノ二)’를 입수하여 공개한다.
이 책은 1950년에 정리된 원고로, 출판은 되지 않았다. 히라이 에이이치 씨는 전 사도광산 채광과장이며, 사도광업소를 경영하던 미쓰비시금속(三菱金属)의 의뢰로 사도광산의 역사를 에도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2권으로 정리했다.
이 자료는 원본과 복사판이 현존하는데 양쪽 모두 비공개 처리되어 있다. 역사인식문제연구회는 레이와(令和) 4년 1월 26일에 목차와 844쪽부터 846쪽에 있는 ‘(9(九)) 조선노무자사정(朝鮮人労務者事情)’이라는 항목의 사진도 입수하여 연구소 홈페이지에 이를 공개한다.
다만, 사도킨잔(佐渡金山)의 세계유산 등록에 반대하며 현지조사와 연구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기관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동일 사료의 일부 복사본을 1월 14일에 ‘익명의 일본인 연구자’로부터 입수했다고 한다. 해당 연구자는 2015년 9월, 니가타 현 교육청 문화행정과 세계유산등록추진실에서 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상은 해당 재단이 1월 27일에 진행한 웹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자료집에 수록된 정혜경(아르고(ARGO) 인문사회연구소)의 ‘새로운 자료 소개: 히라이 에이이치 ‘사도광산사’‘에 따른 것이다.
사도광업소 내부 자료를 활용하여 쓰인 ‘사도광산사(佐渡鉱山史)’에서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동원된 조선인의 총수 및 각 연별 동원 수, 그리고 종전시의 잔류 수가 다음과 같이 밝혔졌다.
“쇼와 15년 2월 조선노무자 98명을 모집하여, 5월에 248명, 12월에 300명, 쇼와 16년 270명, 17년에 79명, 19년에 263명, 20년에 251명, 합 1,519명이 이입하였으나, 전쟁과 동시에 잔류인원 1,096명을 송환했다.”
또한 대우에 대해서도 일본 내지인과 마찬가지로, 숙소와 식사 등을 제공하는 등 광업소 측이 상당히 신경을 써서 좋은 대우를 했음이 간결하게 쓰여 있다.
- 임금은 일본 내지인과 동일
- 채굴량에 따른 성과급 지불
- 가동성적에 따른 정근상여와 연 2회의 근로상여를 지급
- 가족 소유자는 사택이 무료. 쌀, 된장, 간장 등 생필품은 저렴하게 제공
- 독신자는 기숙사, 공연비, 목욕비 무료. 하루 50전(실비 부족분은 회사가 부담)으로 식사 제공, 회사 직영의 농원에서 야채 보급
- 전액 회사 부담으로 생명보험에 가입
- 영화 시사회, 강연회, 소풍, 운동회 개최
- 기숙사에 잡지, 조선장기, 축음기, 라디오 등이 배치
아래 문장은 구자체(旧字体)를 모두 신자체(新字体)로 변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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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44)
(九)朝鮮労務者事情
日支事変の拡大と共に鉱員の応召漸く増加し増産計画遂行上困難を来
(p.845)
し内地求人絶対不可能の状態にありたれば昭和十五年二月朝鮮労務者九八名を募集し五月二四八名、十二月三〇〇名、昭和十六年二八〇名仝十七年七九名、十九年二六三名、二十年二五一名計一五一九名を移入したが終戦と同時に残留人員一〇九六名を送還した、在山中の待遇賃金制度、稼働奨励方法等概ね内地労働者と同一で主として坑内夫として就労し請負単価により稼高に応じ賃金を支給し、一ヶ月の稼働成績に応じ精勤賞与を与へ扶養家族の多寡及稼働日数に応じて米価補給を行ひ毎年二回の勤労賞与を交附し一般に家族持労働者には社宅の無料貸与、共同浴場施設、米、味噌、醤油其他生活必需品は購買会にて廉価配給及家族傷病の場合の診療等を実施し単身者は寄宿舎(三個所)に収容し舎費を徴せず食事は内地人同様の調理にして一日五十銭(実費の差額は会社負担)寝具使用料一ヶ月一組五十銭にて貸与し光燃費浴場費は会社負担其他作業用品依服履物等日用品の購入払下は購買会を通じて廉価に行ひ蔬菜類不足の折柄鑛山直営の農園から補給した尚又全従業員を以て組織せる協和会(当時産業報国会)に入会せしめ従業員の親和、修養、給済、境遇改善、能率並に福祉増進を図る、協和会に於ては随時映画会、講演会、遠足会、運動会其他祭典催物を開催し尚各寄宿舎には娯楽室を設け雑誌、朝鮮将棋、蓄音機、ラジオ等を設付け慰安娯楽と趣味の向上に努むる等遺憾なきを期した、其他勤
(p.846)
続三ヶ月以上に及びたるときは団体生命保険に加入せしめ各人在籍中の保険料は一切会社負担し万一不幸ありたる場合保険金三百円を贈呈し災害に対する扶助、退職の場合の給与関係等につき内鮮区別なく移入当時は一人一日米一升程度を普通とし漸次減食せしめ特に配給米実施後は盛切り飯とし配給米の特に不足を来せる場合は甘藷、大根、乾麵等の混食にて間に合はせた、昭和十八年五月に於ける職種別人員及び内地労働者との比率は左の如くである
昭和十九年、二十年度に於ては朝鮮人労務者増加数五一四人に上り圧倒的労働力であった
概して訓練又は指導よろしきを得たる如く終戦に際しても他地方に見る如き暴状等もなく帰還せしむるを得た
(상기의 표는 판별하기 쉽도록 역사인식문제연구회가 작성한 것이다.)
‘사도광산사’ 목차
사도광산사 조선노무자 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