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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특수위안시설협회(特殊慰安施設協会)’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43)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특수위안시설협회(特殊慰安施設協会)’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2년 11월 17일판, 번역 : 박재이).




특수위안시설협회(特殊慰安施設協会, RAA)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그리고 연합군이 점령한 일본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위안소’를 중심으로 한, 점령군용 위안시설이다. 연합국 병사의 강간이나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일본 정부가 최대 5만 5천 명의 매춘부를 모집해서 단기간에 설치했다.

영어로는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라고 하며 RAA 라는 이니셜로 알려져 있다. 직역하면 ‘여가, 오락협회’이며 일본어 명칭과 비교하면 의미가 크게 다르다.



목차


1 개요


2 설립 배경

  2.1 설립까지


3 RAA 관련 시설의 설치 장소

  3.1 협회사무소

  3.2 도쿄 주변

  3.3 아타미, 하코네


4 RAA의 운영

  4.1 모집

  4.2 신문 광고

  4.3 업무 상황


5 RAA 설치 후의 상황

  5.1 GHQ군의총감의 요청과 도쿄도령 제1호

  5.2 RAA 폐지로

  5.3 RAA 설치 중의 성범죄

  5.4 일본인 부녀자 능욕 사건


6 RAA 폐지 후의 성범죄와 일제 검거

6.1 이타바시사건

6.2 나카노의 연행 미수 사건


7 RAA 이외의 시설

  7.1 오사카, 나고야

  7.2 나라


8 그 후

  8.1 조선전쟁(한국전쟁) 때

  8.2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후


9 GI 베이비

  9.1 팡팡걸


10 특수위안시설협회를 소재로 한 작품

  10.1 소설

  10.2 영화

  10.3 TV드라마

  10.4 만화책


11 참고문헌

 


1 개요(概要)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중 하나인 미군은 공창제도를 인정하지 않아서 별도로 위안소를 두지 않아왔던 것으로 판명되었던데다가, 영국군이나 호주군을 비롯한 영연방군도 대량의 장병들이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점에서, 이 연합군 병사들의 일반 일본인 여성에 대한 강간 사건이 예측되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희생으로써, 애국심을 가진 여성”(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의 표현에 따름)을 모집해 연합군을 위한 위안소를 설립했고, 이에 5만 3천 명에서 5만 5천 명에 달하는 인원이 모였다.

점령군의 성 대책에 관해서는 일본 경시청이 8월 15일 패전 직후부터 검토했으며 8월 22일에는 연합군 신문기자로부터 “일본에 그런 시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매우 기대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또한 영관급 병사가 도쿄 마루노우치(丸の内)경찰서에 와서 “여자를 소개하라”는 말도 했다. 

8월 17일에 성립된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내각의 국무대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는 경시청 총감 사카 노부요시(坂信弥)에게 “일본의 딸들을 지켜 달라”고 청원했기 때문에 사카 노부요시는 일반 부녀자를 지키기 위한 ‘방파제’로 연합군 병사 전용 위안소 설치 운영을 기획하고 다음날인 8월 18일에는 내무성 경보국장 하시모토 마사자네(橋下政実)의 ‘외국군 주둔지의 위안시설에 관하여(外国軍駐屯地に於る慰安施設について)’라는 통지가 내려왔다. 

하야카와 기요히데(早川紀代秀)에 따르면 당시의 위안소는 도쿄, 히로시마, 시즈오카, 효고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요코하마, 아이치현, 오사카, 이와테현 등에 설치되었다. 또한 우익단체인 국수동맹(国粋同盟, 총재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은 연합군 위안소 아메리칸클럽(アメリカン倶楽部)을 9월 18일에 개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간토지구 주둔군 장교와 일반병사의 위안’을 목적으로 도쿄에서 개업한 곳이 ‘특수위안시설협회’, 영어명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레크리에이션 및 오락협회, RAA)였다.

점령군은 RAA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GHQ의 군의총감(軍医総監)과 공중위생복지국장 크로퍼드 샘스(Crawford F. Sams) 대령이 9월 28일에 도쿄 위생국 방역과장 요사노 히카루(与謝野光)에게 도내에서 불타지 않고 남은 유흥가 5군데와 매춘가 17군데를 언급하며 점령군용 여성을 소개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요사노 히카루는 장교, 백인 병사, 흑인 병사용의 구분 상담도 응했다. 1945년 12월 시점에서 재일연합군은 43만 287명이 주둔했다.

여성사학자인 후지메 유키(藤目ゆき)에 따르면 RAA에서는 가장 성행했을 때에는 7만 명, 폐쇄 시에는 5만 5천 명의 여성이 일했다.

그 후 1945년에 포츠담 명령에 따른 공창제도 폐지 방침과 전 미국 대통령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의 반대, 그리고 이와 더불어 성병의 만연을 이유로 GHQ는 결국 특수위안시설을 폐지했다. 특히 성병의 경우 도쿄 등을 제외하면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은 탓에 패전의 혼란과 맞물려 위안부의 60퍼센트가 매독 등의 성병에 걸렸다.

역사학자인 모모세 다카시(百瀬孝)에 따르면 RAA와 별개로 연합군 여성병사용 ‘위안부’도 존재했다. 1946년에 나고야를 점령한 여성병사용으로 채용된 남성은 내장, 눈, 피부, 혈액, 소변 검사를 받았고 마쓰자카야(松坂屋) 근처의 목조 주택에 여러 남성들과 1인 1실이 주어져서 6개월 동안 특정한 여성 하사의 전속이 되었다. 근무는 하루 간격이었고 식량은 윤택하게 주어졌지만 체력적으로 가혹했다.

RAA 이외에도 일본 각지에 비슷한 시설이 존재했다.

연합군이 점령한 일본에서는 창부의 요금이 8센트(0.08달러)였고 하루에 미국인 47명을 상대한 여성의 실제 수입은 2달러였다(뉴욕타임스).


2 설립 배경(設立背景)

다음의 세 가지를 설립 배경으로 들 수 있다.

• 유럽의 전쟁터에서도 미군 장병에 의한 강간 피해자가 14,000명(독일인 여성 11,040명)이 있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위안소를 설치하지 않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군 장병이 아군인 수많은 프랑스 여성을 강간하고 미군이 매춘부와 성교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서 길거리를 걸어갈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 르아브르(Le Havre) 시에서는 시장이 미군 지휘관에게 교외에 위안소 설치를 간청하기도 했었지만 미군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 오키나와전에서도 연합군이 상륙한 후 강간이 많이 발생했다. 미군 병사에게만 강간당한 여성 수를 1만 명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 연합군이 일본에 머물렀을 때 처음 열흘 동안 가나가와 현에서는 강간 사건이 1,336건이나 발생했다. 점령 직후의 성폭행이나 강간 건수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여성사학자 후지메 유키에 따르면 상륙 후 한 달 동안만 해도 최소 3,500명이 넘는 여성이 연합군 병사에게 피해를 입었다.

이에 더해 천황의 라디오 방송 이후 일본 내에서 “적이 상륙하면 여자를 닥치는 대로 능욕할 것이다”라고 소문이 퍼졌다. 경찰 내부 보고서에서도 “약탈, 강간 등 인심을 불안하게 하는 언동을 하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이 많은 듯 하다”고 밝혔다.

2.1 설립까지(設立まで)

“자네가 선두에 서서 일본의 딸들에 순결을 지켜 주게”

―1945년 8월 19일, 경시총감 사카 노부요시(坂信弥)에게 부총재 취임 다음날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가


점령군의 성 대책은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이 1945년 8월 15일 패전 직후부터 검토했다.

8월 17일에 성립된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내각의 국무대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는, 경시총감 사카 노부요시(坂信弥)에게 “일본의 딸들을 지켜 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사카 노부요시는 일반 부녀자를 지키기 위한 ‘방파제’로 연합군 병사 전용 위안소의 설치 운영을 기획했다. 경시총감 사카 노부요시는 “히가시쿠니노미야 씨는 난징에 입성했을 때 일본 병사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생략) 그래서 미국에 당하면 큰일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 같다”며 당시의 일을 증언했다.

8월 18일 내무성은 경보국장 하시모토 마사자네(下政実)를 통해 ‘외국군 주둔지의 위안 시설에 관하여(外国軍駐屯地に於る慰安施設について)’(‘외국군 주둔지에서의 위안 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外国軍駐屯地における慰安施設設置に関する内務省警保局長通牒)’) 및 ‘외국 주둔군 위안설비에 관한 정비 요항(外国駐屯軍慰安設備に関する整備要項)’을 각 현에 행정 통지했고 경시청은 화류계 단체와 협의했다.

연합군 대책의 일환으로 26일에 외국군 주둔지의 위안 시설이 설립되었다. 전쟁 후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며 일본의 부녀자의 정조가 점령군 병사들에게 더럽혀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성 방파제를 만들어서 일반 부녀자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것이 나온 것이다.

이미 점령 직후 연합군 특히 미군이 이런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명령했다고 하며, 1945년 8월 22일자로 발령된 내무성 경보국이 통지한 ‘연합군 진주 경위에 관한 건(連合軍進駐経緯ニ関スル件)’의 마지막에 “연합군 진주에 따라 숙소 수송 설비(자동차, 트럭 등) 위안소 등 알선(慰安所等斡旋)을 요구한다”고 기록되었고 연합군의 신문기자로부터도 “일본에 그런 시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매우 기대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영관급의 병사가 도쿄 마루노우치 경찰서에 와서 “여자를 소개하라”라고 요구했다.

26일에 ‘특수위안시설협회’가 설립되었다. 자본금은 1억 엔이며 그중 5,500만 엔은 오쿠라쇼(大蔵省, 대장성)가 보증해서 일본권업은행(日本勧業銀行)이 대출을 했다.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자금 조달 쪽으로 특히 큰 힘을 기울였다. 건설에 필요한 자재나 영업에 필요한 생활집기, 의복, 이불, 그리고 콘돔 약 1,200만 개를 도쿄도와 경시청이 현물로 제공했다.

27일에 오모리(大森)해안의 요정 ‘고마치엔(小町園)’을 위안소 1호로 지정했다. 가나가와 방면에 연합군 기지가 집중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에 게이힌(京浜)국도변의 고마치엔이 뽑혔다.

28일에 RAA 간부가 황궁 앞에서 선서식과 만세삼창을 했다. 국영 매춘의 단서다.

선서의 주된 취지는 “(RAA협회에) 전후 처리의 국가적 긴급 시설의 일부분으로 주둔군 위안의 난사업(難事業)을 부과한다. (생략) ‘쇼와의 오키치(昭和のお吉)’ 수천 명의 희생 위에 광란을 막는 방파제를 쌓아서 (생략) 국체 수호의 정신대로 삼는 것과 다름없음을 거듭 직언함으로써 성명한다.”

이날 연합군의 선발부대가 아쓰기(厚木)에 도착하여 고마치엔에서 성교를 했다. 다음날 이후에도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미군이 몰려들었다.


3 RAA 관련 시설의 설치 장소(RAA関連施設の設置場所)

1945년 8월 27일에 오모리 해안의 요정 ‘고마치엔’을 위안소 1호로 지정한 것을 시작으로 위안부, 특수시설부, 카바레부 등이 개설되었다. 도쿄도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 3개월 이내에 위안소 25군데가 개설되었다. RAA 관련 시설은 도쿄 외에도 아타미(熱海), 하코네(箱根) 등의 보양지에도 만들어졌다.

3.1 협회사무소(協会事務所)

설치한 날은 알 수 없지만 RAA 본무 사무소는 도쿄도 교바시(京橋)구 긴자(銀座) 7-1(현재의 주오(中央)구 긴자 남부)의 도쿄 가부키좌(歌舞伎座)에 설치되었다. 이목을 꺼려서 일본야구연맹에 사무실을 빌리게 하고 RAA는 전액 월세를 부담해 그중 방 하나를 사용했다. 이 지시는 사토 진고(佐藤甚吾)가 가와시마 쇼지로(川島正次郎)를 중개자로 일본야구연맹회장 스즈키 류지(鈴木龍二)와 절충해 결정했다고 한다.

3.2 도쿄 주변(東京周辺)

도쿄의 고급 장교용 위안소로 1945년 10월 20일에 스미다(墨田)구 무코지마(向島)에 ‘영빈관대장(迎賓館大蔵)’, 11월에 세타가야(世田谷)구 와카바야시(若林)에 ‘RAA 클럽’이 설치되었는데 1946년 8월에 점령군이 접수했다. 일반 병사용 위안소로 도쿄도 시나가와(品川)구 오모리 해안에 고마치엔(小町園), 라쿠라쿠(楽々), 미하라시(見晴), 나미미쓰가와(波満川), 하치노키(蜂之喜), 하나즈키(花月), 야나기(やなぎ), 오토메(乙女), 세이라쿠(清楽), 히노데(日の出) 등의 갓포료칸(割烹旅館)이 설치되었다. 다마(多摩) 지구에서는 훗사(福生)영업소(훗사마치(福生町)), 조후엔(調布園)(조후마치(調布町)), 니시타마(西多摩)군 미타무라(三田村)에 카바레도 겸한 ‘라쿠라쿠하우스(楽々ハウス)’ 등이 설치되었으며 다치카와(立川)시에 카바레 후지, 미타카시마치(三鷹町)에 카바레도 겸하는 뉴캐슬 등이 위안소로 설치되었다.

RAA 중 도쿄의 한 위안소에서는 기모노를 입은 여성 150명을 갖추고 미군을 받아들이겠다고 첫날 47명이나 상대한 여성도 있었다(보수는 2달러).

위안소 외에 RAA에서는 카바레와 호프집도 설치되어 그곳에서 일본인 여성과 만나는 구조가 되어 있었다. 긴자의 카바레로는 센비키야(千疋屋), ‘오아시스 오브 긴자(オアシス・オブ・銀座)’, 고비키초(木挽町)의 가부키좌 별관에 클럽 에덴(クラブエデン)이 개설되었다. 그 외에도 긴자의 호프집으로는 에비스 비어홀(エビスビヤホール) 등이 개설되었고 미나토(港)구 다카나와(高輪)의 파라마운트, 아카바네(赤羽)의 아카바네회관(아카바네 카바레) 등이 RAA 관련 시설로 개설되었다. 이 RAA 시설 외에도 화류가 등 민간 유흥 시설도 번성했는데 이를테면 도쿄 나카노(中野)구 아라이초(新井町)의 화류가는 점령군 일색이었다.

구세군(救世軍)은 1947년 4월에 도쿄도의 위탁으로 다치카와(立川)에 ‘특수부인보호시설 신생기숙사(特殊婦人保護施設 新生寮)’, 6월에 오사카부의 위탁으로 ‘니시나리(西成) 조코료(朝光寮)’를 개설했다.

3.3 아타미, 하코네(熱海・箱根)

아타미에서는 장교용 위안소로 아타미관광합(熱海観光閤. 처음에는 후키소(風喜荘))이 개설되었고 초대 소장은 RAA 상무이사를 지낸 사토 진고(佐藤甚吾)였다. 일반 위안소로는 다마노이(玉乃井) 별관이 개설되었다. 이 료칸은 1946년 2월에 작가 다카미 준(高見順)이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나카야마 기슈(中山義秀)와 숙박하려고 했을 때 RAA 료칸에 일본인은 숙박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계 2세라고 하며 숙박했다. 그밖에도 카바레 뉴 아타미(キャバレー・ニュー・アタミ)가 있었는데 이곳은 현지에서 오유(大湯)댄스홀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일본인도 이용할 수 있었다. 후지야(富士屋) 본관도 RAA 관련 시설이었다. 미8군이 접수한 아타미(熱海)호텔은 ‘a special service hotel’로 언급되었다.

하코네(箱根)에서는 도키와(常磐)호텔이 특수위안소였다. 후지야(富士屋)호텔, 고라(強羅)호텔에서도 미8군의 ‘스페셜 서비스반’이 관여했다.


4 RAA의 운영(RAAの運営)

그 밖에 생활 수단이 없는 전쟁미망인이나 자녀가 많았던 시대 배경도 있어서 위안부가 도쿄 도내에서만 약 1,600명, 전국에서 4천 명이 일했으며 RAA 전체로는 여성 53,000명이 일했다고 볼 수 있다. 위안부는 손님을 하루 30명에서 50명 정도 받았다. 수입에 관해 일례로 오모리 해안의 고마치엔 위안소에서는 당시 금액으로 월수입이 5만 엔에 달하는 매춘부도 있었다. 당시엔 은행원의 초봉이 80엔이다. 하지만 전후 혼란기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1945년 12월 시점에서 재일 연합군은 43만 287명이 주둔했다.

4.1 모집(募集)

RAA의 기본적인 발상은 전시 중의 위안소 시설인데 전시 중의 위안부와 다른 점은 중개업자를 통하지 않고 광고를 보고 찾아온 일반 여성들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물장사(水商売)를 하는 사람을 고용할 예정이었으나 생각처럼 인원이 모이지 않았다. 전시 중에 무허가 매춘으로 검거한 사람에게 위안부가 되도록 경찰이 요청한 사례도 있었다(히로시마현 경찰사 편찬위원회 편 ‘히로시마현 경찰 백년사(広島県警察百年史)’ 하권(히로시마현 경찰본부, 1971년. DOI=10.11501/9634150). 히로시마시는 원폭으로 괴멸된 탓에 주변 도시 각지에 설치되었다).

“신일본여성 급구, 숙소, 의복, 식량 전부 지급”이라고 쓰인 광고판을 긴자 등에 설치하고 신문광고로 일반 여성을 모집했다. 하루 약 300명이 응모했다. 히로오카 게이이치(広岡敬一)의 말에 따르면 자세한 내용은 광고에 실려 있지 않았으며 이 광고를 보고 찾아온 수많은 여성들은 물장사 경험이 없었으며 대부분은 일의 실제 내용을 듣고 떠났다고 한다.

4.2 신문 광고(新聞広告)

마이니치신문 1945년 9월 4일에

급고 – 특별 여종업원 모집, 의식주 및 높은 급료 지급, 가불도 지원, 지방에서 응모하는 사람에게는 여비 지급.
도쿄도 교바시구 긴자 7-1 특수위안시설협회


도쿄신문 1945년 9월 4일에

카바레, 카페, 바 댄서를 구함. 경험 유무 상관없이 국가적 사업에 정신대로 참여할 야마토 나데시코(일본 여성)의 분발을!
확실한 최고 수입
특수위안시설협회 카바레부


이러한 광고가 있었으며 당시에는 연일 나왔다.



RAA 시설에 편승해서 개업한 긴자 메리골드(銀座メリーゴールド) 등의 민간위안시설에 대해 경시청은 ‘위안부 구인 주의에 관한 건(慰安婦の求人注意方の件)’을 통지해서 부정한 소개 등이 없도록 지시했다.

4.3 업무 상황(業務状況)

• 간부의 상황(幹部の状況)

기본급 1,100엔, 수당 1,100엔 총 2,200엔이었다. 식사는 경시청에서 식권을 지급했으며 군대가 가져오는 (양질의) 소고기 등과 같은 선물도 기대할 수 있었다(이상은 전쟁 전에 요시와라(吉原)에서 유곽을 경영한 경력이 있는 RAA 영업소장 오카모토 세이지(岡本清次)의 이야기).

• 종업원의 상황(従業員の状況)

여성 한 명이 최고로 하루 60명을 상대했다는 증언이 있다.

※ 또한 ‘업무 상황’은 전부 당시의 내용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하며 현대로 바꿔서 읽어야 한다(출전 : 31).


5 RAA 설치 후의 상황(RAA設置後の状況)

5.1 GHQ군의총감의 요청과 도쿄도령 제1호(GHQ軍医総監による要請と東京都令第一号)

점령군은 RAA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GHQ의 군의총감과 공중위생복지국장 샘스 대령이 9월 28일에 도쿄도 위생국 방역과장 요사노 히카루에게 도내에서 불타고 남은 유흥가 5군데와 매춘가 17군데를 언급하며 점령군용 여성을 소개해 달라고 요구했다. 요사노 히카루는 장교, 백인 병사, 흑인 병사용으로 나누는 상담도 응했다.

GHQ는 “도지사가 책임지고 진주군 병사들이 성병에 걸리지 않게 해야 한다”며 성병 검진을 명령했다. 요사노 히카루는 이 명령을 받아서 도쿄도령 제1호와 경시청령 제1호로 성병 예방 규칙을 제정해 일주일에 한 번씩 강제 검진을 실시했다. 도쿄도는 10월 22일에 ‘점령군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의 성기 세정과 정기적인 검진 의무화’를 포함시킨 규칙을 제정했다. 이 규칙이 전쟁 후 도쿄도 행정이 발령한 1호 조례다.

5.2 RAA 폐지로(RAA廃止へ)

1946년 3월 26일에 연합군도쿄헌병사령관 관방 ‘진주군의 음매굴 출입 금지에 관한 건’(출입금지령)을 통지하면서 RAA 시설은 폐쇄되었다. 하지만 1948년 4월 시점에서 가부키좌의 본부 사무소는 아직 남아 있어서 공창 시설로서의 협회 조직에서 적선(赤線, 공창가 지역) 경영자의 조합 조직으로 변경해서 존속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사토 진고는 1947년 4월에 실시한 제1회 참의원 의원선거에 전국구에서 입후보했는데 그 직함을 ‘조합연맹 부회장’으로 하기도 했다(선거는 낙선).

RAA 폐쇄 후에 직장을 잃은 여성 중에는 ‘팡팡(パンパン)’이라고 불린 길거리 창녀가 되거나 유흥가로 이동한 이도 있었다.

거국적으로 매춘을 했던 목적은 ‘일본 여성의 순결 지키기’였다. 실제로 특수위안시설협회가 폐지되기 전의 강간 사건과 부녀자 폭행 수는 하루 평균 40건이었다. 특수위안시설협회가 폐지된 후인 1946년 전반의 강간 사건과 부녀자 폭행 수는 하루 평균 330건이었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보면 일본 여성의 순결은 지키지 못했다고 간주되고 있다.

5.3 RAA 설치 중의 성범죄(RAA設置中の性犯罪)

요코스카(横須賀)나 요코하마를 비롯해 진주군이 민가에 침입해 일본인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1945년 9월 2일 개업 예정인 고마치엔 위안소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미군들이 8월 28일에 몰려와서 모든 위안부들을 강간했다. 그 밖에 1945년 9월 5일에 무장한 미군이 하토노마치(鳩の街)에 왔다. 이때 매춘부들이 겁을 먹어서 업자는 매춘부들에게 손님을 받게 했다. 그 후 이를 계속하듯이 진주군 병사는 요시와라, 또는 신주쿠 2초메(新宿二丁目)의 유곽으로 가기 시작했다.

요코하마의 한 위안소에서는 100명이 넘는 미군들이 무장한 채 개업 전날 위안소로 몰려와 위안부 14명을 윤간했다. 다음날 저항한 위안부를 미군이 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개업 이틀째에 폐쇄되었다. 개업 후 위안소에서는 어느 방에서나 남성들의 웃음소리와 여성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병을 앓거나 자살하는 위안부도 적지 않았다. 9월 1일 노게야마(野毛山)공원에서 일본 여성이 미군 27명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다. 9월 5일 가나가와현의 여자고등학교가 휴교했다. 9월 19일 GHQ가 ‘프레스 코드(press code)’를 발령한 후에는 연합군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무사시노(武蔵野)시에서는 소학생(초등학생)이 집단 강간을 당했으며 오모리(大森)에서는 병원에 미군 200-300명이 침입해 임산부와 간호사들을 강간했다. 그 후에도 1947년에 283명, 1948년에 265명, 1949년에 312명의 점령군 병사들에게 피해를 입은 일본인 여성들의 신고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후지메 유키는 점령이란 “일본인 여성에 대한 미군의 성적 유린의 시작‘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5.4 일본인 부녀자 능욕 사건(日本人婦女子凌辱事件)

위안소를 개설한 후에도 숱하게 발생한 진주군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특별고등경찰은 해산 명령이 내려오는 1945년 10월 4일까지 계속 조사했으며 이를 내무성 경보국 외사과가 ‘진주군의 불법 행위’로 문서화했다. 이 문서는 일단 몰수되었지만 1973년 12월에 일본으로 반환되어 1974년 1월부터 국립공문서관이 소장했다. 이 문서는 ‘진주군의 불법 행위(進駐軍の不法行為)’에 전문이 실렸다. 이 책에는 가나가와 현경(県警)의 조사 보고도 실려 있다. ‘성폭력 문제 자료 집성 제1권(性暴力問題資料集成第1巻)’에도 발췌해서 실렸다.

일본 공산당은 미군의 불법 행위를 추궁했으나 특별고등경찰이 작성한 이 문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6 RAA 폐지 후의 성범죄와 일제 검거(RAA廃止後の性犯罪と狩り込み)

성병 대책으로 1945년 11월에 교토에서, 1946년 1월 28일에 도쿄에서 ‘일제 검거(狩り込み)’라고 하는 매춘여성 검거를 태평양육군헌병대사령부(MP)가 실시했다.

6.1 이타바시사건(板橋事件)

1946년 11월 15일에 이케부쿠로(池袋)에서 통행인이었던 여성들을 MP(헌병)와 일본 경찰이 무차별로 체포해 요시와라 병원에서 강제로 질 검사를 받게 한 이타바시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 중에는 일본영화연극노동조합원이었던 여성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 조합은 항의운동을 전개해 신문 등에서도 보도되었으며 가토 시즈에(加藤シヅエ) 의원 등도 GHQ에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항의에 대해 MP측은 ”검거한 여성들을 어떻게 하든 우리 마음이다. 이에 대해 너희들은 항의 따위를 할 수 없다“, ”일본의 경찰은 현재 너무나도 무력하다. 이는 자신들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CIE(민간정보교육국)나 유나이티드 프레스 등은, MP가 아니라 일본 경찰의 소행이라면서 인권 침해라고 비난했다.

6.2 나카노의 연행 미수 사건(中野の連行未遂事件)

1948년 9월 20일에 나카노구에서 장을 보던 여성이 MP에게 연행될 뻔했다. 이 사건으로 항의를 받은 경시청은 PM0720부대의 MP가 연행했으며 일본 경찰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당시 MP의 지프에 동승해서 ‘MP 라이더’라고 불렸던 일본 경관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 검거는 MP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7 RAA 이외의 시설(RAA以外の施設)

RAA와 비슷한 시설(위안소)는 오사카, 아이치현, 히로시마현, 시즈오카현, 효고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이와테현 등 일본 각지에 설치되었다.

7.1 오사카, 나고야(大阪・名古屋)

전쟁 전의 국수대중당(国粋大衆党)을 뿌리로 하며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총재를 담당하는 우익단체인 국수동맹이 연합군 위안소 아메리칸클럽을 1945년 9월 18일 오사카에 개업했다. 또한 나고야에서는 국제 고급 향락 나고야 클럽이 개설되었으며 모집에 여성 680명이 쇄도했다.

7.2 나라(奈良)

나라에는 위안시설 RR센터가 만들어졌다. 나라 시내에는 1952년 당시 팡팡걸이 약 2,500명 정도 있었다.


8 그 후(その後)

8.1 조선전쟁(한국전쟁) 때(朝鮮戦争時)

그 후 조선전쟁(한국전쟁)에서는 한국인 여성을 위안부로 모집하는 동시에 일본인 위안부도 재일미군(주일미군) 기지 주변, 그리고 조선반도로 끌려갔다.

8.2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후(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後)

1951년 9월 8일에 연합국들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해 관련 국가들과의 청구권 문제를 해결했으며 그와 동시에 재일미군의 주둔이 용인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재일미군의 범죄가 이어졌고 1952년 5월부터 1953년 6월까지의 경찰 자료에서도 살인 8건, 과실 치사 435건, 강간 51건, 폭행 704건 등 총 4,476건의 범죄가 보고되었다. 1954년 2월에는 우지(宇治)시 오쿠보(大久保)소학교의 4학년 여학생이 강간당한 후 음부에서 항문까지 칼로 찢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밖에도 4세 유아가 강간당해 위독 상태에 빠진 사건과 갑자기 저격당해 사망한 사건 등이 빈발했다. 1952년 나라의 위안시설 RR센터에는 위안부 2,500명이 있었다.


9 GI 베이비(GIベビー)

점령군 병사와 일본인 여성 사이의 혼혈아를 ‘GI(Government Issue, 미군 병사에 대한 속어) 베이비’라고 하며 1953년 후생성 조사에 따르면 일본에서 4,972명이 확인되었다. 펄벅재단(Pearl S. Buck Foundation)의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203만 명에 달한다고도 하며 그밖에도 사와다 미키(沢田美喜)처럼 20만 명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9.1 팡팡걸(パンパンガール)

주로 재일미군 장병을 상대로 한 거리의 창녀를 말한다.


10 특수위안시설협회를 소재로 한 작품(特殊慰安施設協会を題材にした作品)

10.1 소설(小説)

• 육체의 문(肉体の門) (다무라 다이지로(田村泰次郎), 1947년)
• 여자의 방파제(女の防波堤) (다나카 기미코(田中貴美子), 1957년)
• 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1959년) (양억관 역, 이상북스, 2011년)
• 수요일의 개가(水曜日の凱歌) (노나미 아사(乃南アサ), 2015년)

10.2 영화(映画)

• 여자의 방파제(女の防波堤) (1958년)
• 닛폰 파라다이스(にっぽんぱらだいす) (1964년)
• 육체의 문(肉体の門) (1988년)

10.3 TV드라마(テレビドラマ)

• 1995년 8월 18일 21시부터 후지TV의 금요 엔터테인먼트에서 ‘전후 50년 특별기획 여자들의 전쟁 잊힌 전후사 진주군 위안 명령’으로 방영되었다.

10.4 만화책(マンガ)

• 어둠의 닌자(ヤミの乱破) (호소노 후지히코(細野不二彦))


11 참고문헌(参考文献)

11.1 경찰 자료(警察資料)

• 경시청(警視庁) ‘당면한 문제에 대한 서민층의 동향(1945.8.20.)(当面の問題に対する庶民層の動向(一九四五・八・二〇))’ ‘자료 일본현대사2 패전 직후의 정치와 사회 1(資料日本現代史 2 敗戦直後の政治と社会 1)’ 오츠키쇼텐(大月書店), 1980년, 149-150쪽. 전국서지번호:81003333.

• 이치노세키(一関) 경찰서 ‘9월 2일 진주군 경비에 관한 상황 보고(九月二九日 進駐軍警備に関する状況報告)’ ‘진주군의 동향(進駐軍の動向)’ 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패전 전후의 사회 정세 제6권(敗戦前後の社会情勢 第6巻)’, 1999년, 223-229쪽. ISBN 4-906642-79-9. 전국서지번호:99116860.

11.2 1950년대 이후(1950年代以降)

• 야마다 메이코(山田盟子) ‘점령군 위안부 국책 매춘 여성들의 비극(占領軍慰安婦 国策売春の女たちの悲劇)’ 고진샤(光人社), 1992년 9월 1일. ISBN 476980623X.

• 미즈노 히로시(水野浩) 편 ‘일본의 정조 – 외국 병사에게 능욕당한 여성들의 수기(日本の貞操―外国兵に犯された女性たちの手記)’ 아오키샤(蒼樹社), 1953년 1월 1일. ASIN B000JBB7BQ.

• 고토 벤(五島勉) 편 ‘일본의 정조 <속>(日本の貞操〈続〉)’ 아오키샤, 1953년 1월 1일. ASIN B000JBA1ZY.

• 다나카 기미코 ‘여자의 방파제’  다이니쇼보(第二書房), 1957년. ASIN B000JAXKXA.

• 가와모토 요시카즈(川元祥一) ‘개항 위안부와 피차별부락(開港慰安婦と被差別部落)’ 산이치쇼보(三一書房), 1997년 8월 1일. ISBN 4380972682.

11.3 1980년대 이후(1980年代以降)

• 미즈노 히로시 편 ‘죽음에 임해 고소하다(死に臨んでうったえる)’ 도고샤(倒語社) ‘공동의 전후 총서(空洞の戦後叢書)’, 1982년 8월 1일. ASIN B000J7DDHQ

• 간다 후히토(神田文人) 저,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편 ‘쇼와의 역사 제8권 점령과 민주주의(昭和の歴史 第8巻 占領と民主主義)’ 쇼가쿠칸, 1983년 4월 1일. ISBN 409376008X

• 아와야 겐타로, 가와시마 다카네(川島高峰)  편 ‘패전시 전국 치안 정보(敗戦時全国治安情報)’ 3권, 일본도서센터, 1994년. ISBN 4820562150

• 고토 벤 ‘검은 봄 미군, 팡팡, 여성들의 전후(黒い春 米軍・パンパン・女たちの戦後)’ 도고샤 ‘공동의 전후 총서’, 1985년 10월 1일. ASIN B000J6LL0I.

• 다모쓰 시부타니 저, 히로이 오사무(広井脩) 역 ‘유언과 사회(流言と社会)’ 도쿄소겐샤(東京創元社) ‘현대사회과학총서’, 1985년 6월 1일. ISBN 4488006949

• 센다 나쓰미쓰(千田夏光) ‘종군위안부[정](従軍慰安婦[正])’ 고단샤(고단샤분코), 1984년 11월 1일. ISBN 406183374X

• 도우스 마사요(ドウス昌代) ‘맥아더의 2개의 모자(マッカーサーの二つの帽子)’

• 한무라 료(半村良) ‘쇼와 악녀전(昭和悪女伝)’ 슈에이샤(슈에이샤분코), 1997년 9월 19일. ISBN 408748677X. ※ 실록소설

• 후지메 유키(藤目ゆき) ‘냉전체제 형성기의 미군과 성폭력(冷戦体制形成期の米軍と性暴力)’ ‘여성, 전쟁, 인권(女性・戦争・人権)’ 2호, 고로샤(行路社), 오오쓰(大津)시, 1999년, 116-138쪽.

• 아와야 겐타로(粟屋憲太郎), 나카조노 히로시(中園裕) ‘진주군의 불법 행위(進駐軍の不法行為)’ 겐다이시료슈판 ‘패전 전후의 사회 정세 제7권(敗戦前後の社会情勢 第7巻)’, 1999년. ISBN 4906642802

• 후지메 유키(藤目ゆき) ‘성의 역사학 공창제도, 낙태죄 체제에서 매춘방지법, 우생보호법 체제로(性の歴史学 公娼制度・堕胎罪体制から売春防止法・優生保護法体制)’ 후지슈판(不二出版), 1997년 5월 1일. ISBN 4938303183

• ‘편집 복각판 성폭력문제 자료 집성(編集復刻版 性暴力問題資料集成)’ 1권, 후지슈판, 2004년 7월 1일. ISBN 4835053249

• 히로오카 게이이치(広岡敬一) ‘전후 성풍속대계 나의 여신들(戦後性風俗大系 わが女神たち)’ 쇼가쿠칸, 2007년 3월 11일. ASIN B00DQMLZKI

• 게이센(恵泉)여자가쿠인대학 평화문화연구소 편 ‘점령과 성 : 정책, 실태, 표상(占領と性 : 政策・実態・表象)’ 임팩트슈판카이(インパクト出版会), 2007년. ISBN 9784755401756. 전국서지번호:21323356.

• 이와나가 후미오(岩永文夫) ‘풍속 진화론(フーゾク進化論)’ 헤이본샤(平凡社)(헤이본샤신서), 2009년 3월 1일. ISBN 978-4-5-8285456-5

11.4 지역사(地域史)

• ‘다이토구사(台東区史)’ 하권, 도쿄도 다이토구, 1955년. doi:10.11501/3019391.

• 도쿄백년사편집위원회 편 ‘도쿄백년사(東京百年史)’ 6권, 도쿄도, 1972년. doi:10.11501/9640957.

11.5 외서(洋書)

• Yoshimi, Yoshiaki (2001). Comfort Women: Sexual Slavery in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World War II.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023112032X

• Michael S. Molasky (1999). American Occupation of Japan and Okinawa. Routledge

• Tanaka, Toshiyuki (2002). Japan's Comfort Women: Sexual Slavery and Prostitution During World War II and the US Occupation. London: Routledge. ISBN 041519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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