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스포츠 영화의 진실성을 추구하다
스포츠 영화에서의 리얼리티의 중요성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의외로 별달리 논의된 적이 없는 문화적 주제이다. 스포츠 영화라 하면, 승리를 위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보니, 극적인 과장을 하기 마련이다. 야구영화라면, 9월말 투아웃에 역전 만루홈런이라던지, 권투 영화라 하면 마지막 라운드의 역전 KO승이 결말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록키>였다. 1편에서는 아슬아슬한 패배, 2, 3. 4, 5편에서는 바로 역전 KO승, 그뒤 6편에서는 다시 아쉬운 패배로 결말을 지었다.
그러나 스포츠라는 장르 자체가 대중화되면서, 스포츠영화에서도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만 감독의 2002년작 <알리>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화 <알리>는 알리와 포먼, 프레이저 등 역사적 대결을 100% 재현하였다. 알리가 휘두르던 펀치 하나부터, 다운의 장면까지 실제의 장면을 복원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알리 역을 맡은 윌 스미스는 알리의 권투 장면부터 인터뷰 장면 전체를 몸에 익혀야 했었다.
스포츠 영화에서 역사적 실화를 영화한 예는 그 이전에도 많았지만, <알리>처럼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않았었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분노의 주먹>은 제이크 라마타라는 실제 복서 이야기를 다뤘지만, 경기 장면 등은 대부분 감독이 재창작했다.
<알리> 이후에 제작된 2005년도 작품 <신데렐라맨> 역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 짐 브래독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었다. 이 영화 역시 <알리> 못지않게 경기의 고증에 투자를 많이 했다. 짐 브래독과 막스베어의 세계 타이틀 전은 몸 동작 하나하나 재현하며, 실제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자신감 탓에 <신데렐라맨>의 DVD 타이틀에는 실제 경기 동영상도 포함시켰을 정도였다.
스포츠의 대중화가 스포츠영화의 리얼리티를 부른다
스포츠 영화에서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스포츠의 대중화와 전문화 때문이라 추정된다. 예를 들면, 웬만한 인터넷 복싱 동호회에서는 알리의 일대기 전체를 꿰뚫고 있는 마니아팬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영화 <알리>를 보았을 때, 실제의 알리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영화의 진실성 자체가 떨어진다. 최대한 객관적 진실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어야만, 마니아팬들의 비판의 눈길을 벗어날 수 있다.
1980년도, 한국에서도 복싱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최민수 주연의 <신의 아들>, 조상구 주연의 <지옥의 링> 등등이다. 이들 영화의 리얼리티는 한 마디로 최악이었다. <신의 아들>에는 당시 실제 권투선수였던 아주마 넬슨이 등장하는데, 국적부터 잘못되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주먹만 휘둘러대며, 거짓말 같은 역전 KO승만 보여주면 그게 바로 복싱영화였던 것이다.
지금 시대에 이런 수준의 복싱영화를 만들면, 제 아무리 내러티브가 탄탄해도 마니아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고증과 스포츠의 진실성 혹은 사실성의 추구는 이제 스포츠영화의 필수가 된 것이다.
비주류 주제의식이 스포츠의 진실성 훼손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제작 당시부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핸드볼 대표팀의 이야기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별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여성 비인기 스포츠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임순례 감독은 전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등에서 보여주었던, 사회적 비주류의 애환을 이번 영화에서도 형상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아줌마 핸드볼 대표선수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비주류의 삶의 진실성만을 추구하면서, 실제로 핸드볼 혹은 스포츠 자체의 진실성을 너무나 많이 놓쳐버렸다. 리얼리티가 전혀 살지 않은 것이다. 주제나 내러티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시스템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의 운영이다.
영화에서, 김정은이 역을 한 김혜경은 감독 대행으로 부임해왔다가, 성차별에 밀려 선수로 뛰게 된다.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다. 또한 새로운 감독은 김혜경의 전 남자친구이다. 사사건건 이 둘은 충돌한다. 감독이 작전 지시를 내리면, 선수가 나서서 반박한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시스템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 더 영화의 집중도를 떨어뜨린 장면은 선수와 감독이 크로스컨트리를 하여, 선수가 이기지 못하면 대표팀에서 퇴출한다는 설정이다. 선수의 몸 하나하나를 생명 같이 여기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선수가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한 경주를 할 수 있는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세계 최강이라는 한국 대표팀의 훈련 과정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과 장면으로 채워넣었다. 어차피 비주류라는 의식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핸드볼 대표팀의 현실은 재현하는데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같은 허점
영화 <타이타닉>에서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여서라도 당시 배 안의 인테리어 하나하나를 완벽히 재현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예술로 재현할 때, 완벽한 모방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관객들이 한국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 영화 <쉬리>에서, 총 하나, 사격 자세 하나를 실제 군사 전문가로부터 자문받아 100% 고증한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바로 주제의식 전달에 급급한 나머지, 형식적 미의 추구를 등한시했다. 이 때문에 작품 전체의 완성도가 크게 떨어졌다.
이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시나리오는 바로 <화려한 휴가>라는 또 하나의 역사 왜곡 영화를 집필한 나현 작가의 것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휴가> 역시 광주에서 희생당한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주제의식에 집착한 나머지, 디테일한 부분에서 고의든 실수든 수많은 왜곡이 저질러졌다. <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모두 같은 작가가 같은 이유로 같은 허점을 보인 영화라는 것이다. <화려한 휴가>에서 주인공들만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않게 한 설정이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젊은 감독이 여자 선수들에게 존대말을 쓰는 설정이나, 진실성을 훼손하는 방식도 매우 닮아있다. 물론 제작진들이 <우리생애최고의순간>은 스포츠영화가 아니라 비주류 여성 영화라 기획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신데렐라맨> 역시 스포츠 영화가 아니라 비주류 인간의 삶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앞으로 한국영화의 소재 폭은 훨씬 더 넓어질 전망이다. 분야 하나하나로 볼 때면 보다 더 전문적인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증권가를 배경으로 다루는 영화도 나올 테고, 몽고나 우즈벡에 진출한 한국 청년 기업을 다루는 영화도 나온다. 역사물도 수도 없이 기획될 것이다. 그럼 점차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형식미의 기본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그 필수적 요소는 바로 철저한 고증이다.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운영시스템을 100% 재현해내면서 동시에 주제의식을 살릴 수 없었을까?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대표팀 감독이라는 사람이 자기 옛날 여자친구에게만 더 관심을 쏟는 황당한 장면이 없으면, 여성팬을 끌어들일 수 없다는 말인가? 지금 당장이야 관객들에게 통할 수 있겠지만, 관객의 수준이나 기대치는 제작자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높아지기 마련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즐겁게 보았지만, 2% 이상 아쉽고 허전한 느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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