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말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더라. 집으로 오는 택시를 타기 위해 태평로 삼성본관에서 1호선 남영역까지 걸어가야 할 정도였다. 초저녁 무렵, 직접 마주쳐본 광화문 로터리의 컨테이너 요새는 참으로 대단한 물건이었다. 무엇보다도 냄새가 끝내줬다. 어찌나 기름칠을 잔뜩 했던지 앞에 잠깐만 서 있어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에서는 막대한 분량의 환경호르몬, 즉 내분비 교란물질이 대기 중으로 휘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출산율의 지속적 하락으로 고민하는 대표적 저출산 국가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하여 민관이 힘을 합쳐 애를 써도 모자랄 판국이다. 한데 이명박 정권은 시위대의 청와대 진출을 막는답시고 컨테이너 박스에 독하기 짝이 없는 공업용 그리스를 아낌없이 발라놓았다. 촛불집회에 동참한 상당수 남성들을 무정자증 환자로 만들어놓을 심산인가? 장가도 못간 젊은 총각들이 수두룩한데.
이명박 대통령과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당부하는 바이다. 다음부터는 컨테이너에 부디 인체에 해롭지 않은 환경친화적 자연산 기름을 처발라주시기 바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겠다. 윤전기 잉크에 들어갈 콩기름 좀 빌려달라고, 조선일보 인쇄하는 일에 쓰이는 식물성 콩기름을 교보문고 정면의 컨테이너 장벽에 칠한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일 게다. 국민들의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에 모두 이로우리라.
2. 네티즌들이 ‘명박산성’이라고 조롱하는 컨테이너 박스 성벽을 바라보다가 마치 대하드라마 ‘대조영’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성전을 묘사하는 전투씬을. 컨테이너 바로 아래쪽에 무수한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는 이유에서였다. 다종다양한 단체와 조직에서 들고 나온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기치들을 삼족오 깃발로 바꾸면 영락없는 안시성 싸움이다. 본의 아니게 2MB를 양만춘 장군과 엮는 것 같아 장군께는 매우 죄송하다.
대다수 국민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를 전두환 시대로 되돌렸다고 이야기한다. 국민원로가 판단하기에는 그건 이명박에 대해 지나치게 후한 평가다. 그는 한국사의 시계추를 도처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삼국시대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6월 10일의 촛불시위에 참석한 나는 시종일관 불안했다. 컨테이너 박스 저편에서 전투경찰들이 갑자기 나타나 길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을 향해 석포와 불화살을 쏠 것 같아서. 그들 옆에서는 여경들이 행주치마로 부지런히 돌멩이 나르고.
대하사극에는 멜로적 요소가 양념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권의 청와대 어느 수석비서관이 식사자리에서 정두언 의원한테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했다는 “오빠~잉” 하는 교태 섞인 인사청탁은 수다한 청춘남녀들의 평화스럽던 가슴을 싱숭생숭하게 뒤흔들고 있다. 우리네 속담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이명박은 도대체 누구와 잤기에 난데없이 짝퉁 만리장성을 건설한 것일까? 난 이명박과 안 잤다.
3. 이명박은 정치인 체질이 확실히 아닌 모양이다. 육중한 컨테이너 박스의 느닷없는 출현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모방한 아류작이기 때문이다. 생전의 왕회장은 서산갯벌을 간척하면서 낡은 유조선을 방조제 용도로 활용한 적이 있다. 이명박은 지금 그걸 모방하는 걸로 짐작된다. 광화문으로 통하는 뱃길이 뚫려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컨테이너 박스 대신에 커다란 선박을 끌고 왔을 개연성이 짙다. 시민들이 빈정거리듯 서울 한복판에 인천처럼 연안부두가 생기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기업을 경영하던 시절의 관행과 습성과 체질에서 탈피한 확률은 현재로서는 0에 가깝다. 따라서 이명박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국 수습책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전국민을 접대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강남의 고급 미용실에서 공짜로 파마를 시켜주고.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이다.
성공한 CEO 이명박의 실패한 국정운영이 순전히 부정적 효과만을 남기지는 않을 전망이다. 대중의 맹목적 정치혐오가 덕분에 조금은 누그러질 테니까. 이제껏 개나 소나 무턱대고 욕하는 게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명박의 집권을 계기로 정치가 고도의 훈련과 경험을 요하는 전문직종임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반면 기업인은 당분간은 제일 한심한 부류의 인간들로 낙인찍힐 운명이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로 규정했다. 뒤집어 얘기하면 정치인은 예술가에 상응하는 사회적 존경과 신망을 누려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인 함부로 갈구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아트한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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