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기타


배너

난닝구와 아스팔트우파의 비애와 희망

좌우에서 헌신과 노력을 다하면서도 가장 천대받는 세력

2003년 집권당이던 민주당 내에서 친노세력이 한창 신당창당을 준비할 당시, 전남지역에서 난닝구 하나 걸쳐입고 올라온 일련의 무리들이 민주당사 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당무회의에 난입하여, 당시 신당파였던 이미경 의원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장면이 전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른바 정치세력으로서의 ‘난닝구’가 처음으로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경향신문 뉴스메이커의 최성진 기자는 난닝구를 '이성보다 힘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하고 호남 지역주의에 편승하는 정치집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정치사적으로 볼 때 난닝구의 태생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이른바 영남출신의 대통령이 연거푸 탄생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호남출신으로서 대선에 출마한다. 이때 호남의 서민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표는 물론 푼푼이 모은 돈까지 건네주며 수십년을 열성적으로 지지한다. 즉 영남정권을 단 한번이라도 교체해보겠다는 호남인들의 정서가 난닝구라는 정치세력을 탄생시킨 것이다.

영남출신 노무현이 호남기반으로 정권 재창출하며 난닝구들의 투쟁 시작

문제는 김대중 정권 이후 영남출신의 노무현이 호남을 기반으로 정권을 재창출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유시민 등 이른바 영남 친노세력은 호남 지역주의에 매몰된 난닝구 때문에 영호남 통합이 불가능하다 보고, 희대의 여당 분당 사건을 일으킨다. 이는 단지 영호남의 문제 뿐 아니라 서민과 엘리트라는 미묘한 갈등구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사모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은 난닝구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386을 중심으로 젊은 엘리트 그룹에 가까웠다. 이들은 정치개혁을 깃발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 정치의 상징인 난닝구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척결의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유시민이 2003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뒤, 처음으로 국회에 등원할 당시 빽빠지를 입고 나타나면서, 이들 세력을 난닝구와 비교하여 빽빠지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친노좌파 진영의 난닝구과 빽빠지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난닝구는 빽빠지들과의 싸움에서 사실 상 전멸을 당한다.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한 뒤, 민주당은 총선에서 10석의 미니 정당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난닝구와 빽빠지와의 싸움에서 친노좌파 언론과 시민사회는 99% 빽빠지를 지원한다. 천박하고 구태의연한 난닝구보다는 선명한 정치개혁 노선의 빽빠지가 언론과 시민사회의 정서에 더 부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수십년 간 누적된 난닝구 세력보다는 신흥 빽빠지 세력이 권력을 잡았을 때 친노좌파 시민사회에 돌아갈 밥그릇이 더 크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빽빠지 세력에 의해 친노좌파 시민사회 인사들은 김대중 정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으로 권력화되기도 했다.

우파진영에서 난닝구와 비견될 수 있는 세력은 이른바 ‘아스팔트 우파’이다. 아스팔트 우파란 노무현 정권 시절 한국사회의 모험주의적 좌익 행태에 분노하여 거리로 나와 인공기 등을 불질르는 등의 집단 행동을 하는 세력을 말한다. 대부분 노령층이 주를 이룬다.

아스팔트 우파 역시 우파 진영에서 난닝구처럼 천대를 받는 입장이다. 난닝구가 백빠지들과 대립각을 세운다면, 아스팔트 우파는 이른바 웰빙우파와 갈등 관계에 있다. 아스팔트 우파에서 규정하는 웰빙 우파란 ‘좌파 정권 당시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다, 우파 정권이 들어서자 한 자리 차지한 뒤, 제 몫만 챙기는 기회주의 세력’이다. 웰빙 우파 진영에서는 거리로 몰려나가 시대에 뒤떨어진 구호나 외치는 아스팔트 우파 때문에 표가 떨어진다고 불평하기 마련이다. 아스팔트 우파에서 현 정부의 중도론을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좌우 양 진영에서 헌신과 노력을 다하면서도 가장 천대받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난닝구와 아스팔트 우파의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정밀하게 분석하면 난닝구와 아스팔트 우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아스팔트 우파는 정책 지향점과 지식인그룹 갖추고 있어

아스팔트 우파는 분명한 정책 지향점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헌정 질서 확립, 자유통일은 아스팔트 우파의 신념과 원칙이다. 아스팔트 우파는 항상 이 기준으로 행동한다. 또한 아스팔트 우파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우파 지식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한다. 애국우파 논객 조갑제 대표, 언론인 류근일은 물론, 동아일보 이재호 전 논설실장, 문화일보 윤창준 논설위원 등등은 지속적으로 “아스팔트 우파는 극우가 하니라 행동하는 양심”, “아스팔트 우파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그 수혜자한테 감사의 말 한 마디 듣지 못하는 상처입은 마음”이라며 이들의 가치를 역설해준다.

반면 난닝구는 김대중 대통령 지원과 민주당 사수 이외에 별다른 정책적 지향점을 보이지 않는다. 아스팔트 우파가 북한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위해서 모인 반면, 난닝구는 처음부터 김대중 정권 탄생을 위해 자연스럽게 모인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난닝구는 정치인들의 정략에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2007년 대선 당시 난닝구들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재합당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강한 압력으로 민주당 인사들은 대다수가 탈당하여 친노세력에 합류한다. 이 때문에 난닝구들 내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난닝구들의 사이트 남프라이즈에서의 기류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러나 결국 대선 이후 민주당은 친노세력과 합류하였고, 현재의 민주당은 정세균, 안희정 등 친노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난닝구들은 또 갈 곳을 잃은 것이다.

난닝구들이 아스팔트 우파와 달리 정처없이 떠밀리며 정치인들에 이용당하는 이유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지식인이 없기 때문이다. 난닝구들이 쳐다볼 수 있는 친노좌파 지식인은 오직 “우파세력이 정권 잡으면 호남인들을 다 죽인다”라는 공포를 조장하는 선동을 일삼는다. 우파와의 소통 채널이 없는 난닝구들은 가장 증오하는 친노세력보다도 우파에 대한 두려움을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친노세력과 친노좌파 엘리트들은 언제라도 이들 난닝구들을 이용했다 팽하는 일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난닝구와 아스팔트 우파 모두와 일정 정도 교류를 하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는 이들이야말로 양 진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들이라 평가한다. 정권교체를 위해 아무런 사심없이 선뜻 돈을 내고 선거운동을 뛰었던 난닝구들이나, 대한민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가는 아스팔트 우파나 방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마음은 같다. 그리고 어차피 이들은 이른바 ‘한 자리’라는 감투를 쓸 수 없다는 점은 다들 알고 있다. 그럴 나이도 아니다.

난닝구와 아스팔트 우파 소통할 때, 정치혁명 가능

아스팔트 우파는 그나마 일정한 수준의 조직화를 이루고 있고, 방향을 제시할 엘리트그룹도 함께 하고 있다. 반면 난닝구는 민주당 주위에 흩어져, 정략적 정치인들의 농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 정치개혁의 핵심은 바로 이들 난닝구의 선진화와 조직화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설사 우파가 정권을 잡아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호남이 망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는 소통로 확보가 필요하다.

경향신문의 소통 기획, 현 정부의 중도지향 등등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의외로 좌우소통론은 힘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좌우소통론이 대부분 엘리트들 간의 친분과 자리 배분에 멈춘다면 의미가 없다.

지금 필요한 좌우소통은 난닝구와 아스팔트 우파와의 소통이다. 그리고 이들의 소통을 제도권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어차피 정책적 지향점이 없는 난닝구라면, 얼마든지 아스팔트 우파의 애국적 가치를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조만간 흩어져있는 난닝구들의 행동 방향을 제시해줄 정치적 리더와 새로운 지식인그룹이 전면에 등장할 것을 확신한다. 난닝구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아스팔트 우파와 손을 잡았을 때, 그리고 30대 이하의 청년세대가 이와 결합했을 때, 대한민국 정치는 혁명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 변희재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