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기자들을 만나다보면, 대한민국 언론계의 기자의 역할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더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는 시기에 과거의 한정된 역할에만 머물러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언론학 교과서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자의 역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는 '메신저(messenger)'의 역할과, 다른 하나는 약자를 대변하는 '애드보키트(advocate)' 역할이다. 주로 언론학과에서는 이 두 가지 역할 중 어느 것이 더 현실에 적합하느냐 토론을 벌이지만, 실제로 취재 현장에 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포털이 권력화되고, 인터넷에 권력이 개입하면서, 이 두 가지 역할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메신저 역할을 주로 수행하는 대표적인 영역이 연예저널리즘이다. 연예기자들은 하루에 무려 20여편 이상의 기사를 연예기획사가 보내준 보도자료 그대로 베껴쓰고 있다. 메신저이긴 하지만 현장이나 자료에서 주요 팩트를 찾아내어 독자들에 전달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연예기획사의 홍보대행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타파’, ‘삼성 타도’, ‘이명박 정권 박멸’ 등등의 절대적 가치
반면 애드보키트 역할은 주로 친노좌파 매체의 젊은 기자들이 선호하고 있다. 이 쪽 매체의 기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늘 결론은 “신자유주의 타파”, “삼성 타도”, “이명박 정권 박멸”로 귀결된다. 이런 논조야말로 2010년대의 젊은 기자들이 절대적으로 따라야할 가치로 숭상되고 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메신저보다도 이 절대적 가치의 애드보키트의 역할이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소수의 독재자와 다수의 국민과의 대립전선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애드보키트 역할이란 단순히 독재정권을 비판하면 자연스럽게 수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사회가 다변화되면서, 강자와 약자의 구도는 매우 복잡하게 재편되고 있다.
“A라는 사람이 X가 고통받고 있는 어떤 잘못을 발견하자마자, B와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A와 B는 이러한 잘못된 상황을 고치고 X를 돕기 위해 법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 법은 항상 C가 X를 위해 무엇을 할지 명시한다. 여기서 나는 C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는 C를 잊혀진 사람이라 부르겠다. 아마도 이 호칭이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잊혀졌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하고 투표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항상 비용을 부담한다”
미국의 경제가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1883년 예일대학의 윌리엄 섬너가 주장했던 그 유명한 ‘잊혀진 사람(The Forgotten Man)’ 논리이다. 이러한 섬너의 논리는 1930년대의 미국 대공황 시절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선 공약으로 차용했다. 루즈벨트는 '경제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잊혀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잊혀진 사람은 섬너의 그것과 달랐다. 섬너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며 세금을 납부하는 평범한 시민을 가리켰지만, 루즈벨트는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뜻했다. 건국하자마자 민주주의가 사실상 완성되어버린 미국의 현대사에서 ‘잊혀진 사람’ 즉 약자가 누구이며, 무엇이 약자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의 역사는 이토록 깊었던 것이다.
국민세금은 약자들이 정부에 맡겨놓은 돈, 목소리 큰 사람이 갈취하는 것 막아야
경제사회사에서 약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경제사회 생태계를 파괴시켜, 실질적으로 약자의 삶에 크나 큰 위협을 가했던 실패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최근 국내에서 번역된 ‘잊혀진 사람들’의 저자인 애미트 슐래스 역시 미국의 대공황 극복 정책을 그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 약자를 구호한다는 명분으로 관세를 갑작스럽게 높이고, 국민세금을 낭비하면서, 단기간에 극복될 수 있었던 미국의 금융공황이 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확산되어, 수많은 ‘잊혀진 사람들’이 과도한 세금부담을 하며,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대공황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논쟁과 각기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2010년대, 미국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로 발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 기자들이, 1883년도의 윌리엄 섬너 혹은 1930년대의 미국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허버트 후버이든 플랭클린 루스벨트이든, 그 당시의 다양한 정책을 지지 혹은 반대했던 미국의 언론인들 만큼의 고민이라도 하고 있냐는 것이다.
각 친노좌파 매체의 젊은 기자들은 지자체 선거의 쟁점으로 떠오른 무상급식 문제에 대해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과연 이들이 국가가 무상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 중에서, 왜 유독 급식이 가장 시급하게 무상으로 제공되어야하는지, 모든 사안을 다 따져보았는지 의문이다. 즉 무상이 그토록 좋다면 무상버스, 무상지하철, 무상주택, 무상대학 등등도 하면 될 것 아니냐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사안은 항상 1순위를 정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이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사회 전반을 다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세금은 바로 윌리엄 섬너가 주장한 다수의 ‘잊혀진 사람들’이 국가에 잠시 맡겨놓은 돈이기 때문이다. 이를 혼동하면 약자가 정부에 맡겨놓은 돈을 약자로 위장하고 있는 소수의 목소리 큰 사람이 갈취하는 일을 기자들이 돕는 형국이 되고 만다.
타도해야 할 상징으로 되어버린 삼성에 대한 비판의 실효성도 따져보자. 삼성X파일 사건 당시부터, 특검에 이르면서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한겨레, 미디어오늘 등등의 매체와 KBS와 MBC까지 총동원하여 삼성에 대해서 모든 팩트를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참여연대, 민언련, 언론연대, 언론노조, 정의구현사제단 등 모든 친노좌파 단체들이 이명박 정부가 아닌 노무현 정부에서 총지원했다. 삼성 비판은 절대 외로운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삼성이 광고로 비판을 통제한다고 하지만, 프레시안이 밝혔듯이, 주기적으로 삼성을 밟아버리는 오마이뉴스도 광고 협찬 매출의 20%가 삼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아닌가. 오히려 반대로 노회찬 대표의 삼성X파일 공개 무죄판결 건 같은, 충분히 보도할 가치가 있는 뉴스조차 보도하지 않는 인터넷우파 매체 중에서 삼성광고를 수주하는 곳은 거의 없다. 이들이 광고 때문에 삼성을 비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삼성 비판의 실익을 공적으로 따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파진영에서는 좌파 매체와 좌파단체들이 대기업을 공격하며 광고와 협찬까지 뜯어내고 있다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고, 이런 이중적 행태에 이용당하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경향도 있다.
삼성 등 강자에 대한 비판, 목적과 실익, 방법까지 철저히 따지는 능력 키워야
필자가 문제제기하고 싶은 것은 삼성 비판의 목적, 아니 삼성 변화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경제정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이는 삼성 하나만의 변화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면서, 다수의 약자형 경제주체들이 경제적 힘을 갖추도록 유도하는 생산적 보도도 그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바로 실크로드CEO포럼이 주장하는 청년기업 육성과 같은 것 말이다. 그 과정에서 삼성 등 대기업과 윈윈관계를 설정하여,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을 구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오히려 경제영역의 비판이 과도하게 삼성 등 대기업에 집중되면서, 새로운 경제 영역을 찾아내야 하는 저널리즘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이 상실된 것은 아닐까.
비판은 그 자체로 선이 아니다. 설사 그 비판의 대상이 강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정확한 팩트로 비판을 하되, 이 비판을 세 번, 네 번, 열 번까지 반복하려면 비판의 목적과 실익을 분명히 따져야하고, 그 실익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면, 신물나는 수준의 반복적 비판 이외에 다른 방법도 찾아봐야하고, 그 실익은 윌리엄 섬너의 기준으로 보면 다수의 ‘잊혀진 사람들’, 친노좌파적 기준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2010년대에 애드보키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젊은 기자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능력이다. / 변희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