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중소기업의 경영진만 해도 대한민국 청년층에 광범위하게 번진 반기업 정서에 대해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경영진이 최선을 다해서 매출을 올려 간신히 직원들 급여를 맞추어주어도, 젊은 직원들 중에는 경영진이 뒷돈을 빼돌리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반기업 정서는 청년층을 신림동과 노량진 고시촌으로 내몰아, 능력있는 인재들이 기업이 아닌 고시촌에서 시험문제나 풀도록 방치시키고 있다. 국가 전체로 봤을 때, 반 기업 정서는 수치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TV드라마와 영화 속에서의 기업인은 동네북 신세
청년층의 반기업 정서는 친노좌파 매체들의 무차별 비방 보도 이외에도, TV 드라마와 영화에서의 기업인에 대한 그릇된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비방 보도가 일정한 목적을 보이는 반면, 드라마와 영화의 경우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근 35%대의 고공 시청률을 보이고 있는 KBS2TV의 ‘제빵왕 김탁구’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탁구는 재벌가의 서자로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가족으로 들어가지만 온갖 멸시와 음모로 인해 쫒겨나고 만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반 기업 드라마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너무 익숙하게 접한 내용이라 다들 자연스럽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드라마와 영화들이 누적되면서 대중문화에서의 기업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동네북이 되어버렸다. 조금이라도 훌륭한 기업인의 모습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면 그 자체로 이례적인 일이 되고 만다. 그나마 찾아보기도 어렵다.
이런 드라마 상의 기업의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현실이라기 보다는 미디어에 비춰진 기업의 모습이다.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KCC, 이에 더해 현대자동차그룹까지 개입된 이른바 범 현대계열 그룹들의 현대건설 인수전이다.
현대건설 인수전은 최근까지만 해도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과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의 대결로 묘사되었다. 선대 정주영 회장의 후계자인 정몽헌 회장의 부인과 동생의 가문대결로 묘사되면서, 경제 전문가 뿐 아니라 문화 전문가들 내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러다 7월 1일자 조선일보가 장자인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중공업그룹과 KCC의 지원을 받아 현대건설을 인수하기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판은 더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장자와 며느리의 대결이 된 것이다.
현대건설은 국민세금으로 살린 기업, 당사자들은 반성부터 해야
언론 역시 이러한 흥미로운 이슈를 놓칠 리가 없었다. 벌써부터 이를 가문의 전쟁으로 묘사하며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전 또 가문의 쟁탈전 되나’(한국일보), ‘현대건설 인수전 제 2차 가문전쟁 되려나’(세계일보), ‘현대건설 누가 잡을까, 뜨거운 집안싸움 예고’(경향신문), ‘현대건설 인수, 장자 VS 며느리 가문의 전쟁’(국민일보) ‘현대기아차그룹 현대건설 인수, 정주영 적통성 되찾나’(헤럴드경제) 등등 언론보도의 방향은 가문전쟁으로 잡혀버렸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 태도가 끼치는 부작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은 지난해 10월 9일 예금보험공사 국정감사에서 “현대건설, 하이닉스, 현대석유화학, 현대상선 등 외환위기 직후 현대그룹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24조 4000억원에 이른다”며, “현대 계열사들이 아예 응찰(입찰)을 할 수 없게 하든지 응찰을 하더라도 부채 유발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언론보도는 이성헌 의원이 제시한 기준을 중심에 놓고 방향을 잡는 것이 상식이다. 가장 강하게 인수의지를 밝히고 있는 현대그룹의 경우 2001년도에 무슨 경영적 오판을 했기에 현대건설이 부실화되었고, 앞으로 인수를 하면 어떤 방식으로 경영을 잘해나가 국민경제에 기여를 할 것인지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 당시 계열 분리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같은 그룹이었던 현대중공업그룹이나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언론은 이런 문제를 제쳐놓고 가문전쟁부터 벌이고 있으니, 현대건설이라는 건설업계 1위 업체의 인수전을 놓고도 경제논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는 언론 자체도 문제이지만, 당사자들 특히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의 책임도 크다.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2008년 초 현대중공업그룹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생전의 모습을 그룹광고에 삽입했다. 현대건설 인수에 그룹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던 현대그룹 측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가문의 적통 들고 나온 현정은 회장의 책임
이에 같은 해 3월 20일 현정은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7주기를 맞아 기자들 앞에서 "최근 여러가지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현대가의 정통성은 정몽구 회장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공개 발언하면서, 전체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하게 되었다. 이는 누가 봐도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을 정몽구 회장의 도움으로 견제하겠다는 정략적 발언이었다. 이때부터 언론들은 마음놓고 현대건설 인수전을 재벌가 가문의 싸움으로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현대건설 인수전이 가속화되면 언론의 보도 역시 드라마 수준의 선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나의 국가적 매각사업이 영화나 드라마 속의 재벌의 암투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그러면서 온갖 대중문화를 통해 반기업 정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청년층은 이를 아예 현실화해버릴 것이다. 하나하나 기업가 정신을 배워가야 할 청년 창업가들의 의식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은 물론이다. 반기업 정서가 끼치는 해악이 정밀한 경제논리로 판단해야할 문제를 정치와 정서 논리로 판단한다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경제 영역에서는 대재앙이라 할 수 있다.
정부가 국민세금으로 살려낸 기업을 매각하는 데에는 해당 기업을 가장 잘 경영하는 업체를 선택한다는 단 한 가지 논리만이 존재해야 한다. 이에 정통성이니 적통이니 가문이니 며느리나 장남이니 하는 이상한 단어들이 난무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경제논리로만 본다면 현대건설 부실의 책임자들인 현대계 기업들은 처음부터 인수의 자격조차 없는 셈이다. 그러나 이미 여론이 가문 전쟁으로 넘어가면서 현대계 이외의 다른 기업들은 인수에 참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분위기이다. 이게 과연 G20 국가 대한민국의 2010년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냐는 것이다.
언론은 경제논리 하나로 공정한 심판관 역할해야
문제는 다시 언론이다. 해당 기업들이야 인수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홍보전략은 총동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럼 언론은 사안 사안마다 공정한 판결을 내려줘야 한다. 일단 국민세금을 투입시키도록 한 장본인들 중 반성과 성찰도 없이 가문과 적통을 들고 나오는 쪽이 있다면,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러면서 여론을 철저하게 경제논리로 바꿔줘야 한다. 그렇게 하여 현대계가 아닌 기업들도 경제 논리 하나만으로도 인수전에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현대건설 인수에 참여하는 각 기업들이 내세우는 사업계획을 꼼꼼히 검토하여 시너지 효과를 더 크게 낼 수 있도록 여론을 모아가야 한다. 언론이 이런 작업을 해주어야 이제껏 있었던 정부의 부실기업 매각사업 중 가장 큰 여론의 관심이 모아질 현대건설 인수전이 조금이라도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수전 관련 기사를 볼 독자들에게 엄밀한 경제논리를 소개할 기회도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지금처럼 가문 전쟁으로 보도를 확산시킨다면, 앞으로 언론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한 편집방향”이라던지, “일자리 창출만이 대안이다”라는 식의 가식적인 친 시장 논리는 접어버리는 게 낫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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