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언론인 오연호가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대선에서 문국현을 띄우기 위해 공작질을 서슴지 않던 그가 이번에는 조국이라는 상품을 선정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만한 인물이 왜 이제사 주목을 받나 싶을 정도다. 영남 출신에 서울대 법대의 최고학력, 게다가 훤칠한 인물까지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등장은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진보진영 내에서 얼마나 귀한 상품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얼핏 보기에 조국은 대학도 못나오고 인물도 시원찮았던 노무현보다 훨씬 진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수성가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이제 일류대학 학벌 없고 부모 잘못 만난 사람은 더 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미 배에 기름기 낀 좌파진영 내에서 노무현과 같은 상품은 고갈된 지 오래다.
조국은 귀족적 이미지로 아줌마 부대를 유인하는 오세훈의 좌파 버전이다. 좌파진영에서 그를 주목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그가 시대정신을 대표한다기보다 좌파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조국이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아들의 로스쿨 입학과 관련된 화제의 중심에 오르며 내뱉은 일성은 한국좌파들이 꿈꾸는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우리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강남좌파, 영남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아니겠는가. 언제 한국 진보좌파가 남들에게 하듯이 자신들에 대해서 치열한 자기비판과 성찰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이들은 오늘날 자신들이 향유하는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명성에 대해서 더 없이 관대하다.
이런 강남좌파의 자기변명에 대해 자발적 옹호에 나서는 덜 떨어진 인간이 있다. 고재열은 유독 이에 적극적이다. 최근 그는 블로그에서 강남좌파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드러냈다.
“‘강남좌파’라는 말은 원래 조중동이 참여정부 시절 386엘리트를 비판하던 말이었다. 좌파가 부유하게 되면서 꼴불견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이명박정부 들어 다른 식으로 해석된다. 좌파가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부자가 좌파가 되었다는 것이다. 30대 전문직에 두루 나타나는 양상인데, 계급적 이해와 달리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소수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계급에서 한나라당 거부정서가 확산되고 있는데 이들이 곧 강남좌파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식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천박하기 짝이 없다. 한국인들의 보편적 정치 불신은 늘 현직 대통령에 대한 디스카운트 현상을 불러왔다. 노무현이 집권시절 5.7%라는 역대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것이 불과 수년전의 일이다. 그때의 국민들이 지금의 국민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노무현이 사망했을 때 울고불고 했던 바로 그들이며, 지금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는 자들 또한 그들이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에 대한 지지표가 부동산 상승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는 것은 정설이다. 지금 강남에서 이명박이 인기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기대만큼 부동산가격이 오르지 않는데 대한 반감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정서가 노무현 정권기간 동안 부동산 폭등에 대한 향수를 불러온 것이 강남민심의 진실이라면 그런 이들도 강남좌파라고 불러줘야 할까? 적어도 고재열식 분류에 따르면 그렇다. 이명박에 대한 비판은 선이요, 지지는 악이라는 단순 논리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철저하게 물질적 계산에 입각해 행위 하는데도 얼치기 좌파들은 돌팔이 같은 분석만 일삼고 있다.
C급 좌파들의 세상
우리사회에서 말하는 강남좌파는 지역적인 의미는 아니다. 주로 386세대를 중심으로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성공한 좌파집단을 의미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 문화, 예술, 학계, 교육계 등에 종사하는 자들 중 매체를 통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룬다. 문제는 조국의 희망과는 달리 앞으로 강남좌파가 늘어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고재열이 굳이 30대 전문직을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 세대에서 자수성가로 강남에 진입할 자원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386세대는 좌파를 하건 혁명을 꿈꾸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강남좌파들이 젊은 세대에게 호의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들은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젊은 세대의 문제는 외면한 채 외국인노동자의 인권 보호에 열중한다. 군가산점의 부활은 여성과 장애인에게 피해가 간다며 반대하지만 서민의 아들에 대한 보상에는 무관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본질은 시간강사의 현실을 외면하는 대학교수, 저임금 스태프들을 착취하면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영화감독, 사교육을 통한 양극화에 기여하면서도 좌파발언으로 인기를 끄는 학원 강사 같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태가 그래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기대하는 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들을 옹호하는데 열중하는 것은 자기욕망의 표현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고재열에게 충고하건대 제발 자기 세대의 이익을 팔아먹지 말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라.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고.
이런 강남좌파의 분열적 행태에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자기합리화의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흔히 민주화세력으로부터 변절했다고 비판받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주로 1980년대 제도적 민주주의의 달성에 헌신했지만 1990년대 공산권의 붕괴이후 자신의 지향점을 변경한 이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경제가 호경기를 구가하던 시절, 자신들이 매판자본이라고 비판하던 기업에 입사하고, 1980년 광주시민들이 불태웠던 방송국에 들어간 이들이 과연 노동현장을 택했던 이들에게 변절을 운운할 수 있을까? 이들의 때늦은 혁명운동은 지조의 표현이 아니라 지난날에 대한 변명의 몸부림이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가장 가혹한 것도 바로 이들이다. 강남좌파는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에는 더 없이 관대하면서도 젊은 세대의 진로 고민에는 냉소적이기 짝이 없다.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시대적 행운이 주어졌는지는 알지 못하니 노인들 폄훼와 젊은 놈 때리기가 무성하다. 하지만 이들의 위선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자식들의 교육문제다. 이들의 좌파적 발언은 사회적 가면이지만 자식들에게 원하는 삶이야말로 무의식의 반영이다. 한국 좌파들이 해괴하기 짝이 없는 것은 교육문제만큼은 좌우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입만 떼면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자식을 미국에 유학 보낸다. 계급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식만큼은 교육을 통한 상속에 골몰한다. 이런 자들이 남의 자식들에겐 투사의 삶을 살라고 충돌질 하고 있다.
영화 ‘밀양’의 원작소설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는 강남좌파와 기회를 빼앗긴 젊은 세대 간의 관계를 이해할만한 장면이 나온다. 유괴범에게 자식을 잃은 엄마는 종교의 힘으로 슬픔을 극복하려 한다. 그는 율법에 따라 원수를 용서하려 하지만 정작 원수는 이미 신의 이름으로 용서받았음을 천명한다. 상처 받은 엄마는 종교에서마저 배신당한 채 무너져 내린다. 과연 인간이 용서하기도 전에 신이 함부로 원수를 용서해도 괜찮은 것일까? 종교 대신 이념을, 386세대를 가해자로, 젊은 세대를 피해자에 대입하면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된다. 386세대에게 물적 기반을 빼앗긴 젊은 세대는 이제 분노할 권리마저도 빼앗기고 말았다. 정의, 평등, 연대 따위의 단어는 약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그 마저도 가진 자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강남좌파의 번성이야말로 종말론적 징후다. 그들은 이 시대 젊은이들을 두 번 죽이는 부관참시 집행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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