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임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한국사회에 부러운 모델이다. 우리에게는 국가원수가 퇴임 직전까지 지지율의 고공행진을 이어간 사례가 없다. 쿠데타를 통해 스스로 권좌에 오른 이들이야 그렇다손 쳐도 임기초반 9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김영삼이나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메시아와 같았던 김대중, 노무현도 그 끝이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집권 3년차를 맞이한 이명박 대통령의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여론조사의 왜곡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현재상황이 특이한 것은 그 반대급부가 야당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구제역 사태처럼 정부여당의 숱한 빌미가 제공되는데도 왜 민주당에 대한 지지는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정답은 유시민이 얼마 전 제시 한 바 있다. 최근 민주당과의 복지논쟁에서 그는 제1야당이 처한 위기를 ‘신뢰의 상실’에서 찾았다. 지난 정권의 충신이었던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모양새가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싸가지 없다는 그의 평판은 평론가의 입장일 때 빛을 발한다.
정치평론가들이 어떻게 분석을 하건 현재 민주당의 위기는 사람의 위기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인식이야말로 대안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이다. 민주당이 철새 도래지라는 것은 소속의원들의 당적을 조사해보면 금세 드러난다. 한나라당이 공고한 반대세력의 존재 속에서도 역대 두 번째로 장수한 정당이라는 것은 그만큼 소속의원들의 당적이 깨끗함을 입증한다. 하지만 여러 번에 걸친 김대중의 사당시절과 열린우리당의 헤쳐모여 시절을 거치게 되면 호남중진들의 당적도 걸레가 되기 십상이다. 더욱이 보수진영에서 넘어온 철새들의 경우를 더하면 과연 이들이 여당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당대표부터가 그렇다. 손학규는 정치철새로서 아주 성공한 사례다. 한국에서 일제총독부 관리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비슷한 경우가 민주당에서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의 행로를 보면 변절과 전향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 후임 경기지사인 김문수도 진보진영에서는 변절자로 비판받지만 손학규와는 다르다. 적어도 김문수는 1987년 한국이 제도적 민주주의를 달성할 때까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전향을 한 시점은 소련이 해체하고 좌파진영이 공황에 빠진 시점이었다. 다른 이들이 유학을 가거나 고시공부를 택할 때 그는 또 다른 선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손학규는 아직 한국이 군사정권의 어둠에 묻혀 있을 때인 1980년 영국유학을 택한다. 친구 김근태가 수배와 고문을 당할 때 그는 현실세계에서 출세를 위한 스펙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이후 그가 다시 민주화진영에 얼굴도장을 찍은 것은 이미 민주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5공화국 말기였다. 양지를 지향하는 그의 철새행위는 이미 1980년대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후 김문수와 함께 김영삼의 품에 안긴 그는 십 수 년 간 보수진영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지난 대선직전 뜬금없이 벽돌 빼내가듯 민주당에 호출 당했다. 손학규도 민주화세력이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인물이 없었으면 대선후보를 남의 당에서 빼내올 생각을 다했을까. 손학규의 사례를 보면 민주투사 되기는 참 쉬운 일임을 알게 된다. 친일파는 평생 독립운동 하다 일제말기에 잠시 발만 담가도 영원히 모욕을 받는데, 십 수 년을 보수진영에 빌붙어 잘 먹고 잘 살아도 당적만 바꾸면 민주화세력이란다. 중세유럽에 존재했다는 면죄부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민주당 당적이다. 전두환도 광주 망월동에서 대성통곡 한 번 하고 민주당 문 두들기면 고문으로 받아줄 기세다. 옛말에 다정도 병이라고 한 것은 이렇게 간도 쓸개도 없는 민주화 세력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표현이다.
예측 불가능한 변절 행로
이광재의 경우도 김문수를 돋보이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잠시나마 도지사의 꼬리표를 달았던 그는 김문수와 행정 철학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평창올림픽 유치였다. 이미 ‘강원도민의 한’ ‘국민적 염원’ 따위로 표현되는 사안을 반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대학시절에 서울올림픽을 반대하던 학생이었다는 것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누구라도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의 이상과 다른 현실에 부딪히면 인생행로를 변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김문수처럼 공개적으로 전향선언을 하고 일관된 행동을 보이면 문제될 것이 없다. 정말 위험한 것은 해명 없이 멋대로 궤적을 선회하는 자들이다.
흔히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왼쪽 깜빡이를 넣고 우회전을 했다는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데, 이광재 같은 참모를 둔 한 이는 필연적이었다. 만일 젊은 시절의 이상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과거와 화해를 하는 것이 정직한 일이다. 적어도 김문수는 비판을 감내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수정을 했다. 그런데 이들의 행적 변경에는 도대체 설명이 없다. 개발독재식 정책을 선택해도, 매판자본이라 비판하던 기업의 장학생이 되어도 내가 하면 괜찮다는 식이다. 이렇게 해명 없는 전향에 대한 책임은 결국 보스였던 노무현에게 돌아갔다.
그의 병역회피 이력도 그렇다. 그 자신은 시대적 암울함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단지 이유를 설명하지만 의사 흉내를 내려면 좀 그럴싸하게 해야 한다. 안중근은 오른손의 약지를 잘라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지만, 검지는 남겨둠으로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른손 검지를 잘라서 대한민국 병역을 회피했다. 남의 허물은 잘도 발견하는 이들이 자신들 알리바이는 왜 이렇게 허술한지 모르겠다. 그런 이광재를 노무현은 오른팔로 총애했고, 민주당은 강원도지사로 공천했다. 두 번에 걸친 대선에서 병역논쟁으로 재미 봤던 정치세력이 이런 인물을 중용했으니 국민기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의 득세로 이제 대한민국에서 병역공방은 김빠진 소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정동영 역시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얼마 전 그는 참여정부 시절에 대한 반성문을 제출함으로서 주목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반성문은 기자시절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는 하이에나 언론인의 전형이었다. 한국 언론의 가장 어두웠던 5공화국 초기 정동영은 전비어천가를 읊어대던 기자였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호남의 적자를 자처하고 있다. 전주의 아들은 광주의 아픔을 잊어도 괜찮은가? 그렇게 언론자유가 극도로 억압받던 시기에는 찍소리 못하고 지내다가 정작 밝은 세상이 오자 언론자유를 외치며 이미지 조작을 했다. 그는 노영방송 MBC를 만든 일등공신이자 후배 기자들의 출세 모델로 기회주의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에 음모론이 횡행하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음모론은 비판적 지지론자들이 극도로 저주하는 양비론의 또 다른 버전이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민주정부를 겪은 민초들이라면 필연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귀결이었다. 이 나라의 보수세력이 국민들에게 고통을 요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수 십 년 간 피땀 흘려 쌓은 국부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민생이 피폐해진 것은 민주화세력의 집권 기간이었다.
어쩌면 우리사회는 두 종류의 고문기술자들에게 번갈아가며 고문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는 1980년대 고문경관들의 역할이 잘 묘사돼 있다. 그들은 2인1조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발로 짓밟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피의자들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온화한 얼굴로 접근해 설렁탕을 사주며 구슬리는 역할이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던 피의자들은 대부분 후자의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고문기술자라는 단어에서 전자의 난폭함만을 떠올리지만 정말 위험한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들이다.
민주, 평화, 개혁 등 오늘날 진보세력 스스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단어는 풍성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것 다 갖다 붙이는 정치세력이 왜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할까? 그것은 결국 구성원들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 설명되지 못하는 괴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이들은 예측 불가능한 정치세력으로 남게 되고, 한국유권자들의 정치 불신은 정치적 허무주의로 승화된다. 한때 뜨겁게 타올랐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좀먹는 이들은 유권자들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정신적 고문기술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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