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탄핵 역풍으로 구 민주당 전체가 궤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때 아닌 공천 논란이 벌어졌다. 탄핵 이전부터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며 노골적으로 총선에 개입하면서 민주당은 사실 상 패배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 때 당시 김경재 민주당 최고위원이 자신의 고향이자 재선 지역구이던 순천을 포기하고 서울 출마를 선언하며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하고자 했다. 물론 그 이전 조순형 대표가 자폭에 가까운 대구출마를 선언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당 중진들의 헌신에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동참했다. 김경재 전 의원의 계획은 동작, 관악, 구로, 영등포, 강북, 강서 등 구 민주당 강세 지역에 호남 중진들이 출마하고 호남은 신진 인물로 열린우리당과 승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출마를 약속한 호남중진들은 모두 뒤로 후퇴하고, 오직 한화갑 전 대표만이 당선이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역구 전남 신안무안을 포기하고 서울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한 대표는 “반드시 길이 있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검찰에서 한화갑 대표의 경선 자금 수사를 시작했다. 자칫 구속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화갑 대표의 지자들이 대거 서울에 상경하여 한화갑 대표의 지역구 유턴을 주장했다. 이에 한화갑 대표가 무안으로 복귀할 것을 선언하게 된다.
한화갑 대표의 공천을 밀어붙인 김경재
문제는 탄핵 이후 조순형 당대표와 추미애 최고위원이 선대위원장과 공천 문제로 이른바 옥세파동을 벌여버린 것이다. 민주당에서는 순간적으로 당 직인을 찍을 사람이 사라졌다. 한화갑 대표의 무안 공천장도 피일차일 미뤄졌다. 특히 추미애 최고위원이 강경하게 한화갑 대표의 공천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 당원들은 “당 대표가 연고도 없는 대구에 출마하는데, 대구 출생 추미애 의원이야말로 대구에 출마해야 되지 않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어느 날 조순형 대표와 추미애 최고위원 모두 당사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한화갑 대표의 공천을 밀어붙인 인물이 바로 김경재 최고위원이었다. 한화갑 대표를 포함한 호남의 중진들의 서울출마를 주도한 김경재 최고위원이었지만 “한화갑 대표는 민주당의 당대표로 헌신한 사람이다. 이런 인물의 뜻을 당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냐”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에 한화갑 대표는 선거운동을 뒤늦게 시작한 탓에 무안에서 가까스로 당선되었고, 서울 출마를 강행한 김경재 최고위원은 낙선한다.
2004년 총선 패배로 노무현 정권을 출범시킨 거대 여당에서 의석수 9석에 불과한 초미니 군소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을 부활시킨 인물은 한화갑 대표이다. 한 대표가 이끈 민주당은 각종 호남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전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총선 당시 민주당 구 지도부였던 김경재 최고위원 등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했다. 한 대표는 “선거를 앞두고 당권싸움을 벌여, 당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안 공천장을 뒤늦게 주는 바람에 낙선의 위기에 처했던 불만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한화갑 대표의 태도에 서울 출마를 강행하고, 한 대표의 공천을 추진한 김경재 최고위원이 크게 억울해 했다.
당대표와 대선후보 역임한 정동영 내쳐버린 정세균의 비정한 정치
온갖 복잡한 탈당, 창당, 합당을 반복하며 다시 돌아온 민주당에서는 2009년 4월 재보선에서 유사한 논란이 벌어졌다. 두 번에 걸쳐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맡았고, 대선후보까지 거친 정동영 의원의 공천 문제였다. 당시 당대표였던 정세균 의원은 정동영 의원의 전주덕진 공천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표면적인 논리는 대선후보까지 지낸 인물이 어떻게 자신의 지역구에서 출마하느냐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당내 실력자인 정동영을 견제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이에 결국 정동영 의원은 공천장을 받지 못해 탈당 뒤 무소속 출마하여, 자신의 당선은 물론 신건 후보까지 당선시키며 민주당 후보를 압도했다. 정동영 의원으로서는 2008년 총선 당시 전주덕진을 포기하고 서울 동작에 출마하여 막강한 상대인 정몽준 의원과 맞서다 낙선하는 등 당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자신의 고향에서 선거가 벌어짐에도 공천장 하나 주지 않는 당에 대해 원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필자는 정세균 대표를 비판하며 정동영 의원을 옹호했다. 정동영 의원이 괜찮은 정치인이어서가 아니라, 당대표를 두 번 역임하고, 대선후보까지 지내고, 총선에서 헌신한 인물을 정략적 목적으로 배제시키는 정세균 대표의 술수가 못 마땅했기 때문이다. 정세균 대표는 정동영 의원의 공천을 거부하며 2012년에는 자신부터 서울출마를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진짜 그렇게 할지 언론은 지켜봐야할 것이다. 2012년 총선에서 정세균 대표의 서울출마 여부에 따라 정동영 의원에 대한 공천 반대 입장의 진정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4월 재보선에서는 분당 지역구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전현직 당대표의 공천 문제로 시끄럽다. 민주당에서는 손학규 대표의 분당 출마를 종용하는 분위기이다. 손학규 대표는 2008년 총선에서 경기도가 아닌 서울 종로에 출마하여 박진 의원에게 낙선한 뒤 칩거에 들어간 바 있다. 이 때의 상황으로 보자면, 만약 분당에 출마하여 낙선하면 대권은커녕 어렵게 확보한 당권까지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일이다.
이미 당내 권력투쟁을 위해 전직 당대표인 정동영 의원의 공천까지 막아버린 민주당의 전례로 볼 때, 손학규 대표의 분당 출마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손학규 대표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영환 의원의 경우 “만약 손학규 대표가 분당 출마 뒤 낙선한다면 내가 앞장서서 손대표를 지키겠다”고 주장했지만, 민주당이 재보선에서 참패했을 경우, 김영환 의원 개인의 힘으로 당권교체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재섭 대표가 5공인사? 한나라당은 5공을 승계한 정당이다
한나라당에서는 강재섭 전 대표의 공천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정동영 의원의 기준으로 보자면 강재섭 대표는 당 대표를 맡아 대선과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총선 당시 공천 논란에 휩싸이자 스스로 출마를 포기하기도 했다. 물론 공천 학살을 당했다는 박근혜 전 대표 측 인사들의 반발로 어차피 대구지역 당선이 불확실했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볼 때는 강재섭 대표는 엄연히 선거에서 승리한 당대표였고, 출마를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한나라당 내에서의 강재섭 전 대표에 대한 공천반대 논리는 경쟁력이다. 그러나 과연 정운찬 전 총리에 비해 경쟁력이 크게 뒤떨어진다는 확실한 통계는 아직 없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내의 당권 파들이 전직 당대표의 국회 복귀를 꺼리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마치 정세균 대표가 정동영 의원의 복귀를 막았듯이 말이다. 특히 홍준표 최고위원은 강재섭 전 대표에 대해 5공인사라 공격하지만 강재섭 전 대표의 주장대로, 둘다 검사출신으로서 강재섭 대표는 92년 총선, 홍준표 최고위원은 96년 총선에 각각 국회에 입성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한나라당은 5공을 승계한 정당이다.
순천 재보선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도가 벌어지고 있다. 위기에 빠진 민주당을 위해 서울 출마를 감행하여 낙선한 김경재 전 의원이 민주당 소속이 아닌 무소속으로 출마를 확정지었다.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가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과 야권연대를 해야한다며, 민주당 무공천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순천 재보선, 40년 민주당원 김경재 VS 15년 한나라당원 손학규의 싸움
김경재 전 의원의 민주당 경력은 197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40년이다. 손학규 당대표의 민주당 경력은 대통합민주신당을 기준으로 약 3년이다. 오히려 손학규 대표는 15년 간 한나라당에서 대변인,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두 차례의 대선과 세 차례의 총선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저지하는데 앞장섰다. 이런 인물이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서는 공천을 하면 안 된다고 결정한 것이다. 어차피 순천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단일후보로 나선다 해도, 결국 40년 민주당원 김경재 후보와 15년 한나라당원 손학규 대표와의 맞대결이 된다. 손대표 뿐 아니라 한화갑 대표가 평민당 소속으로 있기 때문에 정동영, 천정배, 이인영, 조배숙, 박주선 등등 민주당에서 김경재 전 의원보다 더 오랜 당원 생활을 한 인물은 없다
이런 손학규 대표가 분당에 출마하여 강재섭 후보와 맞붙게 되면, 순천 재보선과 맞물려 희한한 광경이 벌어지게 된다. 김경재 후보는 순천에서 40년 민주당원으로서 “손학규는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가라”고 공격할 것이고, 강재섭 후보는 전직 한나라당 대표로서 “손학규는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오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아무리 비정하다 해도 금도는 있는 법이다. 누가 더 비열하고 배신을 잘하는지 내기를 하고 있는 이런 구도 때문에 여야 모두 전패의 위기에 떨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 변희재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