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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위안부 관련 미군 포로 심문 보고서 내용을 왜곡한 뉴시스

조선인 위안부는 무조건 '순결한 민족의 대표선수'여야만 하는 것인가?

※ 이 글은 김동호 작가님이 과거에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김 작가님의 허락을 얻어 미디어워치가 새로이 재정리해 공개하는 것입니다.



20143월 즈음에 1944년 버마(현재 미얀마) 주둔 미군의 일본군 전쟁 포로 위안부 관련 보고서가 공개되었다는 기사들이 쏟아졌었다.

 

그런데 미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하여 일부를 번역했다는 뉴시스 기사 내용을 살펴보니 원 미군 보고서('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에 대한 여러가지 왜곡과 누락이 발견됐다. 이는 아마도 의도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 위안부 20명 직접 심문’ 1944전범문서 (뉴시스 기사)

 

사실 해당 미군 보고서는 2013년에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저, 뿌리와이파리 출판사)에서도 이미 일본 학자의 책을 재인용하여 일부 소개하는 식으로 공개된 바 있는데, 마치 미발굴된 문서인 것처럼 특종(?) 뉴스를 내보내는 것부터가 좀 이상하기는 하였다.


 

1944년의 미군 보고서 원문에는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라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원문의 'girls''소녀들'이라 번역하였다. 사실 20명 중에서 미성년자는 19세의 1명 뿐이었으므로 이 위안부 포로들을 '소녀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버마에 도착했을 당시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평균 나이는 23세다.


또한 기사에서는 위안소 업자들이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간 것을 '징집'할 목적으로 갔다고 번역하여 마치 업자들이 '강제로 징집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주었다. 위안소 업자들은 해당 보고서에서도 나오고 있는 것처럼 몇백엔의 선대금을 가족들에게 미리 지급하고 각종 감언이설로 위안부들을 데려간 것이라 '징집'이란 용어는 걸맞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용어 상의 왜곡 외에도 위안부들이 배급 통제를 받지 않고 물품을 구입하여 물질적으로 일반 군인에 비해 풍요하고 “거의 호사스러운(near-luxury) 생활을 누렸다는 부분이나, 위안부들이 일본군 장교들과 어울려서 각종 스포츠와 소풍, 그 외의 오락행사에 참여하였다거나 위안소 밖으로 쇼핑을 다니고 저녁 만찬에 초대되어 다니는 등의 생활을 하였다는 부분, 많은 일본 군인들이 위안부들에게 집에서 보내준 물품들로 각종 선물을 안기고 위안부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하였으며 몇몇은 실제로 위안부와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는 등의 부분을 기사에서 임의로 누락시켰다. 이러한 내용들은 아마도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이겠지만... 


보고서에는 20명의 위안부들 중 몇몇은 이곳에 오기 이전에 이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매춘녀)'였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 부분 또한 기사에서는 누락되었다.

 

즉 한국인들에게 위안부는 무조건 '순결한 민족의 대표선수'여야만 하는 것이다.

 

매춘녀들에게는 유린될 인권도 없다는 것인가? 매춘녀들도 역시 종군위안부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숨겨야할 민족의 수치인가?


위안부들의 위안소 업자와의 통상적인 계약 기간6개월에서 1(가족이 진 빚의 규모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되어 있다)이었으며 빚을 다 갚은 상당수의 조선인(한국인) 위안부들이 1943년에 현지 일본군 사령관의 귀국 허가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부분도 해당 기사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보고서의 전문(全文)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이러한 사항들이  왜곡되고 누락된 형태로 기사화된 것이 과연 기자의 의도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별반 어렵지도 않은 영문에 대한 초보적인 독해 능력조차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이런 식으로 사실이 왜곡되고 누락된 형태의 기사에 여론이 휘둘리고, 그 여론이 다시 정부를 압박하고 그러한 압박이 한 국가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악순환이 어디서 멈출 지 참으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개 민간인인 필자가 이렇게 글을 쓰기 전에 뉴시스 특종(?) 기사의 왜곡과 누락을 지적하는 의견이 주요 언론에서 과연 하나라도 나왔던 것인지, 그저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중이 일일이 원문을 확인해 볼 수도 없는 것이고 저런 뉴스가 나오면 그냥 믿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일텐데 이렇게 무책임하게 왜곡, 누락시킨 기사에 대해 어찌 누구도 지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애초 취업사기, 인신매매로 팔려온 위안부들을 고용하는 문제성 위안소들의 설치와 운영에 일본군도 역시 깊숙이 관여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쟁범죄의 맥락에서 시비해볼 수 있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단정할 수도 없는 일인 위안부 모집에 있어 일본군부의 직접적 강제’, ‘위안소에서의 참혹한 인권 유린과 같은 사안으로 사실을 왜곡 과장하고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언설을 퍼뜨려 이로 인한 국민 감정의 악화로 다시 정부에 압력이 가해지고 이러한 악순환을 부추기는 것이 과연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또 일본 우익의 추종자라는 둥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 우익도 바보가 아니라면 구글에 문서 이름만 쳐도 전문(全文)이 즐비하게 뜨는 미군 보고서를 가지고 뻔한 사실을 왜곡하고 누락시키는 것에 눈 뜨고 가만히 당하기만 하겠는가?

 

그쪽에서는 그쪽대로 한국 측의 이러한 무식한 왜곡을 보고 "옳다구나!" 무릎을 치며 해당 문서에서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부분만 쏙쏙 가져와서 "이것 봐라. 일본군 위안부들이 이렇게 거액의 돈을 벌고 위안소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빚 다 갚고 한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흔한데 한국인들이 사실을 왜곡하며 선동하는 것 좀 보라"고 주장할 것이다.


뻔히 알려진, 혹은 조만간 알려지게 될 사실들을 가지고 숨기고 왜곡시켜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코 애국이 아니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럴수록 위안부 할머니들은 다른 모든 기억들은 강제로 억압된 채 반일감정을 등에 짊어진 '우리 민족의 항일 투사요 국가대표 선수'의 입장만을 강요받게 될 뿐이다.


일본군 위안부들이 '대한민국의 항일 투사이자 국가대표 선수'로 숭앙받게 되면 최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한국군 위안부(미군 위안부, 유엔군 위안부)들은 뭐가 되나이분들은 쉬쉬 숨겨야 할 '민족의 수치'라도 되어야 하는 것인가?



전쟁 기간 동안 군대의 사기를 위해, 군대가 현지 주민에 대해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줄이기 위해 군대와 정부가 위안소 업자들의 인신매매와 노예노동을 조장하고 방조하여 생겨난 인권침해요 인권유린임은 양자가 동일하다. 가해자가 이민족이냐 같은 우리 민족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덧씌우고 오히려 거기에 더 중점을 두다보니 점점 더 자가당착이 되어간다.


이러한 악순환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제는 박유하 교수에게 민형사 소송까지 제기되어 있다. 사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서 묘사된 위안부 상은 1944년 미육군 심리전팀에서 보고한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에서 묘사된 위안부상보다 훨씬 더 동정적이고 깊이가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은 일본군 위안부들을 상대로, 사건 당시에 이해관계와 무관한 제 3자가, 프로파간다가 아닌 자신들 내부의 의사결정을 위해 조사하여 생산한 정보 보고서라는 점에서 대단히 신빙성이 높은 자료이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집, 위안소에서의 생활, 일본군과의 관계, 경제적 상황 등은 이 문서에서 묘사된 것이 아마 통상적인 상황일 것이다. 버마 전선에 비해 더욱 안정된 중국 화베이 일대의 위안소들은 아마 이보다 더 여건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전쟁 말기로 가면서 일본군의 상황이 최악으로 몰리면서 위안부들의 생활 여건도 일본군과 함께 나빠졌을 것이니 위의 보고서가 전쟁 기간 내내의 상황을 대표하지는 못할 것이다.


, 보고서에서 위안소 업자들의 선대금이 '몇백엔'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들기는 한다.


1941년도에 발표된 최명익의 단편소설로 포주와 창녀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는 '장삼이사'를 읽어보면 색시장사들이 위안부의 가족에게 지급하는 돈은 1000엔이다. 일본군에서 위안소 업자들에게 선대금으로 빌려준 돈은 1인당 2000엔 정도라 한다. 1944년 매일신보에 게재된 '위안부 모집 광고'에서 '선불은 3000엔까지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보고서에서 위안부와 위안소 업자와의 계약 기간은 6개월에서 1년이며 이 기간은 '가족의 빚'의 액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데, 위안부 1인의 1달 평균 수입은 업자에게 떼주고 나서 750엔 정도라 한다.

 

매달 업자가 700엔을 가져가면 6개월이면 4200, 1년이면 6000엔이다. 선대금이 몇백엔에 불과하다면 아마 1-2개월에 모두 갚았을 것이란 점에서 선대금이 '몇백엔'이란 것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고 실은 매일신보의 위안부 모집 광고에서 나온 몇천엔 정도가 아니었을가 싶은데 뭐 이것은 딱히 중요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돈을 많이 줬다고 인신매매와 노예노동매매춘이란 범죄가 희석되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몇백엔, 몇천엔이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는데, 1940년 기사를 보면 당시 택시 운전수 월급이 75, 택시는 소형이 3000, 대형이 8000엔 정도이며, 먹여주고 재워주는 식모 월급은 8, 초등교원 평균 봉급 50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군 사병의 월급은 8엔에서 20엔 사이였다고 한다.


위안부의 1달 평균 수입이 750엔이면 당시 괜찮은 직업이던 택시 운전수 월급의 10여배 가량이니 적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이들의 식품이나 각종 생활물품이 위안소 업자를 통해 구매하는 것이라 이 과정에서의 폭리, 불안정한 생활에 따르는 심신의 피로함으로 과소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라 돈을 제대로 모으는 경우는 흔치는 않았을 것이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어쨌든 일부 위안부들이 고소득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부분이 아닐 수가 없는데,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 이야기' 127쪽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위안소로 큰 돈을 번 업자 이야기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가 되면 조선인이 경영하는 위안소도 생기고 거기에 수용된 위안부 수도 증가해 갔습니다. 그 가운데는 1937년 자본금 2천원으로 시작한 위안소가 1940년 자본금 6만원으로 번창한 업소도 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의 박일석이란 사람이 경영한 '카페 아세아' 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조선인 업주를 논문에서 세어 보니 모두 29명이나 되는군요.]

 

위안부 본인도 역시 큰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131쪽과 132쪽에 나온다. 물론 이는 케이스바이케이스인 것 같다.

 

[앞서 상하이 위안소에서 깜짝 놀랄만한 큰돈을 벌은 위안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만, 여러 기록을 보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습니다. 중국 한커우에는 일본여자 130명과 조선여자 150명이 수용된 규모가 큰 위안소가 있었는데, 이름이 경자라는 조선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3만원을 저축하였는데, 5만원인 되면 서울로 돌아가 작은 오랫집을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이 대단한 여자라고 표창을 하라고 했답니다.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가 온 문옥주라는 위안부가 있는데, 자신의 기구한 역사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녀는 5천원의 거금을 고향집으로 송금하고도 25천원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2년 당시 남의 집에 식모살이를 하면 대개 한 달에 11원을 받았습니다. 이에 견주면 경자나 옥주가 얼마나 큰 돈을 모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남태평양 라바울 섬의 어느 조선 위안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에게 200원을 맡기면서 고향집으로 송금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야마나시 현에 있는 자기 집값보다 많구나 라고 생각했답니다.]

 

[위안부의 계약기간은 보통 2년이었습니다. 기간이 지나서 모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상당수의 위안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악덕업주에 걸려 돈을 구경하지 못한 불쌍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동남아나 남태평양으로 간 여인들 가운데는 전쟁말기에 배편이 끊어져 돌아올 수 없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휴지조각으로 변한 군표를 가방 한가득 들고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으며, 강을 건너다 그만 군표가 든 가방을 떠내려 보낸 어느 여인의 애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글은 앞서 공개한 필자의 두 글과 함께 읽으면 이해하기가 더욱 좋을 것이다

 

정대협 민족권력을 비판한 역작, ‘제국의 위안부

 

중일전쟁기 조선인들의 위안소업과 마약밀매업 문제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하여간 독자들이 직접 필자가 새로이 번역한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를 읽어보기 바란다.


다음 기사 :
[전문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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