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민족문학계가 항의, 결국 삭제됐다는 이문열의 단편 ‘사로잡힌 악령(이문열 중단편전집5 수록작, 둥지)’은 ‘민주화’라는 이름표만 달면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우리사회의 위선과 폭력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운동권의 항의로 제거된 소설, ‘사로잡힌 악령’
최근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로 인해 고은 시인의 과거 기행과 성추행이 문단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새삼 이문열의 단편 ‘사로잡힌 악령’이 주목받고 있다.
이문열이 1994년 발표한 단편소설 ‘사로잡힌 악령’은 지금 서점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도서관에서도 초판을 소장하고 있지 않으면 이 단편을 읽어볼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출간되자 등장인물이 고은 시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고은 시인이 소속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문열은 “작품을 보면 어떤 시인의 행보가 연상되겠지만 그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는 작품이 아닌 1980년대의 시대상을 담아내는 작품으로 봐 달라”고 해명했다. 작품 내용도 일부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비난을 견디지 못한 이문열 작가와 출판사는 ‘사로잡힌 악령’을 목록에서 삭제한 뒤 ‘아우와의 만남’ 개정판을 냈다.
‘사로잡힌 악령’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비판
그러나 ‘사로잡힌 악령’이 주목한 것은 추잡한 성추문과 기행을 일삼는 환속승려 시인 개인이 아니라, 그 시인을 둘러싼 사회였다. 그러니까 고은을 연상시킨다는 소설 속 시인의 일탈은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관심은 타락한 시인을 과잉보호하는 부조리한 사회다.
주인공 ‘나’는 검사 출신 변호사. ‘나’는 법학도 시절 절에서 고시 공부를 하고, 독재정권 검사가 되고, 퇴임 후 변호사가 된다. 그 과정에서 환속승려 출신 시인 ‘그’를 오랫동안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된다.
무명이던 때 ‘그’는 우리 사회 각 분야 명사와 친분을 맺어 대외적으로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는 행태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명사를 헐뜯기도 한다. 이를 두고 이문열은 ‘명사사냥’이라고 묘사했다. 명사사냥을 다니던 무명시절이 지나고, 뒤늦게 ‘그’는 시인으로 등단했고, ‘나’는 검사가 됐다. 신출내기 검사인 ‘나’에게 어느날 ‘그’의 성폭행 사건이 배당된다.
검사를 찾아온 중년 남성의 사연은 이랬다. 시를 좋아하는 자신의 아우가 ‘그’의 재주를 아껴 숙식을 제공했는데, 아우가 출근한 틈을 타 ‘그’가 아우의 제수를 범했다는 내용이었다. 제수는 ‘그’와 정을 통하게 되고 나중에는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결국 아우는 상심하고 폭음을 일삼다가 어느 여관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인 ‘나’는 ‘그’를 처벌할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와 관계된 사건을 공소권없음으로 처리하면서, 다만 ‘힘을 얻게된 악이 드디어 공격성을 드러낸 것’을 ‘나’는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 문단에서 활동하는 ‘나’의 선배는 ‘그’에 관해 “그만한 일로 감옥에 간다면 그 사람 아마 평생 햇볕 보기 힘들 걸”이라고 일갈한다. 선배는 최근에도 ‘그’가 친한 교수가 해외 연수를 간 사이 교수의 부인을 겁탈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본색을 드러낸 ‘그’의 기행은 문학계에 파다해진다.
“그의 악이 번성하는 한 파렴치한 엽색(獵色)의 식단도 풍성했다. 자랑스레 휘젓고 다니는 색주가는 기본이었고 손쉽고 뒷말없는 유부녀는 속되게 표현해 간식이었다. 더욱 악의 섞어 말하자면 신선한 후식도 그 무렵에는 그에게는 흔했다. 시인의 허명에 조금했다가 화대도 없이 몇 달 침실봉사만 한 신출내기 여류시인이 있는가 하면, 뜻도 모르고 관중의 갈채에만 홀려 있다가 느닷없이 그의 침실로 끌려가 눈물과 후회 속의 아침을 맞는 얼치기 문학소녀가 있었고, 그 자신이 과장하는 시인이란 호칭에 눈부셔 옷 벗기는 줄도 모르다가 (적나라한 표현이라 기사에서는 생략함) 놀라 때늦은 비명을 지르는 철없는 여대생도 있었다.”
“어디선가는 좋지 못한 행실로 술상을 덮어쓰고, 또 어디선가는 그 동안 단짝으로 어울려 다니던 문사에게까지 된통으로 얻어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유부녀를 집적이다 눈이 뒤집혀 덤비는 그 남편에게 쫓겨 밤중에 담을 넘는 걸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가 북채만한 여동생을 데리고 나타나 칼을 빼들고 설치는 청년 앞에 불품 없이 꿇어앉아 싹싹 비는 꼴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이문열 중단편전집5 ‘사로잡힌 악령’ 중, 222쪽)”
꺼져가던 악령의 화려한 부활, ‘반독재’ 저항시인으로 표변
‘그’는 점차 문단에서 입지가 추락하고 급기야 자살소동까지 벌이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문인시국선언’을 작성한 몇몇 문인들이 시국사범으로 검찰에 붙잡혔는데 ‘그’가 주모자 급으로 구속된 것. 허무주의·탐미주의 시인이 돌연 독재에 항거하는 저항시인으로 시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는 이제 거짓, 뻔뻔스러움, 천박, 비열 따위 다분히 감정적인 험구의 사정권을 가뿐히 벗어나 거창한 반독재의 대의 뒤에 숨어 버렸다. 그리고 뒤이은 유신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더욱 휘황한 빛을 뿜기 시작한 반독재의 대의는 그의 지난 행적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227쪽)”
10.26과 12.12를 거쳐 5.18을 거치면서, 민주민중의 시대가 됐다. 이제 ‘그’의 이름에는 저항시인, 민중시인, 민족시인이란 칭호가 따라붙었다. 문단은 민족주의 진영이 완전히 장악했다. “거기다가 그 동지들의 철저한 함구도 그의 악을 보호해주었다.” 그의 과거는 은밀한 소문으로만 남았다.
‘그’에게 적대적인 세력도 ‘그 시대의 절박한 대의’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성명서마다 감초처럼 끼는 그의 이름과 엄청나게 부풀려져 발표되기 일쑤인 80년대 초 시국사건에의 연루, 투옥, 고문, 재판, 중형으로 이어지는 수난의 이미지는 이제야말로 그의 대중적인 지명도를 전국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대중들의 환호도 그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그가 쓰는 책은 내용을 묻지 않고 일정 부수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그의 시간을 비싸게 사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어떤 악은 제 키를 가리고도 남을 면죄부를 찾아내 완숙해진다. 완숙한 악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면 파괴되지도 절멸되지도 않는다.(234쪽)”
승리한 악을 향해 우리가 할수 있는 건 ‘저주’뿐
다시 많은 시간이 흐르자 ‘그’는 운동권의 중심에서 이탈해 다시 세속의 탈을 쓴다. 그리고 예쁜 약사 아내를 얻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백화점 쇼핑을 즐기는 성공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의 악행을 아는 ‘나’는 승승장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마침내는 이른바 ‘정신승리’를 하기에 이른다.
“이 거짓과 위선을 폭로되어야 하고 이 허영과 뻔뻔스러움은 벌받아야 한다. 이 악은 파괴되고 절멸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음 일년이 다해 갈 무렵부터 나는 차츰 그 열정에 지치고 절망적이 되어 갔다.(239쪽)”
“그러다가 그 절망감과 무력감은 마침내 그의 악에 대한 엉뚱한 축원으로 변해 갔다. 이 악을 지울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없다. 그의 죄가 탕감받을 수 있는 벌은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 그가 자신의 악 속에서 영원히 번성하는 것이다. 자신의 악 속에 영원히 갇히는 일이다. 너는 너의 악 속에서 영원하라…….(240쪽)”
작가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악의 번영에 번민하고 좌절하다, 결국 정신승리에까지 이르는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그렸다. 그러면서 우리사회의 추악한 위선을 고발했다. 민주화라는 훈장 뒤에 숨은 악과 대의를 위해 그 악을 보호하는 운동권의 섬뜩한 정신세계도 묘사한다.
정말로 소설 속 ‘그’가 고은 시인을 연상시켰고, 그래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이 소설을 ‘묻어버리고자’ 했던 것일까. 고은 시인과 한국문단을 다시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