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학당 이영훈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이 일제시대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는 강의를 시작했다.
가장 민감한 이슈인 위안부 이슈를 통해 한국인의 ‘반일(反日) 종족주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댄 것이다. 강의는 지난 2월 유튜브 ‘이승만TV’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진행되고 있다.
2월 14일 첫 동영상 강의 '6.25전쟁과 한국군 위안부'에서는 6.25 전쟁 당시 존재했던 한국군 위안부를 주제로 했다. 해방 이후 한국군 위안부가 일제시대 일본군 위안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내용이다. 유독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만 분노하는 한국인의 비일관성과 반일 감정에 날을 세운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뿌리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강의에서 이 교장은 한국인들의 반일 종족주의적 정신문화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걸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박근혜 정부가 일본 아베 정부와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 협약을 최근 문재인 정부가 파기했다”면서 “일본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분쟁의 지속’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인의 정신문화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한탄했다.
바로 이 정신문화를 가리켜 이 교장은 ‘반일 종족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는 “종족주의는 절대적이면서 무조건적인 적대 감정”이라며 “그 깊은 뿌리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세계에 맞닿아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러한 정신세계는 비과학적이고 폐쇄적이며, 자국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결여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무지한 가운데 온갖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혀 있고, 나아가 세계사를 진보로 이끈 근대문명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해보지 않는 무지몽매한 상태”라고 일침을 가했다.
“위안부 ‘3만명설’, ‘성노예설’ 재고 필요”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한 자신의 일관된 관점과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과거 2015년 유튜브 ‘정규재TV'에서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미국군에도 위안부가 있었다‘, ’15~19세기 조선시대에도 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취지로 강연했던 그는 해당 방송에서 “1917년 총독부가 실시한 공창제가 폐지된 이후(1947년)에도 민간 위안부가 있었으며, 그 위안부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위안부의 발생‧존재형태‧성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교장은 이러한 자신의 과거 강연을 소개하면서 “(저는 정규재TV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종사한 조선인 여성이 3~4만명, 또는 20만명이나 된다는 종래의 통설을 부정하고, 약 4000~5000명 정도로 추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라는 종래의 통설도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했다”며 “3년전 그 강의를 지금부터 15회에 걸쳐, 보다 폭넓고 세밀하게 풀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군 위안부야말로 수 만명 달했을지도…한 명이 하루 6명 상대
이 교장은 이날 첫 강의가 한성대 김귀옥 교수의 한국군 위안부 관련 논문 일부를 바탕으로 한다고 밝힌 뒤, 본격적으로 6.25 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1951년경 국군은 장병들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특수위안대를 설립했다. 장병의 사기를 북돋우고, 이들이 성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는 것에 따른 부작용을 예방할 목적이었다.
특수위안대는 강릉, 춘천, 원주, 속초에 각각 1개 중대, 그리고 서울에 3개 소대가 있었다. 각 소대에 소속된 위안부는 평균 20여 명이었으며, 1개 중대는 8개 소대로 구성됐다. 이를 종합해보면 특수위안대에 속했던 위안부의 총 수는 약 7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7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 이 교장은 “특정한 시점에 파악된 절대수이고, 이곳을 길게, 혹은 짧게 거쳐간 여인의 수는 그것보다 몇 배, 몇 십배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어 1952년 당시 한국군 특수위안대 서울 제 1, 2, 3소대와 강릉 제 1소대의 위안 실적을 나타내는 표를 제시했다. 해당 표에 따르면 이 4개 소대에 속한 98명의 위안부는 1952년 한 해에 20만 4560명의 장병을 위안했다. 이를 계산하면 위안부 한 명이 하루 평균 6.3명의 장병을 맞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전쟁의 문화…전선에서는 모두가 역사의 희생자”
강의에서는 한 예비역 장성의 한국군 위안부 관련 증언도 소개됐다. 이 교장은 “한국군 위안부를 가장 자세히회고한 분은 채명신 장군”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가 집필한 ‘사선을 넘고 넘어’라는 회고록 일부를 낭독했다.
"제 5연대가 전선에서 후방 예비대로 나왔다. 장병들은 예비대로 빠지기전부터 온통 위안부 이야기로 술렁였다. 나는 전공을 세워 훈장을 받은 장병에게 티켓을 우선 배분했다. 박판도라는 중사가 있었다. 나이가 겨우 19세에 불과한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 소년인데 돌바위 고지를 점령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세워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티켓을 받은 박판도 중사는 숫총각이었다. 위안부대의 천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는데, 분대원들이 억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선 분대원 모두가 어찌하는가 하고 천막을 들여다봤다. 여자가 바지를 벗기려하자 박판도는 도망쳤지만 좁은 천막안에서 곧 잡혔다. 숫총각임을 안 여자가 장난삼아 그의 물건을 만지며 놀리자 얼굴이 빨개져서 천막밖으로 도망쳐나왔다. 분대원들은 자신의 분대장을 철저히 교육시켰으며 다음날 박판도는 재시도 끝에 결국 성공했다. 우리부대가 다시 전선에 투입됐을 때 박판도는 아쉽게도 매복을 나갔다가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 없었다. 나는 박판도 중사를 1계급 특진시키고 충무훈장을 추사했다."
이영훈 교장은 회고를 읽고 난 뒤 “이 슬픈사건을 두고 부대장 채명신을 탓하지 마시길 바란다. 그는(채명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휘하 장병에게 위안부를 제공하는 일에 하등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의 문화였다”면서, “그 전선에서는 모두가 역사의 희생자였다. 천막 안의 위안부도 슬픈 인생이지만, 19세에 전사한 박판도 중사의 인생도 슬프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교장은 “박판도 중사가 난폭한 군인으로서 유약한 여인의 성을 약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저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그렇게 단죄할 자격이 없다. 연대장이나 분대장이나 위안부 모두는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교장은 “제가 군 위안부제도를 정당화한다고 비난하지 마시길 바란다”며 “저는 인간 역사의 모순성과 복잡성, 현재에도 존재하는 그 동시대성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역사는 결코 도덕적인 비판이나 단죄가 아니다”라며 “역사가는 있었던 사실을 가능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해서 전달해줄 뿐”이라고 역설했다.
“군부대를 둘러싼 민간의 성매매는 여전히 존속”
이 교장은 “1954년 3월 특수위안대는 일제히 폐쇄됐지만, 이후 군부대 주변의 성매매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라며 “군부대를 둘러싼 민간의 성매매는 여전히 존속하고 번성했으며, 그에 종사한 여인들 역시 위안부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1955년 정부는 보건사회통계를 작성하면서 민간 성매매 여성을 위안부라고 규정하고 호칭했다”며 “따라서 6.25 당시의 특수위안대는 민간의 위안부가 잠시 영업장소를 부대 내로 옮긴 것에 다름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시 국군은 특수위안대 편성에 하등의 애로를 느끼지 않았다”며 “여러 측면에서 군 위안부와 동일한 약 6만명의 민간 위안부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다음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②] 우리나라 1960년대까지 성매매 종사자 ‘위안부’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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