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이우연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스위스 제네바 소재 유엔 유럽 본부, 인권이사회 본회의에 출석해 일제시대 징용노동과 관련 한국의 역사왜곡 문제를 주제로 발표했다.
(관련기사 : [단독] 한국인 학자, 유엔 인권이사회서 한국의 근현대사 왜곡 문제 정면 비판)
이우연 위원은 현장 발표와는 별개로 이를 보충하는 장문의 의견서를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했다. 이 위원은 이 의견서 말미에 징용노동 문제와 관련 한국의 문재인 정권이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도록 유엔 인권이사회가 권고해주기를 호소했다.
아래는 본지가 단독 입수한 이 위원의 의견서 전문(한국어판, 일본어판, 영어판 포함)이다.
[한국어 버전] 전시기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의견서 2018년 10월 30일, 전시기(戰時期)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을 고용한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하여 한국의 관련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한국대법원은 일본 기업이 한국인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한국 정부는 이 판결을 지지하고 있고, 그 결과 일본인의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크고, 또 일본 행정부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권리가 훼손될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한국 사법부와 정부가 전시 노무동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I. 일본으로의 조선인 노무동원은 “강제연행”이나 “노예사냥”이 아니라, 자발적 의사 또는 징용이라는 법률적 절차에 의한 것이었다. 이 건의서에서 사용하는 “노무동원”의 “동원”이란 넓은 의미의 개념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일본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그 속에는 조선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강제적 노동력 이동”, 즉 좁은 의미의 “동원”만 아니라, 본인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이동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노무동원은 1939년 9월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일본 본토에서 징용이 실시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 뒤 1945년 3-4월까지 약 72만 5천명의 조선인이 전시 노동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일본으로 이동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일부 연구자, 언론인 등은 조선인들이 일본 관헌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노예사냥”을 하였다는 주장조차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모집”이라는 방식으로 조선인의 동원이 시작되었다. 노동력이 부족한 일본 본토의 기업체들은 직원들을 조선에 직접 파견하여 응모자를 선발하였다. “모집”에 의한 조선인 동원은 1942년 2월경까지 진행되었고, 30만 명가량이 이 경로로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39년과 1940년에는 조선 남부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고, 많은 청년들이 일본행에 지원한 결과, 지원자 수가 모집 인원을 크게 초과하는 기업이 매우 많았다. 1942년 3월부터 1944년 9월까지는 “관알선”이라는 방법으로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이는 일본 본토의 사업체에 더 적합한 노동자를 선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민간의 직업소개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동원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약 35만 명가량이 일본으로 이동하였다. “모집”과 “관알선”에 의한 조선인의 이동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자발적 의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의 기업이나 관헌은 일본행을 거부하는 조선인에게 그를 강요할 수 있는 법률적인 방법이 없었다. 법률적인 강제를 수반하는 노무동원은 일본 본토보다 5년 늦은 1944년 10월 이후에 징용령이 조선에도 적용됨으로써 비로소 개시되었다. 징용에 응하지 않으면 “100엔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졌다. “징용”은 징용영장 발부, 수령,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맞춰 출두하는 절차에 따라 집행되었다. 여기에서도 급작스럽고 임의적이며 폭적적인 “강제연행”은 없었다. 미국공군이 한일해협의 제공권을 장악한 후, 1945년 3-4월 경이 되면 조선인을 일본본토로 수송할 수 없게 되자 징용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노무동원이 실시된 약 65개월 중에서 징용은 약 6개월간 실시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은 10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 전시노무동원과 관계없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5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의 높은 임금을 기대하고 일본으로 도항했다. 합법적인 도항이 불가능할 경우, 조선인은 거금을 내고 작은 배를 이용하여 목숨을 걸고 밀항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을 “강제연행”하여 일본으로 끌고 갈 이유는 없었다. 또 그러한 시도가 있었다면 조선인은 강력히 저항하였을 것이다. “강제연행”이나 “노예사냥”에 의한 노무동원은 일을 수 없는 일이었고,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다. II. 조선인의 노동은 민족적 차별하의 “강제노동” 또는 “노예노동”이 아니라, 통상적 노동 또는 일본인과 동일한 조건에서 수행된 전시노동이었다.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중 46%가 탄광에서 일했다. 금속광산을 포함하면 광업은 54%를 차지한다. 13%는 토목건축업에, 33%는 공장 등에서 노동하였다.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다. 따라서 탄광의 지하노동은 조선인들에게 가장 힘겹고 고된 일이었다. 조선인의 탄광노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조선인과 일본인은 동일한 환경에서 노동하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조선인을 차별하여 의도적으로 위험하고 고된 작업에 배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시노무동원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함께 작업했다고 증언하였다. 조선인이 일본인과 함께 하나의 작업조를 구성하여 일하는데 조선인만 위험할 수 없다. 1930년대 초 이후 일본 탄광에서는 4-7명이 하나의 작업조를 구성하고, 수십 개의 작업조가 하나의 탄갱에서 동시에 작업하는 채탄기술을 채택하였다(장벽식(長壁式) 채탄법). 하나의 작업조가 다른 조들 보다 작업속도가 떨어지면 탄갱 전체의 작업이 모두 지연되었다. 따라서 조선인만으로 독립적인 작업조를 편성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위험하였다. 조선인의 계약기간은 2년이었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은 경험이 부족했고 숙련도가 낮았다. 그 결과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작업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1930년대 이후 탄광에서는 기계화도 급속히 진전되었다. 조선인들은 대규모 광산에 배치되었으며, 여기에서는 1인용 기계식 드릴로부터 대형 컨베이어까지 기계가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은 대부분 무학이었고, 2년 만에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기능을 획득하기 어려웠다. 또 다이너마이트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일정 구역을 조선인이 전담하면 한 탄갱에서 일하는 전체 탄광부들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숙련된 일본인과 미숙련의 조선인을 하나의 작업반으로 편성해야했다. 조선인은 작업환경에 있어서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조선인의 재해율은 일본인보다 높았다. 일본의 노동수요와 조선의 노동공급이 갖는 특성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였다. 일본의 산업현장에서 가장 고되고 위험한 작업을 담당한 것은 원래 청장년이었고, 이들이 징병되었다. 동원된 조선인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공백이 된 작업공정을 그들이 메우게 되었다. 인위적인 작업배치상의 차별로 인해 조선인 재해율이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2.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불되었다. 임금은 노동자에 대한 처우에서 가장 중요하며, 기타 노동조건을 대변해준다. 우리는 임금과 그 민족적 격차유무에 주목하고자한다.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에게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불되었으며, 이는 1944년 9월 이후의 징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징용으로 동원된 조선인에게는 국가의 원호체계가 적용됨으로써, 본인과 조선에 있는 가족들의 수입은 더욱 증가하였다. 그들의 임금은 조선의 임금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 비해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1940년,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탄광부들의 월수입은 조선에 있는 남자 은행원의 2.4배, 면직공의 5.2배였다. 1944년, 일본 남성의 초임에 비교하면, 대졸 사무직과 순사에 대해 각각 2.2배, 3.7배였다. 이와 같이 임금이 높았던 것은 석탄 증산이 전쟁을 위해서 절실한 반면, 청장년 노동력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매우 높았지만, 그 고수입이 모두 직접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로인해 오해도 발생하였다. 조선인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단신으로 일본으로 이동하였고, 기업이 운영하는 기숙사가 식사와 주거를 제공하였다. 일본인의 경우, 나이가 훨씬 많았고, 사택이나 일반주택에 가족과 함께 개별적으로 생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들은 전쟁경비로 인해 대규모 재정적자 문제에 직면하였다. 일본은 증발한 화폐를 강제저축을 통해 회수함으로써 인플레를 억제하였다. 강제저축은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었다. 조선인은 부양가족이 없었으므로 일본인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금액이 강제저축으로 임금에서 공제되었고, 식사비도 회사 기숙사에 지급되었다. 월수입의 50% 이상이 강제저축, 식대 등으로 공제되고, 잔액이 조선인의 손에 인도되었다. 조선인들은 이 현금을 조선의 가족들에게 송금하거나, 일상적 소비에 사용하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손에 인도된 금액이 일본인에 비해 소액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민족차별”이 심각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인의 경제관념은 뚜렷하였고, 계약종료와 함께 어김없이 저축과 각종 적립금을 정상적으로 회수하였다. 만약 송금에 문제가 발생하면, 가족들은 조선에 있는 최일선 행정기관에 그 사실을 통지하였고, 조선총독부와 일본 본토의 정부기관은 해당 기업에 시정을 요구하는 문제해결 체계를 갖고 있었다. 기업 또한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송금 사고를 바로 해결하였다. 정상적인 급여지급 체계하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부채를 청산하고 농지를 마련하는 등 가정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은 일본제철로 동원된 4명의 한국인이 일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본 신일철주금으로 하여금 원고 1명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원고 4명 중 1명은 일본제철 야와타(八幡) 제철소에서 근무하였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은 총 3,042명이었다. 그들이 정산을 거치지 않고 급거 귀국하면서 남기고 간 미수금은 모두 약 27만 엔이었다. 일인 평균 88.6엔이었고, 1개월 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이중에서 미불임금은 28.7엔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퇴직적립금, 예금 등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전후의 예외적인 혼란기를 제외하면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임금 등 처우에서 민족차별은 없었다. 탄광의 임금은 성과급체계에 따라 산정되었다. 예를 들어 채탄부의 경우 1톤당 단가는 민족과 관계없이 동일하였다. 임금은 숙련도, 경력, 성실성 여하에 따라 결정되었다. 경력과 숙련에서 앞선 일본인들의 월급이 조선인보다 평균적으로 높았다. 1943년, 17개의 금광을 운영하던 일본광업주식회사의 경우, 갱내부는 15개, 갱외부는 9개 광산에서 일본인의 평균임금이 조선인보다 높았다. 이는 평균값이므로, 일본인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조선인도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재벌기업인 일본질소 계열의 에무카에(江迎) 탄광의 운탄부 임금을 보면, 직접적 노동임금은 일본인이 70.1엔, 조선인이 62.5엔이었는데, 일본인의 초과근로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월수입은 각각 116.2, 100.0엔이었고, 여기에서는 가족수당의 차이가 중요했다. 공제금을 제외하고 노동자에게 인도되는 금액은 각각 84.0, 41.9엔이었다. 앞서 말한 요인들에 더해 식대가 공제되고 저금 액수가 달랐기 때문에 큰 차이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월수입의 40% 이상이 노동자에게 인도되고 있었다. 1942년, 홋카이도의 한 탄광에서는 50엔 이하의 월급을 받는 조선인은 전체 조선인의 75.0%에 달하지만 일본인은 17.6%에 불과하였다. 그곳에서 조선인의 근속기간은 2년 이하가 무려 89.4%인데, 일본인은 42.8%에 불과하였다. 3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조선인은 전혀 없었지만, 일본인의 45.8%가 3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임금격차는 민족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숙련과 경험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9년 직후에 일부 조선인들이 조선에서 들은 것보다 임금이 낮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업은 임금계산 방법 때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그 뒤에는 임금에 관련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민족간 임금차별이 분쟁을 발생시킨 경우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석탄, 철강, 병기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은 넉넉한 현금을 갖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한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력과 물자가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생산량이 증가하면 기업의 이윤은 그만큼 증가했다. 일본인 개인에 의한 일탈적 차별행동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인, 조직적`지속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업은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민족 차별은 근로의욕을 감퇴시키고 저항을 유발하여 생산과 이윤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작업현장에서의 큰 실수에 대한 상급자의 일과성 폭행과 같은 전근대적 노무관리의 잔재는 아직 남아있었다. 특히 한 노동자의 부주의한 행동이 다수 노동자의 생명과 신체를 위협할 수 있는 광산에서 그러한 관행은 특히 오래 존속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민족 차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인에게 가장 큰 불만은 식사와 관련된다. 주식인 곡물의 제공량은 일본인과 동일하였는데, 조선인의 식사량이 더 컸기 때문이다. 종전직전까지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배급체계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자 기업과 노동자에게 할당되는 식량이 감소하였다. 일인당 배급량은 일본인과 동일하였지만, 조선인에게는 더 큰 고통이 되었다. 작업시간 이외의 일상생활은 자유로웠다. “감금상태”나 “강제수용소”와 같은 억압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인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서치라이트가 설치된 망루에서 총을 든 군경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장벽을 감시하는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하는 역사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인들의 도박은 기업의 노무관리에 있어서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도박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이는 노동자 사이의 분란을 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음날의 작업을 곤란하게 하였다. 작업 종료 후나 월 2회의 휴일이면 조선인은 시가지로 외출하여 외식과 음주를 즐기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규모 사업체 주변에는 조선인 여인들이 있는 조선인 전용의 “특별위안소”가 있었다. 일본 기업의 입장에서, 조선인을 차별하거나, “강제노동” 또는 “노예노동”으로 조선인을 학대하는 것은 극히 비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전쟁승리를 최대 목표로 삼고 “총력전”을 전개하는 일본정부도 조선인의 근로의욕을 감소시키거나 노동력을 훼손하는 행위를 엄격히 통제하였고, 행정ㆍ경찰 조직은 조선인을 고용하는 기업을 관리ㆍ감독하였다. 요약하면, 일본으로의 조선인 노무동원은 “강제연행”이나 “노예사냥”이 아니라, 자발적 의사나 징용이라는 법률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동환경, 임금과 처우, 일상생활을 고려하면, 조선인은 민족적 차별 속에서 “강제노동”이나 “노예노동”으로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노동 또는 전시동원체제 하에서 일본인과 동일한 노동을 수행하였다.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식민지기 조선인 노무동원과 관련하여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도록 권고하여 주시기 바란다. [일본어 버전] 戦時期に日本に動員された朝鮮人労働者に関する意見書 2018年10月30日、戰時期日本に動員された朝鮮人を雇用した日本企業を対象として、韓国の関係者らが起こした損害賠償請求訴訟で、韓国大法院は、日本企業が韓国人らに慰謝料を支給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判決した。 韓国政府も大法院の判決を支持している。その結果、日本人の権利が多く侵害される可能性が高い。また、日本政府の対応によって韓国人の権利も大きく損なわれる可能性は高い。こうした問題が発生したのは韓国の司法府と行政府が戦時期労務動員に対する歴史的な真実を正しく把握し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 I. 朝鮮人の労務動員は「強制連行」あるいは「奴隷狩り」ではなく自発的意思または徴用という法律的手続きによるものであった。 この文書で言「労務動員」における「動員」とはいえより広義の概念である。戦争を遂行する過程で日本は朝鮮人を様々な方法を使って日本に移動させたのである。 その中には朝鮮人の意思とは関係なく「強制的労働力移動」であるより狭い意味での「動員」だけでなく本人の自発的同意に基づいた移動も含まれている。 朝鮮人の労務動員は、1939年9月公布された国家総動員法によって日本本土における徴用の実施とともに始まった。その以来1945年3~4月まで約72万5千人の朝鮮人が戦時下における労働力需要の充足のため日本に移ったのである。ある論者たちは朝鮮人が日本人官憲によって「強制連行」されて日本に連れて行かれたと主張している。朝鮮人を対象とする「奴隷狩り」をしたという主張さえなされている。これは事実ではない。 日本本土とは違って朝鮮では「募集」という形式で朝鮮人労働者の労務動員が始まったのである。労働力の必要な企業は職員を朝鮮に直接派遣して応募者を選抜したのである。「募集」による朝鮮人の労務動員は1942年2月頃まで行われのであり、約30万の朝鮮人が「募集」という形で日本に移ったのであると推定する。とりわけ、1939-40年には朝鮮南部地域において大きな凶年となった。そこで数多くの朝鮮人青年が日本行を支援することとなった。その結果、志願者が募集人数を大幅に越える企業もとても多かったのである。 1942年3月から1944年9月まで労務動員は「官斡旋」という形であった。日本本土の企業が必要とする適切な朝鮮人労働力をより効率的に動員するためまるで朝鮮総督府が民間の職業紹介所のような役割を担う方式であった。こうした形で約35万人の朝鮮人が日本に移動したのである。 「募集」と「官斡旋」による朝鮮人移動の本質は、本人の自発的意思による移動であった。日本企業や官憲は日本行きを拒否する朝鮮人に対してこれを強制できる法律的な手段を持ってなかったのである。法律的な強制の労務動員は日本本土より約5年1ヶ月が遅れた1944年10月以降であった。朝鮮にも徴用令が適用されてからである。徴用に応じなければ「100円以下の罰金または1年以下の懲役」処分されたのである。 「徴用」は徴用令状の発領と受領そして決まった時間と場所に応じて出頭する手続きによるものであった。ここでも無計画の恣意的かつ暴力的な「強制連行」はなかったのである。アメリカ空軍が韓日海峡の制空権を握ることになった1945年3-4月頃になって朝鮮人の移動ができなくなったから徴用も事実上において終了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労務動員が行われた約65ヵ月にかけて徴用はただ約6ヵ月間であった。しかも徴用によって日本に行かれた朝鮮人は約10万人以下であると推定しうる。 戦時労務動員と関係なく1939年から1945年まで約155万人の朝鮮人が日本における高い賃金を求めて渡航したのである。合法的な渡航が不可能な場合, 朝鮮人は大金と命をかけて小船を利用して密航を図ったのである。こうした状況で中で朝鮮人労務者を「強制連行」して日本に連れて行く必要はなかった。また,そのような試みがあったとすれば、朝鮮人本人も強く抵抗しただろう。「強制連行」や「奴隷狩り」による労務動員は有り得ないことであり、実際にもなかった。 II. 朝鮮人の労働は民族的差別に強いられた「強制労働」または「奴隷労働」ではなく通常的な労働または日本人と同じ条件で行われた戦時労働であった。 日本に動員された朝鮮人の46%が炭鉱で働いた。金属鉱山を含めると鉱業では54%を占めたのである。13%は土木建築業、33%は工場におけるで労働した。日本に動員された朝鮮人たちはほとんど農民出身だった。このため炭鉱の地下労働は朝鮮人にとって最も辛い労働でもあった。 朝鮮人の炭鉱労働を検討してみよう。 1.朝鮮人と日本人は同一な環境で労働した。 朝鮮人を差別して意図的に危険かつ辛い作業場に配置したという主張がある。しかしこれは事実ではない。該当韓国人は、日本人と一緒に作業したことを証言している。朝鮮人が日本人が共に一つの作業組で働くのであるから朝鮮人だけが危険であることは有り得ない。
1930年代日本の炭鉱では4-7人の労働者が一つの作業組を形成する。そして数十個の作業班が一つの炭坑で同時に作業を行う採炭技術を採用したのである(長壁式採炭法)。一つの作業組の進展速度が遅くなると、炭坑全体の作業も軒並み遅延することとなる。したがって朝鮮人だけで独立した作業班を編成するのは非効率的かつ不安定だった。朝鮮人の契約期間は2年であって契約期間が満了されれば、ほとんど朝鮮に戻ったのである。日本人に比べて朝鮮人は経験が不足してており、熟練度が低かった。そこで朝鮮人と日本人とは一緒に作業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 1930年代炭鉱では機械化も急速に進展した。朝鮮人労働者も大規模な鉱山に配置されていた。ここでは1人用機械式ドリルから大型コンベヤまで機械が広汎に使用された。しかし、朝鮮人はほとんどは無学であり、作業経験2年でも機械を操作できる機能を獲得しえなかった。また,ダイナマイトを一般的に使用している状況の中で一定の区域を朝鮮人だけが担当するとすれば,ある炭坑で働く全体炭鉱夫危うくなる危険があった。したがって熟練した日本人と未熟練の朝鮮人を一つの作業班に編成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朝鮮人は日本人と同様の作業環境で労働したのである。 朝鮮人労務者の災害率は日本人より高かった。日本の労働需要と朝鮮の労働供給が持つ特性によって発生した結果だった。日本の産業現場で最も苦しくで危険な作業を担当したのは元来青壮年であった。しかし彼らが徴兵されたのである。朝鮮人労務者はほとんど20代前半の壮健な青年たちであった。彼らが空白した作業工程を埋めることになった。人為的な作業配置によって朝鮮人災害率が高くな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のである。 2. 賃金は正常的に支払った。 賃金は労働者への待遇で最も重要な事項である。その他の労働条件さえ代弁してくれる。賃金と民族的格差の有無に注目したい。
日本に動員された朝鮮人に賃金は正常に支払われれたのである。これは1944年9月以降の徴用でも同様であった。徴用された朝鮮人には国家の援護システムが適用された。本人と朝鮮にいる家族の収入はむしろ増加した。彼らの賃金は朝鮮や日本に比べても非常に高い水準だった。 1940年日本で働いた朝鮮人炭鉱夫の月収は朝鮮にいる銀行員の2.4倍、綿織工の5.2倍であった。1944年日本における男性の初任給に比較すると大卒事務職と巡査についてもそれぞれ2.2倍と3.7倍であった。石炭増産が戦争のために切実であった反面, 青年労働力は非常に不足していたからである 朝鮮人労働者の賃金は非常に高かったが,それすべてガ手渡されていない。ここで誤解も発生した。朝鮮人はほとんど20代前半の若い年に単身で日本に移動し、企業が運営する寮で食事と住居を解決したのである。日本人の場合,年齢がずっと高いぐて社宅や一般住宅で家族と共に個別的に生活していた。 第2次世界大戦参戦国は戦争経費によって大規模な財政赤字を抱えていた。日本は増発した貨幣を強制貯蓄により回収することによりインフレを抑制した。強制貯蓄はすべての労働者に適用された。朝鮮人は扶養家族がなかったので日本人に比べ、はるかに多くの金額が強制貯蓄で賃金から控除された。食事代も会社の寮に支払ったのである。 月々の収入の50%以上が強制貯金や食事代などで控除されており、残額が朝鮮人の手に引き渡された。朝鮮人たちはこの現金を朝鮮の家族に送金したり, 消費に支出したのである。朝鮮人労働者の手に引き渡された金額が日本人に比べて小額で, これが誤解を招いた。 朝鮮人の経済観念は明確であり,契約終了とともに貯蓄と各種積立金を正常に回収したのである。もし送金問題が発生したとすれば, 家族は朝鮮の最一線行政機関にその事実を通知する。朝鮮総督府と日本本土の政府機関は当該企業にその是正を求める問題解決の体系を構築していたのである。また企業も労働力を持続的に確保するためには送金事故を直ちに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正常な給与支給体制によって多くの朝鮮人が負債を清算して農地を購入するなど家庭経済を成長させることができたのである。 日本製鉄で働いた4人の韓国人が日本の新日鉄住金を相手にして損害賠償請求訴訟を起こしたのである。2018年10月30日韓国の最高裁判所は新日鉄住金にとって原稿1人に1億ウォンずつの慰謝料を支払うよう言い渡した。原稿4人中1名は日本製鉄の八幡製鐵所で働いた。そこで終戦を迎えた朝鮮人が精算しないて急いで帰国することで残していった未収金は一人平均88.6円であり、1ヵ月の賃金に及ばない金額であった。そううち未払い賃金は28.7円に過ぎず, 残りは退職積立金や預金などであった。1945年8月15日前後例外的な混乱期を除けば、賃金は正常的に支給されてのである。 3.賃金や処遇における民族差別はなかった。 炭鉱労働の賃金は成果給体系によって算定されたのである。例えば、採炭夫の場合、1トン当たり單價は民族の可否とも関係なく同一であった。賃金は熟練度,経歴,誠実さによって決まったのである。熟練と経歴でリードしている日本人の月給が朝鮮人より平均的に高かった。1943年17個の金鉱を運営していた日本鑛業株式会社の場合、坑内部は15個、坑外夫は9つの鉱山で日本人の平均賃金が朝鮮人より高かった。これは平均値なので日本人より高い賃金を受け取った朝鮮人も多かったことが分かる。 1944年財閥企業であった日本窒素系列の江迎炭鉱における運炭夫賃金を見ると、直接的労働賃金は日本人が66.5円、朝鮮人が60.0円だった。これは日本人の勤労時間が長かったからであった。月収はそれぞれ116.2と100.0円であった。家族手当の差が重要だった。控除金を除いて労働者に引き渡される金額はそれぞれ84.0と41.9円であった。前述の要因に加え食代を控除し、貯金額が違ったために大きな差が生じた。しかし、月収入の40%以上が労働者に引き渡されていたのである。 1942年北海道にあったある炭鉱では月給50円以下の朝鮮人は炭鉱で働いていた朝鮮人全体の75%を占めていたのであるが、日本人は17.6%に過ぎなかった。しかし、朝鮮人の勤続期間は、2年以下が全体の89.4%であったが、日本人の場合は42.8%に過ぎなかった。また3年以上の経歴を持つ朝鮮は一人もいなかったのに対して日本人の45.8%は3年以上の経歴を持っていたのである。賃金格差とは民族差別ではなく熟練と経歴の差異から生じたことがわかる。 労務動員初期には朝鮮で聞いたものより賃金が低いと不満を濡らした場合があった。 企業が賃金の計算方法を説明することで問題は容易に解決された。その後は賃金に関わる紛爭はしなかった。それに民族間の賃金差別が紛争となったケースはほとんどなかった。 石炭,鉄鋼,兵器など軍需物資を生産する企業は多額の現金を持っていた。第2次世界大戦に参加した他の国でも同様だった。労働力と物資の不足が問題であった。生産量が増加すれば,企業の利潤はそれに比例して分増加した。日本人個人による逸脱的差別行動はあり得るだろう。しかし制度的なかつ組織的な持続的差別は存在しなかった。企業はむしろそれを防ぐために努力していたのである。民族差別は労働意欲の減退と抵抗を誘発して生産と利潤を減少させる要因であったからだ。 勿論、作業現場においては誤りで上級者の一過的な暴行のような前近代的労務管理の残滓は残っていた。とりわけ,ある労働者の不注意な行動が多数労働者の生命と身体を脅かすこ鉱山ではそのような慣行は長く存続していた。しかしそこに民族差別があ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 朝鮮人にとって最大の不満は食事にかかわる問題である。主食である穀物の提供量は日本人と同量であったが、食習慣において朝鮮人の食事の量がより多かったからだ。終戦直前まではあまり深刻な問題ではなかった。しかし終戦直前になると配給システムが円滑性を欠けったため企業と労働者に割り当てられる食糧が急減したのである。そこで食事の配給量は日本人と同量であったが朝鮮人にとってより大きな苦痛となったのである。 作業時間以外の日常生活は自由だった。「監禁状態」や「強制収容所」のような抑圧体制は存在しなかった。朝鮮人の脱出を阻止するためにサーチライトと望楼を設置して銃を持った軍警が鉄条網で囲まれた強制受容所を連想する場合があり,そのような映画が制作されたこともあった。しかし,それを証明する歴史的資料は存在しない。 賭博は企業の労務管理においてもっとも難しい問題であった。労働者の多くがギャンブルで眠れず労働者の間でも争いを起こっただけでなく翌日の作業も困難を齎したのである。作業終了後や月2回の休日になると朝鮮人は市街地で外出して外食や飲酒を楽しんで記念写真を撮った。大規模事業体の周辺には朝鮮人女性たちがのいる朝鮮人向けの「特別慰安所」があった。 日本企業の立場から朝鮮人を差別したり「強制労働」または「奴隷労働」に強いられ、虐待するのは貴重な労働力を非効率的に扱う非合理的な行為である。「総力戦」を展開する日本政府もそんな行為を厳しく取締した。行政·警察組織は、朝鮮人を雇用する企業を管理・監督していたのである。
要約すると,朝鮮人の労務動員は、「強制連行」や「奴隷狩り」ではなく自発的意思や徴用という法律的手続きによって行われた。労働環境,賃金と処遇,日常生活を考えると,朝鮮人は民族的差別の中で「強制労働」や「奴隷労働」で苦痛を受けたのではなく通常的な労働または戦時動員体制のもとで日本人と等しい戦時労働を行ったのである。 以上の事情からUN人権理事会は、韓国政府に対して植民地期朝鮮人の労務動員に関する歴史的な真実に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勧告するように願っております。 [영어 버전] The True Circumstance of Mobilized Korean Laborers On October 30, 2018, the Korean Supreme Court ruled that Japanese companies, which employed Korean labor as wartime mobilization, pay compensation to Korean laborers, who raised lawsuit to request compensation payment. The Korean government supports the Supreme Court verdict. As a result of this, Japanese peoples’ right may be greatly violated. And in case of Japanese government response to this verdict,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Korean’s peoples’ right be greatly damaged. The reason why this problem occurred is that Korean judicial administration and government executive have not grasp the historical truth concerning the wartime labor mobilization. I. The mobilization of Korean laborers was not “forced” or “slave hunting” but “on own will” or on legal procedure based on “drafted labor”. Mobilization of Korean laborers started from September, 1939, when national mobilization act was promulgated in Japan proper to draft laborers. Then until March/April, 1945, 725 thousand Korean laborers moved to Japan to replenish labor shortage during the war. As different from Japan, labor mobilization in Korea started in the form of “private recruitment” Japanese companies which needed labor force dispatched their own staff to Korea to recruit laborers. This form was applied till February 1942, and about 300 thousand Koreans were estimated to move to Japan. From March 1942 to September 1944, labor mobilization was conducted in the for of “good offices of government”. This form was used to recruit laborers which were need by Japanese companies more efficiently by Korean government general acting as private placement agency. About 350 laborers moved to Japan under this system. The nature of Koreans move to Japan through “private recruitment” and “god offices of government” are based on their own will. Law based “draft” which has legal enforcement was introduced in Korea.
November, 1944, 5 years and 1 month later than Japan proper. If rejecting draft, less than 100 yen fine or less than imprisonment of up to one year were imposed. Since the Koreans were at that time Japanese national, it was lawful according to international law. There were no haphazard, arbitrary or Violent execution of “forced recruitment”. Of the whole labor mobilization of about 65 months, “draft2 mobilization was only 6 months. It is estimated that less than 100 thousand Koreans were “drafted”. Apart from the wartime labor mobilization, 1, 550, thousand Korean people moved to Japan seeking higher wages. When lawful move to Japan was not possible, many Koreans tried to move to Japan using small ships by risking big amount of money and life. Under such situation there were no need to transport Koreans for forced labor to Japan. There could not be “forced transport” or “slave hunting”, and not at all actually. II. korean laborers were not discriminately forced to work or forced salve work but worked under the same condition as Japanese co-workers. 1. Koreans and Japanese worked in the same circumstances. Someone says that Koreans were intentionally positioned at dangerous and hard work by racial discrimination. But this is not true. The Koreas themselves testify that they worked in cooperation with Japanese workers. In 1930s mechanization in coal mining progressed rapidly. There one man machine drill and conveyers were widely used. Usually Koreans’ period of engagement was two years, and then they went back to Korea. Most of them were not well educated and two years experience was not enough for them to master machine operation. If less experienced Korean workers worked by themselves alone, it was dangerous to cause accident including dynamite explosion, so experienced Japanese workers and not experienced Korean were grouped as one team. Korean workers worked under the same condition as Japanese.
2. Wages were payed fairly Wage is the most important element for working condition. Korean workers worked in Japan were payed normally. This was the same as “forced draft” after September, 1944. National social security system was applied drafted Korean workers. Their wage level was very high. Korean coal miners’ wage in 1940 was 2.4 times as much as Korean banking staff and 5.2 times as much as weaving workers in Korea. As compared with initial salary of male clerk graduated from university and police officer in Japan, the Korean coalminers7 wage was 2.4 times and 3.7 times respectively. Korean workers wages were very high but they were not necessarily paid in cash. The countries engaging in WW II were suffered huge fiscal deficit. Japan tried to diminish inflation by recovering bank notes by forced saving. This forced saving were applied to every worker. In case of Korean workers, more than 50% of wages were deducted by meal cost and forced saving. Since actual money handed Korean workers were smaller than that of Japanese with many family dependents, some Koreans misunderstood they were unfairly treated. Koreans’ economic thought is clear, and when they finish the contract term, they normally recovered saving and other reserves. If paying problem occurs, their family in Korea can claim the problem governor general office in Korea. The companies had to solve the paying problem in or der to secure labor supply. So normal payments were mostly made and therefore Korean family can settle the debt and purchase farms to improve the family economy. Except for exceptional period of August 15, 1945, wages were payed normally.
3. There were no national discrimination concerning wage and treat. The coalmining work wage was stipulated by achievement based system. The records of that time show that some Koreans were payed higher than Japanese. In case of a coalmine in Hokkaido in 1942, 50 yen or less payed workers represented 75% of Korean workers but 17.6% of Japanese workers. The reason was that period of work of less than 2 years was 89.4% of Koreans but 42.8% of Japanese. No Koreans worked more than 3 years but 43.8% of Japanese worked more than 3 years. Wage difference was not baes on national discrimination but on working length and resultant skill. The biggest dissatisfaction Korean workers was about meal. The fact was that the same amount of meal was supplied but Koreans did not satisfied with the amount. That was the difference of custom. Except for working time, they were free. After the work time or two days off in every two months Korean workers went out in the streets to enjoy eating and drinking and photo taking. Around big factories there were Korean girl comfort house for Koreans. For Japanese companies, discriminating Koreans, forcing labor, or forcing slavery work mean nothing more than causing trouble. It is an irrational deed for the use of labor effectively. Japanese government, which are ardent in executing the total war, strictly supervise such actions. Government and police organization were in charge of administration and supervision of companies which employ Koreans. To sum up, mobilization of Korean workers was not “forced transportation” or “slavery work” but was conducted based on free will or through lawful procedure of “draft”. That was just the same war time mobilization as applied to Japanese under the war time mobilization system. Since the real situation is above mentioned, 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are requested to advise Korean government to adhere to the Agreement on Concerning the Settlement of Problems in Regard to Property and Claims and Korea and Economic Cooperation, which was confirmed by the Governments of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in 1965, by recognizing the historical truth concerning the mobilization of Korean labor during the time of Annexation of the two countries This is a very important matter for the future development of Korea and Japan rel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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