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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지만원 재판, 집단주의 사회의 위선

“집단주의 광기의 한국사회에서 감성재판과 인격재판의 다음 희생양, 당신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추정을 단정으로 성급히 몰아가는 비합리성과 조급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 개인들이 가진 이러한 인간성의 결함들은 전문가들 사이의 열린 토론과 상호 비판이 고취되는 사회에서라면 그만큼 제어될 것이다. 반면, 공식적 담론이 도전 받지 않고 ‘주류의 시각(mainstream view)’ 혹은 ‘인민의 요구’라는 명분 하에 위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는 추정은 쉽게 단정이 되고 급기야 그에 따른 재판까지도 내려질 수 있다. 몇 주전 지만원에 대한 이른바 명예훼손 형사재판처럼 말이다. 


5.18 사건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성역시하는 사람의 눈으로는 당연히 지만원의 주장은 모욕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지만원에 대한 형사재판은 크게 두가지 생각할 거리를 나에게 던져 주었다. 첫번째는 한국 사회의 놀라울 정도의 개인과 집단을 바라보는 위선의 프레임이다. 집단주의 사회임을 숨기듯, 한국 사회에서 이 재판은 마치 원론적인 개인과 개인 사이의 명예 훼손 사건처럼 위장하고 있다. 사안이 단순한 개인간의 사건이 아닌 (진영논리가 판을 치는) 정치적 사건임을 감안하면, 그 배후에 막강한 사회적 파워의 영향을 당연히 생각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20년전 한국논단의 명예 훼손 형사재판 당시 그랬던 것처럼, 한국사회는 철저히 위선적이다.  

즉, 공개적 의혹 표명이 진지하고 중립적인 검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형사법상 명예 훼손으로 이어지고 마는 기이할 정도로 위선적 사회인 것이다. 무슨 손 씻기 캠페인 시민단체도 아닌 이상, 정치는 진흙탕 싸움임을 모르는 시민단체가 없을 리 만무함에도 진흙이 튀었다고 시민 단체 간 형사고소가 발생했던 기이한 이 사회는 20년이 지나도 전혀 진화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개적이 아닌 비공개적으로 의혹을 교환하고 전파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지만원 명예 훼손 사건의 핵심은 지만원이 광주 시민 몇 명의 명예를 훼손시켰는지 보다 그가 제기한 공개적인 의혹 제기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다. 사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도 하다. 검증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제기된 의혹에 의해 이미 몇몇 시민 혹은 시민단체의 명예가 훼손되었음을 재판 근거의 핵심으로 삼는 주장은 실제 지극히 정치적인 이 형사 사건 자체의 성격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만원 형사사건은 겉으로 볼 때는 순수한 개인과 개인들 사이의 명예훼손 재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이들과 관련된 지지 세력으로 누가 있는지 그리고 한국사회라는 곳이 과연 얼마나 그 안에서 담론이 투명하게 생산되고 토론되는지 실체를 아는 사람에겐 전혀 다르게 보인다.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홈페이지와 개인 연줄이 전부인 (래디컬한 정치적 의견을 거침없이 하지만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주장해온) 한 개인과, 관련 사건에 대한 국가의 유공자 지원을 연계하는 거대 재단을 위시한 상당수 지역 시민들의 (그로 인해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는) 심정적 지지를 등에 업은 개인들 간의 형사 재판으로 보는 나의 시각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일까? 두 쪽 다 지지자와 비판자가 있겠지만, 이 명예훼손 재판에서 과연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일까? 

그럼에도 감히 한국사회 내의 (기성 우파 개인 및 집단을 포함해서) 어떤 사람도 그 래디컬한(radical) 견해가 겪고 있는 연구활동과 표현의 자유 침해 건에 대해 비판하지도 못하고 있다. 왜 극소수를 제외하면 공개적으로 거론조차 못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 사건 및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토론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 애당초 매우 협소하다 보니, 매우 래디컬한 주제의 사회적 토론을 요청하는 행동은 (소위 명예 훼손이라는 명분으로) 쉽게 억압당하게 되고 그러한 현실에서 아무도 선뜻 그러한 토론에 연관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좌파, 우파의 목소리 들이 각각 표본 정규분포 곡선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정형화된 토론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토론장 밖에서 그 범위 밖의 극단에 해당하는 목소리가 철저히 억압당해도 사회에서 조용히 외면되고 마는 모습. 이보다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적 사회임을 더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음 직 하다. 래디컬한 목소리가 그렇게 심기에 거슬리고 위험한가? 고작 그 정도의 면역력(immunity)을 가진 사회가 어떻게 혁신(innovation)을 외치고 관용(tolerance)을 거론하는가? 철저한 집단주의 위선의 사회, 이것이 내가 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이러한 집단주의 (tribalism)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또 하나의 병적인 속성이다. 바로 정치를 그리고 역사를 선과 악의 틀로서 바라보는 순진하고 유치한 시각이다. 앞에서 공개적 의혹제기에 대해 매우 위선적이고 폐쇄적인 한국 사회의 특성을 얘기했는데, 공개적 의혹 제기가 정치적으로 공론화되는 경우에도 그 검증 과정 자체가 (주로 언론의 단순포장과 사회적 매장 속에서) 일방에게만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는 사법부 재판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비평과 비방 (저들이 왜 나쁜 놈인지 내가 알려주마, 이 기사를 읽어봐)이 언론 기사의 본질이 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 정치의 속성 상, 제기된 공개적 의혹을 ‘철저하게 검증하기도 전에’ 수많은 언론 기사들에 의해 때로는 정치인도 아닌 민간인들의 명예와 (아무도 그들의 명예 따위에 관심 없다) 사생활이 속수무책으로 파괴당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분명 가슴 아프다. 하지만, 민간인이라 해도 진흙탕 싸움인 정치의 영역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는 순간 튀어 오는 진흙을 막을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듯 복잡한 진흙탕 싸움이라는 현실을 마치 사회적, 역사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단순 선악 논리로 미화하려는 시도이다. 


집단주의적 한국 사회에서 광주 5.18 사건은 이미 나치 정부의 홀로코스트 만큼이나 선과 악의 프레임으로 단정되어 있어 이에 대한 다른 시각을 표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을 감수한다. 재판에서 진실을 다투는 양 당사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이렇듯 이분법적인 선악의 틀에 영향받는 경우에, 재판은 고사하고 중립적인 검증 과정이 제대로 이루이지기도 힘들 것이다.   

정치사적 관점에서 5.18 사건은 현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controversial) 이슈이며, 엄연히 좌우의 사회적 시각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이 상반될 수 있다. 분명히 5.18 기념 재단 등이 한국 사회 내에서 누구도 부인 못하는 ‘기득권 획득 기관(established institution)’으로서의 확고한 사회적 위치를 지니기는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그 사건과의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기관들이다. 지만원은 5.18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를 하였고, 이 의혹 제기가 철저히 검증되기 전에는 한국사회의 ‘배타적 정통시각(orthodox view)’에 근거한 선악의 인격심판이 이 의혹의 검증 과정 전체로부터 차단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실 여부를 따지는 학문과 연구의 영역에 감성은 개입될 틈이 없다. 피해입은 광주 시민 개개인들의 아픔은 그 자체로 추모될 수 있으나, 그 아픔의 감성이 역사적 연구와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을 권리를 가지지는 못한다. 지만원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자신이 (지만원이 북한 침투원이라고 주장하는 5.18 사건 당시 사진 속 인물의) 실제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개인들도 (이 진흙탕 조사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이 정치적 사안에서 일방이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려 들었다고 보는 인격심판을 이미 해놓고 이를 전제로 재판을 내리는 듯한 한국의 사법부를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지만원 다음은 누가 될까? 누가 이 집단주의 광기의 한국사회에서 감성 재판과 인격재판의 다음 희생양이 될까? 당신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숭의여고 역사교사 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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