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께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참조하라고 하셨다.” KBS 일일연속극 ‘열아홉 순정’에 출연중인 탤런트 추소영이 제작발표회에서 했던...
난데없이 왜 박근혜냐고 의아해할 분들이 허다할 게다. 나 역시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박근혜와 추소영, 아니 강신형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란 말인가?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면 추소영의 발언이 조금은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세련되고 구김 없이 자랐지만 아픔도 있고 의지도 있는 그런 인물로 표현하려고 한다.”
양국화 구혜선에 묻혀 빛이 바랜 감은 있으나 추소영의 강신형은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녀의 직업은 첨단 미래통신기업 ‘UT’의 법무팀장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철저해 늘 상대방을 제압하는 조용한 카리스마를 가졌다. 그런 반면 성격이 쿨하고 털털해서 주변사람들한테 인기가 좋다. 우아하고 도회적인 마스크와는 달리 소외계층에 무료변론을 해줄 정도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여유도 갖췄다.
이런 강신형에게도 아픔은 있다. 신형의 아픔은 슬픈 가족사에 연유한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교통사고로 부모가 졸지에 사망하는 바람에 어린 남동생을 돌봐야 하는 소녀가장이 된 것이다. 의사부부였던 부모가 남겨준 재산과 부유한 본가와 외가 덕택에 경제적 어려움은 전혀 없었지만, 한참 부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시기에 모든 일을 직접 결정하고 추진하는 삶은 미치도록 고달프고 외로웠다.
이쯤 되면 연출자가 추소영의 역할모델로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를 지목한 것이 뜬금없는 짓이 아니었음은 충분히 검증되었을 터. 주연보다 멋진 조연이 흐름을 주도하는 현상이야말로 요즘 드라마들의 대세다. 금와 전광렬, 수양제 김갑수, 양만춘 임동진이 대표적이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이라도 괜찮다. 예컨대 대소 역할의 김승수는 주몽 송일국에 버금가는 인기와 명성을 누린다.
나는 ‘열아홉 순정’을 중반 이후부터 시청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극의 초반부에 강신형이 본래의 기획의도와 같이 쿨하고 세련된 인상으로 그려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허나, 갈곳 없는 국화를 신형의 오피스텔에서 살도록 배려해준 점으로 미루어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크게 망가지지는 않은 눈치다.
한데 드라마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강신형이란 캐릭터가 이상한 쪽으로 차츰차츰 전이했다. 윤후와 국화가 나누는 사랑의 깊이와 정비례해 신형은 ‘스타 워즈’의 다스 베이더처럼 음침한 수렁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시초는 박근혜였으나 결과는 송영선 혹은 전여옥이 되어버린 격이랄까? 이럴 바에는 초장부터 아예 전여옥 의원이나 송영선 의원을 벤치마킹하는 게 차라리 나을 뻔했다.
눈썰미 매서운 몇몇 고정시청자들은 강신형이 어둠의 힘에 굴복하는 과정을 구체적 사례를 적시하며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신형의 화장법과 의상기조가 서서히 변모했다는 주장이다. 흑갈색 색조화장에 옷의 색깔은 칙칙해졌다나. 자꾸만 음모적 분위기를 풍긴다는 해석이다. 예쁜 양국화와 귀여운 박윤정(이윤지)에 흠뻑 반한 탓으로 말미암아 절반쯤 넋이 나간 채 침을 질질 흐리면서 드라마에 몰두하는 나로서는, 사소한 설정의 변화에서 드라마의 전개방향마저 끄집어내는 다른 열혈 시청자들의 안목과 식견이 그저 부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박근혜를 복사했다는 강신형의 처참한 몰락은 비단 외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멀어지는 윤후를 바라보며 초조해진 신형은 빼앗긴 사랑을 되찾는답시고 도리에 위배되는 파렴치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화가 거주하는 옥탑방에 찾아와서는 국화 몰래 결혼사진을 도둑질해간다. 훔친 사진을 윤후의 식구들에게 보여주면서 국화를 유부녀라고 일러바친다. 결혼사진은 사실 합성이었다. 신형의 서투른 음해공세는 곧 들통나고, 평소 신형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닮고 싶어하던 국화조차 신형을 저급하고 추악한 존재로 취급하게 된다.
한국의 일일홈드라마는 철두철미한 악역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에 눈이 멀어 질투의 화신으로 타락했던 신형은 결국 개과천선해 국화와 윤후를 이어주는 오작교 구실을 자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대하게 출발했던 강신형의 이미지는 돌이키기 어려운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현재 강신형은 엄지 여사(이혜숙)와 더불어 시청자들의 미움을 가장 많이 받는 천덕꾸러기로 굳어진 상태다. 쿨한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이 실종되고, 치사하고 비열하다는 비난만 잔뜩 사고 있다.
강신형은 박윤후와 양국화에게 너무나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안겼다. 윤후를 싱가포르로 쫓아내려던 계획은 신형의 아이디어였다. 윤후가 시도하는 사업프로젝트를 사사건건 방해하도록 윤후의 아버지를 부추김으로써, 국화를 잠적하게 만든 사건도 강신형의 작품이었다. 이 모두가 국화와 떼어놓기만 하면 윤후가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신형의 오판이 빚은 사태였다. 신형의 기대를 배반하고, 신형이 설치면 설칠수록 국화에 대한 윤후의 사랑은 더욱더 애틋하고 절절해진다. 사랑에서도 인격에서도 강신형은 만만하게 여기고 한 수 아래로 깔봤던 양국화에게 완벽한 KO패를 당한다.
드라마에 정치를 대입하면 흥미로운 상관관계가 발생한다. 신형은 윤후와의 결혼을 철석같이 믿었다. 믿음이 어긋나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온갖 무리수를 범한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본인이 선출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에게 신형에게 닥쳤던 일이 벌어진다면 과연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오리지널은 복사판과 얼마나 다를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 그렇다고 국화가 이명박이란 뜻은 물론 아니다. 이명박이 국화면 내가 패리스 힐튼이게? 하기는 연변처녀 양국화가 이명박씨와 면전에서 마주쳤다면 빤지르르한 게 꼭 찍찍개 같다고 놀려댔으리라.
선수 특유의 육감이랄까? 2007년의 대통령 선거구도를 판가름할 중심적 매체이자 콘텐츠는 드라마일 듯싶다. 1997년은 책이었다. 강준만 교수가 저술한 ‘김대중 죽이기’가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선거지형을 뒤흔들었다. 2002년은 영화였다. ‘가문의 영광’은 방황하던 호남표심을 결집시키는 접착제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17대 대선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셈이다. 조짐이 불길하다. 박근혜를 모방해 창조한 배역이 시청자의 원망과 질타를 한 몸에 받으며 인정사정 없이 찌그러졌으므로.
강신형의 굴욕과 수모는 실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윤후를 놓친 신형은 군에서 제대하는 남동생의 선배와 인연이 닿는다. 시놉시스대로라면 신형의 왕자님은 실제 나이는 30대지만, 40대로 거뜬히 비쳐지는 중후(?)한 외모를 지닌 사내다. 주요한 출연자들이 제각기 훌륭한 배필을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흐뭇한 대단원은 우리나라 가족드라마의 표준공식이다. 신형에게도 해피엔딩은 해피엔딩인데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혹시 박근혜 전대표를 노골적으로 겨냥한 애정 어린 충고는 아닐는지? 대권은 포기하고 너는 당권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드라마는 보기보다 꽤 힘에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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