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보이차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중국인들이 보이차를 수단으로 재테크를 꾀한다는 소식이다. 보이차가 귀한 대접을 받는 명차이기에 빚을 내서라도 사재기를 한다나. 맞다! 나한테도 그 비싸다는 보이차가 있다. 중국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2003년 초여름에 우연히 얻은 물건이다. 마셔야지 마셔야지 하면서도 깜빡 잊고 비닐봉지에 싸둔 채 몇 년을 헛되이 보냈다.
종이에 낱개로 포장된 형태다. 개수를 확인해보니 스무 개 남짓 남아있다. 포장지째로 찬물에 반나절쯤 담가놓은 다음 검붉은 찻물이 우러나면 마시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시대로 실행하려는 찰나 왠지 기분이 찜찜하다. 비록 수십 년 동안 발효된 거라지만 또다시 내 방에서 만으로 4년을 추가로 묵혔다. 중간에 변질이라도 됐으면 어떡하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보이차의 유통기한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상충되는 답변내용이 떠있는 혼란스런 상태다. (1) 보이차는 묵을수록 좋다. (2) 보이차도 유통기간이 있다. 난감하다. 에라 모르겠다. 최악의 경우 설사밖에 더하겠는가? 명색이 국민원로인데 차도 무조건 연륜이 붙은 걸 음용해야지.
보이차를 탄 지 서너 시간 후에 KBS 2TV에서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방송되었다.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면 제일 먼저 폐지될 게 유력한 프로그램이다. 진행자만 바뀌고 유사한 틀을 유지하던지. 심현섭이 출연을 거부당했다고 징징거렸던 사건이 바로 엊그제일 같은데 너무 허무하게 무너지는구나. 요런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주범이라 할 노무현 정권의 실세들이 저희가 저희를 평가하겠다면서 포럼을 빙자한 사조직을 결성했다. 후안무치와 적반하장도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의 경지다. ‘노빠=양아치’가 돼버렸다.
금주의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초대손님이 가수 양파다. 혜성같이 출현했던 추억의 소녀가수. 수능시험을 앞두고 하도 긴장한 탓에 갑자기 몸에 탈이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6년 만에 새로운 음반을 발표했단다. 텔레비전 무대에서 라이브공연을 펼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하소연한다. 사회자와의 대담에서 몹시 떨린다고 고백하는데 정말로 안절부절못하는 징후가 안색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도 선수는 선수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불안감이 깨끗하게 걷힌다. 자기에게 할당된 마지막 곡에서는 본래의 궤도에 완벽하게 올라섰다. 문득 섹시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효리, 채연, 서인영, 아이비, 길건 등의 직업적 섹시코드 여가수들이 판매하는 경박한 섹시와는 차원이 다른 중후한 섹시함이다. 애송이 티를 완전히 벗어난. 나이를 힘으로 연결시키는. 윤도현이 정확히 지적하더라. 종전과 비교해 훨씬 Powerful해졌다고.
“나의 유년시절은 어쩌고저쩌고…”로 시작되는 글들을 대할 적마다 극심한 욕지기를 억누르기 어렵던 터였다. 비겁함을 세월의 장막 뒤에 감추는, 시간의 흐름을 구실로 영혼의 조로를 합리화하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해서다. 시간이 인간을 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무능과 태만이 인간을 무력함으로 이끈다. 나약한 인간은 그들이 덜 무력했던 과거에서 위안을 구하려 애쓴다. 그는 이내 상하고 마는 보리차다.
우리는 시간이 언제나 나의 편이라고 믿어야 마땅하다. 어제의 나보다는 오늘의 내가 강하며, 오늘의 나보다는 내일의 내가 강할 것이라고 확신해야만 옳다. 서른의 문턱을 앞둔 왕년의 여고생스타가 섹시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녀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유형의 체질이기 때문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게스트였다. 그들로부터 나는 아무런 임팩트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노찾사는 시간의 경과와 정비례해 약해지는, 또는 약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의 역량과 가능성은 미래로부터 건너와야 한다. 과거에서 비롯되는 힘은 궁극적 승리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한다. 보이차의 탁월한 효능은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설득한 데 있다. 숙성도와 신선함이 단짝을 이룬다. 사람 또한 오래 살수록 강해지게끔 삶의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섹시심벌 이효리가 양파의 동갑내기다. 허나 나는 효리가 하나도 섹시하지 않다. 눈가의 잔주름과 함께 그의 전성시대는 필연적으로 저물기 마련이다. 효리는 시간의 노예다.
양파가 시간과 대등하고 동지적인 협력관계를 맺은 덕분이리라. 튀지 않는 모양의 민소매 상의에 무릎 위로 10cm 가량 올라가는 흰색 스커트.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여느 아가씨들의 수수한 옷차림새로 나왔음에도 엄청 섹시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피부의 주름살은 그가 더욱 단단한 인물로 거듭났음을 증거하는 얼굴에 생긴 王자다. 반복하겠다. 당신의 인생을 활력 있게 움직일 에너지 자원을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확보하라. 그리하여 강해져라. 강한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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