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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암과의 투병 끝에 2일 사망한 황쥐(黃菊) 중국 부총리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이끌던 중국 최대 정치세력이었던 이른바 '상하이방(上海幇)'의 대표주자다.

황 부총리는 또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등과 함께 칭화(淸華)대 출신 '칭화방(淸華幇)'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저장(浙江)성 자산(嘉善) 출신인 황 부총리는 1963년 칭화대 전기공정대학 전기제조과를 졸업한 뒤 상하이인조기계공장 기술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줄곧 상하이에서 일을 해온 기술전문관료다.

그는 1986년 상하이시 부서기로 재임할 당시 상하이 시장으로 부임한 장쩌민 전 주석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상하이방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으며 장쩌민 퇴임 이후 장쩌민의 영향력을 실천하는 임무도 맡았다.

황 부총리는 우방궈 상무위원장과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과 함께 장쩌민 당시 상하이 시장 밑에서 부서기로 일한 인연을 갖고 있으나 다른 상하이방과는 달리 묵묵하게 장쩌민이 맡긴 임무를 수행해왔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를 계기로 장쩌민이 당총서기로 전격 발탁되고 주룽지 전 총리와 우방궈 상무위원장이 차례로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1991년 상하이 시장으로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그는 주룽지 전 총리가 밑그림을 그린 '푸둥(浦東) 개발 프로젝트'에 개발영도소조 조장으로 현장지도를 하고 상하이 시장과 당서기 시절 이를 성공적으로 완성해 오늘의 상하이 발전을 견인한 장본인이다.

중국 최대 경제도시인 상하이의 푸둥지구 개발을 주도한 황 부총리는 지난 1999년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이 선정한 21세기 중국을 이끌어갈 50인에 뽑혀 전세계 외교가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큰 일에서는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작은 일에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결점 때문에 상하이 시절 '몰주의(沒主意: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라는 모욕적인 소리를 듣기도 했다.

황 부총리는 1994년 상하이시 당서기에 이어 공산당 정치국 위원으로 진입하면서 장쩌민 전 주석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4세대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2002년 정치국 상무위원, 2003년에는 부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상하이시 당서기 시절 당시 장쩌민 주석의 '3개 대표론'에 대해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밝힐 만큼 철저한 장쩌민의 심복이었으나 다른 파벌들의 견제로 중앙 정계 진출은 늦었다.

황 부총리는 2001년1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푸둥지구를 시찰할 당시 밀착 수행하며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으며 2003년 상무 부총리로 임명되면서 중국의 골칫거리인 재정과 금융분야를 맡았다.

장쩌민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대외과시욕이 강해 내부적으로 적이 많았던 그는 2005년 말 췌장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면서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비리 연루 의혹설과 실각설 등 신변 이상설이 나돌아왔다.


(베이징=연합뉴스)
ysk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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