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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리더십 될까, 미운 오리새끼로 끝날까'

한나라당의 '아웃사이더', '이단아', '왕따', '열린우리당 2중대' 모두 고진화 의원(44)에게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그도 그럴 것이 고 의원은 한나라당의 방향과는 늘 엇나갔다.

지난 2004년 말 국가보안법으로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보이던 상황에서 그는 "국보법을 향후 3년간 '한시적 특별법'으로 적용하고 형법으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당론과 정반대 주장을 해 지도부를 '뜨악하게'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고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와 '친일진상규명법 제정 찬성', '이라크 파병 반대', '개헌논의 지지' 등 여야간 쟁점이 불거질 때마다 당의 반대편에 섰다.

이 때문에 초선인 고 의원은 지난해 12월 언론을 통해 대선 출마의사를 공식화하고 당내 후보 경선에 뛰어 들었을 때 '공명심을 좇는 돈키호테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만 했다.

심지어 유석춘 당 참정치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은 지난 2월 "한나라당 이념에 반하는 인물이 대통령후보 경선 장을 당 정체성 훼손을 위한 선전공간으로 활용하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면서 "스스로 당을 떠날 것"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 의원은 오히려 "수구보수 야당을 바꿔야 한다. 당 내외에서 유력주자에 대한 줄세우기 정치가 전면화된 상황을 타파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답을 대신했다.

1985년 5월 서울 을지로 미국문화원에 70여 명의 대학생이 쳐들어갔다. 이들은 "광주학살 지원한 미국은 사죄하라"며 점거 농성을 벌였다. 고 의원은 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5년형을 선고 받아 2년7개월을 복역했다.

이런 고진화를 만든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강원도 영월 출신의 고 의원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를 갑작스레 잃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진압된 줄로만 알았던 순진한 고교 2학년 고 의원은 1980년 5월 울먹거리며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려주던 김진경 담임선생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크나큰 진실에 충격을 받은 고진화는 이때부터 수험서를 접고 역사와 철학 공부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후일 미문화원 점거 사건 주도 혐의로 구속된 고 의원은 '민중교육지사건'으로 역시 구속된 김 선생님을 운명처럼 재회한다.

고 의원은 "김 선생님과의 만남이 지금까지 이어진 나의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고 회상했다.

사회 문제에 깊이 파고든 고진화는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82학번으로 진학했다. 군사정권의 시퍼런 서슬 속에서 그는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학생연합의 민족.민주.민중 투쟁 결사체인 삼민투 공동위원장으로 맞섰다.

미문화원 점거 사건에 따른 2년 7개월간의 복역기간 중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아 6번이나 전국의 교도소로 이감됐다고 한다.

졸업장도 없이 형기를 마친 고진화에게 김대중-김영삼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탄생한 노태우 정권은 전 정권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는 민주연합청년회와 민주개혁 정치모임 청년위 위원장, 국제청년포럼 한국대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등 청년학생운동 시절의 성과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그러나 서른을 넘긴 고 의원에게 청년학생운동만으로는 민주화의 길이 요원해 보였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당창당으로 정치권이 3김(金)의 대결구도로 자리잡자 3김청산을 앞세워 통합민주당에 합류, 제정구 전의원, 유인태.박계동 의원 등과 함께 제도권 정치인의 길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고 의원은 1996년 총선에서 서울 강서을 후보로 출마해 고배를 마셨지만 2만여표를 얻어 가능성을 보여줬다.

누가 봐도 골수 학생운동 출신인 고 의원은 2000년 오경훈, 박종운 등 다른 386세대와 함께 한나라당행을 결정했다.

고 의원은 '변절자'라는 주변의 시선에 "원칙과 소신으로 한나라당을 개혁하고 세상을 바꾸자는 결심으로 입당 원서에 서명했다"면서 "호랑이를 잡으러 보수의 심장에 뛰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나라당에 입당할 때부터 '당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선배 의원들의 호통도, 당원들의 손가락질도 받을 만큼 받았다.

이쯤 되면 수그러들 법도 한데 그는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 탄핵'과 '차떼기 사건'으로 난파선의 위기에 몰렸을 때 국회 옆 파천교 아래 천막에서 당의 환골탈태를 요구했다.

"국회의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입법기관입니다. 당론이라면 권유할 수는 있어도 무조건 거수기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현대 정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는 게 고 의원의 소신이다.

고심 끝에 출마했지만 격려보다 비판이 먼저 쏟아졌다. "아무나 경선에 나온다"고 주변에서 혀를 찼다.

그럴수록 고 의원은 "비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꺾이지 않는 원칙과 소신으로 한나라당 개혁을 말해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면서 "이를 원동력으로 한나라당과 대한민국을 바꾸겠다"고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그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면서도 행복지수는 102위에 불과한 대한민국을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고 의원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7번째 안에 드는 부자 나라보다는, 세계에서 7번째 안에 드는 행복한 나라가 돼야 한다. 진화하면 행복할 것"이라며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aayys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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