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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검사, DJ 저격수, 돈키호테…'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뒤늦게 합류한 홍준표(洪準杓) 의원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그의 인생은 평범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오히려 `드라마틱'하다는 게 적합해 보인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난한 촌놈'이 맨 주먹 하나로 상경해 그 흔한 '빽' 하나 없이 세상의 온갖 강자들과 좌충우돌하면서 입지를 다져온 인생 역정이 우리가 흔히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스토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홍 의원은 1954년 경남 창녕의 벽촌에서 가난한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 굶기를 밥 먹듯 했고, 초등학교 때에만 다섯 차례나 이사를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고교도 당시 명문학교 대신 장학금을 주는 학교를 선택해야 했고 대학 전공 역시 처음에 원했던 의대 대신 '돈이 덜 드는' 법대를 선택했다.

홍 의원은 최근 회견에서도 대입고사를 보기 위해 서울에 첫 발을 내디뎠던 당시를 비장한 표정으로 회상했다. "1972년 2월 24일 새벽, 단돈 1만4000원만 달랑 들고 서울역에 내렸던 산골소년 홍준표가 이제 서민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을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만들고자 한다."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을 이처럼 '험난하게' 보낸 탓인지 이후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듯 거칠 것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조직에서는 언제나 '비주류'였다.

'굽히느니 부러지겠다'는 삶의 태도 때문에 그를 환대하는 윗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4수 끝에 사시에 합격한 그는 청주지검에서 그토록 원했던 검사로 첫 발을 내디뎠지만 검찰 생활 11년간 이른바 '요직'으로 불리는 대검 중수부나 공안부 등은 문턱도 못 가봤다.

그의 말대로 "위에서 알아듣게 얘기하면 적당히 넘어가야 할 사건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청주지검 검사 시절엔 법무장관 처가 관련 사건을 수사했고, 울산지청 검사 재직시절엔 87년 현대중공업 노사분쟁과 관련, 당시 대통령 친인척과 연관된 인물들을 소환해 관심을 끌었다.

88년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 때는 이른바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을 수사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큰 형 전기환씨와 청와대 및 안기부 고위관계자들을 구속했지만 결국 '괘씸죄'로 광주지검으로 좌천됐다.

광주에서는 조폭 수사를 전문적으로 하면서 조직폭력배들에게 '저승사자'로 악명을 떨쳤다는 소문이 아직도 자자하다.

92년 여름 서울지검 강력부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자신의 검사 경력에 획을 긋는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후일 그를 인기드라마 '모래시계'의 모델로 만든 '슬롯머신 업계 비호세력 사건'을 직을 걸고 밝혀낸 것이다.

이 사건이 권력형 비리임을 감지한 그는 "어차피 그들을 안 쳐내도 내가 죽고, 쳐내도 내가 죽는다. 그럴 바엔 내가 먼저 물어버리겠다"는 각오로 권력층의 온갖 위협과 조직내 왕따를 감수하고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씨는 물론 '6공의 황태자' 박철언씨, 자신의 상사이자 차기 검찰총장 후보였던 이건개씨까지 구속해 버렸다.

덕분에 그는 '돈키호테'라는 별명을 얻으며 스타 검사로 떠올랐지만 결국 '통제불능'으로 낙인찍히면서 2년 반 동안 한직을 전전하다 결국 옷을 벗고 말았다.

곧장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과거 잡아넣었던 '조폭'들의 협박에 제도권 진입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96년 초 정치권에 무작정 뛰어들었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과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 꼬마 민주당 등으로부터 모두 영입 제의가 있었지만 YS가 총재이던 신한국당을 택했다.

이후 그는 이듬해 DJ에게 정권을 내준 신한국당에서 'DJ 저격수'라는 또 하나의 별칭을 얻는다. 야당 의원으로서 줄기차게 최고권력자인 DJ와 그 아들들에 대한 비리 폭로를 마치 전업처럼 삼았기 때문.

정치권 입문 당시 '모래시계 검사' 이미지에 맞게 여당인 신한국당이 아닌 꼬마 민주당을 택했더라면 아마 '이회창 저격수'가 됐을 것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이 때문에 '폭로 전문가'나 '저격수'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얻었지만 그는 "부정과 비리에는 목을 걸고 맞선다"는 신념을 일관되게 지킨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탄핵 역풍에 한나라당 소속 출마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던 2004년 17대 총선 당시 그가 한나라당 약세로 분류되던 동대문 지역에서 살아남은 것도 권력에 정면 대항하는 이미지가 서민층에 어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정계에서 홍 의원은 검찰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주류였다.

검찰 시절과 마찬가지로 당 지도부에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때문에 그는 3선 중진의 경력을 쌓으면서도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맡아보지 못했다. 당 혁신위원장 등을 지내고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정도가 손에 꼽힌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남이 주는 것을 얻기보다 내 스스로 얻어낸다"는 철학으로 끊임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맹형규 의원과 2파전을 거듭하다 막판 등장한 오세훈 현 서울시장에게 역전패를 하긴 했지만 이후 그의 꿈은 오히려 한 단계 더 커졌다. 대권 도전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벽이 높아 보이지만 그는 "두고 봐라. 홍준표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홍 의원은 이 같은 자신감의 배경에 대해 "상식 아닌가. 2대 8의 사회 구조에서 8에 해당하는 서민들의 편이 홍준표이겠냐, 박근혜.이명박이겠냐"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서민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도전극'이 과연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 지 두고 볼 일이다.


(서울=연합뉴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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