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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꿈꾸며, 추미애를 질타하노라

[공희준칼럼] 추미애는 간디나 김구가 아니다


진취는 도전과 모험을 양날개로 삼는다. 모험을 무서워하지 않고 도전을 사랑하는 삶의 태도야말로 진취의 고갱이다. 도전과 모험을 꺼리지 않는 이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겠는가? 가산점논쟁에 참여한 부류의 주류는 패기와 정열이 타올라야 정상일 청년세대다. 가산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종자들 모두가 한심한 족속이라고 외치는 게, 못을 씹어먹어도 너끈히 소화할 젊은 녀석들이 벌써부터 편하고 안정된 직장만 좇으면 나중에 커서 뭐가 되겠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 진취적 기상을 갖춘 진보좌파 지식인에게 어울리는 자세다. 진중권과 박노자는 절대 그러지 못한다. 도리어 조갑제와 지만원 쪽에서 그리 할 공산이 크다.

허경영은 망하기 일보직전의 열린우리당에 진취적으로 입당해 대통령 예비후보 기호 1번을 당당히 꿰찼다. 사업일정을 핑계로 출마여부를 저울질하는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과 비교해 훨씬 훌륭한 인간이다. 만사에 진취적으로 임해야만 국민에게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열린당 탈당파를 반면교사의 사례로 제시하겠다. 이왕 열린우리당을 떠났으면 더 이상은 이것저것 재지 말아야 한다. 탈당파가 바가지로 욕을 먹는 원인은 여전히 안전제일주의를 고집해서다. 안전제일주의에 집착하는 정치인의 대표자로 국민원로는 문희상을 지목하련다. 아직까지도 청와대 반응 의식하며 헛소리 지껄이는.

문희상 같은 소인배 졸장부가 정치를 한다는 건, 그것도 한나라당 소속이 아니라 왕년의 민주화운동 투사들이 주축을 이뤘다는 범여권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수치다. 사람의 얼굴크기는 선천적이다. 허나 가슴의 넓이는 당사자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문희상은 생물학적 얼굴크기와 무형의 가슴크기가 극단적으로 반비례하는 경우다. 새가슴의 얼큰이, 허경영의 인삼뉴딜만큼 엽기적이고 웃기는 조합이다.

국민들은 도대체 문희상이 왜 열린당을 탈당했는지 의문이다. 영남친노들의 딸랑이 역할을 지금처럼 계속할 심산이라면 하루속히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하기 바란다. 문희상의 속내를 요약하면 국회의원은 하고 싶은데 노무현과는 결별하기 두렵다는 거다. 따라서 탈당한 것도 아니고 잔류한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같기도 동작을 취할 수밖에. 비슷한 심리를 지닌 인물들로는 김원기, 정세균, 장영달 등이 있다.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일을 이룩하려는 배짱은 없는 대신 남들이 공들여 뭔가를 성사시키면 숟가락만 달랑 들고 나타나겠다는 잇속만 번뜩이는. 이기는 편이 항상 자기편이었던 한나라당 강재섭 역시 발생학적으로는 문희상과 동류다.

비극은 여기에 숨어있다. 진보진영도, 개혁세력도 한결같이 노무현을 비판한다. 비판을 했으면 극복을 해야 마땅하다. 극복의 방법과 노선은 개인마다, 정파마다 다를 수 있다. 핵심은 진취적으로 극복하자는 것이다. 한데 비판을 지나 극복의 단계에 다다르면 다들 갑자기 소심해진다. 물론 나름대로 소심함을 합리화할 명분은 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린다는 변명이 단연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구실이다. 전부 몸을 사리고 눈치만 살피는 까닭에 괴이한 사태가 벌어졌다. 범여권을 통틀어 노무현이 가장 진취적 성격으로 국민들에게 비치는 현상이.

노무현 정권이 도모하는 수작들은 분명 죄다 엉터리고 백해무익한 짓들이다. 해롭고 터무니없는 음모와 농간을 청와대와 영남친노는 진취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한다. 노무현을 밟고 가기 위해선 노무현이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과 경지의 진취적 기상이 절실히 필요하다. 현실은 어떠한가? 진취는 고사하고 복지부동과 무임승차만 꾀하지 않아도 다행이다.

나는 예전에 추미애를 이렇게 꾸짖은 바 있다. “지가 간디야? 김구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놈의 세상, 특히 반한나라당세력에는 간디와 김구가 넘쳐난다. 개나 소나 구름 위에 올라가 너무도 당연해 하품만 나오는 현학적 논리를 근엄하게 읊어댄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는 진단은 순전히 뻥이다. 우리나라를 보시라. 사상가와 철학자 풍년이다.

진지하게 묻겠다. 간디와 김구가 위대한 이념과 숭고한 세계관의 소유자였던 이유로 민중의 영웅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던가? 실제는 다르다. 간디와 김구는 구질구질하게 살았다. 간디는 매일 물레 돌렸고, 김구는 독립자금 조달하려 쉬지 않고 다리품을 팔았다. 호텔식당에 기자들 모아놓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 받으며 국민들은 도통 알아듣기 어려운 대통합인지 소통합인지 제3지대인지를 주제로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가 간디와 김구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건 비록 허드렛일일망정 진취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해 역사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추미애한테 쓴소리 좀 더하자. 에어컨 빵빵하게 돌아가는 시원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한반도의 평화통일 청사진 고민하지 말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괜히 간디와 김구 흉내내지 마시고 정 할 일 없거들랑 빗자루 들고 지역구 골목길이라도 청소해라. 그게 참다운 진취적 기상이다. 비루하고 구차한 일이나마 씩씩하고 진취적으로 해봐라.

지도자가 진취적이지 않으면 지지자라도 진취적이어야 한다. 참으로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정치인 지지자들 중에서 허경영 지지자가 제일 진취적이라니. 선거법에 걸리든 말든 대중교통수단에서 거리낌없이 명함 나눠준다. 허리 굽은 노인이. 진보개혁진영 지지자들은 거의가 젊다. 젊은 만큼 과감해야 하는데 거꾸로다. 선관위만 탓하기 바쁘다.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이룩하려는 성의와 열정만 있다면 선관위 단속쯤은 쉽사리 피해갈 수가 있다. 그저 편안히 수고하지 않고, 익명의 인터넷 아이디 뒤에서 만사를 해결하려드니 될 일도 안 된다. 선관위 단속 따돌릴 비책 한 개 알려줄까? 겉멋부리는 아이디 버리고 주민등록증에 표시된 본명으로 글을 써라. 선관위는 실명 사용자는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는다.

조선일보 독자마당에 접속하는 노인네들조차 제 이름 석 자 떳떳이 밝히고 의견 개진한다. 조선일보가 안 망하는 것은 반동적이되 진취적인 독자들 덕분이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면 무얼 하겠나? 진취적이지 않은데. 댁이 손에 때 묻히기 싫다고 익명의 아이디에 숨어 애꿎은 선관위만 쿨 하게 조질 때, 당신이 경멸하는 수구꼴통들은 가슴에 이름표 붙이고 뙤약볕 맞아가며 시청광장에서 성조기 흔든다. 결국은 근성과 오기 싸움이다. 투지대결에서 그대들은 이미 수구에게 졌다. 이번 대선 보나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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