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저명한 교수님의 영화평론
어느 유명한 교수님이 어떤 영화를 보고 평론한 글이다.“나는 평소 영화를 볼 때 담배를 몇 대 피우느냐에 따라 그 영화를 평가한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 담배를 적게 피운다. 지루하고 따분한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담배를 피우는데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줄곧 담배를 피워야 했다. 아니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 했다. 또 도대체 이 영화에 쓸데없이 소가 왜 그렇게 자주 등장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큰 스님의 다비식도 왜 그렇게 오랫동안 지루하게 다루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었다......(중략)......
놀라지 마라! 이 글에 나온 영화는 1989년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그랑프리를 획득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다. 또 이 영화에 위와 같은 대담무쌍한 평론을 한 사람은 당시 연세대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마광수 교수다. 그 당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라는 베스트셀러 뿐만아니라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너무나 유명했던 마광수 교수의 이런 혹평에도 불구하고 내 생애에서 가장 감동 깊게 보았던 영화 몇 편을 뽑으라면 그 중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뽑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3 시간(175분)여 즈음이나 되는 흐름이 오히려 찰나로 느껴졌었다. 이 영화는 가급적 대사를 절제하는 대신, 말로 표현하기에 벅찬 내용을 배용균 감독 특유의 영상미로 불교의 핵심 주제들을 잔잔하게 그러나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낸 수작이다.
그때 필자가 이 영화를 보면서 받았던 감동은 마치 시인 박재삼이 그의 詩 ‘천년의 바람’에서 노래했던,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그 솔바람처럼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맴돌며 잔잔한 파문을 던져주고 있다.
이 영화에 필자가 감동받은 건 내용 뿐만이 아니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숨도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영상미가 가히 놀라왔다. 이 영화에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서 해외에서까지 그 영상미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2003)’에서 보인 바닥 전체에 불경을 새기는 부자연스러움 같은 것이 없어서 더욱 좋았고, 마찬가지로 ‘개구리 몸에다가 줄을 매고 거기에 돌을 매달아 놓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어이없는 촌스러움, 또는 군데군데 드러나고 있는 감독의 억지스러운 의식과잉‘ 같은 장치들이 철저히 극복되었기에 더욱 빼어났다. 남들은 단 한번 만이라도 더 매스컴의 조명을 받기 위해서 온갖 ’생쑈‘를 다하는 대한민국의 미디어계에서 그렇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서도 거의 <은둔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배용균 감독 자체가 속세의 권력과 명망으로부터 초월한 이미 선불교에 대해서 거의 득도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면 왜 마광수 교수와 나는 동일한 영화를 두고 왜 이렇게 판이한 시각과 감흥을 갖게 된 것일까?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즐긴다
그건 이 영화가 불교의 업과 윤회 그리고 해탈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였고 이 테마에 대해서 필자가 마광수 교수보다는 훨씬 많은 문화적 토양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광수 교수가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던 ’소(牛)의 빈번한 등장‘도 불교 특히 선(禪)불교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반드시 등장해야만 하는 필연성 코드임도 보는 즉시 알았으리라. 혹시 이 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거대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흔히 그려져 있는 탱화인 십우도(十牛圖), 심우도(尋牛圖) 또는 [문화유산지킴이][규장각][소]>를 검색해 보면 일반인도 금방 알 수 있다. 10 컷 으로 된 이 탱화에는 붉은 색깔의 야성의 소가 득도를 해 감에 따라 점차 흰색으로 변하는 데 이 흰색의 소는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일 수도 있고 본성을 일어버린 나 자신일 수 있다. 아니 십우도 또는 심우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누구나 어릴 적에 한번 쯤 읽었던 ‘소가 된 게으름뱅이’라는 한국의 전래설화라도 더듬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민족의 전통 사회에서 소(牛)가 인과응보나 인간의 업보에 얼마만큼 중요한 상징을 갖고 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불교의 윤회와 카르마 그리고 열반과 해탈(니르반야-Nirvana)의 과정에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다비식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예(禮)를 숭상하는 유교가 장례식과 무덤, 그리고 제례의식을 가장 중요시하듯이 일체 고뇌에서 해탈함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불교사상을 정면으로 다룬 이 영화에서 다비식(화장하는 의식)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니? 배용균 감독은 이 영화에서 득도한 스님을 화장하는 장면에서 일반인들이 신기해 마지않는 사리 한 점도 장치하지 않는 치밀함을 보인다. 사리는 이 영화가 추구하는 인생고뇌의 해탈이라는 주제에 비추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라는 점을 감독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도 고도화된 해탈의식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본다. 영화에서 큰 스님의 육신은 곱게 절구에 빻아져 강물에 흩어진다. 이때 이 뼛가루를 먹으면서 해탈의식을 완성해 주는 물고기들조차도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 훌륭한 배우다.
교수에게도 무식할 자유를 달라!?
마광수 교수가 이 영화를 본 후 지루하고 재미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혹평할 자유를 충분히 인정한다. 물론 그가 야한 여자를 좋아하든지 말든지, 혹은 손톱을 길게 기른 여자를 좋아하는 페티시즘적 취향을 가졌든지 말든 그건 내 관심사도 아니다. 사실 마광수 교수는 이런 주장으로 우리 사회의 문화를 한 단계 정도는 업그레이드 시킨 점도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마광수 교수가 장미여관 등의 후속작 소위 ‘희수사건‘으로 법원에서 외설 판정을 받은 건 한국의 문화예술인이 사법권력의 폭력에 짓밟히고 말았던 사건으로 이 일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이 문화 후진국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만한 사건이다. 몇 년 전 외국의 한 신학대 교수이자 성직자가 자기 사무실 컴퓨터에서 포르노 동영상을 많이 저장하고 즐겨 보았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파면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나로 말하면 아무리 성직자라도 그런 개인적인 취향으로 파면하는 일은 인간의 건전한 양심에 비추어서도 매우 과도한 징계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저명한 교수님이라도 자기 양심에 반하지 않는 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가 그 당시 마광수 교수의 평론에 대해서 분노했던 것은 바로 마광수 교수의 그 무식함이었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교수가 무식할 자유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명제에는 아니오!(No!)라고 단호하게 말하겠다. 이는 교수라는 직업의 존립에 대한 지극히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교수도 인간이니까 특정분야에 대해서 무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분야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좀 더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비평을 안하면 되는 것이다. 그 교수가 자신이 향유하는 ‘무한하게 무식할 자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보기에 “이렇게 지루하고 재미도 없는 영화에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는 것은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했다는 그 사실 즉 한국인들의 지나친 권위에의 맹종현상 때문”이라는 진단까지 내리면서 이런 엉터리 진단을 각종 미디어에 쏟아내는-너무나 무식하여 어처구니없이 용감무쌍한-사태에 직면하게 될 때면 사정이 좀 다르지 않을까? 한 감독이 거의 10년에 걸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창조한 자신의 분신같은 작품을 앞에 두고, 겨우 담배 몇 개피로 농담꺼리로 만들어 대중이 보는 신문에다가 태연하게 조롱하고 있는 황당한 광경을 목격한 ‘그 교수보다 좀 덜 무식한 일반 교양인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과연 이런 정도까지도 ‘교수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라고 인정해 주어야 할까? 물론 교수라고 해서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에 대해 두루 박학다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수가 그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면 평을 하지 말고 좀 잠자코 있으라고 주장하거나 다른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배울 기회를 가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인가? 마광수 교수는 내가 자주 보았던 음악잡지에 까지 폭을 넓혀서 중근세 서양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이 관음증 환자이며 관현악기들이 꾸불하게 휘어져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관음증 환자들이 그들의 새디-매저키스트적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해괴한 주장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진중권 현상
상당히 오래 전부터 우리 한국 사회에서 ‘대중이 짐작하기에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무식한 상태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폭언까지 마구 퍼붓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이런 현상을 진단하면서 이를 ’진중권 현상’이라고 명했었다.
한국사회에서 특이한 방식으로 대중으로부터 명성을 확보하면서 문화권력의 일정부분 움켜쥐는 데 성공한 세 사람이 있는데 그는 마광수, 김용옥, 진중권이다. 이 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라면 단연코 ‘좆(fellas), 보지(vagina)' 같은 금기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대중들 앞에 나서서 순식간에 그들의 눈도장을 찍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미디어의 속성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사람일지라도 각종 미디어에 자주 출몰하는 순간 그 사람의 지적인 수준이나 속성과는 별개로 미디어에 나오는 빈도 자체가 권력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물론 마광수, 김용옥이 이 수법으로 대중에게 부각될 때에는 이런 단어가 약간은 금기어였던 측면이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우리 사회를 일정부분 더 건강하게 하고 더 진보시키는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과는 20년 정도의 한 세대를 터울로 두고 진중권이 이런 사용했을 때는 금기어가 아니라 약간 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범람하고 있었던 까닭에 오히려 식상한 용어에 불과했다. 이런 까닭에 진중권은 그의 후배 변희재로부터 ’구시대적 수법을 쓰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지식인‘ 이라는 따가운 지적을 받아야 했음은 필연적이었고 또 이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문화권력 마케팅 수법
이 세 사람 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권위에 대한 저항 이미지와 소수자 의견을 대변한다는 이미지를 그들 나름대로 지식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삼아 승승장구했다. 그나마 김용옥이나 마광수 교수가 진중권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진중권보다는 덜 무식하고 훨씬 덜 뻔뻔스럽다는 점이다. 마광수 교수는 그가 때때로 무식한 주장을 용감무쌍하게 내세웠을지라도 적어도 마교수의 글에서는 진정성이 보였고 실제로 그는 문화권력보다 더 막강한 정치권력에 대항해 싸웠다. 문화 권력의 일각을 움켜쥐기 위해 진중권처럼 의도적으로 교묘한 트릭이나 전략을 쓰고 있다는 징후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마광수 교수가 현재의 진중권의 표현방식을 빌리자면 ‘울트라 캡숑으로 뻔뻔한 진중권 겸임교수의 그 뻔뻔한 정도와 책략을 백 분의 일 정도라도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어찌되었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표현의 자유에 관련한 외설 시비로 사법 심판까지 받았던 순교자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문화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무식한 문화평론가를 향한 대중의 분노
진중권은 영화 디워와는 별개로 사회현상으로서의 디워 현상이 매우 위험하며 여기서 파시즘적 광기를 읽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소수의 의견을 대변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비평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로써 양식 있는 비평가의 입을 막으려 하는 파시즘적 광기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몇몇 엉터리 문화비평가들이 말하고 디워 현상의 폐해는 그 근거도 너무나 박약하고 지극히 편협한 피해망상의식에서 비롯된 가공된 논리다. 오히려 그들이 말하고 있는 디워 현상의 폐해보다는 ‘진중권 현상’에서 오는 폐해가 훨씬 위험하고 파시즘적임을 대중들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도 실제로 대중들이 분노하고 있는 점은 진중권이 그들과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다름을 표현하는 비문화인적인 방법과 또한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문화에 대해서 무식하다는 사실 때문으로 보인다.
인터넷과 문화권력 독점시대의 붕괴
위 서두에 소개된 영화 평론을 보자마자 마광수 교수의 그 무식함과 용맹함에 분노한 본인은 즉시 긴 장문을 원고지에 빼곡빼곡 채워서 반론을 보냈었다. 물론 음악에 관한 그 평론에 대한 반론도 조목조목 보냈었다. 두 반론을 요약하라면, 교수는 어떤 주장을 자유롭게 할 권리는 있어도 ‘무식할 자유’만은 없다. 제발 ‘독단적 선잠(dogmatic slumber)’에서 깨어나 자신을 좀 되돌아보기 바란다’ 라는 글이 요지였다. 물론 나의 이 긴 반론은 신문에 단 한 자(字)도 실리지 못했다. 그 비평에서 보다시피 당시 마광수 교수는 그렇게 무식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면서도 신문사에서 원고료를 받아 챙길 수 있는 막강한 문화 권력이었고 이는 갓 대학을 졸업한 한 이름 없는 청년이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벅찼었다. 게다가 그는 걸핏하면 한국의 ‘음습한 권위주의’에 대한 피해자이자 희생양임을 입버릇처럼 내세우며 묘한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결코 권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은 그가 그런 주장을 할 당시 걸핏하면 프로이트의 권위라는 외투 속으로 숨어들곤 했던 사실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의 네티즌들이 진중권이라는 이상하리만큼 문화에 대해서 무지한 문화평론가에게 대한 반론은 진중권이 짐짓 오마이 뉴스에 요약하여 밝힌 바대로 ‘논리적이지만 싸가지가 없다’라는 주장이 아니다. 물론 그런 주장도 더러 있겠지만 오히려 그건 진중권의 교묘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대중들이 진중권이란 문화평론가에게 바라는 사항은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좋으니 제발 논리라도 제대로 갖춰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과거 필자가 마광수 교수의 무식한 평론에 분개했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네티즌들에게 인터넷이라는 발언권이 주어졌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말 그대로 진중권이 문화평론가 답지 않게 대중문화에 대해서 무식하다는 점이 그 초점인데 진중권은 의도적으로 모른 채 하면서 엉뚱한 요약을 내세우면서 대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자신은 소수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순교자인양 하는 지극히 저급한 술수를 한국의 대중들은 목격하고 있다.
배용균과 심형래, 마광수와 진중권
심형래 감독은 현재 한국의 충무로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다. 진중권의 황당한 표현대로 심형래가 충무로의 영화문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고 충무로가 심형래의 영화문법에 귀를 기울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옷깃을 스친 마광수와 배용균 감독의 묘한 인연을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피력한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마광수와 진중권의 문화마케팅 수법이 너무나 비슷하고 또 배용균 감독과 심형래 감독은 두 분 다 비충무로 출신이면서 각기 한국 영화의 한 획을 그은 확실한 거장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광수 교수의 황당한 평론에 분개한 20년 전의 필자의 심정이 지금 네티즌들이 진중권 등의 황당하고 무식한 문화평론가들의 말도 안되는 평론에 분개하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 1부 끝/ 나머지는 2부에서 계속) 김휘영 <문화 평론가>
시대의 수난자가 될지라도 진리를 지켜 나간다면 영생하리라고 누군가가 이야기 했지요? -- “배용균 감독“
* 김휘영 <문화 평론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대자보와 진보누리 등에서 무위라는 필명으로 활발한 문화평론을 하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근간)'이라는 한국 문화 전반에 걸친 신랄한 해부와 대안을 제시하여 한국 사회에 자그만한 등불을 비춰는 시도를 하고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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