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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서사구조를 아느냐 / '디워'와 '반지의제왕'

'디워'에는 서사구조에 갖춰야할 모든 요소가 다 있다


반지의 제왕과 디워의 서사구조

오래 전에 ‘내셔널 지오 그래픽 채널‘에서 영화 <반지의 제왕>이 성공한 원인을 분석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예일대나 하버드대학 등의 유명 석학들은 반지의 제왕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그 첫 번째로 원작 소설이 대중에게 어필할 만큼 탄탄한 서사구조의 전형(典型)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더듬어 반추해 보면, 미숙한(Immature) 주인공(Protagonist), 현명한 조력자(Mentor), 거대한 적(Antagonist), 시련(Obstacles)과 극복(Overcome), 그리고 가치(virtue)를 위한 고귀한 희생(犧牲, Sacrifice) 또는 희생정신 등이 빼어난 서사구조가 가진 주요 코드들(Major codes)이다.

미숙(未熟)한 주인공(Protagonist)과 시련

장차 영웅이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하게 될 운명을 타고 나지만, 능력이나 세력, 그리고 정신력 등 모든 방면에서 아직 ’미숙한 주인공(immature heroes)’의 존재는 필수다. 통상 이런 인물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단 한 사람으로 집약되는 구조를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주인공은 뜻밖에 분산되어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는 호빗족인 프로도, 레골라스, 왕의 귀환에서는 곤도로 왕국의 아라곤이 각 서사구조의 단계마다 주인공의 역할을 분담한다. 주인공(heroes)과 시점의 분산이라는 건 서사구조상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법 한데, <반지의 제왕>의 경우는 외외다. 3부작 영화가 나오기까지 각기 1-2년 정도의 ’시간의 단절(斷切)’이라는 영화외적 도움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3부작 모두를 성공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참 아이러니하다.

심형래 감독의 디워에서는 선한 이무기와 하림과 나린 그리고 LA에서의 이든과 사라가 이 역할을 맡고 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동양(東洋)의 신화적 세계를 날아다니는 용(Ryoung)은 서양(西洋) 신화나 영웅서사시에 나오는 드래곤과는 전혀 다른 신성한 영물(靈物)이다. 때문에, 베오 울프나 니벨룽겐의 반지 같은 서양의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적 구조의 비좁은 틀에 스스로의 몸을 움츠려 들어가는 대신 당당하게 세계를 향한 눈(Eye)으로 동양 신화의 가치를 오롯하게 살려낸 점은 심 형래 감독이 가진 한국의 문화콘탠츠를 제대로 살려 보겠다는 의지나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했을 것임을 짐작가능하게 한다. 심 감독의 감각과 놀라운 직관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이무기라는 한국적 문화콘텐츠로 그만의 환타지 영화를 개척해서 세계 시장에 내놓을 만한 필요충분한 자격을 획득하고 있다.

디워에서는 선한 이무기가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이무기인 부라퀴의 방해로 승천을 못하게 되는 구조로 그 시련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다시 500년이라는 기나긴 시련의 기간을 맞아야 하고 그 이후 제 2차의 결전은 미합중국 LA시에서 전개된다. 물론 부라퀴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의 야심이 나린과 하림의 자살로 실패하고 같은 세월에 해당하는 시련의 기간을 갖게 됨은 마찬가지다.

강력한 적(Overpowering Antagonist)

세상을 암흑으로 빠뜨릴 악(惡)의 세력의 우두머리인 사우론과 브라퀴는 각각 어리고 미숙한 주인공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적(Antagonist)이며, 그것도 매우 파괴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다. 그들이 갖추는 능력은 결코 개인적인 능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무런 능력이나 준비도 갖추지 못한 '미숙한 주인공‘과 비교할 때, 세력과 자금력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인(Overwhelming) 격차가 존재한다. 사우론과 악의 군대, 브라퀴와 아트록스 군단(軍團)이 그것이다.

시련(Obstacles)과 극복(Overcome)

<반지의 제왕 3부-왕의 귀환>에서 사악한 간신에 의해서 늙은 왕이 위엄과 총명을 잃고 초라한 몰골로 변해 있는 모습, 아라곤이 악의 화신 사우론의 침략을 맞아 패배주의의 나락에 떨어져 망연자실하고 있는 상황, 3부 마지막 부분에서 선과 악의 싸움의 향배를 결정할 절대반지를 파괴하러 가는 과정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던 골룸에게 사사로운 탐욕이 증폭되고 또 이 탐욕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인과 하인인 프로도와 샘 사이의 이간질, 그로 인해 샘(Sam)에 대한 프로도의 불신이 증폭되는 구조 등이 내적 갈등과 외적 위기를 동시에 만들어 낸다. 또 이는 극중 주인공이 반드시 극복해 내야 하는 시련이기도 하다. 이때 간달프나 샘은 특유의 능력이나 신념으로 이를 극복하고 더 발전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디워의 제주도 장면에서 하림 어머니의 갈등, 하림의 수호무사인 나린이 하림을 사랑하게 됨으로 발생하게 되는 개인과 천명(天命 cause)의 대립, 500년 만에 여의주를 얻어 승천하려고 하는 선(善)한 이무기와 이 여의주를 뺏아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려는 악(惡)한 이무기인 부라퀴와 갈등과 투쟁, 강력한 부라퀴에 비해 그 힘이 미숙(未熟)한 선한 이무기의 좌절, 그리고 여의주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서의 나린과 하림의 자살 등이 시련으로 작용한다.

멘토(Mentor)와 샘(Sam)

대중에게 어필하는 데 크게 성공하는 서사구조에는 거의 모두가 이런 현명한 조력자를 거의 필연적으로 두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현명한 조언자 또는 조력자를 흔히 멘토라고 칭하는데, 그 어원은 호메로스의 일리어드 오딧세이에서 발원한다.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木馬)를 고안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오딧세이는, 바다의 신(神)인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10 여 년 동안 온갖 풍랑을 겪게 된다. 그가 오랫동안 왕국을 비운 동안, 그의 아름다운 아내인 페넬로페와 그의 왕국과 재산을 노리는 수많은 정적들이 야심을 드러낸다. 이때 오딧세이의 장자(長子) 텔레마쿠스를 끝까지 지켜주며 도와준 사람이 바로 멘토(mentor)다. 이후 이‘멘토‘란 말은 ‘현명한 스승’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했다.

현명(賢明)한 조언자(Adviser)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이안 맥켈런粉)와 디워에 나오는 보천도사가 바로 이 멘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간달프와 보천도사(500년 후의 LA에서는 잭)는, 주인공이 실의(失意)에 빠져 있을 때마다, 그들만의 특별한 소명의식(Cause)과 지혜와 충언으로 그들의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어리고 미숙한 주인공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도피하려 할 때, 멘토는 특별한 능력과 신념(信念)으로 그들에게 사명감이라는 불을 당겨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게 하고 그들을 제 위치로 데려다 놓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

곤도르 왕국에서 사악한 간신에 의해서 늙은 왕이 위엄과 권능을 읽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간달프는 분연코 일어나 아니오(No!)라고 일갈하며 그를 깨우쳐 준다. 또 3부작 영화 중, 1부 초반에서 그는 호빗족의 마을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프로드에게 운명지어진 특별한 사명을 숙지시킨다. 3부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 결말부분에서 세상의 운명을 건 선과 악의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하여 프로도와 샘이 골룸의 안내를 따라가는 여정(旅程)이 나온다. 이때는 간달프보다는 충실한 하인인 샘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Sam: 영어권에서 Sammy라고도 불리는 이 이름은 실제로 ‘충직한 하인’을 지칭하는 용어다!).

보통 ‘현명한 조력자’는 드라마 대장금(大長今)에서의 한상궁(양미경粉)처럼, 범인(凡人)이 갖지 못한 신비한 능력으로, 미숙한 주인공을 도와 그의 숨겨진 능력과 사명감을 일깨워주지만, 자신은 무대 뒷면으로 사라지는 역할에 그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에서는, 이 조력자인 간달프는 스스로 회색의 마법사에서 백색의 마법사로 업그레이드되는 성장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다른 서사구조와는 매우 다른 차이점을 갖는다. 사실 이 점은 ‘주인공의 분산’과 더불어, 사실상 <반지의 제왕>이 갖고 있는 서사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서사구조가 되려면 가능한 시점이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럴 때에 관객들이 좀 더 깊고 쉽게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에서 조선시대의 보천도사와 그의 환생인격인 LA에서의 잭은 자기에게 주어진 멘토의 역할을 너무나 충실하게 해낸다. 그는 이든(그 뉘앙스가 ‘이스턴‘이란 동양의 의미를 강하게 암시한다)에게 조선의 전설을 들려주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비하도록 안배한다. 이는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의 간달프가 프로도에게 하는 역할을 보는 듯하다.

멘토(Mentor)와 샘(Sam)은, 극중에서 영웅이 되는 주인공보다 훨씬 강한 정신력과 자기 확신, 그리고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존재들이다. 디워의 제주도 씬에서 하린의 부모나 하린과 나린이 방황할 때 보천도사가 보인 행적이나, 이든이 심리적인 방황으로 갈등할 때도, 보천도사의 환생인격인 ’잭’이 보인 행동 또한 전형적인 멘토의 그것이다.가치를 위한 희생(정신)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여겨지던 전쟁을 앞두고서, 죽음을 무릎 쓰고 사자(死者)들이 있는 사망의 계곡으로 걸어 들어가는 영웅의 결단과 희생정신, 그리고 여의주의 운명을 타고난 사라의 고결한 희생은, 모두 악의 무리에게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런 결단이나 희생은 스스로 다른 길을 선택을 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는, 결코 강요받지 않은 순수한 의미의 희생이다. 이는 악의 무리에게 세상이 짓밟히는 것을 구하기 위한 고귀한 결정이다. 사우론의 공격을 맞아 곤도르 왕국에 있는 용사들의 희생과 저항은 모두 고귀한 가치(Virtue)를 위한 투쟁이다.

신물(神物)

절대반지와 여의주는 ‘아더 왕의 전설과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엑스칼리버나 트랜스 포머에서의 큐브와 비슷하다. 그것 자체로도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거대한 서사구조를 결정짓는 매우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 절대반지는 선과 악의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힘을 갖춘 물건이며, 디워에서 여의주는 선한 이무기와 악한 이무기인 부라퀴가 1,000년에 걸쳐 투쟁하며 얻고자 하는 신물(神物)이다. 또 이 여의주가 누구의 손에 가느냐 하는 건, 절대반지가 누구의 손에 들어 가느냐와 같은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악의 무리에 그것이 들어가면 이 세상엔 암흑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래서 이 여의주를 지키기 위해서 용의 전쟁(D-War)에서 조연급들인 인간들의 활약이 필요하다. 여기서 절대반지와 여의주를 악의 무리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아라곤‘이나 ’선(善)한 이무기‘가 아닌 프로도와 샘, 그리고 이든과 세라라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실 서사구조에서 복선이나 인과관계는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큰 흐름은 멕베스에서 등장하는 세 마녀(witch)들의 예언이나 내레이션으로 결정된다. 즉 예언 그 자체가 복선(複線)이면서 동시에 인과관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보면서 ‘저건 미신인데,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읽어 보았는가? 전쟁의 각 순간순간이 올림피아 산에서 연회를 열고 앰브로이드를 즐기는 신들의 변덕이나 기분에 의해서 결정된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 <매트릭스>가 차용했다고 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또 어떠한가? 오후에 한가로이 책을 읽던 앨리스가 헐레벌떡 뛰어가는 하얀 토끼를 보고는 그 토끼를 쫓아가게 된다. 이유는? 없다.

토끼는 얼마가지 않아 굴로 들어갔는데 앨리스도 토끼를 따라 굴로 들어갔다. 근데 이게 웬 걸? 굴은 마치 기다란 미로처럼 길고도 길었다. (에피소드 생략) 그 기다란 굴은 끝나고 방이 하나 나왔는데 토끼가 어떤 문으로 ‘휙’하고 들어가 버렸다. 앨리스가 들어가려 했지만 너무나도 작은 문이라서 들어가지 못하고 그만 울어 버린다. 그런데 탁자 위에 ‘몸이 작아지는 약’ 이라고 적힌 유리병이 있지 않은가? 앨리스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 약을 먹었더니, 몸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몸이 작아지자 자신의 앞에는 커다란 홍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조금 전 앨리스가 흘린 눈물이었다. 앨리스는 작아진 자신의 몸에 딱 맞는 크기의 문으로 들어가 다시 토끼를 쫓아갔다.(이하 생략) 여기서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가능한 건 오로지 ‘먹으면 몸이 작아지는 약’이라는 메시지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 황당한 구조가 이 소설을 개연성 없는 황당한 스토리가 되게 하기는커녕, 앨리스가 찾아간 ‘이상한 나라’를 ‘더욱 이상한(far stranger) 나라’로 만드는 묘한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을 더 넓고 깊은 상상과 호기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결정적인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복선과 인과관계

긴 창 모자에 페티코트를 입은 처녀가, 한 젊고 잘 생긴 총잡이에게 ‘이걸 지니고 있으면 그게 당신께 행운을 가져다 줄 거예요‘ 라고 하면서 동전(coin)을 한 개 건네준다. 나중에 이 건맨은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방의 총알에 자기 가슴을 정통으로 명중당하고도 멀쩡하다. 하필이면 그 총알이 가슴 위 호주머니에 있던 그 동전에 명중된 것이다. 이걸 보고 ’말도 안돼! 하필이면 그 작은 동전에 총알이 맞다니?‘ 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구조가 관객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여자가 건네면서 말한 ’행운’이란 단어밖에 없다.

관객들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을 즈음,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극적인 순간에야 발휘되는 ‘행운(幸運)’이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적의 총알이 다른 곳도 아닌 하필이면, 그 동전을 맞춘다는 건 로또가 당첨되는 일보다 더 희박한 확률이라고 주장하면서 트집을 거는 사람들은, 예술이나 문화 자체에 대한 문외한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영화를 보는 시각에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트랜스포머조차도 ‘태초에 큐브가 있었다’라는 황당한 말장난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 큐브가 왜 있었는지를 묻는 건, 오페라 하우스에 초미니 스커트에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거대한 몸짓의 알래스카 말라뮤티 와 앙!앙! 울어대는 아기를 데리고 들어와, 껌을 딱!딱 씹어대면서 온작 소란을 피우는 비문화인의 몰상식에 다름아니다.

디워의 인과관계

마찬가지로 영화 디워에서 하림과 나린이 LA에서 이든과 사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전혀 어색한 장치가 아니다. 동전과 총알에서 ‘행운’이라는 코드 하나로 충분하듯이, 이든과 사라는 ‘환생(還生)’ 이라는 단 한마디로 그 존재의 의의를 충분히 확보한다. 더구나 이든은 어릴 적에 골동품상에서 신이(神異)한 경험을 하고, 세라 또한 20세가 되어가는 즈음, 이상한 꿈을 꾸고 특별하게도 500년 전 조선에서 하린이 가졌던 그 문신(tatoo)까지 가지고 있다. 이 정도의 안배에도 이 구조가 이상하거나 어색하다고 말하는 건, 서사구조에 대한 무식을 고백하고 있는 일이다. 오히려 이런 트집잡기를 하는 그 의도가 순수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다. 이든이 위기의 순간에서 목숨을 건지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가 빛을 발하면서 이카루스 군단장을 처치한 일은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못된다. 보천대사가 영화의 초반에 이든에게 목걸이를 건네면서 한 말, "이 목걸이가 어떤 위기에서도 널 보호해 줄 것이다“라는 예언 하나로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 이상한 잣대를 갖다 대면서 악성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은 무더운 날 시원한 맥주를 마셔 갈증을 해소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김을 다 빼버리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이런 잣대라면 난도질당하지 않을 SF영화가 하나도 없다.

황석영

최근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소설가 황석영은 <바리데기>소설을 내놓고 인터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요즘 젊은 소설가들은 인문, 철학에 대해서 공부 좀 해라. 요즘 소설가들을 보면 서로 네 문체가 좋니, 내 문체가 좋니 칭찬해 주곤 하는데,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構成)이다.” 그는 문체보다는 구성과 스토리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더 나아가 “스토리와 구성은 소설을 이루는 뼈대지만 문체가 인테리어에 지나지 않으며 인테리어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디워가 부족한 건 사실 서사(敍事)가 아니라 서정(抒情)이다. 필자가 반지의 제왕과 비교하여 드러내 보인 바와 같이 그 구조는 너무나 훌륭한데 그 인테리어에 해당하는 문체, 즉 영화에서 말하면 연출에서 몇 가지 흠결을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장대한 서사, 억압된 서정(Gorgeous Epics, Oppressed Lyrics)

디워의 한계이자 단점에 관한 냉정한 평가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디워의 한계는 서사(敍事)가 없어서가 아니라 서정(抒情)의 억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1000년의 걸친 선한 이무기와 악한 이무기의 투쟁, LA 시가(市街) 전투신, 환생의 모티브를 가진 배경의 전환 등 서사구조 자체는 너무나 장대하다. 그 결과 볼거리가 풍성하고 이런 과정을 너무나도 훌륭한 CG 기술로 영상화 시키는 데 성공했다. 관객들은 이점에서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 다만 연출상 노출된 아주 사소한 결점들 때문에 이를 보는 관객들이 ’감동‘을 자아내는 데 있어 약간 미적거린다. 특히, 이든은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감정을 거의 노출 시키지 않는다. 급박해서 택시를 탈 때는 응당 문짝을 ’쾅!‘ 하고 닫아야 하건만, 그는 그 순간에도 ’Lady First’를 몸소 실현하는 너무나도 매너 좋은 신사 같다.

용(Ryoung)의 눈물

이든은 영화 디워에서 어찌 보면 매우 중요한 부분인, 감동을 주어야 하는 특별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은 너무 어정정하다. 그가 분노도 기쁨도 환희도 슬픔도 특별히 표시하지 않는 이상한 존재로 서서, 관객들이 감동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다. 하지만 이런한 이든의 뻣뻣한 연기를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진짜 주인공인 부라퀴와 선한 이무기의 연기가 뛰어났다. 그들의 액션연기도 매우 훌륭했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 영화에서 최고의 명연기 및 장면으로 뽑힐 수 있는 ‘용(Ryoung)이 하늘로 승천하다 돌아와서 우는 내면 연기’는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도 남았다.

인생은 아름다워!

사소한 결점들은 세계적으로 매우 수준 높고 감동적인 영화라고 평가받는 ‘인생은 아름다워 (La Vita E Bella, 1997,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에서도 나온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추락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쿵! 하고 떨어지는 까닭에, 이를 바라보는 관객은 거기에 제대로 감흥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다. 즉 사건은 있는데 관객이 감각적으로 수용하고 감흥하는데 약간의 장애가 발생한 것것이다. 매우 탄탄한 구조로 되어 있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The Mystery Of The Cube, 1998, 유상욱감독)‘에도 이런 단점이 노출된다. 웬만한 어드벤쳐 영화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밀폐된 동굴에서 바위가 굴러오는 씬의 경우, 그 바위는 관객들의 흥분을 점차로 에스컬레이터 시키기 위해서 관객들의 마음 속으로 ’어-,어-,어-,어어어--,,,, 쿵!“ 하는 식으로 점차적으로 스피드가 증가하면서 굴러와야 함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너무 빨리 ”어, 쿵!“ 하는 식으로 짧게 굴러가 버리면 여기에 몰입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관객들이 뭔가 찜찜한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시각으로 세계적으로 흥행한 ’인디애나 존스’를 보면, 그 영화의 감독이 얼마나 치밀한 연출력을 갖고 있으며 오히려 이런 어드벤쳐 영화로 관객을 감동시키는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지를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웰컴 투 동막골 (Welcome To Dongmakgol, 2005)’의 박광현 감독이나 그 각본을 맡았던 장진 감독이 이 부분에서 특출한 재능을 갖춘 분으로 판단된다.

디워는 괴수영화가 아닌 환타지 영화

물론 이런 결점들은 심형래감독이 직접 이런 사소한 부분에 까지 신경을 쓰거나, 이런 눈(Eye)을 가진 조연출자를 발굴하여 합류시키기만 해도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사소한 부분들이다. 진짜로 심형래 감독이 위대한 이유는 그의 시선(Eye; Point of view)에 있다. 심감독이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무엇이든 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영화 디워처럼 특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갖춰 세계시장에 내어 놓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건 실제로 일을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정확하게 표현 하자면, 영화 디워는 단순한 괴수영화가 아닌 판타지 영화의 전형(典型)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영화다. 괴수영화와 환타지 영화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반지의 제왕>같은 거대 서사구조의 존재유무로 보면 특별히 실수하지 않는다. 디워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반지의 제왕>에 필적하는 거대한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 이 점이 디워가 디워 II, 디워 III 로 거듭날 수 있는 훌륭한 기반이기도 하다. 따라서 후속편에서는 더욱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나올 것으로 행복한 기대를 갖게 한다.

골룸과 이무기(Golum & Imoogie)

영화 <반지의 제왕>이 세계(世界) 문화시장에 상영된 이후, 문명국가에서 골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없이도 소통이 가능한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골룸은 한국에서 특출한 개그우먼 조혜련이 열연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문화인들 중에서 영화 디워를 본 이후에 이무기(Imoogie)라는 한국 고유의 문화 아이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로 판단된다.

영화 <디워>를 접한 외국인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한국의 태권도, 김치 등과 함께 이무기와 관련한 한국의 전설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조금이라도 더 유발시킬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결국 한국의 관광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국가경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유형무형의 한국적 문화자산을 세계 속에 꽃 피우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그리스 로마 신화>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부근의 <북유럽 신화>를 읽어면서나 서구의 중세 신화들을 읽으면서 내심 느꼈던 질투심 반 부러움 반의 질문을 했었다. “서양 사람들도 우리 한국의 신화나 전설, 설화 들을 읽을까? 나의 질문은 당연히 즐겨 읽을까 가 아닌 읽기라도 할까 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심감독은 매우 뛰어난 영상미로 한국의 이무기 전설을 영상언어로 만들어, 이를 세계 문화인들의 눈앞에 내놓아 필자의 바램을 현실화 시키는 대단한 일을 해냈다. 이점에서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웃김’과 ‘우김‘의 어릿광대(idiot), 진중권

진중권에게 있어서 ‘웃김‘은 그의 유머감각이 아니라 회피다. 교묘한 트릭으로 자신의 논리부재를 감추고, 대중이 그가 던진 웃음 속에서 긴장의 끈을 늦출 때, 비겁하게 도망가기 위한 장치다. 토론이 핵심부분에 접어들어 수준이 조금 높아지고,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려고 할 때마다 이 장치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진중권이 이 웃음을 순간적인 재치나 즉흥성으로 만들어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지한 '웃김'

심형래 감독의 해학 "무슨 엑스레이 찍는 것도 아니고....."를 접하는 사람들은 심형래 감독 특유의 천재성에서 나오는 즉흥성과 촌철살인의 풍자에 전율한다. 하지만 진중권의 치밀하게 준비햐해 온 듯한 '웃김' 장치인 '심형래가 이무기로 아방가르드 할 일 있습니까?'는 너무나 진지해서 웃기기 보다는 어색함 그 자체다. 왜냐하면 여긴 풍자나 해학처럼 미학적 경지가 전혀 없고 자신의 억지논리를 합리화 시기기 위한 억지스러움이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11개 부분에서 노미네이트 되고 그 전부를 석권한 영화 '반지의 제왕-왕의귀환' 조차 아방가르드 안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받아서 감독이 아방가르드 해서 흥행에 실패하는 건 무책임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감독들이 아방가르드 같은 바보짓을 안하는 것이다.

진중권 ’이 대목에서는 이렇게 웃겨서 도망가야지’ 하는 치밀한 계획으로 미리 준비해 와서는, 그 대목이 나오면 어김없이 써먹는다. 준비해 온 보따리에서 그가 풀어놓는 검은 능구렁이에 혼비백산하는 건 대중(大衆)이 아니라 논점(論点)이다. 그래서 그는 이 위기탈출의 부분에서 가장 진지하다. 이 순간에 누군가가 끼어들기라면 하면, 전혀 못들은 척 하면서, 더욱 마이크를 강하게 잡고 그 웃김이 가진 목적을 완성하려 시도한다.

뻔뻔한 '우김'

‘웃김'에서 '시옷' 하나 차이인 ‘우김'은 진중권의 또 다른 전매특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서 도저히 회복불능인 상태에서는, 그는 어김없이 ’우김’의 전술을 사용한다. 이 부분은 진중권의 학자로서의 양심이나 인간성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부분이라 매우 흥미롭다. 필자는 남이 내 잘못이나 논리적인 오류를 올바르게 지적해 주었을 때, 그것을 인정하거나 진지하게 사과하는 건 패배가 아니라 진정한 용기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런 순진한 상상은 진중권이라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일어 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숫제 마이크를 혼자 잡고 있다는 점을 너무나 다행하게 생각한 나머지, '뻔뻔하게 우김’으로서, 논리적인 ‘설명’이 아닌 일방적인 ‘선언’을 택한다.

디워에는 ‘서사(구조)가 아예 없다‘라고 한 말이 대중 앞에 공개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는 그의 말이 틀림을 인정하기 보다는 차라리 옥쇄의 길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전략은 단 한가지, 끝까지 ’우김’ 뿐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서사구조가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고 또 왜 디워에 서사구조가 없는지도 증명해 내지 못한다. 그가 간간히 말하고 있는 건 서사구조가 아니라 그 서사 구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의 드러난 연출상의 사소한 미비점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TV에서 대중 앞에서는 논리적으로 자신을 비판해 보라고 짐짓 개그맨 박명수가 애용하는 ‘호통개그‘까지 함으로서, 자신이 적어도 논리적으로 이기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광고한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일이다. 여기서 한 지식인의 끝없는 추락을 본다(계속) 김휘영 /문화 평론가

김휘영 (문화평론가)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경제학사)를 졸업했다. 문학에 관심을 가져 내친 김에 독학으로 영문학사 자격을 획득했다. 한동안 대자보와 진보누리 등에서 활발한 문화평론 활동을 펼치다가 최근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신랄하게 해부하고 그 대안을 제시할 바램을 갖고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을 집필 중이다.

앞으로 이어질 글(대략)입니다. 가장 중요한 테마 2개가 남아 있는 셈입니다.
* 디워와 시대정신(화려한 휴가와 연관하여)
* 심형래 감독이 충무로에 주는 영화문법(7-II)

뱀다리) 솔직히 기본적인 문제인 디워의 서사구조의 부재명 같은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긴 글을 써서 설명을 해 주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개탄스럽다. 어떻게 하면 한류를 헐리우드에 접목시켜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가 등의 미래지향적인 글을 써내는 하는 필자의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이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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