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상을 해석할 줄 모르는 평론가들
영화 디워가 애국심 마케팅으로 관중동원에 성공했다느니 그 열기가 파시즘적 광기라니 하는 사람들은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 공부를 좀 더 하기 바란다. 아니 먼저 인간에 대한 통찰력부터 더 기르기 바란다. 며칠 전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즉 일요일 12시에 서울 중심가에 있는 모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좀 참석해 줄 수 없느냐는 요청이었다. 한 시간 10분 정도의 설교를 듣는데 그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3만원을 준단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한 시간에 3만원 이라는 시간대비 고수익인데도 참석자를 모으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휴가철의 일요일인데다 또 포교가 목적인지라 그 교회와 지리적으로 좀 가까운 사람을 찾다보니 그럴 것이라는 판단은 들었다. 바빠서 안되겠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라도 좀 소개시켜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그렇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고수익인데도 자기가 싫으면 좀처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맘이 내키면 시키지 않아도 헌금까지 내면서 교회나 사찰로 간다. 그런데 영화 관람료 7천원을 자기 돈으로 들이면서 거기다 교통비 등의 부대비용까지 들이면서 한 시간 반이나 하는 영화를 단지 애국심 때문에 보고 있다고? 그래, 심형래 감독이 애국심 마케팅을 좀 하고 인생극장 마케팅을 좀 했다고 하자. 요즘 사람들이 단지 애국심이니, 인생극장 마케팅에 감동받아서 극장을 찾아 갔다는 말을 믿으라고? 그것도 8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단지 그것 때문에 극장을 찾았다고? 대한민국에 이렇게 열렬한 애국자님들이 많은지 몰랐고 대한민국에 이런 무식한 말을 하는 문화 평론가들이 많다는 점은 더욱 몰랐다. 문화평론가로서 그 이유를 제대로 찾지 못할 양이면 가만히 있을 일이지 왜 그렇게들 부지런한지 모르겠다.
성공하는 영화에는 뭔가가 있다!
야구 선수 이승엽이 대만출신의 일본 프로야구선수 왕정치 (오 사다하루)가 세운 55호 홈런을 경신할 즈음 관중들이 구름처럼 야구장으로 몰려들었었다. 56호 홈런 공을 잡으려고 매미채까지 들고 나타난 구름관중을 결코 애국심 또는 이승엽의 인생극장 코드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게 애국심 코드로 해석될 일이라면 미국의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소사와 홈런포 경쟁을 하면서 침체해 가던 메이저리그를 부흥시킨 일도 애국심 코드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을 두고 애국심 코드로 해석하는 얼간이 비평가들은 단 한명도 없다. 얼마 전 배리 본즈가 행크 아론의 홈런기록을 갱신할 때의 구름관중은 또 어떤가? 배용균의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가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것도 마광수 교수의 황당한 상상인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해 갖는 막연한 신비감 때문'이 아니라 이 작품이 불교를 다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평론가상 1위'를 수상할 정도로 쉬운 영상미를 추구한 덕분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이 영화에서 가능한 대사를 자제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은 아름답고 쉬운 영상미보다 복잡한 경전을 해석하는 식으로 접근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배용균 감독과 심형래 감독의 유사성은 두 사람 다 비충무로 출신이면서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두 사람이 오직 한 장르의 영화에만 매진해 온 세월 또한 비슷하다. 비록 배감독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심감독이 비교적 가벼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두 사람 다 가능한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영상미학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육제(謝肉祭)
이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로 ‘관중의 주체적 참여‘와 그것을 즐기는 ’사육제(謝肉祭;카니발)‘라는 전혀 다른 신화적 코드를 읽어내야 한다. 그건 바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그 현장에 바로 내가 있었다는 그 참여 의식과 그것을 함께 즐기는 현상‘을 말한다. 아까도 말했다 시피, 영화 디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역사를 확실히 여는 그야말로 한국 영화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영화다. 심형래와 영구아트가 확보한 놀라운 기술력의 성과물을 목도하면서 지금 한국의 영화산업은 매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과거보다 훨씬 자신만만해졌고 또 건강한 에너지가 넘쳐나고 있다. 다음 작품으로 구미호가 어떻니 하면서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담론이 넘치고 있다. 단지 나같은 사람으로부터 과거 지향적이고 패배주의 젖어 있는 진중권의 무식을 깨우쳐 주어야만 한국의 평론계와 문화예술계가 건강하게 발전하리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귀중한 시간의 낭비를 하게 되는 비생산적인 담론을 생산해 내게 된 점만 제외하면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심감독의 디워가 가진 역사적 의의는 두 개다. 하나는 한국영화 역사상 그 기술적인 완성도로 할리우드를 넘어선 영화라는 점과 또 하나는 동양의 신화 속에 존재하던 용(Dragon이 아닌 Ryoung)과 이무기(Imoogi)라는 상상 속의 영물을 CG로 정교하게 형상화시키는 데 성공한 동아시아 전 국가의 영화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다.
이런 영화를 이승엽의 홈런 행진에 관중이 많이 모이듯이 영화 디워에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리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두 가치 중에서 그 기술적인 완성도 측면이 더 컸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300이나 트랜스포머처럼 기술적으로는 매우 뛰어나지만 내용이나 스토리 측면에서는 고만고만한 영화를 보면서 은연중에 가져 왔었던 약간의 열등감이나 찝찝함을 확실하게 털어줄 만큼 디워가 그 기술적인 영상미에서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장에 관객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즐기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진중권의 무식 -- 영화 300과 디워의 서사구조 비교
영화 300에는 확실하게 있는 서사구조가 디워에는 없다고 말하는 진중권은 제발 중학교에 다시 가서 국어 공부를 확실히 하고 대중 앞에 나섰으면 한다. 300은 전쟁을 소재로 한 까닭에 확실한 서사구조가 있다는 진모씨가 디워에는 서사구조가 없다니 간혹 이 사람의 주장이나 글을 보면 무식한 건지, 알면서 양심에 눈감은 채 짐짓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너무 많다. 둘 다 지식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전쟁은 문명이나 문화의 강렬한 충돌 사건이다. 전쟁을 기록하는 건 소설 같은 서사구조가 아니라 데이터와 사실, 그리고 역사가의 사관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채록되는 게 역사다. 이에 반하여 신화와 전설은 그 초기에는 인간 사회의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담은 채 구전으로 전래된다. 그러다가 트르바토르, 민네징거 등의 음유시인이나 이야기꾼들의 소설가적 창의성으로 윤색되고 첨삭되는 과정을 거쳐 매우 정교한 서사구조로 정착된다. 즉, 서사구조라면 전쟁보다 신화전설이 훨씬 탄탄하다. 아니 전쟁을 기록한 역사를 두고 서사구조라고 말하는 바보는 없다.
전쟁과 역사(歷史 history), 전설과 서사(敍事 epic)
모든 전쟁은 그 자체가 고유명사로서 유일무이하므로 기록이 있을 뿐 경쟁자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서사 구조들이 이야기 형식으로 다양한 버전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경쟁하다가 가장 경쟁력 있는 것만이 전설과 신화의 지위로 격상된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왜 장대한 서사구조를 가졌는가? 이는 진모씨의 무식한 지적처럼 전쟁을 담고 있는 역사서라서가 아니라 호메로스의 유장한 문체와 그의 창의적 상상력과 신화적 코드 등으로 거듭난 ‘소설‘이기 때문이다.
서사구조(소설)의 3대 요소
페르시아의 100대군에 맞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싸우다 전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300보다는 심형래 감독의 디워가 다는 수천 배 아니 수만 배 이상 큰 시공간적 배경과 사건을 담고 있음으로 해서 그 서사구조가 훨씬 장대하고 복잡하다. 뿐만 아니라 스크린 속에 등장하는 무대조차도 영화 300은 디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페르시아와 스파르타간의 전투가 일어나는 작은 요새가 주 무대인 ‘300’에 비해서 선악의 모습을 한 이무기가 여의주를 놓고 격돌하는 영화 디워는 과거와 현재, 조선과 LA, 빌딩 숲과 하늘 등으로 훨씬 스케일이 크다. 즉 영화 300에 서사구조가 있다면 영화 디워에는 300의 300배 곱 정도는 능히 있고도 남는다.
진모씨의 사기술
진중권이 디워의 서사구조가 없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두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하는 진정한 원인이 무엇일까? 역시 진중권의 내적한계, 즉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함‘에서 발원한다. 네티즌들과의 끝장토론이라는 동영상을 약 5분 정도 보다가 짜증이 밀려와서 꺼 버렸다. 진중권은 도대체 얼마나 무식한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진모씨가 누누이 강조하는 게 ’평론가는 객관적으로 말해야지 주관적으로 말하면 안된다‘ 는 말인데 진모씨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호불호를 가지고 디워의 서사구조의 유불유, 즉 존재양식의 유무 자체를 논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디워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진중권같이 독자적 해석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다. 서사구조를 이루는 3대 기둥인, 인물 사건 배경 어느 측면에서 보나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진중권에게 디워의 서사구조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싫다‘를 ’없다’로 착각하고 있는 문화평론가
진중권의 말을 요약하면, “주인공(이든, 사라 등 이 영화에서 주인공 부라퀴 아래 등급의 조연들)이 하는 역할이 없는 서사구조는 맘에 안들어” “주인공들이 도망만 다니다 끝나는 서사구조는 싫어” ‘여자 한명 잡는데 대 군단이 나오는 서사구조도 기분 나빠”“사람이 안울고 용이 우는 서사구조도 정말 싫어”인데, 이게 진중권의 무식한 머리 속을 한바퀴 돌고 나오더니 서사구조가 ’없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용어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원래 미학이나 평론계에서는 정확한 용어의 선택은 기본 중에서 기본인데 진중권은 많은 경우, 이 기본기의 확보에서 실패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대중들에게 전혀 엉뚱한 걸 찾아와서는 그걸로 대중을 가르치려고 들고, 그 얼토당토않은 말에 논리적으로 반론하면 오히려 파시즘같은 화석화된 용어까지 들먹이며 역정을 낸다. 이 광경을 보는 대중은 정말 짜증난다. 콤팩트하고 슬림한 휴대폰을 보고 한국제라서(또는 일제라서) ‘싫다‘라고 하면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평론가가 되니까 휴대폰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나 진중권이 정작으로 모르고 있는 것은 문화평론가로서의 평론 자체에 대한 정의다. 평론이란 진중권의 말대로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이 절대 아니다. 그 객관이라는 것조차도 매우 주관적인 객관이 되고 말고 또 되어야만 하는 것이 평론이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논하는 평론은 그 자체로서도 미학적인 완성도가 담보되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사실 평론에서 평론가의 주관성이 드러난 부분이야 말로 평론의 꽃으로 불리어져야 할 부분이다.
영화 300
좀 더 쉽게 진모씨가 서사구조가 있다고 말한 영화 300을 예로 들어 진중권의 무식함을 더 확실하게 논증해 보겠다. (가상평론) “영화 300은 전쟁을 따왔기 때문에 서사구조는 탄탄한데 이런 점이 영 맘에 안 들어.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전부 인간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페르시아 군대는 왜 전부 괴물처럼 묘사하고 있지? 서두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사신도 흑인으로 등장시킨 것도 어색하고 게다가 300의 전사들은 안 그렇던데 페르시아 군사들은 왕을 위시하여 전부 피어싱을 하고 있는 점으로 봐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인종차별주의자 이거나 백인우월주의자 아닐까 하는 판단이 들어.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기분이 찜찜했어.....“ 물론 이런 흠결은 분장이나 연출상의 문제이지 300의 서사구조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 300에서도 서사구조의 탄탄함이 이런 흠결들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 디워에 나타난 ‘이든‘의 뻣뻣한 연기나 군데군데 약간 엉성해 보이는 작은 플롯도 영화 디워의 서사구조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디워의 서사구조가 너무나 장대하고 CG기술이 너무나 뛰어나서 이든 등의 어색한 연기를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다.
심형래 감독의 한계는 대한민국의 문화 자체의 한계
영화 디워의 스케일이나 서사구조가 너무나 장대해서 그 자체로 어떤 미학의 경지를 압도할 정도였고 가 장엄함을 압도한 부분도 많고 또 CG 기술의 현란함과 정교함이 감탄을 넘어 그 자체로서도 감동의 경지까지 닿아 있을 만큼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심형래감독의 디워는 그 스케일이 장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엄함이라는 숭고미나 비장미를 만드는 데에는 말 그대로 1% 부족했고, 헐리우드를 넘어선 한국의 독자적인 CG 기술은 관객에게 경이와 감탄을 유발시켰지만 그것이 섬세한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부분적인 흠이 분명히 있다. (별로 도와 준 것도 없이 이 부분을 벌써 밝혀서 심감독께 심히 미안함을 밝힌다)
일본에서 만든 괴수 영화 고질라를 보면서 그저 즐겁게 시간을 떼우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이지 감동까지 기대하는 관객은 애초에 없다. 하지만 심형래감독의 디워는 너무나 탄탄한 이무기 전설을 모티브로 했고 또 현실체라고 착각할 정도로 지극히 정교한 실사체를 등장시키고 있는 까닭에 나같은 평론가들이 자연스럽게 영상미학으로서의 최고 단계인 오락성과 작품성의 완비라는 더 높은 단계를 요구가 나오게 된 것은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찬사로 받아 들이면 된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가 블록버스터로 성공한 원인에는 탄탄한 원작 소설이 뒷받침되어 있고 또 이 두 소설 모두가 북유럽 신화와 그리스 로마 신화 등에서 그 모티브를 원용해 왔다는 점은 밝힌 바 있다. 한데 한국의 심형래 감독은 이런 소설적 성공 모델이나 실험이 없이 바로 한국의 이무기 전설을 각색하여 영화화 했다. 소설로 시장의 반응을 보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그만큼 허술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한국의 소설가들이나 문단은 J.J톨킨이나 조앤 롤링 같은 역할을 해 주지 못했는가? 그들 스스로가 이런 환타지 소설 양식을 얕보면서 경원시 해 온 점은 없는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최첨단에 다다른 심형래 감독의 고독과 한계는 바로 우리 나라 문화 전반의 한계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문화적 토양이나 도움이 없이 혼자 고분분투한 심감독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심형래, 그는 진정으로 위대하다!
다만 좀 더 애정어린 시선과 미래지향적인 시각으로 비평하자면, 장대함과 장엄함 사이의 미세한 간격, 감탄과 감동 사이의 미세한 파장의 떨림, 이것이 세계 시장 공략을 지향하는 영화 디워를 만든 심형래 감독이 후속편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다. 만약 심감독이 이 미세한 간격까지 메우는 데 성공한다면 한국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를 능가하는 명감독의 탄생을 보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채워주는 작은 역할을 하고 싶다)
/ 김휘영 (문화평론가)
* 제 5부, '디워의 역사저 의미와 무식한 평론가들'과 함께 읽어주십시오.
7부--- 심형래 감독이 말하는 영화 문법
8부--디워와 화려한 휴가에서 보는 영화와 제도권력 (연재)
뱀다리) 필자는 비평을 할 때 언제나 그 대안을 찾는 특이한 습관이 있다. 영화 디워가 전편을 넘어서는 속편 디워II 를 만들 때, 나는 이 영화가 첫 편 정도의 투자 금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수 십 억 불’ 이상의 수익을 안겨 줄 스토리 라인을 이미 찾았다. 터미네이터는 그 속편으로 갈수록 작품의 완성도도 높아졌고 또 세계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도 엄청나게 배가된 작품이다. 필자가 보기에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도 그 속편 디워 II에서 훨씬 많은 수익을 올려 줄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너무나 탄탄하게 갖춰진 영화다. 이건 또한 이미 세계 시장에 투자된 광고료를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기에 더욱 좋다. 다만 다음 편에서는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이 필수적이며 영화 디워에서 나타난 몇몇 단점들을 잘 극복해야 한다. 물론 필자는 이 영화를 보자마자 그 속편에서 세계시장에서 전편보다 수십 배 이상 성공시킬 스토리를 완성시켜 보았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심형래 감독님을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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