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자다. 정확히는 기자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소멸했으되 출입기자단 명부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고스란히 승계된 탓이다. 때문에 휴대전화기로 줄기차게 문자메시지가 날아온다. 통합신당의 주요 일정과 동정을 알리는 내용이다.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국민참여경선이 치러지는 요즘은 메시지의 양이 부쩍 늘었다.
도착하는 문자메시지를 종합검토하면 한 가지 이채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이해찬 진영은 후보자 본인의 활동상 못지않게 선거대책본부장 직책을 맡은 유시민 의원의 행적을 쉬지 않고 홍보한다. 선대본부장의 역할이 후보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일이므로 수긍할 만한 구석이 전연 없지는 않다. 선대본부장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정동영 캠프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선대본부장의 임무가 반드시 멸사봉공하는 것만은 아닐 터.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선대본부장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넓히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금상첨화이리라. 그런데 유시민은 몹시 특이한 사례에 해당한다. 후보와 선대본부장이 철저한 제로섬 관계에 놓여있다. 하나가 살면 다른 하나가 죽는.
DJ가 유시민한테 간접적으로 이른바 ‘쿠사리’를 준 모양이다. 동교동으로부터 전화연락을 받은 한명숙이 유시민이 주도하는 이해찬 캠프 내의 강경기류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소식이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판이 깨지고 만다는 김대중의 의중을 한명숙이 이해찬에게 대신 전달했고, 이를 수용한 이해찬이 경선무대에 복귀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내가 임의로 꾸며낸 허구가 아니다. 연합뉴스가 보도한 사실이다.
김대중까지 부랴부랴 수습에 나서야 했을 정도면 유시민의 신당 초토화작전이 도를 넘어섰다는 증거다. 더구나 노무현마저 더는 유시민을 한없이 감싸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노무현 정권의 국정 지지율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이다. 지지도 상승의 8할이 동교동 몫이란 뜻이다. 노무현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과의 연정구성 시도는 자만심이 만든 오류였다고 실토했다.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노무현의 독선적 성격을 고려하면 반성문 100장에 맞먹는 소리다.
지금 유시민은 사면초가다. 영남유빠들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면 사방이 난닝구에 포위된 절체절명의 위기다. 국민원로는 주목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유시민이 어떻게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지. 아놔! 어느새 유시민 정치 9단 다 됐다. 고향으로 직행했다. 그는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국민들이 어디선가 숱하게 목격했던 수법이다. 궁지에 몰릴 적마다 영남 도처에서 장외집회를 개최하곤 했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얄미운 잔머리를 완벽히 답습한 꼴이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활로를 연고지에서 구했다. 김영삼은 민자당 대선주자가 되려는 승부수로 마산으로 잠적했고, 김종필은 충청도 지방을 유세하면서 ‘핫바지’를 외쳤다. 김대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호남 유권자들을 대방동 보라매공원에 집결시키고 대규모 군중집회를 빈번하게 개최했다. 지역감정을 악용하기는 수구기득권 언론사들 또한 매한가지였다. 동아일보 1면에 실렸던 “대구·부산에는 추석이 없다”는 악명 높은 헤드라인이 있지 않은가?
방금 언급된 모든 사람과 세력을 시급히 청산돼야 마땅할 구시대의 유물로 비난하며 유시민은 정치에 입문했다. 그의 목표와 구호는 지역구도 타파였다. 지역주의 극복의 우선적 관건은 아쉬울 때 고향에 손 안 벌리는 데 있다. 이를테면, 아무리 경상도 노빠들의 악성댓글에 시달린다한들 국민원로가 출신지인 충남 공주로 도망가 번개모임을 갖지는 않는다.
유시민이 선대본부장 자격으로 경주로 향했다는 빤한 항변은 하지 말기 바란다. 선대본부장의 가장 큰 구실은 후보의 취약지역 공략이다. 이해찬은 친노세력의 근거지인 영남에서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인다. 유시민은 이해찬의 지지세가 미약한 대전과 전주를 찾지 않았다.
망하는 선거캠프의 특징을 아시는가? 부도직전의 기업체 분위기와 비슷하다. 자금사정이 어려운 회사일수록 사장이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잦다. 선거사무소에 후보가 자주 나타나면 선거는 이미 종친 셈이다. 이해찬 진영이 현재 딱 그 짝이다. 선대본부장은 제 정치생명 연장에 여념이 없고, 후보는 유권자 만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매일 고소장만 작성한다.
이해찬 캠프에서 발신되는 문자메시지의 태반은 이런 요지다. “고소할 거야!” “고발예정” “검찰과 경찰에 수사의뢰” 무슨 법무사 사무실도 아니고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들인지. 유시민이 내년의 18대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기존의 지역구를 버리고 경상도에서 입후보할 것이라는 얘기가 벌써부터 무성하다. 별안간 고향인 경주로 내려간 유시민의 행보가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선대본부장이 후보자의 도우미 노릇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후보가 선대본부장의 국회의원 출마에 불쏘시개가 되는 곳, 거기가 바로 이해찬 캠프다. 친노후보 단일화에도 불구하고 이해찬이 꼴찌를 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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